|
|
+++++++++++++++++++++++++++++++++++++++++++++++++++
261030.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묵상글 ( 10/29 21:20~:25, 06:55.)
1)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전일 20-21시. *가끔은 이전에도 올릴 수 있음 > : 호명환 신부님. 고인현 신부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6시 이후. *가끔은 이전에도 올릴 수 있음 > :
김찬선 신부님. 호명환 신부님.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가능하면 위와 같이 할 계획이나 개인 형편으로 그리 알 될 경우가 있습니다..
이 시간대 이외 여러 묵상글을 보시려면 전체공지란 " H. 260707. 카페 운영에 대한 고견을 주세요." 의
2번에 들어 가셔서 안내를 받으세요
** 오늘 묵상글 공유 : 호명환 신부님(10/29 21:20), 고인현 신부님( 10/29 21:25. )
김찬선 신부님: ( 06:55. 추가. ) 호명환 신부님: ( 06:55. 추가 . ) 이마르첼리노M 수사님: ( 06:55. 추가 . )
2) 정회원님 중 다른 묵상글을 공유하실 분은 오늘 묵상글을 이 뜨락에 게재하여 주시고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3) 이 묵상글 뜨락은 전체 공지 "H. 260707" 2-1의 가-1), 나)를 실행할 계획입니다.
가-1) 프란치스칸 공동체나 개인 또는 프란치스코 성인을 존중하는 분으로서 이 카페를 인계받아 운영할 의사가 있으신 분과 협의를 시작하고, 이 공간의 계속 여부도 합의가 되는 대로 즉시 하도록 하겠습니다.
나) 11월 대림시기(11/29) 이후 12월 중순 아니면 , 그 이전이라도 4.3-1 뜨락의 운영을 중단할 계획이오며
카페는 여러 자료를 활용하실 분을 감안 당분간 존속시킬 계획이기에, 2)의 회원분이나 제가 가끔 묵상글을
올릴 수도 있을 경우를 감안, 묵상글 뜨락(4. 3-1)은 유지하도록 하겠습니다.
+++++++++++++++++++++++++++++++++++++++++++++++++++
----------------------------------------------------
261030.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2026.10.29. 15:49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법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예수님은 살아 숨 쉬시는 하느님의 뜻이 어떤 모습인지를 몸소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이웃 사랑!
사랑이야말로 우리의 참된 법입니다!
2026년 10월 29일 목요일
공공 신학자 레이철 헬드 에번스(Rachel Held Evans:1981-2019)는 예수님께서 사랑을 어떻게 하느님 법의 궁극적인 완성으로 이해하셨는지를 다음과 같이 성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는 사실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은 율법이 본래 지향하던 모든 것을 온전히 구현합니다. 예수님은 살아 숨 쉬는 하느님의 뜻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 뜻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자비, 여성들에 대한 존중, 병든 이들을 치유하는 사랑, 그리고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연대를 포함합니다. 또한 사회에서 소외된 이들과 한 식탁에서 음식을 나누고, 어린이들을 따뜻이 품어 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보복보다 용서를 선택하는 것이며, 복수보다 십자가의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자신을 배반한 친구를 위해 아침 식사를 차려 주는 사랑이기도 합니다.
엘턴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고백하는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교리는 단지 예수님이 하느님과 닮으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훨씬 더 급진적인 의미를 지닌다. 곧 하느님께서 예수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뜻이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삶을 통해 사랑이야말로 하느님 법의 완성이며, 모든 계명의 핵심임을 깨닫게 됩니다. [1]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에게 성경 전체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묻는 도전을 받으셨을 때, 그분은 매우 분명하면서도 유다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답을 주셨습니다. 신명기 6장과 레위기 19장을 인용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마태 22,37-40).
바로 이것이 모든 해방의 이야기, 모든 광야의 여정, 그리고 소와 누룩과 피에 관한 율법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명이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사랑하는 것이 곧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랑은 종과 주인 모두를 자유롭게 하는 법입니다. 사랑은 궁극적인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이집트를 떠난 나그네를 광야의 여정 속에서 지탱해 주고, 산으로 이끌며, 마침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은 마음만 먹으면 거의 무엇이든 말하도록 끌어다 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찾기 위해 성경 본문으로 다가가며, 대개는 자신이 찾고자 하는 것을 발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이라는 눈으로,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범으로 삼으며 성경을 읽고 있는가? 아니면 심판과 권력, 자기 이익과 탐욕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읽고 있는가?
우리는 사람들을 얽어매기 위해 성경을 읽는가, 아니면 자유롭게 하기 위해 읽는가? 짐을 더 무겁게 지우기 위해 읽는가, 아니면 그 짐을 벗겨 주기 위해 읽는가?
그래서 성경을 대할 때 가장 중요한 질문은 때로 "이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나는 지금 무엇을 찾고 있는가?"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마 이러한 인간의 마음을 잘 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에서 폭력을 행하려 한다면, 그 정당화에 사용할 무기는 언제나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치유하고자 한다면, 상처를 어루만질 약 또한 언제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인류에게 전해진 가장 강력한 이야기들 가운데 일부를 우리에게 맡겨 주었습니다. 그 힘을 선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악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억압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 해방을 위해 사용할 것인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사람을 상처 입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고, 사람을 살리는 은총의 통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단지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선선한 가을 아침, 저는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강물이 흘러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저마다 다른 빛깔로 물든 나무들을 살펴봅니다. 대부분의 나무는 누런 갈색 잎을 달고 있지만, 한 그루의 단풍나무만은 유난히도 눈부신 붉은 잎으로 가득합니다.
그 나무는 평범함 속에서 돋보이는 특별함입니다. 그 모습을 보며 오늘 하루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나 자신과 가족, 이웃, 그리고 나를 둘러싼 창조 세계의 아름다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고자 합니다.
— Robert M.
Reference
[1] Elton Trueblood, cited in Brian McLaren, A New Kind of Christianity (HarperCollins, 2010), 114.
Rachel Held Evans, Inspired: Slaying Giants, Walking on Water, and Loving the Bible Again (Nelson Books, 2018), 55–5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amuel Oakes, untitled (detail), 2021, photo, Broadway, UK.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누군가에게 건네는 빵처럼, 우리는 보이지 않는 이웃에게 손을 내밀도록 초대받습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축복을 주고받습니다.
----------------------------------------------------
261030.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10.29 21:20
2026년 10월 30일 금요일 아니마또레 평화기도 학교 말씀 기도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루카 14,1-6
예수님께서 바리사이 지도자의 집에 초대받아 식사하십니다.
그런데 복음은 서늘한 한마디를 덧붙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환대가 아니라 감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 그 자리에 ‘수종을 앓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몸이 붓고 물이 차는 병으로, 보기에도 힘겨운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물으십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그러자 “그들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합당하다’ 하면 자기들의 규정이 무너지고,
‘합당하지 않다’ 하면 눈앞의 아픈 사람 앞에서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침묵합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대답하지 못하는 침묵 ―
그것은 마음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침묵을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십니다.”
‘손을 잡으셨다’는 이 한마디가 아름답습니다.
멀리서 말씀만 하실 수도 있었지만,
그분은 몸이 부어오른 그 손을 맞잡으셨습니다.
그러고는 되물으십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여기에 우리의 민낯이 드러납니다.
내 아들이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인지 따질 틈이 없습니다.
심지어 내 소가 빠져도 곧바로 뛰어듭니다.
그런데 ‘남의 사람’이 빠지면, 갑자기 규정이 생각납니다.
‘내 것’ 앞에서는 사랑이 즉각적이고,
‘남’ 앞에서는 사랑이 계산됩니다.
그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
눈여겨볼 것이 있습니다.
수종 앓던 이는 당장 죽을 응급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내일 고쳐 주면 되지 않느냐”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고쳐 주십니다.
사랑과 자비는 다음 날로 미루는 것이 아니며,
요일을 가리지도 않는다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듯,
사랑은 규정을 없애지 않고 규정을 ‘완성’합니다.
안식일의 본뜻이 바로 ‘사람을 쉬게 하고 살리는 것’이니 말입니다.
사랑·기쁨 주간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물음 하나를 남깁니다.
‘나는 누구를 내 가족으로 여기는가?’
우물에 빠진 사람이 ‘내 아들’이면 우리는 곧바로 뜁니다.
그러니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결국,
그를 ‘내 아들처럼, 내 형제처럼’ 여기게 되는 일입니다.
그때 사랑은 계산이 아니라 반사적인 몸짓이 됩니다.
그리고 그 몸짓이 병자를 일으키고, 기쁨을 돌려줍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사랑해야 할 때 ‘잠자코’ 있지 않은가?
나는 자비를 ‘내일’로 미루지 않는가?
나는 ‘내 것’과 ‘남’ 앞에서 사랑의 속도가 다르지 않은가?
나는 이웃의 손을 실제로 맞잡는가?
주님,
사랑해야 할 때 침묵하지 않게 하소서.
자비를 내일로 미루지 않게 하시고,
이웃의 손을 제 가족의 손처럼 잡게 하소서.
아멘.
----------------------------------------------------
261030.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10.30 04:18
- 우리가 바라야 하고 빌어야 할 것
어제 독서로 에페소서를 끝내고 우리 전례는 오늘부터 필리비서를 읽기 시작하는데
바오로 사도는 오늘도 편지의 시작을 자기가 누구인지 소개하는 말로 하고,
이어서 편지를 받는 신자들에게 축복하는 말을 합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아시다시피 이 축복은 우리 미사의 인사 두 번째 양식 곧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리시는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와 정확하게 같습니다.
이는 이 축복의 인사가 우리가 해야 할 축복의 인사에 본보기라는 뜻이겠지요.
우리의 가장 짧은 인사가 ‘평화를 빕니다.’이고,
프란치스칸 인사도 ‘평화와 선’인데 이 짧은 인사들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축복은 우리가 하는 것으로서 복을 내려주시도록 비는 것이고,
강복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으로서 복을 내려주시는 것인데
그 복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은총과 평화라는 말이고,
우리가 바라야 할 것이고 빌어 줘야 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필리비 신자들과 관련하여 자기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서 좋은 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그 일을 완성하시리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뜯어보면 믿음 고백이면서 동시에
내가 이렇게 믿고 있으니 그 믿음에 배반하지 말고 그렇게 살라는 격려입니다.
우리에게도 좋은 격려는 이와 비슷합니다.
너는 좋은 사람이고 나도 그렇게 믿고 있으니 앞으로 그렇게 살라는 식이지요.
그러나 이런 격려도 훌륭하지만 역시 신앙인에게 더 훌륭한 것은
너에게 좋은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 그것을 마치실 것인데
그분이 그리하시도록 너도 거절하지 말고 협력하라는 격려입니다.
우리가 바오로 사도에게 같은 신뢰와 격려를 받는다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바오로 사도의 신뢰에 합당한 믿음을 우리도 가져야겠지요?
그래, 하느님께서 나에게도 틀림없이 좋은 일을 시작하셨어!
그런 다음 어떻게 해야 합니까?
믿음에 바탕을 둔 결심을 해야겠지요?
그래, 시작하신 분이 완성하시도록 내가 하거나
내 힘으로 하려는 것을 멈춤으로써 하느님께서 완성하시도록 하자!
이것은 제가 뮤지컬을 시작하고 공연을 이어가면서 지니려고 하는 마음가짐입니다.
내일도 이곳 강화에서 공연을 할 텐데 이 공연이 그분이 하시는 것이 되게 하려면
저를 포함하여 모두가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고집하거나
인간적으로 용을 쓰지 않고 하느님께서 이끌어가시는 대로 맡기는 자세여야겠지요.
이어서 바오로 사도는 또 기도하며 권고하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것은 여러분의 사랑이 지식과 온갖 이해로
더욱더 풍부해져 무엇이 옳은지 분별할 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권고와 격려처럼 우리도 뭘 하든 사랑으로 하고 있고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적으로 말하면 우리의 사랑을 늘 점검해야 하고,
신앙적으로 말하면 식별 또는 영적 식별을 해야지요.
내 사랑이 무분별한 열정이나 너무 인간적이고 애착적인 사랑이 아닌지
기도 안에서 곧 영적으로 식별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261030.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2026.10.30. 05:08
하느님 나라는 서로의 아픔에 대한 동정심 가득한 눈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복음의 장면을 가만히 마음으로 그려봅시다.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루카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이미 6장과 13장에서 각각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과 열여덟 해 동안 등이 굽었던 여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 예수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치유해 주셨을 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의논하였다고 전하고 있고, 13장에서는 예수님의 적대자들이 모두 망신당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를 전제로 본다면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예수님께서 초대되셨다는 것과 그날이 안식일이었다는 것, 게다가 수종을 앓는 사람이 그곳에 와 있었다는 것은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을 고발하기 위해 준비해 놓은 함정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수종(水腫, dropsy)은 몸 안의 공간에 장액(맑고 옅은 노란색의 투명한 액체)이 비정상적으로 고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오늘날 의학 용어로는 주로 "부종(浮腫)"이라고 부릅니다.
수종 자체가 하나의 질병이라기보다는 다른 질환의 증상으로 여겨집니다. 간이나 신장 혹은 심장 등의 이상으로 인해 발생할 수 있으며, 때로는 여러 기관의 문제와 연관되기도 합니다.
당시 유다인들의 전통적인 인식에서는 수종을 앓는 사람을 큰 죄인으로 여기거나, 심지어 성적인 죄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 병은 단순한 신체적 질환을 넘어, 그 사람이 매우 부정한 상태에 있다는 표시로 받아들여지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회적 편견을 넘어서, 수종을 앓는 사람도 하느님의 자비와 치유를 받아야 할 이웃으로 바라보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도 이 사실을 알고 계셨겠지요?! 사람들의 마음을 읽으시는 분이 이 사실을 모르실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상황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이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만일 예수님의 입장에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었을까?" 하고요...
어떤 성서학자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라고 번역된 표현이 단순히 바라본다는 뜻이 아니라, 몰래 감시하듯 적대적이고 위협적인 시선으로 노려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따뜻한 눈길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차가운 시선으로 감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동정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눈앞의 사람보다 규정과 규정 위반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서 보란 듯이 이 병자를 치유해 주시는 것은 그들에게 더 큰 망신을 주시거나 그들처럼 그들을 역고발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하느님의 동정심 가득한 마음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더 깊이 묵상하고 깊이 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복음을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던져 주시고자 하시는 도전이요 초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병자를 하느님의 동정심 가득한 마음, 즉 자비로 바라보셨지만, 그들은 경직되고 왜곡된 마음, 즉 규정에 얽매어 바라보았습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 있지만... 하느님의 자비, 즉 misericordia는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비참해진 상태에 대해 하느님께서 가지시는 연민의 마음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는 죄가 벌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와 용서의 대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루카 복음 13장에서 허리가 굽어 고통받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바라보셨습니다." 주님의 시선은 언제나 가난한 이들, 고통받는 이들, 소외된 이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반면 바리사이들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눈은 오로지 자신들이 정해 놓은 규정을 어긴 행위만을 찾고 있었습니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신 일에 몹시 화를 냈습니다. 율법적으로는 치유 행위도 '일'에 해당한다고 여겼고,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과 눈을 마주하지 못했습니다. 직접 말씀드릴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해야 할 말을 사람들에게 돌려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그를 바라보시며 "위선자들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로 모든 것은 그 눈빛 안에 드러납니다. 자비를 잃어버린 그들의 신앙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었는지가 이보다 더 분명하게 드러난 적은 없었습니다. 그들이 점점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미워하게 된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마침내 그분의 죽음을 꾀하게 된 것 또한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루카 복음에만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도 그 부자가 지옥에 떨어질 만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가 잘못한 것은 오로지 고통 속에 있던 라자로를 바라보지 않았다는 것 하나뿐입니다....
때때로 폭력은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의 반응이기도 합니다.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보면 루카 복음 저자는 바리사이들을 무려 서른다섯 차례나 언급합니다. 성경학자들은 루카 공동체 안에 유다교적 율법 준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적지 않았다고 봅니다. 그들은 이방인 신자들에게까지 유다 율법을 강요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과거 바리사이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사명을 반대했는지를 끊임없이 상기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바리사이적인 태도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늘 존재하는 유혹입니다. 초대 교회 시대부터 그러했고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여전히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잘 지키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 즉 우리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불가해한 사랑과 자비로 구원받는다는 진리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기를 어려워합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하느님과 단지 법적인 관계만 맺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느님을 일정한 선 밖에 두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결국 삶 속 깊은 자리에는 모셔 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의 관계는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냉정한 재판관이 아니라 사랑에 의해 움직이시는 "어버이"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율법의 조항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비로우신 어머니요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사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구원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입니다.
"오늘 나는 어떤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가? 규정과 잘못, 부족함만을 찾는 눈인가, 아니면 예수님처럼 상처와 고통을 알아보는 동정심 가득한 눈인가?"
사실 이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이런 동정심 가득한 눈입니다!
우리 사회와 우리 세상이 왜 이렇게 어둡게 되어가고 있는가를 성찰해 본다면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이런 동정심의 눈이 자꾸만 희미해져 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는 그 사랑의 시선으로, 오늘 만나는 이웃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해 봅니다!
----------------------------------------------------
261030.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http://www.ofmkorea.org/ofmkfb/587016
2026.10.30 03:44
하느님을 향하여 돌려진 마음 3 십자가를 바라보는 관상의 실재
클라라와 보나벤투라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이끕니다. 그들이 바라본 것은 고통의 크기만이 아니라, 그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내어주시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펼쳐진 팔과 열린 옆구리는 인간의 거절 앞에서도 닫히지 않은 사랑을 묵상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상처 입은 인간에게 멀리서 말씀만 건네지 않으시고, 성자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인간의 고통 한가운데로 다가오십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버려진 듯한 자리마저 하느님의 사랑 바깥에 있지 않음을 배웁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기도에는 자신의 상처를 가져갈 자리도 있습니다. 거절당한 기억과 이해받지 못한 외로움, 애써 살아왔으나 남은 후회까지 그분 앞에 놓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나의 고통을 견주어 자신의 아픔을 하찮게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이 얼마나 큰지 증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는 아프다고 말할 수 있고, 더는 버틸 힘이 없다고 고백할 수 있으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다시 살아갈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고통 속에서도 우리에게 삶의 자리를 열어 줍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영적 언어는 이러한 생명의 방향 안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그것은 자신을 미워하거나 삶을 포기하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나만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소유하려는 방식이 사랑 안에서 변화되는 일입니다. 마지막 말은 반드시 내가 해야 한다는 고집을 내려놓고, 상대가 내 기대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자유를 인정하며, 보답이 없어도 선을 행할 수 있도록 자신을 열어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죽음 안에서 우리는 관계를 새롭게 하는 작은 부활을 경험합니다.
또한 십자가를 진다는 이유로 폭력과 학대를 묵인할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상처 입은 이를 보호하고, 해치는 행위를 멈추게 하며, 필요한 도움과 책임을 요청합니다. 용서를 향한 마음과 관계의 신뢰가 회복되는 과정에는 서로 다른 시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거리를 두어야 서로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따른다는 것은 고통을 늘리는 일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 곁에서 생명을 살리는 책임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관상할 때, 우리 시선은 오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로 향합니다. 외로움 속에 잊힌 노인, 존중받지 못하는 가난한 이,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 병든 몸과 지친 마음을 감추고 있는 형제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피조물이 겪는 훼손과 신음에도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계획 밖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지나치기 어려워집니다. 관상은 사람과 세상의 현실을 깊이 보게 하고, 그 현실 안에서 내가 응답할 수 있는 몫을 찾게 합니다.
저에게 있어 제 삶의 현장에서의 삶은 성심원에서 한센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리이든, 작은 공소에서 신자들의 삶을 나누는 자리이든, 재속프란치스코회 형제자매들의 여정을 동반하는 자리이든, 이 부르심은 구체적인 사람을 통하여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도움을 주는 역할만으로 그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들의 기다림과 인내, 감사와 신뢰를 통하여 우리 역시 하느님의 선을 받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자리에서, 그 사람을 통하여 나 또한 지탱되고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형제성은 서로에게 전해진 이 선을 알아보는 데서 깊어집니다.
이때 선교는 삶에서 따로 떼어 놓은 과업을 넘어섭니다. 너를 통하여 내게 전달된 하느님의 선으로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알고, 그 사랑에 응답하여 관계 안에서 발견한 너의 필요를 채우려는 삶이 됩니다. 때로는 말없이 곁에 머물고, 때로는 필요한 말을 용기 있게 건네며, 때로는 함께 문제를 해결할 길을 찾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이 너에게 흐르고, 너에게서 발견한 선이 다시 나를 변화시키는 자리에서 복음은 살아 있는 소식이 됩니다.
우리의 기도가 삶 전체가 사랑으로 변화되기를 바라고 있는가, 아니면 익숙한 범위 안에서만 주님을 따르려 하는가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성실한 실천은 귀중합니다. 그 실천은 마음을 준비하고 지탱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성령께서는 우리가 아직 내어드리지 못한 자리까지 사랑에 열리도록 부르십니다. 십자가를 깊이 바라보다가 십자가가 일상의 삶을 어떻게 변화의 길로 이끌어 주는 지를 배우는 관상의 실재는 누군가의 필요에 자신을 기꺼이 내어주면서 기쁨의 길로 안내합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내어주시는 사랑을 받아 내어주는 사랑으로 응답하고 용서를 받아 용서하는 관계의 변화, 그 변화의 심장에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장 귀중한 것을 내어주는 사랑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
하느님을 향해 돌려진 마음 1 하느님의 거처를 마련하기 (261012. 04:21)
http://www.ofmkorea.org/ofmkfb/586201
하느님을 향해 돌려진 마음 2 가난이 주는 자유와 해방 (261027. 16:12)
http://www.ofmkorea.org/ofmkfb/586896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