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렁거리는 파도에 뱃머리가 심하게 오르내리고, 기관실 위에 달린 붉은 선기도 격렬하게 나부낀다.
궂은 날씨에 거의 모든 배들이 조업을 포기하고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 버린 황량한 바다에
게으른 배 한 척이 둔탁한 엔진 소리를 내며 바쁘게 통발을 올리고 있었다.
‘이번 줄만 올리고 우리도 들어가야겠군...’
심한 파도 탓에 멀미기를 느끼던 선장이 올라오는 통발을 낚아채며 생각했다.
오후부터는 날씨가 좋아진다는 예보만 듣고 무리해서 나온 게 아닌 가 싶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이미 올리기 시작한 통발을 중간에 그냥 놓기도 어중간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줄을 다 올릴 때까지도 상황이 나아질 기세가 안 보인다면 더 이상의 조업은 무리였다.
옆에 있는 마노를 쳐다보았다. 배 한쪽에서 벙거지를 깊게 눌러 쓴 마노가 배의 요동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묵묵히 젖은 통발에서 고기를 꺼내고 있었다.
희한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선장이 키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콧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두 볼이 심하게 따끔거린다. 두껍게 껴입은 옷과 바쁜 몸놀림으로
등에서는 이미 진땀이 흐를 정도지만 어쩔 수없이 드러난 얼굴은 1월의 매서운 삭풍을 피할 수 없었다.
변변한 바람막이 하나 없이 바다 한가운데서 맞아야 하는 사나운 북풍이 마노는 일렁거리는 파도보다
더 불편하게 느껴졌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이 바람을 피하고 싶지만 작업이 끝나지 않는 한
그것은 그냥 바램 일 수밖에 없었다.
콧물을 왼팔로 연신 훔쳐가며 마노가 이젠 제법 익숙해진 솜씨로 통발에서 팔뚝만한 물메기를 꺼내
물칸으로 던지는 일을 반복했다. 선장도 한손으로 키를 잡은 채 능숙하게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구름에 가려진 옅은 해가 중천에 오를 때까지 둘은 아무 말 없이 묵묵히 뱃일을 해내고 있었다.
선장이 조류를 피해 근처 바위섬 뒤쪽에 배를 대고 시끄러운 엔진을 끈 건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다행히 점심때가 가까워지면서 바람이 잦아들기 시작했기 때문에 선장은 나머지 통발을 다 올려보고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갑자기 나타난 불청객을 피해 잠시 자리를 떴던 물새들이 하나 둘 돌아와
거친 바위위에 하얀날개를 접는다.
뱃전에 부딪치는 얕은 파도와 허공을 지나는 공허한 바람 외에 사방은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뿐이다.
마노는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내고 선장은 물칸에서 갑오징어 한 마리를 꺼내 능숙한 솜씨로 장만을 했다.
기관실 위에서 광경을 지켜보던 괭이 갈매기가 바다에 던져진 오징어의 내장을 재빠르게 낚아챈다.
선장이 기관실에서 반쯤 남은 소주를 들고 와 맥주잔에 가득 따르고 마노의 컵에도 조금 부어준다.
가볍게 흔들거리는 배위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마른 점심을 먹고 잠시 몸을 녹인 다음
얌전해진 바다에서 오후 내 남은 통발을 건져 올렸다.
선장이 제법 묵직하게 채워진 배의 머리를 집 쪽으로 향하고 담배를 한대 피워 물었다.
해는 벌써 서편으로 기울고 석양이 하늘과 바다를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후~”
길게 내뿜은 연기사이로 석양을 바라보고 있는 마노의 마른 옆모습이 들어왔다.
햇볕에 그을리고 바닷바람에 형편없었지만 처음 산에서 내려왔을 때보다는 제법 살이 붙고
건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고 보니 같이 일을 시작한 지 두 달이 넘었는데도
아직 마노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어쩌다가 이런 외딴 섬까지 들어오게 되었는지, 또 밖에서는 무슨 일을 했었는지...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고 마노 또한 말이 없는 편이라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마노에 대해서 수군거리던 동네의 엉뚱한 소문들, 북에서 내려온 간첩이라거나
도회지에서 죄를 짓고 외딴 섬으로 숨어들어 온 흉측한 범죄자라는 등의 추측들이
그야말로 괜한 억측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정말 그렇다 한들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싶은 선장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긴 했다.
산을 내려온 뒤에도 여전히 바다에 나가지 않는 날이면 산에 들어가 시간을 보낸다거나
밭일이라면 질색을 하는 자기와는 달리 틈틈이 밭에 나가 작물을 가꾸는 것도 희한했지만
처음 배를 타는 사람이 바다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배멀미 또한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게 신기하기 만 했다.
사실 선창에 막 배를 대고 줄을 묶고 있는 자기에게 다가와서 같이 배를 탈 수 있겠냐고 물어왔을 때만 해도,
언젠가 도시에서 놀러 온 처남이 통발 걷는 걸 도와준다며 자신 있게 바다에 나갔다가
심한 멀미로 오히려 일만 만든 게 생각나서 도리질을 쳤던 선장이었다.
결국 일손구하기가 쉽지 않은 탓에 반신반의하며 배를 태우긴 했지만 이제는 서툰 사람과의 뱃일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어지간한 뱃사람보다 낫다고 말하게 될 정도였다.
나이 든 어머니는 자기를 안심시키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배위의 잡다한 일들과 여러 가지 밧줄의 묶고 푸는 법, 어구를 손질하는 법, 심지어는 판장에
고기를 내다 파는 일까지도 마노는 마치 평생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처럼 진지하게 배우고 또 곧바로 해냈다.
처음엔 아무것도 할줄 모르는 뭍사람을 함부로 쓰다가 괜히 일만 는다고 우려하던 동네사람들이
요즘처럼 사람 구하기 힘든 때 복도 많다며 부러워 할 지경이었다.
선장으로서도 이것저것 쓸데없는 잔소리로 자기를 성가시게 하거나 위판장에서 고기 판 돈을
손에 만져 볼 겨를도 없이 잽싸게 가로채가는 뚱뚱한 마누라를 데리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났다고 생각했다.
될 수 있으면 오랫동안 같이 일을 하고 싶지만 가끔씩 저렇게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볼 때면
왠지 이런 행운도 길게 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첫댓글 벌써 2년전 일이군요.. 요새는 밖에 나갈 일이 많이 없어서 그렇게 추운지 모르고 지내지만 그래도 새해가 되니 자연스럽게 그때 일이 생각이 납니다. 어설프게 소설 형식을 빌어 한 소심한 젊은이의 우스운 경험담을 풀어내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