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호지(水湖誌) - 5
제1장 백팔마왕
제3편 소화산 도둑촌 3-1
사진(史進)은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집안일은 남에게 맡기고, 자신은 오직
무예를 익히는 데 골몰했다.여름이 되어 더위가 한창일 때 사진은 담장 밖에서 자기
집안을 엿보는 사냥꾼 이길(李吉)이라는 자를 만났다.
“나리, 댁의 그을랑(丘乙郞)과 술 한 잔 할까 해서 왔는데, 나리께서 계시기에 못 들어가고
있었을 뿐입니다.”“자넨 왜 요즘 사냥감을 안 가져오는가. 내가 자네한테 계산을
안 해준 적이 있었던가?”“얼마 전 산적 떼가 소화산(少華山)에 들어앉은 후로는 아무도
산에 얼씬을 못한 지 여러 달째가 되었습니다.소화산 산적 두목은 3명이고, 졸개가
5,6백명이나 됩니다. 관가에서는 도적을 잡아오는 사람에게 상금 3 천관을 걸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사진은 곧 장객에게 일러 소를 잡고 술을 내어 크게 잔치를 준비한 다음
마을의 장정들을 모조리 불러들여 말했다.“잘 아는 일이지만 소화산에는 도적떼들이 들끓고
있소. 놈들이 언제 우리 마을로 내려올지 알 수가 없어서 여러분들을 불러 모은 것이오.
집집마다 목탁을 하나씩 준비해 두었다가 도적들이 오면 알리고, 창이나 몽둥이를
준비하고 있다가 막도록 합시다. 두목들은 내가 맡겠소.”
그 무렵 소화산에서도 두령 셋이 모여 앞날을 상의하고 있었다.
“소문에 관가에서 우리를 잡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었답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첫째 두목 주무(朱武)였다.그는 정원(定遠) 사람으로 비록 무예는
뛰어나지 못하지만 진법(陳法)에 정통하고, 지략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곧 관군이 쳐들어올 텐데, 우리도 식량을 넉넉히 준비해야겠다.
먼저 어느 고을을 터는 게 좋겠나?”그들은 멀리 갈 것 없이 가까운 화음현을 털기로 했다.
그러나 둘째 두목 진달(陳達)은 찬성했으나 셋째 두령 양춘(楊春)은 그 말에 반대였다.
화음현을 가자면 사진이 있는 사가촌을 지나야 만 하니 포성현(蒲城縣)을 터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다.주무도 그 의견에 따랐으나 진달은 반대였다.
“그깟 놈의 사진이 뭐가 겁이 나서 그럽니까? 나 혼자 다녀오겠소.”
진달은 두 사람 말을 듣지 않고 곧 150명의 졸개들을 거느리고 산에서 내려갔다.
도적떼가 온다는 말을 듣자 사진이 곧 장객에게 목탁을 두드리게 했다.
목탁소리는 비상령처럼 삽시간에 온 마을에 울렸다.
젊은이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모여들었다.사진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붉은 갑옷을 입고,
등에는 활과 화살 통을 메고, 손에는 칼날이 세 갈래인 팔환도(八環刀)라는 칼을 들고,
붉은말에 올라 무리들을 거느리고 동구 밖으로 나갔다.이윽고 도적의 무리가 다가왔다.
도적 진달은 긴 창을 잡고 백마를 타고 달려오다가 사진을 보자 갑자기 말에서 몸을 굽혀
예를 갖추고 말했다.“우리 산채에 식량이 떨어져 화음현으로 양식을 빌리러 가는 길이오.
사가촌에는 풀 한 포기도 안 건드릴 것이니 잠자코 보내 준다면 돌아오는 길에
후히 사례하겠소.”그러자 사진은 꾸짖었다.“듣기 싫다. 도적놈이 길을 빌리다니
말이 되느냐? 잔말 말고 말에서 내려 결박을 받아라.”
“온 천지가 모두 형제라는 말이 있지 않소. 길 좀 못 빌릴 것이 뭐 있소?”
“나는 네 말을 들어주고 싶지만 안 된다는 자가 있다.”“그게 누구요?”“내 손에 쥐고 있는
칼이다.”진달은 크게 노하였다.“두고 보자니까 못하는 말이 없구나.”
진달이 창을 잡고 사진을 향해 달려들었다.둘이 맞서 수십 여 차례 싸우는 가운데
사진이 짐짓 허술한 틈을 보이자, 진달이 재빨리 창을 휘둘렀다.
사진은 번개같이 창을 피하며 팔을 뻗어 진달의 허리를 잡아 말 아래로 떨어뜨렸다.
그러자 진달의 졸개들이 달아나기 시작했다.
사진은 장객을 시켜 진달을 결박하여 관가에 보내 현상금을 요청하기로 했다.
- 6회에 계속 -
★ 수호지(水湖志) - 6
제1장 백팔마왕
제3편 소화산 도둑촌 3-2
한편, 산채에서 진달을 기다리던 두목 주무는되돌아온 졸개들의말을 듣고 힘으로 맞설 것이
아니라 계교를 써서진달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다.주무와 양춘은 꾀를 내어 단 둘이
말을 타고사진을 만나러 갔다.사진은 문 밖에서 그들을 맞았다.
주무와 양춘은 사진을 보자 그대로 땅에 무릎을꿇고 앉아 눈물을 흘렸다.사진은 뜻밖의
광경에 놀라 자신도 말에서 내렸다.“너희들은 왜 울기부터 하느냐?”주무는 더욱 서럽게 울며
말했다.“저희는 본래 간악한 관리들의 핍박에 못 이겨산 속으로 도망 다니는 중입니다.
우리 세 사람은 서로 형제의 의리를 맺어 생사를같이하자고 맹세했으니 비록 예전의 유비,
관우,장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마음만은 같습니다.이제 아우 진달이 제 말을 안 듣고
왔다가 대인에게사로잡혔으니 이제 저희 둘도 함께 죽을 수밖에없어서 찾아뵙게 된 것입니다.”
사진은 그 말을 듣고 저들이 비록 도적들이지만의리를 중하게 여기는 터에 자신이 저자들을
관가에 바치고 상금을 받는다면 천하의 호걸들이 비웃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을 집으로
데리고 갔다.“그대들이 의리를 중히 여긴다면 모든 일을 없는일로 할 터이니
우리 술이나 한잔 나눕시다.”사진은 진달을 풀어주고 그들을 술자리로 청했다.
세 두목은 사진에게 깊은 사례를 하고 늦은밤이 되어서야 산채로 돌아갔다.
산으로 돌아간 주무는 사진의 은혜가 고마워 작은 예물을 사진에게 보냈다.사진도 답례로
비단과 고기를 보내면서 그들은서로 왕래가 잦아졌다.여름이 지나고 추석을 며칠 앞둔 사진은
소화산의 두령들을 초청해 하룻밤 잔치를 베풀 생각으로왕사(王四)를 산채로 보냈다.
왕사는 주무의 답장을 갖고 되돌아오는 길에주막에 들러 술을 너무 많이 마신 끝에 풀밭에
쓰러져 그대로 곯아떨어졌다.그때 왕사와 친한 사냥꾼이 지나다가 그를 깨우려하던 중
허리에 찬 주머니 속에든 돈 닷냥을 보자 탐이 나서 돈을 빼내는 순간 소화산 두령이 사진에게
보내는 편지를 손에 쥐게 되었다.
‘3천 냥의 현상금이 걸린 소화산의 도적 괴수가 추석날 사진의 집에 놀러온다?’
사냥꾼 친구는 팔자를 고치게 되었다는 생각으로 돈과 편지를 품속에 넣고 곧 화음현으로
달려갔다.왕사는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잠이 깨었다.눈을 떠 보니 돈과 편지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그는 당황한 끝에 사진에게 가서 편지를 도둑맞았다는 말은
숨긴채 그들이 보름날 저녁초청에 응하겠다는 말을 하더라고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추석날 사진의 집에서는 새벽부터 양과 닭을 잡아 잔치준비를 했다.
상을 차렸을 때 소화산 두령들이 찾아왔다.사진은 몸소 나가 그들을 맞아들였다.
때마침 동산에 달이 뜨면서 네 사람이 한창 술을마시며 즐기고 있을 때 문득 담 밖에서
난데없는함성이 일어났다.밀고를 받은 화음의 현위가 두 명의 군 지휘관과 함께 3백여명의
군사를 이끌고 사진의 집을철통같이 포위한 것이다.주무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들 때문에 형님이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빨리 우리를 묶어 저들에게 내주십시오.”
그러나 의리를 중하게 여기는 사진은 그 말을듣지 않고,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생사의 결단을
낼 도리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담 너머로 군관들에게 물었다.“밤중에 웬 소동이오?”
“우리가 다 알고 왔소. 밀고자는 사냥꾼 이길이오.어서 도적들을 내놓으시오.”
사진은 지휘관 옆에 서있는 이길을 향해 물었다.“네 놈은 내게 무슨 원한이 있어 죄 없는사람을
무고하는 게냐?”“저는 아무 죄가 없습니다. 다만, 숲속에서 왕사가떨어뜨린 편지를 주웠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듣자 사진도 어쩔 수가 없었다.“그렇다면 곧 도적들을 내줄테니잠시 기다려주시오.”
사진은 곧 왕사를 불러 한 칼에 베고 집에불을 지르게 한 다음 스스로 앞장서서세 두령들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밖으로 내달렸다.사진은 이길을 한 칼에 베고, 진달과 양춘은 두명의 군 지휘관을
죽였다.뜻밖의 사태에 놀란 현위와 관군들은그대로 앞 다투어 달아났다.
사진은 세 두령과 함께 소화산으로 갔다.자신의 신세가 딱하게 된 것이다.
세 사람을 구하고 이제는 돌아갈 집도없는 신세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도적의 무리 속에서살 수는 없는 일이었다.곰곰이 생각한 끝에 관서지방에 있는
스승왕교두를 찾아갈 작정을 했다.사진은 주무의 무리들이 잡는 소매를 끝내 떨치고, 그 이튿날
약간의 돈을 갖고 행장을 꾸려 혼자 길을 떠났다.
- 7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