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명
1. 지극한 진리(至道)
지도무난(至道無難) 지극한 진리는 어렵지 않나니,
유혐간택(有嫌간擇) 취사선택을 꺼릴 뿐이다.
단막증애(但莫憎愛)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명백(洞然明白) 훤하게 명백하리라.
호리유차(毫釐有差) 조금이라도 틈이 생기면
천지현격(天地縣隔) 하늘 땅만큼이나 벌어진다.
욕득현전(慾得現前) 눈앞에서 체득하려면
막존순역(莫存順逆) 간사한 분별을 갖지 말지니라.
[강의]
첫째로 내거는 주제는 지극한 진리에 관한 총론적 설명이다.
네 마디씩 여덟 구로 되어 있는 총론적 설명이란 한마디로 중생들이 흔히 아는 상식으로는 진리를 터득할 수 없으니 반드시 그것을 초월하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원초적인 본능은 미워하고 사랑하는 감정이다. 이 감정에 의해 사물과 현상을 분별하는 것을 정식(情識)이라 한다.
인간은 이기적 본능 때문에 이기적이면 좋아하고 반이기적이면 싫어하는 까닭에 사물과 현상을 인식하는 데 있어서 그 정식 작용이 다분히 편파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런 편파적으로 작용하는 정식, 즉 애증하는 마음으로서는 지극한 진리에 닿을 수 없다.
왜 지극한 진리에 닿아야 하는가?
그 진리를 체득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무엇 때문에 그 진리를 주장 하는가?
[신심명]의 처음에 나오는 지도(至道), 즉 지극한 진리란 인간생활과 동떨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언제 어디서나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 생활규범을 말한다. 즉 진리란 우리의 마땅한 사회윤리적 규범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그 진리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정식(情識)으로 취사간택하는 감정적 영역만 벗어나면 가능하다.
그럴려면 사물이나 현상을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바라 보려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시각을 자기에게만 맞추지 말고 다수에게, 개인보다는 집단에게 맞추어야 한다. 그러면 그 지극한 진리에 도달하는 길이 훤하게 드러나고 만다.
그런데 지극한 진리에 도달하기만 하면 만사가 O.K인가. 지금 {신심명}은 여기에 단서를 달고 있다. 결국 결과가 좋더라도 동기에 있어서 조금이라도 삿된 간사함이 끼어 있다면 그것은 질적으로 같을 수 없고 가치면에서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즉 우리의 행위 양식은 가치에 존재의미가 있으므로 그 가치를 구족하려면 행위가 ‘동기. 과정. 결과’ 모두 정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기나 과정의 정당성 없이 결과만 성취되면 그것이 비록 정당하더라도 그 행위는 지극한 진리를 터득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결과주의는 동기나 과정의 정당성을 무시한 폭력에 의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목적이 훌륭하므로 수단 방법이 어떻든 상관없이 폭력을 동원하는 것도 괜찮다 함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목적 때문에 삿된 수단을 쓰는 행위는 이미 간사한 분별, 즉 이기적 정식에서 나온 것이다. 지극한 진리를 체득함은 그런 결과만을 탐하는 분별을 뛰어 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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至道(지극한 진리) ; 본래 이 지도는 유가의 용어로 궁극적 실재나 의미.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이른다. 따라서 지도는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이다.
揀擇(취사간택) ; 비교하거나 단절해 버리는 구별의식. 특히 인간의 이분법적 흑백논리 따위, 선학에서는 이것을 아주 싫어한다.
憎愛(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 인간의 깊은 본능에 놓인 감정이 나타나는 상. 이 애증은 [원각경]의 것을 연상한 것이다. 즉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옛적부터 망상으로 ‘나’라는 사상(四相)에 집착해 윤회하느니라.… 그러므로 ‘나’를 사랑하는 이가 있다면 ‘나’도 그와 더불어 수순하고 수순하지 않으면 곧 미워하고 원망하나니,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은 무명을 기르는 까닭에 이 마음을 계속하고서 도를 구하면 도무지 도를 성취할 수 없느니라.”
洞然明白(훤하게 명백하리라) ; 통연은 훤하게, 명백은 분명히 드러나다의 뜻이다. 명백은 원래 [노자(老子) 제 10장과 [장자(莊子)] 천지편에 나온다.
毫釐(조금이라도) 일호(一毫)는 천분의 한치이고 일리(一釐)는 10호(毫)이니, 결국 아주 가는 것을 말함. 여기서는 부사로 쓰여 유차(有差)를 제외한다. 이 ‘호리유차’는 후에 선종에서 즐겨 쓰였다.
現前(눈앞에서) ; 부사적으로 풀었으나 문장 구성상 현전은 동사이다. 욕득은 조동사이다. 고로 욕득현전은 ‘지극한 진리를 자기화 하려면’의 뜻. 간단히 ‘곧장 현장에서 체득하려면’ 정도의 의미이다.
順逆(간사한 분별) 순(順)이란 나아가고 역 (逆)이란 이를 거슬리는 것인데, 말하자면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따지는 의식이 간사하게 작용함을 말한다. 싫어하는 것이 상식인데, 그 중심에는 반드시 이기적 분별심이 있어서 이해관계를 따라 진리마저 이해하려 들므로, 여기서는 강력히 저지하는 것이다.
동국대학교 선학과 교수 현각 스님
첫댓글 < 편파적으로 작용하는 정식, 증애심, 간사한 분별심 >이 문제아를 어떻게... 진여혜님, 고맙습니다.
진여혜님 .. 고맙습니다...()
진여혜님 감사 감사드립니다.._()()()_
이런 심오한 진리를 알게 해 주시다니....^^
구구절절 자양분만 가득한 신심명을 오늘 제 생일선물로 챙깁니다. 진여혜님! 감사합니다. _()_ 성불합시다.
대원성님 생신 축하 드립니다_()_
..*。*。♥ ..。'ㅇ'congratulations!! 。。♥ ㅇ.☆~* ˚。♥ ㅇ.☆.。'*。*。대원성님~♥ ..。'ㅇ'。。♥ ㅇ 생신을 진심으로 축하드리옵니다~'。。♥ ㅇ.☆~* ˚。♥ ㅇ.☆.。congratulations!!
애증이라는 굴레만 벗어난다면 至道에 머물 수 있음을...진여혜님 감사합니다._()_
신심명.... 진여혜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_()()()_
신심명...감사합니다._()()()_
싫어하는 것이 상식인데, 그 중심에는 반드시 이기적 분별심이 있어서 이해관계를 따라 진리마저 이해하려 들므로,..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