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생의 길고 짧음의 의미. **
불로장생은 인간의 영원한 꿈이자 희망사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상 결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진시황제가 불노초를 찾아 헤매었던 일화도 유명합니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오래 건강하게 살기 위하여
건강에 많은 신경을 쓰면서 살고 있습니다.
죽으면 지금 살고 있는 세상보다도 훨씬 더 좋은 천국을 간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도
결코 빨리 죽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모르는 곳으로 가는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인 듯 합니다.
제가 가끔 “60세까지 살다 죽은 사람과 80세까지 살다 죽은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제 스스로나 대화석상에서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소 엉뚱하고도 우문에 가깝게 느껴지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한 대부분의 사람들의 대답은 가벼운 관찰로서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모두들 조금이라도 오래살기를 희망하고, 그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과 노력이 잘못되었다거나 무의미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20년은 인생의 평균수명에 비추어 보면
당연히 큰 차이입니다.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기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희망과 노력과는 별개로
“장수하는 것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지? 반드시 장수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는 대답이 다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앞에 질문과 비슷해 보이지만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느냐의
문제가 포함되어 있는
조금은 다른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럽고 예기치 못한 사고나 질병은
누구나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일들은 주변에서 흔히 일어납니다.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이를 피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사고들을 보면 너무 터무니가
없고 허무하여 사람이 살아있다고 장담하는 것조차 우스울 정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오래 살고 싶어 하여도 소위 운명이라는 부분이 있는 듯도 합니다.
젊은 나이에 어떤 사고를 당한 사람이나
질병에 걸려 일찍 죽은 사람을 보면, 보통
불쌍하다거나 안 됬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매우 안타까워하고 슬퍼도 합니다.
당연히 우리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감성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나 이슬람교나 불교나 모두 공통적인 특징은 삶과 인생은 ‘수고와 고통 그 자체’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말이 조금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종교를 떠나서라도 좀 초연한 시각에서
보면, 인생의 길이의 길고 짧음은 좋고 나쁨의 문제와 관련성이 없고 그 사람의 몫일
뿐이라는 생각도 가능해 보입니다.
어차피 죽음도 우리 인생의 중요하고도
피할 수 없는 한 부분을 이루는 요소입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인정하고 평정심과 담담함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일 필요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몽테뉴의 수상록의 일부를
인용해 봅니다.
“오래 살건 잠시 살건 죽음 앞에서는 매한가지다. 사라지고 난 후에는 길고 짧음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히파니스강에는 단 하루를 사는 작은 벌레가 있다고 한다.
아침 8시에 죽으면 요절한 것이고, 저녁 5시에 죽으면 장수한 셈이다.
이렇게나 짧은 생애를 놓고 행복과 불행을 따진다면 우리 중에서 비웃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우리네 길고 짧음도 영원이나 자연들의
시간에 대보면 가소롭긴 마찬가지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도 명상록에서 비슷한 말을 합니다.
“한 인간이 소유하는 시간은 오직 현재이기 때문에 소유하지 못한 미래는 잃을 수가
없다. 가장 오래산 자나 가장 일찍 죽은 자나 잃는 것은 정확히 똑같다.
그 것은 단지 그가 직면한 현재의 순간만을 빼앗긴다는 것이다”
약간 어렵게 표현되어 있지만 몽테뉴의 말과 비슷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지 않은 자연의 섭리, 우주의 섭리, 신의 섭리 등의
영향과 지배를 훨씬 많이 받고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를
‘운명’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이는 거역할 수 없는 섭리의 큰 흐름의 일부분일 것입니다.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를 담담한 자세로 받아들이는
연습도 필요할 것입니다.
이집트인들은 연회와 같은 큰 잔치 도중에는 망자의 마른 해골을 가져와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가장 즐거운 잔치의 와중에도 인생에서 죽음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는 지혜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인생을 ‘찰나’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는 불교에서 유래된 시간의 최소단위입니다. 그 만큼 짧은 인생임을 의미합니다.
한 인간이 자기 욕망을 채우기에는 너무나 짧은 기간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따라 베풀면서 살기에는 인생은 충분히 길다고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