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내용은 이종문[계명대학교 한문교육과 명예교수]가 쓴 논문 「일연一然 비碑에 관한 몇 가지 문제」 중에서 일연의 속성(俗姓) 부분을 발췌한 내용입니다.
II. 일연 비에 관한 몇 가지 문제
1. 일연의 속성(俗姓) 문제
이 학술 세미나를 주최하는 삼성현역사문화관 측에서 필자에게 일연 비에 관한 발표를 의뢰하면서, 발표문의 한 부분을 할애하여 근년에 제기된 일연의 속성 문제에 대해 검증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다 알다시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연의 속성이 “김씨(金氏)”라는 것을 의심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의 속성이 “김씨”라는 것은 학계는 물론이고 『삼국유사』에 관심을 가진 교양인들의 오랜 상식으로 확고하게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년 전에 김병헌에 의하여 난데없이 “전씨(全氏)” 설(說)이 제기되어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으니, 제기된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제 3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검증해 달라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필자는 김병헌이 주장한 그대로 ‘일연의 속성이 “金氏”가 아니라 “全氏”임’이 거의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그가 이미 수긍할 만한 근거를 납득할 만한 수준으로 제시해 놓았기 때문에, 재론할 필요도 별로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을 담은 김병헌의 논문이 『한국교수불자연합학회지』라는 다소 생소한 학술지에 수록되어 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그의 논문을 접하지 못한 학자들이 많은 것 같다. 설사 접했다고 하더라도 기존 상식을 완전히 뒤엎는 워낙 느닷없는 주장이어서, 선뜻 동의하고 나서기보다는 학계의 추이를 지켜보는 분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김병헌의 견해를 수용하여 일연의 속성을 ‘全氏’로 보는 흐름이 새로운 물줄기를 이루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학계와 국민적 상식의 대세를 이루고 있는 것은 여전히 ‘金氏’다. 이러한 상황을 감안하여, 관련 자료를 보다 광범위하게 동원하여 그의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살펴보고자 한다.
다 알다시피 일연의 속성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는 비석의 양기에 서술된 ‘俗姓(?)氏’(사진 가)다. 자료가 딱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괄호 속의 물음표에 해당하는 글자가 무슨 글자인지 정확하게 판독하기만 하면, 일연의 속성에 대한 문제는 바로 판가름이 나게 된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최근까지 모든 학자가 이 글자를 ‘金’자로 판독하고, 일연의 속성을 ‘金氏’라고 말해 왔다. 하지만 괄호 속의 글자가 과연 ‘金’자 일까? 이를 검증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는 ‘俗姓(?)氏’의 ‘(?)’자 양기와 음기에 나오는 다수의 ‘金’자들과 비교하여 보는 것이 아닐까 싶다. 다 알다시피 일연의 비는 그의 문도 죽허(竹虛)가 중국의 서성(書聖) 왕희지의 행서(行書)를 집자(集字)하여 세운 것인데, 집자의 일차적인 대본은 당나라 승려 회인(懷仁)이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하여 세운 『성교서(聖敎序)』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성교서』를 포함한 또 다른 왕희지 집자 비에 나오는 ‘金’자들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를 확대하여 비교해 본다면, 그 신뢰도가 더욱더 높아지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俗姓(?)氏’의 ‘(?)’자 조사 대상 자료에 나오는 다수의 ‘金’자들과 그 형태가 일치하면 일연의 속성은 ‘김씨’일 터이지만, 만약 일치하지 않으면 그의 속성은 ‘김씨’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될 수밖에 없다.
(나) 일연 비 양기에 나오는 8개의 ‘金’字
(다) 일연 비의 음기에 나오는 11개의 ‘金’자
(라) 성교서에 나오는 4개의 ‘金’字
(마) 흥복사 비에 나오는 5개의 ‘金’字
일연 비의 양기에는 모두 8개의 ‘金’자가 나오는데, 사진(나)가 바로 그것이다. 필자가 일연 비의 탁본들을 모아놓은 『인각사보각국사비첩』과 『인각사보각국사비첩(속집)』에 수록된 20 여종의 탁본들을 대상으로 꼼꼼하게 조사해 본 결과, 일연 비의 음기에서도 모두 11개의 ‘金’자를 찾을 수가 있었다. 사진(다)가 바로 그것이다. 당나라 승려 회인(懷仁)이 집자한 『성교서(聖敎序)』에도 4개의 ‘김’자(사진 라)가 등장하며, 역시 당나라의 승려 대아(大雅)가 왕희지의 행서를 집자하여 세운 『흥복사비(興福寺碑)』에도 5개의 ‘金’자(사진 마)가 나온다. 이상의 ‘金’자를 모두 합하면 무려 28개나 되는데, 이 28개의 ‘金’자를 상호 비교하여 보면, 전체적인 형태가 약간 다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 글자들이 전부 ‘金’자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지 않을까 싶다. 더구나 이들이 만약 ‘金’자가 아니라면 각각의 문맥 속에서 문장의 의미 성립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모두가 ‘金’자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28개의 ‘金’자를 ‘俗姓(?)氏’의 ‘(?)’자와 비교해 보면, 글자 상호간의 형태가 근본적인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에 도저히 같은 글자라고 할 수가 없다. 따라서 ‘俗姓(?)氏’의 ‘(?)’자는 적어도 ‘金’자는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럼 ‘(?)’자는 무슨 글자일까?
일연 비에는 ‘(?)’자와 형태가 유사한 글자가 3개 나오는데(사진 바), ‘俗姓(?)氏’의 ‘(?)’, ‘判觀候署事(?)倜’의 ‘(?)’, 음기에 나오는 문도 이음인 ‘信(?)’의 ‘(?)’가 바로 그것이다. 일연 비에 등장하는 ‘(?)’자와 형태가 유사한 글자를 왕희지 집자 비의 서첩에서도 3개 찾을 수가 있다. 그 가운데 「성교서」에 등장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지러졌다가 다시 온전해졌다.”고 번역되는 “聖敎缺而復全”의 마지막 글자인 “全”이다. "이 글자는 「흥복사비」에도 한 개 나오는데 비석의 끝부분에 나오는 ‘불의전 不意全’의 “全”이 바로 그것이다." ‘불의전’ 바로 뒤에 비석이 단절되어 이 구절의 의미를 확실히 파악할 수는 없지만, 이 글자를 ‘全’으로 판독하는 데는 한·중·일의 판독자들 사이에 아무런 이견이 없는 상태다. 서첩을 구할 수 없어서 필자가 직접 확인하지 못했지만, 왕희지 집자비인 『육역 금강경』에도 같은 글자가 나온다고 한다. 엄밀히 말하면 일연 비에 나오는 ‘(?)’자들과 『성교서』, 『흥복사비』에 나오는 ‘全’자들이 각각 형태가 조금 다르게 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글자로 보아야 할 정도로 근본적인 차이는 아니다. 게다가 왕희지 서첩에서 ‘全’자를 제외하고는 (?)자와 흡사한 형태를 가진 글자를 찾을 수도 없다. 따라서 일연 비에 나오는 “俗姓(?)氏”의 ‘(?)’는 ‘金’이 아니라 ‘全’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김병헌처럼 정식으로 문제를 제기하지는 않았지만, 서예계의 일각에서는 그 전에도 일연의 속성을 ‘전씨’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예컨대 1982년 운림필방 편집부에서 간행한 『왕희지 행서 자전』은 각종 서첩에 있는 왕희지의 행서 글씨를 형태 그대로 따와 글자별로 모아놓은 책인데, ‘全’자를 모아놓은 자리에 일연 비의 양기에 나오는 ‘全’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왕희지의 글씨에 정통한 서예가 백영일과 이종훈에게 ‘俗姓(?)氏’의 ‘(?)’자가 무슨 글자인지 직접 만나서 문의한 결과, 두 사람 모두가 별다른 망설임도 없이 ‘全’자로 판독했다는 것도 참고가 된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일연의 속성은 김병헌이 주장한 대로 ‘전씨’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먼 훗날 혹시 ‘全氏’로 되어 있는 일연 비의 탁본들이 모두 사라지고 인각사에 세워진 재현비만 남게 된다면, 그의 속성이 다시 ‘金氏’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재현비에는 탁본에 있는 그대로 ‘全’으로 새기지 않고, ‘金’씨로 새기는 오류를 범했기 때문이다(그림 1.2). 요컨대 ‘全’을 ‘金’으로 잘 못 새긴 재현비의 경우와는 반대로, 일연 비를 세운 사람들이 ‘金’을 ‘全’으로 잘못 새기는 오류를 범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이상 일연의 속성은 ‘全氏’임이 분명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출처] 삼성현과 경산의 역사 인물 연구 (발행처) 삼성현역사문화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