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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행, 바람처럼 흐르다 원문보기 글쓴이: 무심재
조선; 도자
51장. 분청사기 - 민(民)의 자율성이 낳은 조형의 해방
분청사기의 특질
분청사기(粉靑沙器)는 백자(白磁)와 함께 조선 도자의 양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다. 분청사기는 고려 상감청자(象嵌靑瓷)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초기 도자 문화를 주도하여 15세기 중엽까지 전성시대를 누렸다. 그러다 명나라의 우수한 백자에 자극을 받은 성종(成宗, 1457-1494. 재위 1469-1494) 연간 본격적으로 양질의 백자가 생산되면서 백자와 함께 양대 흐름으로 병존했으며 16세기 후반이 되면 백자에 밀려 생명을 다하고 사라졌다.
이리하여 조선 도자의 정통성은 백자가 차지하게 되었지만 분청사기는 조선 전기 약 150년 동안 제작되면서 백자와는 전혀 다른 도자 예술세계로 조선시대 도자사의 내용을 풍부하게 채워주고 있다.
분청사기는 백자와 여러 면에서 달랐다. 제작 환경이 달랐고 예술적 지향도 전혀 달랐다. 백자는 기본적으로 국가에서 직접 운영하는 관요(官窯)가 생산을 주도하였지만 분청사기는 각 지방에 산재해 있던 지방 가마에서 주로 만들어졌다. 때문에 분청사기는 제작 여건이 백자보다 좋지 못했지만 관(官)의 통제로부터 벗어나 민(民)의 생활 정서가 반영되는 조형의 해방을 누릴 수 있었다. 백자가 품격 있고 고상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분청사기는 삶의 정서가 반영된 질박(質朴, 실질적이며 소박) 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
미적 관점에서 보자면 백자는 양반 공예, 분청사기는 민속공예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공예란 생리상 대부분의 경우 지배층 문화의 산물로 세련미를 추구하지만, 서민의 체취를 자아내는 분청 사기의 미적 성취는 세계 공예사적으로도 아주 드문 것이다.
분청사기의 명칭
분청사기는 이처럼 시대적 사명을 다하고 백자에게 그 임무와 지위를 넘겨주고 종말을 고했지만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서 부활하였다. 첫 번째는 16세기 일본 다도인(茶道人)에게 존숭받은 것이다. 이는 일본 다도가 종래의 화려 취미에서 벗어나 꾸밈없는 질박한 정신의 '와비차[侘び茶]'를 추구하면서 이에 걸맞은 찻잔으로 애용한 것이다. 두 번째는 20세기 초,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로 대표되는 일본의 민예(民藝) 학자들이 인위적인 개교의 공예보다 꾸밈없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의 생활의 미를 강조하면서 분청사기를 높은 차원의 예술적 성취로 조목한 것이다.
일본인들은 우리의 분청사기를 자기들 식으로 이름 지어 미시마[三島],하케메[刷毛目],고히키[粉引] 등으로 불렀다. 미시마는 그들이 분청사기를 수입해 간 조선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고, 하케메는 귀얄 무늬 분청사기, 고히키는 백토 담금 분청사기를 말한다. 미시마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시즈오카[靜岡]의 미시마 신사에서 인쇄하던 달력이 인화 무늬 분청사기의 무늬와 비슷하게 생긴 데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제 강점기 고미술 시장에서 조선 도자 붐이 일어날 때 분청사기는 통칭 '미시마', '하케메'로 불렸다.야마다 만기치로[山田萬吉郞,1902-1991]가 1943년에 지은 분청사기에 관한 저서의 제목이 <미시마 하케메[三島刷毛目]>였다.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는 분청사기를 지칭하는 명칭이 따로 없었다. 조선시대 당대에 분청사기는 그냥 자기(磁器, 瓷器. 또는 沙器)라는 보통명사로 불렸을 뿐이다.
이에 한국미술사의 아버지라 할 고유섭(高裕燮, 1905-1944) 선생은 우리 식의 이름을 부여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을 띠는 사기그릇이라는 의미로 분장회청 사기(粉粧灰靑沙器), 줄여서 분청사기(粉靑沙器)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통상 분청(粉靑)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분청사기라는 용어는 이처럼 우리 문화유산의 정체성을 위하여 만든 새로운 용어인데 여기서 '자기'라 하지 않고 '사기'라고 한 것이 개념상 많은 오해를 낳고 있다. 마치 청자, 백자는 자기이고 분청사기는 사기그릇에 이어서 질이 다르거나 낮은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이에 윤용이 교수는 분청사기는 청자, 백자와 같은 맥락에서 '분청자(粉靑磁)'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 지적하고 분청자로 용어를 바꿀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분청사기는 이미 80년 가까이 사용해 온 미술사 용어로, 박물관 용어해설집은 물론이고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굳이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 지적이 옳음만 받아들이고 관행대로 분청사기 혹은 분청이라 지칭하기로 한다.
분청사기의 탄생과 종류
고려 말 상감청자는 급속히 퇴락의 길로 들어섰다. 1350년 무렵부터 남해안과 서해안에 왜구의 습격이 잦아지면서 1370년 무렵 나라에서는 백성의 안전을 위하여 바닷가에서 50리 이내에 사는 사람들을 내륙으로 이주시켰다. 이에 강진과 부안의 해안가에 있던 청자 가마는 폐쇄되었고 사기장들은 졸지에 생존의 기반을 잃어버린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이를 역사에서는 '유망(流亡)'이라고 했다.
이에 사기장들은 전국 각지로 뿔뿔이 흩어져 내륙 여러 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삶을 영위하였다. 그리고 사기장들은 종래에 해왔던 대로 상감청자를 굽기 시작했다. 도자기를 만드는 재료는 흙(점토)과 잿물(유약)이며 여기에 땔나무와 가마만 있으면 된다. 그래서 사기장들은 어렵지 않게 도자기를 구워낼 수 있었다. 다만 점토와 유약 등 재료가 좋기 않아 도자기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청자의 미덕은 빛깔인데 좀처럼 맑은 청색으로 되지 않고 회청색 또는 갈색으로 나타났다. 청자를 구워 냈지만 청자가 이닌 셈이었다. 이에 사기장들은 자연스럽게 부분적으로 사용되던 백상감의 백토를 그릇 전체에 분장(粉粧) 하는 방식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처럼 백토 분장을 많이 하면서 조형 목표가 빛깔이 아니라 문양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에 분청사기는 문양을 표현하는 방법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타나게 되었다.
첫째는 '상감(象嵌) 분청'이다. 도 1 이는 상감청자와 똑같은 방법으로 만든 것으로 문양과 기형이 약간 다를 뿐이다. 엄밀히 따지면 조선시대에 제작된 상감청자인 셈이다. 결과적으로 상감 분청은 분청사기의 원조로 전국의 각 지역에서 고루 생산되었다.
둘째는 '인화(印花) 분청'이다. 도 2 이는 작은 무늬를 도장으로 만들어 연속적, 집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것을 성형한 뒤 태토(胎土)가 굳지 않은 상태에서 꽃무늬 도장을 반복적으로 찍고 그 안을 백토로 메워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이다. 인화 기법은 고려 상감청자에서도 이미 사용되었지만 분청사기에서 대대적으로 유행하였다. 이 인화분청은 대량 생산에 적합화여 관에 공납하는 일상 용기로 많이 제작되었다.
셋째는 '박지(剝地), 조화(彫花) 분청'이다. 도 3, 4 이는 백토를 칠하고 난 뒤에 양각. 또는 음각 기법을 사용하여 무늬를 새겨 넣은 것이다. 문양 이외 부분의 백토를 깎아내면 '박지 분청', 선으로 음각 무늬를 새기는 선각(線刻) 기법은 '조화 분청'이라 한다. 박지, 조화 기법은 주문양과 종속 문양으로 함께 구사된 경우가 많으며 특히 항아리와 편병 등 큰 기형에 많이 등장한다. 박지. 조화 기법의 문양 효과는 대단히 강렬하여 분청사기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데, 특히 전라도 지방 가마에서 많이 제작되었다.
넷째는 '철화(鐵花) 분청'이다. 도 5 이는 백토로 분장한 다음 산화철을 함유한 석간주(石間硃)라는 안료로 그림을 그려넣는 기법이다. 백토에 철화를 그릴 때는 안료가 빠르게 번지기 때문에 간단한 초화 무늬를 추상무늬처럼 그리거나 물고기 등을 빠른 속도로 그려 대단히 활달한 느낌을 준다. 주로 충청남도 공주 학봉리 가마에서 제작되었다.
다섯째는 '백토(白土) 분청'이다. 도 6 이는 그릇 전체에 백토를 바르는 기법으로 귀얄(붓) 자국을 선명히 드러낸 것은 '귀얄 분청', 그릇을 백토에 덤벙 담갔다가 꺼내면 '담금 분청(또는 덤벙 분청)이라고 부른다. 이 백토 분청은 분청사기가 점점 백자를 닮아가며 소멸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분청사기의 마지막 형태이기도 하다.
도 1,2,3,4,5,6
<세종실록 지리지>의 자기소
조선 초기 분청사기를 제작한 가마의 실태는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통하여 명확히 알 수 있다.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은 1424년(세종 6)에 전국 지리지의 편찬을 명하여 8년 뒤인 1432년(세종 14)에 <신찬팔도지리지(新撰八道地理志)>가 완성되었다. 이 지리지는 현재 전하지 않지만 1450년 간행된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그 내용이 실려 있어 '세종실록 지리지'라 불리고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각 고을의 연혁부터 자연, 인문, 역사 지리에 관련한 다양한 정보가 기록되어 있으며 인구, 토지 및 모든 물산을 조사해 공물(貢物), 조세 등 국가 운영에 필요한 기본 자료를 정리한 방대한 작업이었다. 이 지리지에 소개된 각 고을의 상황에는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도 밝혀져 있으며 그 위치와 함께 상. 중. 하로 품질의 등급까지 명시해 놓았다. 예를 들면 '현청(縣廳) 북쪽 20리에 자기소가 있는데 하품(下品)이다' 또는 '현청 남쪽 10리에 도기소가 있는데 중품(中品)이다'라는 식이다. 이를 다 합하면 자기소 139개소, 도기소 187개소 등 총 326개소에 이른다. 여기서 도기소는 질그릇을 굽던 가마이고, 자기소는 주로 분청사기를 생산하던 가마로 일부 백자를 굽던 곳도 있다. 이 자기소 139개소 중 상품(上品)을 생산한 곳은 경상도 상주에 두 곳, 고령에 한 곳, 경기도 광주에 한 곳 등 모두 네 곳밖에 없다.
자기는 대부분 상류층에서 사용했으며 그중에서도 왕실이 최대 사용자였다. 그리하여 국가에서는 세금을 대신하여 토산 공물로 자기와 도기를 바치게 하였다. 이는 1425년(세종 7)에 찬술된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에 경상도 도내 25개 고을에서 자기, 21개 고을에서 도기를 토산 공물로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에서 알 수 있다.
나라에서 분청사기를 공납 받으면서 15세기 중엽까지 분청사기는 조선 도자의 주류를 이루는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 명나라의 우수한 백자가 조선에 소개되었고, 이에 자극받은 조선은 양질의 백자 생산에 매진하였다. 그리하여 1467년(세조 13) 무렵 한양과 가까운 경기도 광주에서 상품(上品) 자기를 생산하던 자기소에 궁중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을 설치하고 관요에서 백자를 생산하였다. 분원의 설치는 조선 도자의 흐름이 분청사기에서 백자로 넘어가는 분수령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분청사기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분청사기의 기형과 문양
분청사기는 이처럼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한 편으로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고 시대 정서와 마감에 맞는 도자기로 거듭났기 때문에 고려청자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이를 도자기 아름다움의 3대 요소인 빛깔, 기형, 문양 등 세가지를 고려청자와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분청사기의 빛깔은 유약과 태토에 따라 청색, 회색, 청회색, 갈색 등 다양하다. 고려청자의 경우 밝은 색채를 지향했지만 분청사기에서는 그런 단일한 색감이 보이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고려청자의 경우는 색에서 성공과 실패가 명확히 나타났지만 분청사기는 이에 크게 개의치 않으면서 오리려 다양성을 낳았다.
둘째, 기형에서 고려 상감청자는 우아한 형태미를 추구하여 매병(梅甁), 표주박 모양 병, 참외 모양 병 등 유려한 기형이 등장하고 오리 모양 주전자, 죽순 모양 주전자 등 멋진 상형(象形)청자가 많이 만들어 졌지만 분청사기는 항아리, 병, 편병(扁甁), 장군 등 기능적이고 안정감 있는 생활 자기를 추구했다.
셋쩨. 문양에서 고려청자는 하늘을 나는 학과 새털구름을 그린 운학(雲鶴)무늬, 수양버들 늘어진 냇가에서 오리나 유유히 노니는 포류수금(蒲柳水禽)무늬 등 서정적이고 고상한 문양이 유행했지만 분청사기는 평범한 초화(草花)무늬나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牡丹]무늬가 주류를 이루었고 싱싱한 물고기를 그린 물고기무늬 등 생활 정서에 잘 어울리는 문양이 대세를 이루었다. 분청사기에 물고기무늬가 많이 나온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단지 문양의 성격이 귀족 정서가 아닌 생활 정서를 반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런 분청사기는 빛깔, 기형, 문양 모두에서 고려 상감청자와는 다른 질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한국미에 대한 김부식의 정의를 빌려 말하자면 고려 상감청자는 화이불치(華而不侈,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 분청사기는 검이불루(儉而不陋,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다)의 미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특징을 갖고 있는 분청사기를 상감분청, 인화분청, 박지.조화분청, 칠화분청, 백토분청 등 기법으로 분류하여 그 실체와 명픔을 살펴본다.
상감분청
상감분청사기는 태생적으로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에서 나왔기 때문에 기형에 매병, 병, 합 등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런가 하면 항아리가 전에 없이 다양하게 발전하였고 한편으로는 편병과 장군이라는 대단히 기능적이고 실용적인 기형이 제작되었다.
상감분청 매병 상감분청청자의 대표적인 기형은 매병이다. 분청사기가 고려 상감청자에서 나왔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분청사기 매병이다. 때문에 고려 말의 상감청자인지 조선 초의 상감분청사기인지를 가늠하기 아주 힘든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청자상감어룡(漁龍)무늬매병>(보물 1386호) 도 8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조선 초의 상감청자로 생각되고 있다. 매병은 본래 술항아리로 제작된 것인데 청나라 시대에 골동품을 수집하는 취미가 일어났을 때 여기에 매와 꽃꽃이를 하면서 매병(梅甁)이란 이름이 붙었다. 기형에서 어깨가 풍만하고 허리 아래가 급격히 좁아지는 것, 위아래로 종속문양대를 설정하고 몸체에 주문양을 배치한 것, 모두가 전형적인 고려 상감청자의 전통이다. 그러나 빛깔이 갈색을 띠는 것과 어룡무늬라는 새로운 문양을 역동적으로 표현한 것은 조선 상감청자의 모습이다.
이러한 매병이 <분청사기상감갈대와참새무늬매병> 도 9 에 이르면 순박한 시정을 풍기는 그림으로 바뀐다. 다만 종속문양대의 어깨 위 연판(蓮瓣)무늬와 복사(栿紗)무늬는 거의 변하지 않고 있다. 이는 문양의 변화는 종속문양이 주문양보다 나중에 변한다는 조형상의 생리를 말해준다.
<청자상감어룡(漁龍)무늬매병>(보물 1386호)(좌) . <분청사기상감갈대와참새무늬매병>(우)
상감분청 항아리 상감분청사기에서는 항아리가 크게 발전하였다. 이는 분청사기가 고려 상감청자로부터 벗어나 자기 형식을 갖추었음을 말해준다. 항아리는 몸체가 둥근 원호(圓壺), 몸체가 길고 입호(立壺)라고도 불리는 장호(長壺) 두 가지가 있다.
원호로는 <분청사기상감모란무늬귀항아리> 도 10 기형과 문양 모든 면에서 그 유례를 다시 찾아볼 수 없는 명품이다. 뚜껑이 있고 태항아리처럼 어깨에 네귀가 달린 항아리로 기형이 아름답고 문양 구성이 아주 짜임새 있다. 연판무늬와 빗금무늬로 이루어진 종속문양대는 선각 기법으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몸체 가운데의 넓은 주문양대에 면상감으로 모란 줄기와 잎을 큼지막하게 나타내 단아한 가운데 장중한 멋을 느끼게 한다.
장호로는 <분청사기상감모란무늬항아리>(보물1422호) 도 11 일찍부터 명품으로 꼽혀왔다. 매병에서 발전한 이런 형태의 안정감 있는 장호는 조선 도자의 대표적인 기형의 하나로 발전하였다. 이 장호는 특히 몸체에 비해 입이 넓어 넉넉한 볼륨감을 느끼게 해준다. 문양의 구성에서 탐스러운 모란꽃을 대범하게 면상감으로 나타낸 것이 큰 매력이다.
<분청사기상감연꽃무늬항아리> 도 12 기형이 완전히 상감분청사기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형태로 바뀌었다. 이런 항아리의 형태는 기존의 편호(編壺)와 매병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이나 더 이상 고려청자와의 연관성은 보이지 않고 분청사기로서의 독특한 매력으로 나아가고 있다. 기영 자체가 실용적이고 순박한 분위기를 띠고 있으며 몸체의 연꽃과 연잎은 분청사기 특유의 자유분방한 조형적 특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10.<분청사기상감모란무늬귀항아리>(상,좌) 11.<분청사기상감모란무늬항아리> (보물 1422호)(상,우) 12.<분청사시상감연꽃무늬항아리>(하,좌1) 13.<분청사기상감초화무늬귀항아리>(하 중.좌2) 14.<분청사기상감파도물고기무늬병>(보물 1455호)(하 중,우) 15<분청사기상감버들물고기무늬병>(하,우1)
정소공주(貞昭公主,1412-1424)의 묘에서 출토된 <분청사기상감초화무늬귀항아리> 도 13 맑은 청회색을 띠고 있는, 우수한 질을 보여주는 자기로 추상화된 초화무늬의 구성은 고려시대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분청사기의 특색이다. 정소공주는 세종의 맏딸로 1424년 13세 나이에 죽어 경기도 고양에 묻혔는데, 일제강점기에 서삼릉(西三陵)으로 이장될 때 부장품이었던 이 귀항아리가 출토되었다. 정소공주의 묘에서는 분청사기 인화무늬 귀항아리 두 점도 함께 출토되었다. 도 21
상감분청 병과 합 상감분청기 병은 높이 한자(약 30센티미터)정도 되는 대병과 반자(약 15센티미터)정도 되는 소병 두 가지가 있으며 기형은 대개 목이 가늘고 몸체 아래쪽의 볼륨이 강조된 형태인데 굽이 낮게 받치고 있어 안정감이 돋보인다. 똑 같은 병이지만 고려청자에서는 학수병(鶴首甁)이라고 해서 목이 길게 뻗어 유려한 인상을 주지만 분청사기의 병은 몸체가 풍만하고 목이 짧아 듬직한 맛이 강하다. 무늬는 물고기, 모란, 연꽃, 풀꽃 등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표현 방식은 제각각이어서 대단히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분청사기상감파도물고기[波魚]무늬병>(보물 1455호) 도 14 분청사시 문양의 자유분방한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소략하게 반복적으로 나타낸 파도 속의 물고기 모습이 너무도 유머러스한데 인화무늬, 넝쿨무늬를 종횡으로 구성한 종속문양이 아주 치밀하여 주문양과 극명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분청사기상감버들물고기[柳魚]무늬병> 도 15 물고기 두 마리와 버드나무를 그린 커다란 문양대와 빗방울[雨點]무늬의 작은 문양대를 위아래로 배치하고 그 여백은 파도무늬로 꽉 채웠다. 목 부분에 흑백상감의 줄무늬와 연주(連珠)무늬가 있고 아래쪽에는 백상감의 연판무늬가 있다. 몸체 전체에 문양이 가득 차 있어 상감분청사기 특유의 박진감 있는 멋을 보여주고 있다.
<분청사기상감모란무늬병> 도 16 기형과 문양에서 상감분청 병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목 부분은 추상적인 선으로 촘촘히 새긴 반면 몸체에는 모란잎을 과감하게 변형시켜 시원스럽게 상감해 놓었다. 면상감이 갖는 호방함이 한껏 구사되어 마치 현대미술의 데포르마시용 기법을 연상케 하는 조형미가 느껴진다.
<분청사시상감모란무늬합>(보물 348호) 도 17 소박한 가운데 생활의 힘이 느껴지는 당당한 기형이 매력적이다. 시원스럽게 새겨져 있는 모란무늬가 일품이며 푸짐한 볼륨감의 몸체를 튼실한 굽이 높직이 받치고 있는데 뚜껑 또한 묵직하게 닫혀 있다. 이런 합의 형태는 고려시대 청동 합의 기형을 이어받은 것으로 동시대 백자 합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도 16 <분청사기상감모란무늬병>(좌) 도 17 <분청사시상감모란무늬합>(보물 348호)(우)
상감분청 편병과 장군 분청사기를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와 비교할 때 기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실용적이고 질박한 분위기의 편병과 장군이 많은 것이다.
<분청사기상감연꽃무늬편병>(보물268호) 도 18 아주 야무진 기형으로 몸체 앞뒤 편평한 면에 연꽃과 연잎을 흑백상감으로 시원스럽게 새겨넣었다. 어깨와 동체 옆 부분에 구슬 모양의 띠를 두르고, 그 위로 인화무늬를 가득 채운 다음 사이사이에 연판무늬를 나타내며 정교한 멋을 보여준다. 문양의 구성도 조화롭고 유약은 고려청자와 다를 바 없는 우수한 빛깔을 띠고 있어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만든 편병으로 생각되고 있다.
도18<분청사시상감연꽃무늬편병>.(보물268호),경북대학교박물관 소장
인화분청
인화분청사기는 꽃무늬 등 작은 문양을 도장에 새겨 반복적으로 찍어만드는 제작상의 특성 때문에 대량 생산해야 하는 발(鉢),접시, 잔 등 생활용기에 많이 보인다. 그러나 항아리, 병, 장군 등에도 인화무늬의 멋진 작품이 남아 있으며 특히 조선 초기 태항아리에 많은 명작이 있다.
인화분청 태항아리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1454-1488)의 태항아리인 <분청사기인화무늬태항아리> 도 19 1462년(세조 8)이라는 절대 연대가 밝혀져 있는 지석과 함께 출토되었다. 몸체는 문양대를 3단으로 나누고 위아래는 종속문양대로 얇은 선의 연판무늬를 새겨넣었으며 가운데 주문양대는 아주 작은 인화무늬로 빈틈없이 매워 짜임새 있는 문양 구성과 정밀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듬직하고 풍만한 몸체에 얇게 말린 입술이 아주 매력적인 이 항아리에서는 왕가의 고고한 기품이 느껴진다.
또 하나의 태항아리 명작으로 1969년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신축 공사장에서 출토된 <분청사기인화무늬태항아리>(국보 177호) 도 20 이 태항아리는 내항아리와 외항아리가 뚜껑과 함께 출토되어 더욱 주목받고 있다. 아쉽게도 지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월산대군 태항아리와 마찬가지로 15세기 세조(世祖,1417-1468,재위 1455-1468) 연간의 작품으로 생각되고 있다. 외호의 경우 몸체 위 아래는 종속문양으로 구성하고 몸체 전체를 작은 도장꽃으로 촘촘히 메워 흰빛이 도드라지게 하면서 그 윗부분은 흑색상감으로 커튼 모양의 장식무늬를 돌려 강한 악센트를 주고 있다. 전체적으로 조선왕조 국초의 기상이 느껴지는 역동적인 느낌의 인화분청사기이다.
<분청사기인화무늬귀항아리> 도 21 정소공주의 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맑은 청회색을 띠고 있는 우수한 질의 분청사기이다. 추상화된 연판무늬의 반복적인 인화무늬의 구성은 분청사기의 자유분방한 멋을 보여준다. 정소공주묘에서는 이 귀항아리와 함께 <분청사기상감초호무늬귀항아리>도13, 그리고 약간 질이 떨어지는 또 다른 인화무늬 귀항아리도 출토되었다.
19.분청사기인화무늬태항아리(월산대군). 20.분청사기인화무늬태항아리>(국보 177호)
21.분청사기인화무늬귀항아리(정소공주묘 출토)
인화분청 병과 합 인화분청사기는 대개 상감분청사기와 어울리면서 많은 명작을 낳았지만 그중에는 거두절미하고 인화 기법으로만 그릇 전체를 메운 아주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병과 합이 있다. 기형 전체를 도장꽃으로 덮고 있어 마치 김환기(金煥基,1913-1974)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같은 점화를 연상케 한다. 조선 전기의 사기장은 이처럼 무심한 경지에서 현대미술의 올 오버 페인팅(all over painting)의 공간감을 얻어낸 셈이다.
<분청사기인화무늬병> 도 22 전형적인 15세기 조선 초기의 안정되면서도 기품 있는 기형으로 몸체 전체를 도장꽃으로 가득 메워 동어반복적이고 밀집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병의 입술 아래와 목 부분에 태토를 가는 선으로 나타내고 굽의 측면에도 동그란 무늬를 둘러 단조로움을 피하는 절묘한 구성을 보여주고있다.
<분청사기인화무늬합> 도 23 몸체와 뚜껑 모두가 인화무늬로만 가득 채워져있다. 인화무늬의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몸체의 굽, 뚜껑의 입술과 윗부분은 선상감으로 띠를 둘러 안정감 있게 마감되었다.
도22 <분청사시인화무늬병>(좌) 도 23 <분청사기인화무늬합>(우)
인화분청 장군 <분청사기인화무늬장군> 도 24 단아한 형태미를 보여주는 가운데 몸체 전체를 점무늬로 덮고 목에 꽃잎을 상감하였으며 양옆은 인화무늬와 상감문양으로 띠를 둘러 문양 구성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다른 인화분청 장군의 경우 대개 인화무늬와 선으로만 단조롭게 구성된 것과 대비된다.
도 24 <분청사기인화무늬장군>(일본 오사카 시립동양도자기미술관 소장)
삼감인화무늬 항아리와 병 <분청사기상감인화운룡무늬항아리>(국보259) 도 25 15세기 중엽, 인화 기법과 상감 기법이 동시에 발전했던 세종.세조 연간에 만들어진 대작으로 고려 상감청자가 조선 분청사기로 변해간 과정을 잘 보여준다. 어깨에 자리하는 큼지막한 여의두무늬 문양대를 비롯해 전반적인 문양 구성에는 14세기 원나라 청화백자의 영향이 엿보이는데 이를 조선적으로 변형시키면서 인화무늬를 곁들였고, 주문양으로는 여의주를 입에 문 용을 선상감과 인화무늬로 새겨넣었다. 고려 상감청자에서는 볼 수 없는 기형으로 듬직한 항아리 기형 자체에서 왕실 도자기의 권위가 느껴진다.
<분청사기상감인화물고기무늬매병>(보물 347호) 도 26 풍만한 몸체의 아랫부분이 급격히 좁아지는 전형적인 기형의 분청사기 매병으로 위아래로는 연판무늬 띠를 두르고 주문양으로 설정한 원창 안은 한 쌍의 물고기와 선상감으로 새긴 파도무늬로 채웠다.
<분청사기상감인화물고기무늬병> 도 27 비스듬히 유영하는 물고기 한 마리를 상감 기법과 인화 기법으로 시원스럽게 그려넣었다. 종속문양의 배치도 짜임새가 있어 목 주위는 네 가닥의 선으로 구획을 나누어 각기 다른 인화무늬를 새겨넣었고 아래쪽은 백상감으로 연꽃무늬 띠를 두르고 굽에는 연주무늬가 들어있다. 빈틈없이 문양으로 가득하지만 백토가 보여주는 여백과 물고기의 시원스런 표현으로 질박한 분청사기의 멋을 한껏 뽐내고 있다.
<분청사기인화국화무늬원통모양병> 도 28 아주 예외적인 작품으로 인화무늬를 성글게 표현하여 무심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병은 특별한 조형적 계산이 없어 보이는 천연스런 분위기 때문에 '와비사비[侘び寂び]'를 추구하는 일본 다도인들이 꽃병으로 선호하였다.
도25 <분청사기상감인화운룡무늬항아리>(좌 1)(국보259) 도26 <분청사기상감인화물고기무늬매병>(좌 2)(보물 347호) 도27 <분청사기상감인화물고기무늬병>(중 우) 도28 <분청사기인화국화무늬원통모양병>(우 1)
관사명 인화분청사기 인화분청사기의 대종은 일상용기에 있다. 발, 접시, 합 등이 나라에 세금을 대신하여 공납되었기 때문에 무수히 많이 제작되었다. 그런데 운반 도중 도자기가 깨지고 또 이를 사적으로 가로채는 일도 생겼다. 이미 고려 말기에 조준(趙浚,1346-1405)이 임금에게 올린 시무서에서 "각 도마다 여든 내지 아흔 마리의 소에 사기를 실어 길가가 떠들썩하나 일단 개성에 들어오면 궁중에 바치는 숫자는 100분의 1도 되지 않고 사사로이 처분하여 버리니 그 폐단이 참으로 크다"라고 했다.
조선왕조에서도 이런 폐해가 여전하여 1417년(태종 17)에는 다음과 같은 단호한 지시를 내리자는 논의가 일러났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장흥고의 공물 중 사기와 목기에 이후로는 '장흥고(長興庫)'라 세 글자를 새기고 기타 각 관사에 납부하는 것도 장흥고의 예에 따라 그 관사명을 새겨 제품을 만들어 상납하게 하고, 이와 같은 표시가 있는 그릇을 몰래 가지고 있다가 드러난 자는 관용 물건을 훔친 죄를 받게 함으로써 큰 폐단을 끊게 하소서"하여 그대로 따랐다.(<태종실록>17년(1417) 4월 20일자)
이에 장흥고, 예빈시(禮賓寺),내섬시(內贍寺) 등 궁중의 잔치와 외빈 접대를 위해 도자기를 많이 필요로 하는 관사로 공납하는 분청사기에 그 관사의 이름을 새기게 하였다. 도 29. 30
관사명 인화분청사기는 그 질이 상대적으로 우수하며 15세기 분청사기의 상태를 알려준다. 또한 도자사에 절대연대를 제공하는 중요한 사료가 되며 한편으로는 이 문자들이 문양으로서 효과를 발하여 단조로운 인화무늬에 매력적인 악센트가 되기도 한다.
인화분청사기에 등장하는 관사(官司)명 - [생략]
지역명.장인명 인화분청사기 인화분청사기에는 관사명 외에도 지역명이 도장꽃과 함께 건빵 모양으로 새겨진 것이 많다. 이는 공납을 확인하기 위함이면서 또한 품질 관리를 위한 일종의 제작지 실명제인 셈이었다.
그 결과 김(金), 이(李) 등 사기장의 성씨를 새겨넣거나 막생(幕生) 같은 사기장의 이름이 새겨진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그 수량은 아주 적다. 도 35(그림 생략) 이런 식으로 전국에 퍼져 있는 자기소의 모든 장인들과 그 생산품을 관리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아 이내 폐지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도 29,30, 이하 설명문 생략 (31,32,33,34)
박지. 조화 분청
분청사기의 여러 기법 중에서 가장 분청사기다운 맛을 주는 것은 박지(剝地),조화(彫花)기법이다. 박지는 문양만 남기고 여백을 긁어냈다는 뜻이며, 조화는 문양을 선각(線刻)으로 그려냈다는 뜻이다. 두 기법은 따로따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주문양과 종속문양으로 함께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다.
박지.조화분청은 기법이 간단했기 때문에 문양의 표현이 대담하고 활달한 멋이 살아 있다. 고려 상감청자의 경우 공정이 까다로워 세공(細工)의 정성이 들어 가야 했지만 박지.조화분청사기에는 활달한 동감이 시원하게 표현되어 있다.
박지.조화분청 편병 박지.조화 기법은 모든 기형에 구사되었지만 특히 편병에 많은 명작을 남겼다. 편병은 병의 양옆을 편평하게 만들어 망태기에 넣고 다니기 편하게 한 것으로 몽골에서 기원한 기형으로 알려져 있다. 고려 말 상감청자에서도 나타나지만 분청사기에서 크게 유행했다. 편병은 양 옆면이 납작한 것과 약간 둥그스름한 것 두 가지가 있다. 편병의 문양 구성을 보면 대개 좌우 측면에는 모란잎 네 장을 추상화한 사엽(四葉)무늬가 2단, 또는 3단으로 배치되었고 주문양으로는 주로 물고기, 모란, 초화, 추상무늬 등이 다양하게 구사되었다.
물고기를 그린 편병은 아주 많은데 일찍부터 잘 알려진 명품으로는 <분청사기박지연꽃물고기무늬편병>(국보 179호) 도 36 이 있다.이 편병은 비교적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양감이 두드러지며 연꽃과 물고기가 어울리는 연지(蓮池)를 회화적으로 나타내어 서정성이 돋보인다. 이러한 편병은 후기로 갈수록 몸체가 납작해지고 물고기무늬가 선명해지는 경향을 띤다.
미국 시카고미술관에 소장된 <분청사기조화물고기무늬편병> 도 37 그림의 구성이 아주 독특하여 물고기 네 마리가 나란히 줄지어 가는데 한 마리가 반대 방향에서 몸까지 뒤집으며 헤집고 끼어들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아래쪽에는 새끼 한 마리가 여유롭게 놀고 있는 것이 보인다. 유머 감각이 돋보이는 문양 구성으로 분청사기의 해학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분청사기조화물고기무늬편병>(국보 178호) 도 38 물고기 두 마리가 위를 향해 힘차게 솟구치는 모습을 새긴 것으로 일찍부터 명품으로 꼽혀 국보로 지정되었다.
분청사기 편병 중에서 일찍부터 국내외에서 명품으로 지목되어 온 것으로 <분청사기조화물고기추상무늬편병> 도 39(그림 생략) 이 있다. 이 편병의 한쪽 면에는 연지속의 물고기, 다른 면에는 추상무늬가 새겨져 있다. 물고기 그림은 간략한 선묘로 물속의 분위기를 나타내는 한편 물고기가 배를 위로 드러낸 해학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그 반대쪽 면에는 현대 추상미술을 방불케 하는 추상무늬가 새겨져 있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런 긴밀한 기하학적 구성은 조선 초기 사기장의 솜씨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일본의 개인이 갖고 있던 이 편병은 2018년 뉴욕 트리스티경매에 나와 310만 달러(당시환율 기준 약 3억 원)에 국내애호가가 환수해 오게 됨으로써 더욱 유명해졌다.
박지.조화분청 편병은 특히 일본인들이 애호하여 일본에 많이 전하는데 <분청사기박지모란무늬편병> 도 40(그림 생략) 탐스러운 모란꽃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모란잎이 퍼져나간 모습을 박지 기법으로 나타낸 것이다. 모란꽃이 사실적인 형상을 유지하고 있어 아직 문양으로 변하기 이전 단계의 사실성이 살아 있고 귀얄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어 더욱 싱싱한 느낌을 자아낸다.
박지. 조화분청사기 중에는 추상무늬가 간혹 보이는데 <분청사기조화선무늬편병) 도 41(그림 생략) 아무렇게나 그은 선으로 이루어져 있어 현대미술의 액션페인팅을 연상케 한다. 이런 문양이 500년 전의 작품에 나타났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36.<분청사기박지연꽃물고기무늬편병>(국보179호) 호림박물관 소장. (좌). 37.<분청사기조화물고기무늬편병>.시카고 미술관 소장(우)
도38<분청사기조화물고기무늬편병>(국보 178호)(좌) 도42 <분청사기박지모란무늬항아리>(우)
박지. 조화분청 항아리 박지. 조화분청 항아리는 높이 40센티미터가 넘는 대작이 적지 않게 남아 있는데 몸체가 긴 장호로 위아래로 종속문양대를 두고 넓은 몸체에 모란꽃, 또는 연꽃을 큼지막하게 박지 또는 조화로 장식하였다.
<분청사기박지모란무늬항아리> 도 42 몸체에는 만개한 모란꽃과 넓은 이파리를 시원스럽게 문양으로 새겨넣고 위쪽에는 연판무늬를 종속문양으로 새겼는데 아래쪽은 띠선으로 마감하였다. 전체적으로 소박하면서도 서민적이고 실질적인 생활 정서가 흠씬 배어 있어 고유섭 선생이 말한 구수한 큰 맛을 느끼게 해준다.
이와 별도로 실생활에 쓰인 작은 항아리가 많이 전하고 있는데 대개는 초화무늬만 간략하게 나타내어 아주 소박하고 실용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도 42<분청사기박지모란무늬항아리> (호림박물관 소장)
박지.조화분청 병과 장군 박지.조화분청 병은 크기에 따라 높이 약 35센티미터의 대병, 약 25센티미터의 중병, 약 13센티미터의 소병으로 나눌 수 있고 기형은 한결같이 목이 짧고 몸체 아래가 풍만하여 안정감이 있으며 문양으로는 모란무늬, 연꽃무늬, 초화무늬, 물고기무늬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분청사기박지연꽃물고기무늬병> 도 43 산화염으로 번조하여 갈색을 띠고 있지만 문양 구성이 치밀하고 특히 주문양대에 새긴 물고기와 연꽃의 모습이 아주 독특하다. 물고기와 연잎을 박지 기법으로 긁어내고 백토로 여백을 남겨두었는데 마치 백토 바탕에 갈색으로 그림을 그린 듯 회화적인 효과를 자아내고 있다.
<분청사기박지조화모란잎무늬병> 도 44 몸체에는 모란잎을 가득 채워 주문양으로 삼고 위아래로 추상화된 무늬를 종속문양으로 삼은 아주 당당한 기형의 병이다. 태토가 갈색을 띠어 문양들이 선명하게 도드라져 있다.
<분청사기박지쌍학무늬장군> 도 45 독특하면서도 기발한 그림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한 쌍의 학이 서로 목을 마주 꼬고 있는 사랑스런 주제를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부부간의 신뢰와 사랑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도43<분청사기박지연꽃물고기무늬병>(좌) 도44 <분청사기박지조화모란잎무늬병>(중) 도45<분청사기박지쌍학무늬장군>(우)
철화분청
철화(鐵花)분청은 분청사기에서 유일하게 안료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이다. 백토분장을 한 뒤 산화철 안료로 그림을 그려 갈색으로 나타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산화철 안료를 석간주(石間硃)라 불렀다. 철화분청사기는 공주 학봉리 계룡산 가마에서 다량으로 제작되었기에 흔히 '계룡산 철화분청사기'라 불리기도 한다.
계룡산 가마의 넝쿨무늬 항아리 <분청사기철화넝쿨무늬항아리> 도 46 철화백자로서는 예외적이라고 할 정도로 정제된 느낌을 주는 명품이다. 몸체에는 넝쿨무늬를 회화적으로 나타내고 뚜껑에는 넝쿨을 가볍게 돌려 문양 배치에 조화를 꾀하였다.
<분청사기철화넝클무늬항아리> 도 47 계룡산 가마의 넝쿨무늬로는 예외적으로 면 처리가 많고 구름무늬처럼 이어져 있어 회화적인 효과까지 보여주고 있다. 철화의 발색에 짙고 옅음이 나타나 있어 더욱 고급스러워 보인다.
도46<분청사기철화넝쿨무늬항아리>(좌) 도47 <분청사기철화넝클무늬항아리>(우)
철화분청 병 철화분청 병은 물고기무늬, 넝쿨무늬. 풀잎[草葉]무늬가 대종을 이루며 문양 구성이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대개 종속문양 없이 선을 위아래로 둘러 주문양대와 구별하고 있는데 백토를 긁어내어 선을 나타내기도 하고 철화로 긋기도 하였다.
<분청사기철화물고기무늬병> 도 48 양감이 도드라지는 당당한 형태의 병에 물고기 한 마리가 병 밖으로 뛰여나올 기세로 힘차게 그려졌다. 백토를 바른 귀얄 자국이 선명하여 동감이 더욱 일어난다.
<분청사기철화넝쿨무늬병> 도 49 전형적인 계룡산 가마 철화분청 병으로, 추상화된 넝쿨무늬가 속도감 있게 그려져 있다. 백토의 귀얄 자국이 동감을 자아내는 데 목에는 두 가닥의 선을 새기고 아랫부분에는 백토를 바르지 않았다. 이는 아래쪽에 백토를 바르면 쉽게 박락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생략한 것이다.
<분청사기철화연꽃무늬병> 도 50 계롱산 가마 철화분청 병으로서는 예외적으로 연꽃과 연잎을 아주 맵시 있고 간결하게 그려넣어 회화미를 보여주고 있다. 본래 철화는 빨리 번지기 때문에 형상을 그리기 힘들지만 여기서는 빠른 붓질로 소략하게 형상을 묘사하여 별격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분청사기철화버들새무늬병> 도 51 버드나무 위에 앉은 새를 민화풍으로 재미있게 그린 독특한 유물이다. 종속문양은 나타내지 않고 몸체 아랫부분에 하나, 목 부분에 세 개의 선을 그려 주문양대를 나타냈다.
도48 <분청사기철화물고기무늬병>(좌) 도49<분청사기철화넝쿨무늬병>(좌 2) 도50<분청사기철화연꽃무늬병>(중 우) 도51<분청사기철화버들새무늬병>(우)
철화분청 항아리 <분청사기철화연꽃무늬항아리> 도 52 철화분청사기로는 아주 정갈한 문양구성을 보여주고 있어 높은 기품을 풍긴다. 오롯이 솟아 있는 한 송이 연꽃과 네 줄기 연잎을 주문양으로 삼고 종속문양으로 어깨 위로는 넝쿨무늬, 몸체 아래로는 연판무늬를 두르면서 그 사이에 굵은 선을 두 개씩 그어 여백의 미를 살리고 있다.
<분청사기철화연꽃넝클무늬항아리> 도 53 철화분청사기로서만이 아니라 분청사기 전체로 보아도 아주 예외적인 작품인데 그 조형적 분위기는 16세기 유물이 아니라 현대 도예가의 작품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예술성이 높다. 거의 통 모양에 가까운 긴 항아리로 아래쪽에 작은 구멍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태항아리로 추정된다. 백토를 얇게 바르면서 일부 박락된 부분이 있으나 그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단아하게 묘사한 연꽃넝쿨무늬가 암갈색을 띠면서 그릇 전체에 조용한 선미(禪味)가 흐른다.
도52 <분청사기철화연꽃무늬항아리>(좌) 도53<분청사기철화연꽃넝클무늬항아리>(우)
철화분청사기 장군 - - -[차후확인 요함]
철화분청사기 장군 중에는 모란무늬를 그린 명작들이 많이 전하고 있다. 특히 <분청사기철화모란무늬장군> 도 55 큼지막한 모란꽃 한 송이를 중심으로 양옆에 잎사귀가 날개를 펼치듯 뻗어가고 줄기와 땅을 상징적으로 그어나간 뛰어난 문양 구성을 보여준다.
<분청사기철화연지무늬장군> 도 56 물고기를 쪼고 있는 새를 그린 것인데 한폭의 민화를 연상케 하는 편안하면서도 즐거운 작품이다. 양옆에 솟아 있는 연꽃 두 송이와 측면에 비껴 보이는 추상무늬가 어우러지면서 장군 전체에 신선한 생동감이 넘친다.
도54 <분청사기철화넝쿨무늬장군>(상) 도55<분청사기철화모란무늬장군>(중) 도56 <분청사기철화연지무늬장군>(하)
철화분청 발, 합, 편병 <분청사기철화물고기무늬발> 도 57 높이 약 17센티미터, 입지름 약 31센티미터의 대작으로 기형도 듬직하지만 안팎으로 그린 물고기 그림이 그릇에 생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활달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정도로 계룡산 가마의 사기장들은 조형적 자유를 맘껏 구가했던 것이다. 삶의 정서가 듬뿍 베인 이런 작품은 세계 도자사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신선한 예술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분청사기철화연꽃넝쿨무늬합> 도 58 몸체에는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고, 뚜껑에는 파도와 넝쿨무늬가 그려져 있는데 자연스러운 선맛이 살아 있어 율동적인 느낌을 준다.
<분청사기철화초화무늬편병> 도 59 둥근 맛을 유지하고 있는 편병으로 백토분장이 선명한 가운데 철화로 스스럼없이 그린 초화무늬가 엷게 나타나 철화분청사기 중 예외적으로 조용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명품이다.
도57<분청사기철화물고기무늬발>(좌) 도58<분청사기철화연꽃넝쿨무늬합>(중) 도59<분청사기철화초화무늬편병>(우)
분청사기 종합 기법
분청사기는 상감, 박지. 조화, 인화, 철화 기법을 다채롭게 구사하여 다양한 모양 구성을 보여주는 대작에 명품이 많다.
<분청사기물고기무늬항아리> 도 60 상감,인화, 박지,철화 기법을 동원하여 오리와 물고기가 헤엄치는 그림을 새겨넣었다. 상감청자에서 보이는 버들과 새 무늬의 조용한 서정은 사라지고 물고기고 오리고 싱싱하기만 하다. 물고기를 표현하는 데 인화 기법을 사용하였고 일부는 박지 기법을 역으로 이용한 것도 보인다. 풋풋한 백토분장은 전형적인 계룡산 가마의 특징이다.
<분청사기물고기무늬항아리>(보물 787호) 도 61 또한 상감, 인화, 철화 기법을 동원한 대작으로 항아리의 입이 예외적으로 크게 벌어져 기형 자체가 장대한 느낌을 주는데 인화 기법으로 정교하게 새긴 커다란 물고기가 듬직하여 장중한 멋을 풍긴다. 유약의 투명도가 높고 백토가 고르게 발라져 마치 백자 같은 맑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 여기에 철화로 종속문양을 나타낸 것이 단정하여 분청사기로서는 예외적으로 높은 기품을 풍기고 있다.
도60<분청사기물고기무늬항아리>(좌) 도61 <분청사기물고기무늬항아리>(보물 787호)(우)
백토분청
분청사기 중에는 그릇 전체를 백토로 칠한 백토분청사기가 있다. 이를 '분장(粉粧)분청사기'라고도 하는데 사실 '분장분청'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므로 백토분청사기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백토분청사기에는 귀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귀얄분청사기와 백토물에 덤벙 담근 담금분청사기(혹은 덤벙분청사기) 두 가지가 있다. 귀얄분청사기는 선명하게 남아 있는 붓 자국의 동감이 매력적으로 대개 발에 많이 구사되었고, 담금분청사기는 손에 쥔 부분에 백토가 묻지 않아 태토와 백토가 대비되는 미적 효과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분청사기귀얄무늬병> 도 62 기형 전체에 귀얄 자국만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속도감 있는 붓질의 동감이 대단히 매력적이다. 사기장의 자신감 있는 붓놀림이 아니면 이런 작품이 나올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분청사기는 훗날 현대미술의 관점에서 주목받고 높이 재평가되었던 것이다.
<분청사기귀얄무늬장군> 도 63 그 대담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붓 자국이 현대 미술에서 말하는 브러시워크를 느끼게 한다.
<분청사기귀얄무늬발> 도 64 백토를 바를 때 귀얄 자국을 선명하게 남긴 것으로 그 붓질의 움직임이 매력적이다. 이런 귀얄무늬 발은 철화무늬와 안팎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분청사기백토담금발> 도 65 백토를 분장할 때 발의 굽을 손에 쥐고 윗부분만 백토에 담갔는데 미처 굳지 못한 백토물이 굽 아래쪽으로 흘러내린 모습이다. 백토의 흐름이 우연한 미적 효과를 낳은 것이다. 대개 이런 발은 다도인들이 사랑하는 바가 되어 아주 귀하게 대접받곤 했다.
<분청사기백토담금제기> 도 66 문양이 없는 분창사기만이 보여줄 수 있는 엄숙한 멋이 있다. 보(盙)라고 불리는 이 제기는 향교나 서원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거치(鋸齒)무늬라고 불리는 톱니가 제기의 양쪽 귀에 달려 있고 굽의 밑바닥도 톱니 모양으로 깎아서 제기의 장중함을 보여주고 있다. 아무런 치장 없이 백토물에 담갔다가 꺼낸 것이 오히려 어떤 문양보다도 조형적인 효과를 높여준다.
백토분청사기는 그 자체로 소박한 단순미를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상 백자를 닮아가는 분청사기의 마지막 모습이다.
도62 <분청사기귀얄무늬병>(좌) 도63<분청사기귀얄무늬장군>(중) 도64<분청사기귀얄무늬발>(우 상) 도65<분청사기백토담금발>(우 중) 도66<분청사기백토담금제기>(우 하)
분청사기의 종말과 지방 가마의 백자
16세기 전반이 되면 백자가 조선왕조의 도자기로 굳건히 뿌리내리게 된다. 이에 반해 분청사기는 백자의 위세에 밀려 16세기 후반이 되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도자사에서 퇴장하고 만다. 간혹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사기장들이 일본으로 많이 끌려가 분청사기의 맥이 끊어졌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분청사기는 이미 임진왜란 이전에 종말을 고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는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 사기장들이 만든 것이 백자이지 분청사기가 아니라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한편 분청사기는 백자의 세계에 흡수되어 가기도 했다. 분청사기 가마 중 일부는 백자 가마로 전환하여 누런 빛깔에 거친 질감의 백자를 만들기도 하였는데 이를 흔히 조질백자(粗質白磁)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 조질백자는 질 좋은 순백의 고령토가 아니라 점토가 일부 섞인 백토로 만들어 구운 것으로, 그 때문에 흰빛깔이 나오지 않고 갈색을 띠고 있다.
이 조질백자는 주로 서민용 자기로 만들어져 발의 경우 다량으로 제작하기 위하여 여러 겹으로 포개서 굽기도 하였다. 이렇게 생산된 발을 '막사발'이라 불렀다. 바로 이 막사발들을 16세기 일본 다도인들이 다완으로 애용함으로써 일본 국보로 지정된 이도[井戶] 다완 같은 전설을 낳았다. 대표적인 예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가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진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 <이도다완> 도 67 이 있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분청사기의 끝과 함께 등장한 조질백자를 또 다른 도자의 세계로 발전시켜 나아갈 상공업 시스탬을 갖추지 못했다. 각지에 있던 지방 가마들이 민요(民窯)로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왜란이 끝나고도 한참 되었다.
도67 <이도다완> (일본 네즈 미술관 소장)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부분발췌]
[출처]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5|작성자 수연당
청자도 아닌 것이 백자도 아닌 것이….
분청사기는 바탕 흙에 백토(白土)를 바른 뒤 유약을 입혀 구워낸 도자기다. 고려청자에서 조선백자로 이어지는 중간 시기인 15~16세기에 번성했다. 지금이야 조선을 대표하는 미감으로 각광받지만, 분청사기가 제 이름을 얻은 건 20세기 들어서다. 15세기엔 그저 '사기' 또는 '자기'라 칭했고('조선왕조실록'), 일본인들은 이 도자기 무늬가 미시마(三島)라는 신사의 달력 문양과 닮았다는 이유로 '미시마'라고 불렀다.
‘경주 장흥고’란 글씨가 적힌 15세기 인화문 분청사기 태항아리. 높이 21.5㎝. 작은 사진은 김환기의 1973년작 ‘무제’의 부분이다.
분청사기에 새 생명을 불어넣은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 우현(又玄) 고유섭(1905~1944). 1941년 조선일보가 발행한 잡지 '조광' 72호에 '고려도자와 이조(李朝)도자'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태토의 거친 면을 고르잡기 위하여 백토를 발라 장식한 것이니 근본은 청자의 변화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일본 다인(茶人)들이 맘대로 붙인 미시마보다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 함이 그 특색을 잘 보이는 것 아닐까." 분장한 회청사기, 즉 '분청'이라는 걸출한 도자기가 탄생한 것이다.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오는 12월 31일까지 열리는 특별전 '분청사기'는 개념부터 기법, 근대기 전승 현황 등 분청사기의 다양한 면모를 조명한다. 고려시대 전성기 청자에 비하면 거칠고 색조도 어둡다. 하지만 백색과 회색의 은은한 조화, 투박하지만 자유분방한 선과 대담한 무늬가 요즘 감각에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다.
한국 추상회화의 거장 김환기(1913~1974)의 점화(點畵)가 함께 걸렸다. 1973년 작 '무제'다. 작고 동그란 점이 리듬감 있게 캔버스를 뒤덮은 그림은 조선의 도공이 점점이 도장 찍어 무늬를 넣은 인화문(印花紋) 분청사기와 놀랍도록 닮았다. 장남원 관장은 "단순히 동그란 점을 계속 그린 것이 아니라 네모 바탕에 동그란 점을 채운 연속 배열이 인화문을 연상시킨다"고 했다. 분청사기 그릇 뚜껑을 프린트한 사진과 그림을 번갈아 보다 보면, 어느 것이 김환기이고 어느 것이 분청사기인지 구별이 안 된다. 수많은 점과 반복, 규칙성에서 빚어진 현대적 미감이 15세기 조선 도공의 그것과 맞닿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