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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신군부의 구테타는 없었고 3김의 대권 야욕만 있었다
. - 김용삼 대기자
숟가락 ・ 2023. 11. 27. 16:41
안녕하십니까? 강용석입니다.
네 안녕하십니까? 김용삼입니다.
김용삼
요. 사진 한번 보세요. 이 박정희 대통령이 전두환 이때가 계급이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마는
보안사령관 임명한
강용석
그건 소장이죠.
김용삼
그 전두환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의 인연은 1961년 5.16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때 육사
그 뭐 담당 뭐 대위 대위였는데 5.16이 난 걸 보고 5.16 저기 지휘보에 찾아가서 뭐 왜 이렇게 나온 겁니까? 물어보니까,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 취지가 너무 감동을 해 가지고 육군사관학교 가서 육사 생도들을 불러내 가지고 5.16 지지 시위를 해요. 이로 인해서 5.16이 정말 어려운 과정에 있었는데, 이 육군사관생도들의 이 혁명 지지 시가행진으로 인해서 이 혁명이 기정사실화 됐습니다. 그래 가지고 전두환 대통령이 전두환 대위를 너 인제 군 생활 그만하고 와서 정치를 해라 그랬을 때 전두환 대위가 각하 저는 군인의 길이 꿈입니다.
그래서 부귀염화를 누릴 수 있는 정치인을 마다하고 다시 군으로 가는 서 군 생활을 한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전두환이라는 친구를 그 초급장교시설에서부터 유심히 지켜왔던 건 사실이고 그리고 군내 요직으로 계속 관리를 해줬습니다. 제가 그 현역 언론인 시절에 노태우 대통령이 감옥에 갔다 오셨을 때 인터뷰를 했는데 그때 육사 11기들이 생각하기를 이렇게 전두환 대통령이 우리의 보직 관리를 해주는 걸로 봐서 본인이 퇴임한 이후에 김영삼이나 김대중이가 나라를 이끌면 나라가 유지가 되기가 어렵다라고 판단을 했던 것 같답니다. 그래서 혹시 분이 한 텀을 더 집권을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자기네들은 그렇게 느꼈다는 거예요.
뭐 그렇게 느낀 게 어떤 뭐 근거가 있어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이 육사 11기 육 중에서도 최선두주자였던 전두환 장군을 아주 끔찍하게 아꼈고 보직을 관리해 줬고 또 심지어 뭐 여러 가지 뭐 이제 윤필용 장군 이런 걸 통해 가지고 뭐 후원도 해주고 뭐 이런 사실이 있습니다. 특히 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난 게 79년 10월인데 79년 3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전두환 소장을 보안사령관에 임명을 해요.
그래도 원래 보안사령과는 쓰리 스타가 임명되는 자리인데 특별히 이렇게 투 스타를 거기다가 당시에 전두환 장군이 일 사단장으로 간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상황에서 파격적으로 전두환 소장을 보안사령관으로 발탁을 했는데 그로부터 7개월 후에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나서 보안사령관이
강용석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거죠.
김용삼
협동수사본부장을 맡아서 박 대통령 시의 사건을 수사하는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참 이것도 인연 중에 좀 특이한 인연이다. 결국은 전두환이라는 이 무명의 육군 소장을 역사의 전면으로 불러낸 거는 이 79년 3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보안사령관 임명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죠.
강용석
대통령이 그건 뭔가를 예감한 건가요?
김용삼
글쎄 예감을 한 건지 뭔지는 모르면 하여간 후의 역사가 그렇게 진행이 됐어요. 1979년 10월 26일 날 밤에 박정희 대통령이 이제 이 김재규에게 시위를 당했습니다. 이때 정말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졌어요.
강용석
그때 제일 황당한 건 아니 본인이 중정부장인데 중정으로 안 가고 왜 육군 본부로 가요
김용삼
그러니까여 육군본부
강용석
결정적으로 희안한
김용삼
육군 본부로 가서 군을 어떻게 동원해서 뭔가를 할려고 했던 거 아닌가 그런데 이게 인제 패착이었죠.
강용석
궁정에 있었으면 궁정을 누가 공격을 못 하죠
김용삼
그러니까 이게 그래서 인제 6번 벙커에서 인제 여러 가지 일이 벌어졌는데 그때 이제 김재규가 지금 유고니까 빨리 비상 계엄을 실시를 하고 뭐 이런 얘기를 하니까 아니 비상계엄은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이유가 뭔지 얘기를 안 하고 왜 자꾸 비상계엄이고 뭐 유고라고 얘기를 하는데 유고가 뭐요 이렇게 몰리다 보니까, 인제 김재희가 코너에 몰린 거예요. 그러니까 이거 이상하다 그래 가지고 국방부 장관이 김재규를 체포하라 명령을 내려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그 헌병 부대를 출동시켜 가지고. 보안사 부대를 출동시켜서 김재규를 체포함으로 인해서 역사의 격랑에서 전두환 장군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강용석
김재규 체포를 전두환 대통령이 했나요? 당시에 그러니까 합수부장이 된 거구나
김용남
아닙니다. 이합동수사본부장은
계엄령이 선포가 되면은 보안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을 겸직하게 돼 있어요. 그래서 그날 밤에 이제 계엄령이 선포가 됐기 때문에 이 보안사령관이 합동서 본부장을 했고 그리고 보안사가 김재규를 체포해서 보안사 감옥에 김재규를 잡아놨기 때문에 전두환 대통령이 역사의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죠. 그 당시에 이 김재규를 6번 벙커에서 이제 비상 국무회가 열렸을 때 살기 등등한 뭐 김재규 여기 와이샤스에 피도 묻고 뭐 권총도 차고 있고 뭐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김재규를 물고 늘어진 사람이 신현악 총리예요.
당시에 신현악 씨가 경제부 총리를 하고 있었는데, 아니 최규화 대통령이 총리였죠 네 자꾸 김재규가 비상계엄을 선포해야 되고 뭐 그래서 아니 김재규 씨하고 신애락씨는 동양 사람입니다. 군이 칠곡 사람이에요. 근데 아니 김재규 부장 지금 비상계엄 얘기를 하는데 비상계엄은 뚜렷한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데 이유 없이 자꾸 비상계엄을 하자고 하는데 당신 그게 무슨 말이오 뭐 끝까지 밀어붙여가지고 그래 가지고 추궁을 하다 보니까, 이게 인제 김재규가 학 대통령 시해범이라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본인이 자백을 했나요? 자백은 아니지만, 하여간 코너로 몰렸죠 그때 이제 이 노재현 국방부 장관이 김재희가 범인이구나 재체포해라 그래서 전두환 장군이 목숨을 걸고 김재규를 체포한 것입니다.
자 그래서 그날 이제 비상공무에 의해서 이 인제 계엄을 선포하고 10월 27일부터 인제 그날 신하락 씨가 인제 국무총리가 돼서 총리 관저에서 이제 국가 지도자가 사라졌으니까. 뭔가 이제 비상회의를 열었습니다. 비상회의를 연 결과 지금 현행 헌법이 유신 헌법이니까. 유신 헌법에 의해서 빨리 정부를 구성을 해야 이 국가가 제대로 유지될 거 아니에요. 근데 유신헌법에 의하면은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가 권한대행을 하도록 돼 있어요. 그래서 최규화가 권한대행으로 됐습니다. 그리고 3개월 이내에 유신헌법에 의해서 후임자가 선출되도록 돼 있었어요.
그래서 어쨌든 유신헌법에 의해서 3개월 이내에 후임자를 선출하고 정부가 빨리 헌법을 만들어서 유신헌법에 의해서 최규하 대통령이 됐죠 그래서 그렇게 만들어진 정부는 빨리 헌법을 개정하고 헌법에 의해서 그 총선을 실시하고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리고 나서 우리는 물러난다 물러나니까 임기를 다 안 채우고 우리는 물러나는 과도정부다 그래서 과도정부로 이 유지를 하겠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 그렇게 해서 시국 수습 방안이 인제 만들어졌어요.
강용석
그 바로 그냥 시국 수습 방안을 그렇게 정했군요. 네 예
김용삼
그래서 최규하 대통령도 유신헌법 절차에 의해서 12월 6일 날 대통령에 선출이 됐어요. 그리고 나서
우리는 이제 빨리 민주화법을 제정하고 대선과 총선을 통해서 지도부를 구성하는데 아마 거기까지 시간이 일 년 정도 걸릴 것이다. 우리는 1년 안에 빨리 헌법 민주 헌법을 만들고 민주 헌법에 의해서 새로 구성된 정부에다가 모든 권력을 넘겨주고 우리는 퇴임하겠다. 그래서 우리는 과도정부다 그러니까 다 박수를 쳤습니다. 정치권에서도 박수를 치고 그런데 이 구상대로만 진행됐으면 80년 12월 무렵에는 진짜 민선 정부가 출범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 당시에 인제 정치 지도자로 등장을 한 김영삼 씨 김대중 씨 김종필 씨 이 세 사람이 아니 과도 정부가 뭐 헌법을 하는 데는 1년씩이나 걸리냐 1년 너무 길다 하면서 계속 시 시비를 걸기 시작을 했습니다. 과도 정부가 국정 목표를 첫째, 국가 안보 둘째, 사회 경제적 안정 왜냐하면, 당시 대통령이 18년 통치하다가 하루아침에 사라지니까 국가 지도부가 지금 흔들리고 권력 공백이잖아요. 그러니까 안정을 해야 되고 또 빨리 우리는 정상적이고 올바른 민주화의 길을 제시하겠다.
그랬는데 김영삼 이 신민당 당수는 뭐라고 선언을 했냐면 과도기는 짧을수록 좋고 과도정부는 주어진 역할만 수행해라 그리고 나서 3월 80년 3월 13일에는 뭐라고 이 선포를 했냐면 과도 정부가 본연의 입장을 이탈할 경우에 중대 결심을 하겠다.
강용석
뭐 어떻게 결심할지 모르는 사이에 중대 결심한다고 그러고
김용삼
말씀드리면, 최규화 정부를 빨리 끌어내려야 자기네들이 하루라도 빨리 대통령이 되는 길이라고 김영삼은 자기가 된다고 믿었고 김대중도 자기가 된다고 믿었고 김종필도 자기가 된다고 믿었고 이런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헤어질 게 어시믄 하나 뭐 최규화 대통령이 당선 후 첫 국무회의에서 긴급 조치 구호를 해제하고 시국사범을 사면 복권을 해서 이 1980년 2월 29일 날 김대중 지약 순주교 같은 시국사범 687명을 사면 복권했어. 이때서부터 김대중 씨가 다시 정치적 자유를 찾아서 13년만에 나온 겁니다. 이제가 저때까지만 해도 사면 복권이 안 돼 있었습니다. 안 돼 있었네요.
그런데 이 두 사람이 과도 정부를 유신 단 잔당 체제로 규정을 하고 온갖 명목으로 공격하고 흔들어대기 시작을 했어요. 야 너희들 헌법 이런 거 왜 니네가 만들어 우리가 만들 거야. 이렇게 나오니까 인제 1980년 봄에 이게 인제 불온한 뭔가 이게 술렁술렁하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을 했죠. 과도 정부가 1980년 1월 18일 날 법제처에다가 헌법연구반을 설치를 하고 그리고 3월 14일 날 대통령 직속 자문기관으로 헌법 개정심의위원회를 발족했습니다. 위원장의 신현악 부총리를 임명을 했어요. 그래 가지고 인제 전국 주요 도시에서 개헌 공청회를 열어 가지고 개헌 작업을 본격화하기 시작을 했어요.
그런데 이 과도 정부는 우리가 헌법을 개정을 해서 우리가 빨리 헌법을 만들어서 민간 정부를 이양을 하겠다라고 이미 1년 정도의 시간을 유예를 해 달라라고 하고 헌법을 만들기 시작했는데 김영삼 김대중 이 삼 김 씨는 야 그러지 말고 헌법은 우리가 만들 거거든. 그러니까 최규화 정부 손 떼 이렇게 나온 거예요. 그래서 정부와 상의 없이 국회 헌법 개정 심의위원회를 별도로 구성을 해요. 그리고 개헌과 정치 일정은 국회가 주도할 테니까. 정부는 빠져 정부가 만든 헌법 개정기구 폐지에 이렇게 협박을 하고 나온 거예요. 키 김종필 씨가 이 정말 이 박정희 정부 붕괴 이후에 대한민국 민주주의에 이 못을 박은 사람이 이 김종필입니다.
김종필은 원래 삼공화국이 출범할 때 헌법은 재선만 하기로 돼 있었잖아요. 그런데 삼선 개헌을 해서 박 대통령이 자기 임기를 늘렸잖아요. 그리고 나서 10월 유신을 해서 또 임기를 이제 없애버렸죠 말하자면,
강용석
지역에서 공화당 내에서 완전 그냥 왕따 돼 버렸잖아요.
김용삼
그러니까 아니 두 번 말하고 그만둔다고 그랬는데 삼선 개헌 하니까 자기가 대통령 할 자리를 못한 거잖아요. 또 10월 유신을 하니까 그러니까 이제 박정희 대통령에 반기를 들었다가 완전히 정치적으로 몰락을 했는데 그래서 김종필 회고록을 보면은요, 박정희 대통령을 완전히 개똥으로 만들어 놨어요. 진짜 배은망덕한 사람입니다. 이 정말 김종필 회고록을 읽어보시면요 야 뭐 이따위 인간이 다 있나 하고 화가 날 정도로 박정희 대통령을 완전히 짱구로 만들어 놓은 거예요.
강용석
저도 JP회고록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는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서 진짜 안 좋겠었죠. 안 좋겠었어요. 네
김용삼
10월 26일 날 박 대통령이 김재익이 시해당한 상황에서 이후로는 인제 최고 지도자가 사라진 국가 위기 상황에서 김종필은 나는 유신의 피해자다 그러면서 유신을 부정하고 나섰어요. 제가 노태우 대통령을 제가 인터뷰했다고 아까 말씀드렸는데 노태우 대통령이 인터뷰할 때 이런 얘기를 저한테 하셨습니다. 당시에 김종필이 정말 박 대통령의 위대한 분이었고 우리가 이 박 대통령의 유지를 이어받아서 우리가 보다 더 훌륭한 나라를 만드는데 내가 매진하겠다.
하고 선포만 했으면 구 여권과 보수충을 집결시켜서 국민에게 안심할 수 있는 리더십만 보여줬다면 신군부는 김종필을 지지하기 위해서 모든 준비를 다 하고 있었대요 그런데 김종필이가 유신을 부정하고 국가 위기 상황에서 혼란을 부추기며 삼김씨하고 손을 딱 잡는 모습을 보고 이 사람 아니구나 하고 버렸다는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공화당과 민주주의 안락사시킨 주인공은 김종필이에요. 이 사람이 나중에 뭐 했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으로 만들어 가지고 온갖 부귀영화 다 누렸죠
그 당시에 가장 대권에 가까이 가 있다고 큰소리 빵빵 친 사람이 바로 신민당 총재 김영삼이었습니다. 김영삼은 부마 사태로 12.6이 발생했으니까. 다음 대통령은 나다
하고 뭐 완전히 조급증에 걸려가지고 드라이브를 걸은 거예요. 정치적으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한 김영삼은 라이벌인 김대중이 제도권 내에 자리 잡기 전에 전광석화처럼 빨리 결판을 내야 자기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한 거예요. 그래서 계엄령을, 즉각 해제하라 대선과 총선 12월 까지 1년까지 갈 필요 없다. 우리한테 맡겨 빨리 해라 뭐 대선 총선 조속 실시 외치면서 최규와 과도 정부를 계속 압박을 했어요. 이러한 조바심이 혼란을 끝없이 부채질해서 결국 대학생들을 거리로 끌고 나와 가지고. 아수라장으로 만든 것이 1980년 5월이죠.
김영삼이가 이때 정말 집권욕을 조금만 자제하고 순리를 따랐다면 1980년 12월쯤에는 이 사람이 대통령에 당선돼 가지고 가지고 민주주의 정부가 순탄하게 출범했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습니다. 발길을 걷어찬 거는 본인이에요. 이제 오랜 기간 정치 활동을 정지당했다가 80년 2월 29일 날 사면 복권해 가지고 드디어 이제 정치적 자유를 되찾은 김대중 씨는 이때서부터 재야 세력이라고 하는 지금으로 치면은 인제 이 좌익 친북 세력 뭐 이런 세력들하고 손을 잡고 끝없이 국민과 청년들을 선동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3월 26일 날 YWCA 연설에서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4월 16일 인하대 강연에서는 혁명은 혁명을 낳고 우리 모두가 혁명가다 4월 17일 서울대강연에서는 김상진 김주열 못지않게 김재규도 충실이다. 아니 박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가 충신이라니요. 4월 18일 동국대강연에서는 12육 사태는 독재에 항거한 전 국민의 혁명이래요. 박정희를 시해한 것이 전 국민 혁명이에요. 4월 18일 동국대강연에서 탄압을 받더라도 끈질기게 저항하면 12륙과 같은 또 다른 사태가 올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정말 이때는 정말 이 사람은 거의 뭐 급진이 아니라 이건 뭐라고 얘기를 해야 되는 거예요.
이거 아주 국민을 뭐 아주 앞장서서 선동을 했죠. 5월 7일 날 김대중이가 또 중대결단을 선언을 해요. 웬 중대 결심 중대결단이 많아요. 당시에 인제 재야 세력 그러니까 지금으로 치면 이제 좌익 세력입니다. 국민연합이라고 하는 대야 세력이 5월 7일 날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었어요. 기독교 회관에서 여기서
네 김대중이가 노동자 학생들에게 반정부 봉기를 노골적으로 선동을 합니다. 계엄을, 즉각 해제하라 신의락 총리, 즉각 퇴진하라 유정회와 통일주체국민회의 정부개헌심의기구, 즉각 해체하라 정치범 전원을 석방하고 복권하라 부당해고된 근로자 복직을 요구한다. 이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중대결단을 선언한다라고 하면서 외친 이 연설문 중에 한 내용이 제가 요 내용을 한번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돼 있습니다. 노골화되어가는 유신전당의 독재현장 책동을 그대로 내버려두고 어떻게 민주화가 가능한가 민족적 결단으로 이들을 분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노동자 청년 학생들의 민주민권운동은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새 시대를 탄생시키는 최후의 진통이 시작됐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위원장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단호한 시민적 행동을 통한 합류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각계가층의 민주애국 시민은 모든 민주 용량을 총집결하여 유신잔당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는 민주화운동을 전개하자 그래놓고 날짜를 정해서 최후 통치업을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정치적인 구도나 김대중이가 손을 잡은 이 재야 세력은 너무나 급진적인 정책을 주장을 하고 하다 보니까, 국민들이 외면을 했어요.
강용석
그러니까 DJ는 보면 ys는 그래도 국회 의석수를 두고 의회주의자다 이렇게 평가를 받는 데 비해서 DJ는 인제 대선 떨어지고 뭐 일본 갔다가 잡혀오고 뭐 하는 과정에서 뭐 감옥도 갈 거 같고, 이러니까 완전히 그냥 국회가 아니라
김용삼
제야 길거리로 나간 거죠.
강용석
말이 좋아서 재야지 이게 좌익 친북 세력들하고 손을 잡은 거죠.
김용삼
도저히 김영삼과 대결해서 승산이 없다고 생각을 하니까 신민당 입당을 포기하고 재야하고 손을 잡고 장외투쟁을 선언해요. 그래서 김대중의 국민연합이 4월 29일 날 민주화 촉진국민운동본부를 설치하고 불법 폭력 집회 반정부 투쟁을 선언을 해요. 이 두 사람은 민주화가 아니라 자기의 직권이 민주화라고 주장을 하는 거예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가 집권하는 것이 민주화다 우리가 착각을 하면 안 됩니다. 1980년 봄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쫓겨났던 교수 학생들이 대거 학교로 복귀를 하면서 이 사람들이 또 이제 학생들을 선동해 가지고 1980년 3월부터 5월까지 요 삼 사 오 3개월 동안 학생 시위가 2100회가 일어났어요.
그다음에 4월 9일부터 29일까지20일간 노4분구가 719건이 발생을 하고 4월 21일 날 사북동원탄좌에서 광부 3000명이 폭동을 일으켜 가지고 진학 경찰과 충돌을 해서 경찰 한 명이 사망을 하고 100명의 경찰이 부상을 당하는 아주 끔찍한 유열 폭동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와중에 복학생 협의체가 주동이 돼서 5월부터 학생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겁니다. 그래서 5월 네 5월 19일까지 중대결심이라는 게 뭐냐면 계엄령을 해제하고 신현악 내각이 퇴진하지 않으면 5월 22일 날 전국에서 일제 시위에 돌입하겠다라고 선언을 해요. 그리고 이제 학생들이 와 길거리에 쏟아져 나오죠.
12.10이 이후에 최규하 정부가 등장을 하면서 신현악 국무총리가 국정을 인제 이끌다 보니까, 더군다나 이제 뭐 헌법을 만드는 그런 기구라든지. 이런 거를 이제 국무총리가 할 수밖에 없으니까. 야 이거 이러다가 신현악이가 당선되는 거 아니냐 이 두 김 씨는 이렇게 본 거예요. 그러니까 신현악을 집중적으로 공격을 한 거예요. 최규하 신현악은 물러가라 신현악 전두환 한패니까 물러가라 뭐 이런 상황이 발생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 최규화 대통령하고 신현학 총리 간에 뭔가 이 의견 차이가 나오기 시작을 했어요.
신현학 국무총리는 강력하게 대통령제인데 최규하 대통령은 2원집정부제를 만들 수도 있는 것 아니냐 이렇게 2원집정부제 검토를 지시를 해요. 이러니까 관측통들이 야 이거 이 지금 신현학 최규화 내각 안에서 뭔가 뭐 이상한 불협화음이 나오는 거 아니냐 이러다가 이거 뭐 최규하라 신현학이가 이거 뭐 몽땅 다 걸려 가져가는 거 아니냐 뭐 이런 뭐 의구심들이 나오기 시작을 했어요.
특히 신현학 총리가 4월 24일 날 언론 4편집 쪽
강용석
저는 그렇게 기억나는 게 신현학 전두환을 같은 편으로 봤죠 같은 편으로 보고 뭐 이런 플랜카드 같은 게 신현학 전두환 찢어 죽이자 뭐 이런 거 이런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저는 그때 뭐 당연히 신현학도 모르고 전두환도 몰랐거든요. 왜 최규하밖에 모르는데 왜 신현학 전두환이 그렇게 뭐 타겟이 됐는지 사람들은 누구지 그래서 그렇게 생각을 하긴 했었는데 예
김용삼
그러니까 신은학 총리가 야 우리가 과도정부를 선포할 때 우리가 1년 안에 헌법 만들어서 대통령 뽑고 행정부 구성한 다음에 국회 구성한 다음에 우리가 물러난다고 얘기하지 않았느냐 그 왜 자꾸자꾸 묻느냐 우리는 스케줄대로 우리 가고 있다. 그러니 제발 우리를 신뢰를 하라 그렇게 발언을 한 게 언론에 보도가 됐는데 그다음 날 청와대에서 사람을 보내가지고 신은악 총리에게 아니 물러날라면 당신만 물러나지 왜 나까지 물러날라고 그래 이런 메세지를 전하더라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최규하 대통령은 당시에 뭔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5월 10일 날 최규하 대통령이 사우디 쿠웨이트를 급히 방문하게 됐어요. 이때 왜 그러냐면 제 2차 석유 파동이 아주 강타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이란의 회교 혁명이 일어나서 이란이 이제 석유 무기화를 하다 보니까, 이 국제 석유 값이 폭등을 하고 석유 가격이 폭등한 것뿐만이 아니라 한국으로 오게 될 석유가 석유 가격이 석유가 다른 나라로 가다 보니까, 우리나라가 지금 석유가 확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당시에 이제 이 사우디 국왕이 최규화 대통령은 아주 외교통이잖아요.
외교관으로서 인제 사우디 국왕하고도 굉장히 지금 절실한 관계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이 위기 상황에서 최교 대통령이 사우디 가서 석유를 구하러 간 겁니다. 바로 이
강용석
구하긴 구했나요? 그래서 석유를
김용삼
그래서 이제 구해 왔죠 그때 일본 내각 조사실로부터 북한이 남침을 할려고 하는 징후가 보인다라고 하는 첩보가 입수가 됐어요.
강용석
일본이 원래 내각조사실이 우리 국정원보다 더 세다 이렇게 알려져 있는 거 아닙니까 예
김용삼
8일 날 김일성이 비밀리에 소련을 방문해서 브레드네프 서기장과 회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김일성이 루마니아를 방문해 가지고 남반부 인민의 영웅적 투쟁에 의하여 금년 내 반드시 통일을 하겠다라고 발언을 했어요.
그 혼란 상황에서 남침을 하려고 이제 그런 의사 표현을 한 거를 일본 내각 조사실이 루마니아의 정보통을 통해서 이런 정보를 입수하고 한국에다가 이걸 알려준 겁니다.
강용석
아니 소련을 저 때 방문했다는 건 뭐 뻔한 거죠. 뭐 소련한테 동의를 받을라고 방문을 했겠죠.
김용삼
이러니까 지금 대통령도 지금 사우디에 가 계시고 지금 뭐 박정희 대통령이 시에 당한 이후에 지금 뭐 전국은 그냥 뭐 삼 김 씨가 그냥 혼란을 일으켜 가지고 난리도 아닌 상황에서 야 이거 이러다가 일 벌어지면 도대체 우리가 이 글을 어떻게 수습을 해야 되느냐 그래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권장달 보안사 정보처자에게 야 이거 혹시 모르니까 이거 우리가 좀 이 큰 위기가 닥치면은 이거 어떻게 수습을 해야 될지 너 준비를 좀 해라 그래 가지고 이제 보안사가 시국 수습 방안이라는 거를 준비를 했어요. 5월 15일 날 전국 80개 대학에서 10만 명이 몰려나와 가지고.
신현학 전두환 퇴진하라 계엄령 해제하라 이날 저녁에 서울역 부근에서 20대 청년이 버스를 탈취해 가지고 버스를 진압 경찰에 돌진해 가지고
경찰 한 명이 인제 하고 네 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그런 얘기가 이런 인파가 몰려와 가지고 여기서 이제 충돌이 벌어졌는데 충돌이 벌어진 다음날 김대중의 구민협이 정부에다가 인제 또 최후 통첩을 해요. 5월 19일 10시까지 비상계엄을, 즉각 해제하고 유정회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해체하고 신현한 내각이 태진하고 정치범 전원 속방을 안 하면 연대 투쟁에 들어가겠다. 전국 59회 59개 총학생회장단도 똑같은 요구를 하고 났었습니다. 이러면은 인제 이 정부에다가 선전포고한 셈이에요.
그때 인제 이 신현학 총리가 나중에 인제 이 검찰 조사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은 이 서울역 시위하는 현장에 김대중 씨하고 재야 세력들이 빵 물 이런 걸 다 트럭으로 실어다가 공급했다는 거 아닙니까 이제 시국이 날로 좀 심각해져 가니까 5월 16일 날 밤 11시 5분에 최규화 대통령이 급거 귀국을 했어요. 그다음 날 아침에
사우디에서 10일부터 16일까지 있었죠. 주영복 국방부 장관이 5월 17일 날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소집을 해서 지금 김대중의 재야 세력이 이런 도전을 하고 이걸 경찰력으로 도저히 막을 수가 없으니 세 가지를 결의를 합니다.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를 하자
국회를 해산하자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를 하자 이걸 인제 3대 결의를 해서 그 결의한 내용을 국방부 장관이 가지고 최규하 대통령을 찾아갔습니다.
최규하 대통령이 군부의 의견을 보고 아니 국회에서는 이거는 이게 좀 초헌법적인 거 아니냐 국회에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국보위의 설치는 이거는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해야 된다. 그다음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이거는 도저히 지금 이 경찰로는 이 시위를 막을 수가 없는 상황이니까. 비상계엄을 전국 확대하는 문제는 수용을 하고 또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는 이 법안은 최규하 대통령이 수용을 해요.
비상계엄이 전국으로 확대가 되면 계엄사령관이 내각 역할을 대신하게 됩니다. 다시 얘기하면은 내각 기능이 무력화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보통 비상계엄을 내릴 때는 제주도를 제외하고 비상계엄을 내려요
강용석
그래야지 인제
김용삼
내각 기능이 살아나 있게 됩니다. 만약에 전국 계엄이 되면은 내각은 기능이 정지됩니다. 그래서 비상계엄이 확대돼 가지고 이제 군이 전면에 나섰으니까. 최규하와 내각은 이거는 우리가 할 일이 없다. 그래서 5월 18일날 내각을 총사퇴하고 바로 이날 광주에서 계엄군하고 시위대가 충돌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최규하 대통령이 도저히 이 혼란을 이 경찰력만 가지고는 이거 수습을 할 수가 없으니까. 군이 나와서 수습을 해라 하고 군의 손을 들어준 게 바로 5월 17일 5월 18일 요 무렵의 일입니다.
자 이 상황을 보시면, 최규화 대통령은 5월 17일 날 이제 최규화 대통령이 인제 군부에 건의를 수용을 하기 전에 신현학 총리가 최규하 대통령에게 지금 이 상태로 가서 군인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지면은 군인들이 이제 권력을 차지할 우려가 있다. 그러니 우리가 이 군이 등장하는 걸 막기 위해서 최규하 대통령하고 나하고 동반 퇴진하자 그렇게 얘기할 때 신현학 총리는 같이 퇴진하자고 그랬는데 최규하 대통령은 아니다.
지금은 우리가 이 혼란을 수습해야지 당신하고 나하고 지금 다 퇴진해 가지고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 놓으면은 이 시국을 누가 책임질 거냐 가지고 신현학 총리의 동반 퇴진 요구를 거부하고 신군부의 손을 들어준 게 돼버렸어요. 그리고 나서 인제 최규하 대통령이 나중에 하야를 하는데 하야 성명은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책임 정치의 구현으로 불신풍조를 없애고 불행했던 우리 현정사의 평화적 정부이양에 선례를 남기며 또한 국민 모두가 심기일전하여 화합과 단결을 다짐으로써 시대적 요청에 따른 안정과 도의와 번영에 밝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애국 충전과 대국적인 견지에서 나는 대통령직에서 그리고 권한 대행자에게 정부를 물려준다. "
그래서 당시 권한 대행자가 박충훈 씨였는데 박충훈 씨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하야를 합니다.
강용석
왜 박충훈이죠.
김용삼
신현학 총리도 같이 신현학 총리는 이제 사퇴했기 때문에
강용석
박충훈은 누구죠
김용삼
당시에 경제 부총리였습니다. 또 아무 뭐 그냥 이유 없이 하얀 거 이유 없이 하였다기보다는 뭐 도저히 이 사태를 본인의 힘으로는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이건 도저히 안 되겠다. 내가 물러나고 뭐 보다 리더십이 뛰어난 사람이 이 나라를 맡아주기를 바란다 최규하 대통령은 아직도 본인이 왜 사퇴를 했는지 돌아가시기 돌아가실 때까지 본인이 솔직한 이야기를 한 번도 밝히지 않고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나중에 하야하기 한 시간 전에 녹음 내용이 발견이 됐는데 녹음 내용에 요렇게 이야기한 게 언론에 보도가 됐습니다.
"80년 봄에 사회불안을 빚은 것은 성급한 정치인과 일부 언론의 동조 그리고 학생들의 특정 정당 및 정치인 지지라고 지적하고 5일칠 전국계엄 확대 조처와 국보의 설치가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하야 한 시간 전에 녹음 테이프에다가 남겨놨다는 거예요.
전두환 대통령의 아까 판금 조치된 회고록에는 최규하 대통령이 전두환 장군을 불러서 이거는 내가 이 사태를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이거는 신군부가 나라를 맡아 가지고. 나라를 좀 이 진정시키는 수밖에 없겠다.
이러고 자기 해야 했다는 거 아니에요. 어쨌거나 저쨌거나 하여간 전두환 대통령이 그래서 나중에 이제 최고 권력자가 돼서 최규하 대통령은 박충훈 설의로부터 통일 주체 국민에 의해서 전두환 대통령이 선출이 되고, 또 선출되자마자 오공화국 헌법을 만들어 가지고 또 오공화국 헌법에 의해서 또 12대통령이 돼가지고 11대 12대통령을 역임을 해요. 바로 그때 뭐 1년인가 몇 개월 체육관 선거를 또 한 번 합니다.
그래서 이제 오공화국이 출범을 하는데 자 우리가 이 과정을 우리가 복귀를 해보면 1980년 봄에 국가 지도자 공백이라고 하는 이 위기 상황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같은 이 민주화 지도자들이 조금만 인내하고 최규화 대통령과 정부가 약속을 한 그 1년 안에 헌법을 개정을 해서 개정된 헌법으로 총선을 치르고 대통령을 선출을 해서 정도 정부에게 정부를 이양을 하고 우리는 물러나겠다라고 하는 이 약속을 꾸준히 좀 지켜보면서 이런 과격한 활동을 자제했다면, 이 셋 중에 한 사람이 대통령이 됐겠죠. 군이 등장할 명분이 없었겠다. 군이 어떻게 등장을 합니까?
그런데 이 3월서부터 뭐 이 최규하 정부가 할려고 하는 이 헌법 개정 이것도 하지 마라고 하고 자기네들이 하겠다고 나서고 그것도 안 되니까. 김대중 씨는 뭐
김재규를 충신이라고 하지를 않나 뭐 12.6을 혁명이라고 하지를 않나 뭐 이러고 앉아있고 돌아다니면서 뭐 학생들 시위를 하고 학생들 길거리로 몰아내 가지고 버스를 돌진해 가지고 경찰을 치워 죽이지를 않나 이런 상황이 뭐 통제불능의 상황이 된 데다가
강용석
학생들이 근데 왜 그렇게 나선 거죠. 그때
김용삼
민주 정부 구성하라고 민주화라고 하니까 학생들은 뭐 민주화가 좋은 건가 보다 하고 다 나온 거죠.
강용석
민주 정부를 구성하라고 근데 민주 정부를 구성하려고 하고 있는데, 왜 민주 정부를 구성하라고 나오죠?
김용삼
그러니까 그게 이 특정한 이 김대중이나 김영삼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요. 앞에 최규화 대통령의 이 육성 녹음을 한번 잘 보셔야 돼요. 여기에 뭐라고 돼 있냐 성급한 정치인과 일부 언론의 동조 그리고 학생들의 특정 정당 및 정치인 지지
이게 1980년을 망쳐먹은 거예요. 그러니까
강용석
가만히 있었으면 최규화 대통령이 헌법을 만들어서 끊어서 정확하게 인제 이양조치에 넘겨졌을 텐데 선거에 의해서 그걸 왜 이렇게 급하게 하는 바람에 군이 출동할 명분을 만들어 버렸다
김용삼
아니 그래 가지고 뭐 김대중의 국민연합이 정부를 상대로 최후 통첩을 하고 뭐 일제히 뭐 봉기하겠다고 뭐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군부는 이게 뭐야?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하고 정치인들 다 체포를 하고 그래 가지고 결국 5.17 5.18로 그냥 넘어가 버린 거예요. 이게 과도 정부 일정에 따라서 조금만 더 인내했다면, 1980년 말이나 1981년 초에는 민주헌법에 기초한 민주 정부가 정상적으로 출범했을 거예요. 그 출범을 가로막고 다 뒤집어 엎고 그래서 혼란기에 전두환과 신군부라는 세력이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나오도록 만든 사람은 누구냐 김영삼과 김대중과 김종필 아니냐
강용석
그러니까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김영삼 김대중은 뭐 별일 아닌 줄 알았던 거 아니에요. 12.12가 나중에 보니까, 12.12지. 12.12이 가지고 김영삼 김대중한테 직접 피해를 입힌 건 하나도 없잖아요.
김용삼
그러니까 이 양반들이
강용석
오히려 DJ는 이후에 사면 복권이 됐고.
김용삼
그러니까 이 세 사람이 이때 조금만 그냥 기다리고 있었으면 그니까 권력은 자기한테 오는 거예요.
그거를 못 참아가지고. 몇 개월을 못 참아서 이 짓을 하다가 결국 이 세 사람 전부 정치활동 금지로 묶여가지고
그 당시 오공화국은 이 정치활동 금지법이라는 걸 만들어 가지고 구시대 정치인들 전부 뭐 출마도 못하게하하고 그다음에 민주정의당 그다음에 민주 한국당 이런 걸 만들어 정치인들 전부 배제시키고
그리고 말하자면, 인제 뭐 사람들이 얘기하는 대로 군부 파쇼 정권이라고 얘기하는 정부가 출범했는데
그러면 정권을 이렇게 탄생하도록 열심히 도와준 사람은 누구냐 이거예요.
김대중 김영삼인데 장태환과 정승환은 이런 사람한테 가서 붙어가지고 정치를 하고 와
그래서 이게 도대체 이 1980년 봄의 상황을 우리가 정말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면요 정말 이 3김씨 3김씨가 이게 나라를 다 망쳐먹은 것이죠.
강용석
그러니까 지금 그동안은 이 사 80년 3월 4월 5월의 상황이 그러니까 마치 삼김은 그 이 전두환 시나리오 신군부의 시나리오에 따라서 이게 밑에서 인제 작업을 하고 있는데, 삼김씨는 그걸 알고 거기에 저항하다가 이렇게 된 거다 라는 식으로 해왔잖아요. 그동안 뭐 다 그렇게 묘사를 해왔는데 지금 우리 김영삼 기자님은 당시 상황은 그런 게 아니라, 오히려 이 최규하 정부에서는 과도 정부로 해 가지고 1년 안에 어쨌든 헌법을 만들어서 민선으로 이양을 할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걸 뿌리부터 흔들어대니까 DJ, JP가 그냥 조급해 가지고 이리 흔들고 저리 흔들고 DJ는 DJ대로 온갖 학생들과 좌익 세력들 뭐 여기를 다 동원해 가지고 흔들어대는 바람에 오히려 군으로부터 이 사회 혼란 이런 거를 이유로 해서 출동할 명분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김용삼
1980년 5월 달에 당시에 김동길 연세대 교수의 누님이 김옥길 씨였는데 김옥길 씨가 과도 정부의 문교부 장관을 교육부 장관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분이 라디오에 나와 가지고. 테레비에 나와 가지고. 사람들 제발 자제해달라
여러분들이 학교에서 공부 안 하고 길거리에 나와 가지고. 돌 던지고 이러는 순간 누구 좋으라고 하는지 아느냐
사회 혼란은 경찰력 가지고 못 막는 상황이 되면 군이 나올 수밖에 없는데
군이 한번 출동을 하면 이 사람들은 그냥 돌아가지 못한다.
당신네들의 지금 행위가 본인들을 또다시 집권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명분을 줄 수도 있는데, 당신도 지금 누구 좋은 일 하냐고 좀 이런 일을 하느냐 제발 좀 자제해라
이런 방송을 하고 이런 TV 출연해서 이런 호소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들은 특히 김영삼과 김대중은 김영삼이 당권을 쥐고 있는 신민당에 내가 들어가면 이 당권경제에서 도저히 내가 승부가 안 된다. 그러니 나는 재야 세력 다시 얘기하면 좌익 세력과 손을 잡고 뭔가 정변 준하는 그런 일을 일으켜 가지고 내가 정권을 잡겠다.
뭐 결국 그래 가지고 김대중 씨가 5월 17일 날 밤에 자택에서 체포되니까. 5월 18일 날 김대중 선생 왜 잡아갔냐 그래서 광주에서 꽝 하고 터진 게 5.18
그러니까 지금 이 과정을 복기를 해보면 정말 우리가 1980년 3월부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나
강용석
사실 요거랑 똑같은 게 87년 상황 아닙니까 87년도 그니까 군이 등장하지 않았다. 뿐이지 DJYS가 싸우지 않고 DJYSJP가 싸우지 않고 조금 이렇게 힘을 힘을 합쳤으면 그냥 87년에도 이기는 거죠. 당연히 이기잖아요.
당연히 이기는 건데 전부 찢어 먹어가지고
그래가지고 어부지리로 노태우가 당선됐잖아요. 그러니까 그때도 이제 그러니까 평화롭게 됐기 때문에 아무도 그거에 대해서 말을 못 하는 건데 이 80년 상황은 이제 군부가 칼을 들고 나 총을 들고 나왔기 때문에 이제 뭐라고 하는 거지만 사실 1년만 기다렸으면 1년도 아니에요. 6개월만 더 기다렸으면 최규환 대통령이 어떻게든 헌법을 만들고 해 가지고 선거를 정상적으로 치렀다면 치렀다면 전두환 대통령이 될 순 없죠
김용삼
뭐 참 이 전두환 회고록에도 나오는 얘기입니다마는 이 사람이 무슨 정치적인 야망이 있었고, 그랬다면은 아니 자기 부인 이순자 회사가 그 영어 공부 계속하는 게 평생의 꿈이었고 그리고 이순자 여사가 전두환 대통하고 결혼하는 바람에 그 이화여대를 다니다가 그만뒀잖아요. 그래 가지고 이 대학을 못 나온 한이 있었대요 그래서 내가 인제 보안사령관은 서울이지 않습니까? 근무지가 그래서 1980년 봄에 연세대 어학당에서 영어를 공부하러 다녀요.
그러니까 그때 무슨 전두환 대통령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무슨 정권을 잡을 욕심이나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죠
아니 그런 생각이 있었으면 자기 부인에게 그래 뭐 연세 어학당에 다녔겠어요?
이순자 회사가 좀 챙피하다고 하면서 그런 말씀을 하셨었는데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 영어교육과인가 편입할라 그랬어요.
시험을 쳤는데 떨어졌어요.
그러니까 뭐 무슨 전두환이가 무슨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서 무슨 뭐를 시나리오를 짜고 뭐 이거는 정말 우리 지금 우리 현대사를 냉정하게 보셔야 됩니다. 아니 정말 맘에 있었다면 자기 부인이 그래 공부하라고 영어 공부하라고 그래 그거 했겠어요. 그래서 결국 이순자 여사가 외국어 대학 합쳐 가지고 떨어져서 굉장히 뭐 의기소침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인제 연세대 어학당에서 영어를 배우러 다니는데 80년 봄에 어학당에 가는데 연세대학교 안에서 자기 남편을 화형식을 하더라는 거 아니야. 허수아게 얘기해 아니 내 남편이 뭘 잘못해서 지금 이런 화형식을 당하라 그래서 땜에 충격을 받았다.
뭐 이런 내용들이 본인이 쓴 책에도 나오던데 이렇게 해 놓고, 그래서 저는 1980년에 이 삼 김 씨가 외친 민주화는요 진정한 참다운 민주화가 아니라 자기 집권하는 걸 민주화라고 표현을 했어요.
그러한 사람들하고 손을 잡고 국회의원 한번 해먹고 통일민주당 부총재해서 세상을 한번 놀래킨 게 정승화하고 장태환인데 정승화 장태환을 아주 이 선한 천사같은 이미지로 만들어 놓은 영화가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가 개봉이 되니까. 오늘 이 서울의 봄이라는 영화를 개봉하기에 앞서서 저희가 1980년 봄에 우리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이 됐느냐 하는 부분을 좀 말씀을 드렸습니다.
강용석
1980년에 서울의 봄 1980년 3월 4월 5월에 상황 저는 1980년 2월 말에 김대중 제가 김대중 대통령이 그때 사면 복권된지 몰랐네요. 80년
김용삼
2월 29일 날 사면이 됐습니다.
강용석
그전에 이미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는 줄 알았네 아닙니다. 그러니까 정치 활동을 12.12가 만일에 쿠데타였으면 정치 활동을 그때 이미 못 하게 돼야 되는데 못하던 거 오히려 한 거 아니에요. DJ는
김용삼
어쨌든 하여간 이 김대중 씨나 이런 분들은 사면 복권이 돼서 다시 정치적인 자유를 획득한 것은 1980년 2월 29일 날 최규하 대통령의 그 명예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었어요. 그리고 나서 정치에 참여하려고 보니까, 기성정치 정당은 김대중 씨 김영삼 씨가 다지고 있고 자기는 도저히 거기 가지고 당권 경쟁을 해 가지고는 승부가 안 날 것 같으니까. 죄야의 좌익세라고 손을 잡고 복학한 감옥 갔다 온 학생들 이런 학생들 선동을 해서 대학생들을 거리로 끌어내서 최규하 정부 신현학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했고
강용석
오히려 혼란은 DJ가 부추긴 거 아니에요. 그렇게 보면 3,4,5월에 시작한 건 DJ가 사면 복권을 안 받았으면 그렇게까지 혼란스러워지지 않는 것 아닌가요
김용삼
그까 명백히 당시에 이 1980년 봄을 완전히 그냥 아수라장으로 만든 건 김대중 그다음에 유신 체제를 부정한 김종필 그리고 이 최규하 정부를 끝없이 압박을 한 김영삼 이 세 사람이 책임을 져야 된다는 것이죠. 다시 말씀드리면, 이 세 사람만 그냥 조금만 더 인내하고 참고 그랬으면 전두환이가 어떻게 거기 등장을 해 가지고 오공화국의 대통령이 돼요. 이게 말이 안 되는 얘기입니다. 이게
강용석
하여간 여러분 뭐 이런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뭐 이게 뭐 반드시 옳다 이런 해석도 있을 수 있다. 이런 정도로 받아들이시고 저희가 뭐 어떤 시각을 강요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무슨 뭐 신군부의 시나리오에 의한 모든 집권 시나리오가 있었다. 뭐 이 차 뭐 12.12, 5.18 이 두 번의 연쇄 쿠데타로 인한 집권 시나리오다 신군부다 뭐 이런 식의 그동안 모든 역사 해석을 그런 식으로 강요해 왔는데 서울의 봄이라는 것도 사실은 지금 이 상황을 쭉 보면 서울의 봄이라는 것도 사실은 잘 관리했으면 봄이 계속 유지가 될 수 있었고, 그걸 잘 정상적으로 선거를 충분히 치를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이 3김의 야욕 때문에 사회가 너무 극도의 혼란을 겪는 바람에 당시 상황에서 군부로 하여금 등장할 수 있는 명분을 오히려 만들어준 게 아닌가
김용삼
그래서 나중에 이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가 이 단제를 한 거는 김영 3대통령 시절에 특별법을 만들어 가지고 5.18 재수사를 하거든요. 원래 처음에는 검찰에서 성공한 쿠텐다는 처벌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 가지고 이거를 그랬는데 갑자기 특별법을 만들어 가지고 소급입법을 만든 거예요. 소급입법이 아니라고 또 뭐 5대 4인가 헌재에서 뭐 해 가지고 특별법 소급입법을 만들어 가지고 전두환 노태우 신군부 관계자들을 전부 처벌을 하는데 처벌의 근거가 뭐였느냐 아까 제가 말씀드린 권정달 보안사 정보처장에게 시국 수습 방안을 준비하라고 이거는 뭐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군부에서는 A안 B안 C안 그래 가지고 이런 상황이 벌어짐을 우리가 어떻게 대처할까 하는 것을 그 준비해 놓은 건데 이것을 쿠데타의 계획이라고
저는 그래서 이 권정달 씨가 이 5.18 재판 이거를 완전히 이런 식으로 그 이 뒤집어 씌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어. 이 사람도 김대중 씨한테 붙어가지고 국회의원도 해먹고 자유청년맹 총재도 뭐 하고 해피하게 살았던 사람이에요.
이분도 돌아가시기 전에 자기가 이 검찰에게 어떻게 회유를 당해 가지고 자기가 거짓으로 증언을 했는지 반드시 밝히고 돌아가셔야 될 사람입니다.
강용석
네 시국 수습방안 저게 사실 그런 거네요. 문재인 때도 비슷한 거 만들었다가
김용삼
기무사 완전히 그걸로 작살 났잖아요. 기무사가 해체된 거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LIVE] 서울의봄 바로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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