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존엄성과 노동자의 인권
창세 1,26-2,3; 마태 13,54-58 / 노동자 성요셉; 2024.5.1.
성모성월을 시작하는 오늘, 교회는 성모 마리아의 정배이신 노동자 성 요셉을 기리는 특별 지향으로 미사를 봉헌합니다. 이러한 전례적 취지는 1886년 5월 1일에 미국 시카고에서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역사상 처음으로 외쳤던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 2년 후인 1888년부터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노동절로 기념하기 시작한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노동의 존엄성과 노동자의 인권을 당사자들이 주장한 역사상 첫 움직임입니다. 노동절 제정에 담긴 시대의 징표를 외면하기 어려웠던 가톨릭교회에서 시카고 사건 발생 70년 만인 20세기 중반부터 요셉 성인을 노동자들의 주보성인으로서 전례적으로 소환하게 된 것입니다(비오 12세, 1955년). 전례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일어난 하느님의 섭리적 사건들을 기념하는 것이지만, 세상에서 일어난 사건들 가운데에서 신앙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을 골라서 그 안에 담겨 있는 하느님의 뜻을 기리기도 합니다.
노동절의 기원이 되었던 시카고 사건의 발단은 이러했습니다. 1886년 5월 1일에 미국 시카고에서 8만 여명의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8시간 노동제 쟁취’ 구호를 내걸고 궐기하여 총파업을 벌였는데, 경찰과 군대가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는 유혈 사태가 발생했고,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장기징역형과 사형을 선고받았었습니다. 7년 후에 이들은 모두 무죄로 석방되었는데, 이는 그 사건에 당국의 무자비한 진압과 사법적 보복을 지탄하는 여론이 국내외적으로 들끓었기 때문입니다. 즉, 2년 후 같은 날에 모든 나라, 모든 도시에서 같은 구호를 내건 국제 시위가 조직되고, 각국 노동자 대표들이 이날을 노동절로 선포하는 제1회 국제대회를 치르는 등 반향이 거세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1년 후인 1891년에는 레오 13세 교황도 노동자의 문제를 정식으로 제기하는 ‘새로운 사태’ 회칙을 반포했습니다. 이는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을 대표하는 교회의 최고 수장이 취할 수 있는 강경한 발언이었고, 이후의 가톨릭교회의 선교 노선을 노동자 계층의 권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게 된 엄중한 조치였습니다.
이 시카고 시위는 지옥과도 같은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노예처럼 장시간 동안 일하고도 최저수준 이하로 살아야 하는 노동자의 처지에 가톨릭교회가 관심을 기울이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레오 13세 이후 역대 교황들은 이러한 사회문제 개입의 노선을 이어 받았습니다. 가톨릭교회 역사상 사회문제를 주제로 해서 그 수장인 교황이 최고의 권위로 무게를 실어서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회칙을 반포한 이 노력을 기점으로 교회는 가난한 이들과 노동의 문제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의 창조주이심과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 그리고 성령의 이끄심을 신앙으로 고백한 이래 천5백 년 만에, 그 동안 감추어졌던 신앙 진리의 새로운 국면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셨다는 기억이었고, 초대교회는 그렇게 해서 복음을 들은 가난한 이들이 서로 나누고 섬기는 공동체로 출발했었다는 기억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노동절의 사회적 의미를 노동자의 주보로서 성 요셉을 기억하는 전례적 취지는 가톨릭교회의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는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도신경에 빠졌던 주요 계시 중 하나를 2천 년만에 보완하는 획기적인 변화였습니다. 그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던 예수님의 유언이었는데, 이는 또한 성전과 제사를 중심으로 해서가 아니라 삶의 현장과 가난한 이들을 중심으로 해서 하느님의 길을 찾으시던 예수님의 삶을 상기시키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또한 노동자들은 안식을 누릴 권리를 천부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이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는 세 번째 계명에 담겨 있었다는 것도 새삼스럽게 상기했으며, 더 근본적으로는 하느님께서도 엿새 동안 창조의 노동을 하시고 이렛날에는 안식을 누리며 쉬셨다는 성경 해석까지 나왔습니다.
이러한 교회적 각성 분위기가 퍼져 나가는 가운데, 1919년에 국제노동기구가 발족되었습니다. 후임 교황 비오 11세도 1931년에 ‘사십주년’ 회칙을 반포하는 등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부각시키자, 이런 가톨릭교회의 움직임이 일종의 ‘방아쇠 효과’를 발생시켰습니다. 첫 사회회칙 ‘새로운 사태’ 반포 백주년을 기념하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91년에 ‘백주년’ 회칙을 통해 가톨릭 사회교리가 사회적 복음임을 부각시켰으며, 그 후 백 년 동안 반포된 사회회칙들을 집대성하는 작업을 한 끝에 지난 2006년에는 『간추린 사회교리』를 펴냈습니다. 이 문헌의 결론은 가난한 노동자들로 말미암아 상기하게 된 이 새로운 계시의 종착점을 ‘사랑의 문명’이라고 제시했습니다(580-583항).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먹고 사는 일입니다. 원시 시대에 야생 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 식물을 채취하던 생활을 하던 인류가 야생 동물을 가축으로 길들이거나 야생 작물을 경작하여 재배하는 농업혁명을 일으키면서 인구가 증가해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으나, 더불어 발생한 잉여 농산물을 분배하기 위한 권력이 필요해지면서 씨족 공동체는 부족 사회로, 다시 국가로 커졌는데, 영토와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잦아지면서 패배한 세력이 노예라는 신분으로 제도적으로 착취당하게 되었고, 이 무렵부터 구조적으로 가난한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늘어난 잉여 생산물을 자본가 계급이 독점하게 되면서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이 과거의 노예 신분보다 더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라 일컬어지는 현 인류의 물질문명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인류가 생산해 낸 잉여 가치를 이미 부유한 개인들이나 국가가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욕심의 매카니즘입니다. 자본주의 경제학자들 중 누구도 간파하지 못한 이 매카니즘에 주목한 마르크스의 눈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주장헸던 계급투쟁론이나 유물사관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더 가지려고 하지 말고 오히려 이미 가진 것을 나누려고 애를 써야 하며, 더 나아가서는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세상을 이룩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바 있었습니다. 이 나눔과 섬김의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마르 1,15)고 선포하신 복음의 요체인데, 인류 역사에 있어서 혁명적인 이 가르침을 사회경제적인 차원에서 실체화시킨 것이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가난한 노동자들이 억눌리다 못해 들고 일어나게 된 노동절 사태가 자신의 역사적 뿌리를 잊어버려 가던 가톨릭교회로 하여금 가난과 노동의 문제에 관한 시대의 징표를 새삼 일깨워 주었습니다. 이 두 문제는 욕심과 착취의 매카니즘을 지닌 현대 물질문명을 나눔과 섬김의 매카니즘을 지닌 사랑의 문명으로 바꾸어야 할 파스카 과업의 요체라는 것이 가톨릭 사회교리의 결론입니다.
교우 여러분!
이것이야말로 노동절 제정에 담긴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여, 노동이 사회 문제의 중심이고, 노동자가 사회의 중핵임을 알아야 함을 일깨우고자 노동자의 주보이신 성 요셉 기념일을 전례에 도입한 교회의 취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셨던 복음 진리를 가난한 노동자들의 시각으로 바라봄으로써 교회와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류 역사와 개인 인생은 모두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섭리와 뜻대로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요, 이를 앞당겨 보여주신 징표가 바로 ‘예수 부활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의지와 이성 그리고 신앙은 이 흐름을 알아차리고 이 복음에 부합할 수 있도록 총동원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고 빛을 발합니다. 이렇듯이 하느님 섭리에 순응하는 삶이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닮은"(창세 1,26) 존재가 되는 길입니다. 노동 후의 안식은 바로 이를 위해 주어진 거룩한 시간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으려는 목적 의식과 노동과 안식의 조화를 통해 세상을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명 의식,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에서만 기적이, 사랑의 기적이 일어납니다(마태 13,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