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훈 ‘공무원 北해역서 표류’ 보고받고도 오후 7시경 퇴근”
감사원 ‘서해 피살’ 감사 보고서
국방부-국정원-해경엔 ‘보안’ 강조
공무원 사망 뒤 첫 관계장관회의
문재인 정부 안보사령탑이었던 서훈 당시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대준 씨가 서해 북한 해역에서 표류 중이라는 사실을 2020년 9월 22일 보고받고도 구조 조치를 하지 않은 채 퇴근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컨트롤타워인 안보실 지시가 없는 상황에서 국방부와 통일부는 이날 북한에 실종 사실을 알리는 통지문을 보내지 않았다. 정부가 북한 해역 표류를 확인한 지 4시간 만인 이날 오후 9시 40분∼10시 50분 사이 이 씨는 북한군에 사살됐다.
감사원이 7일 공개한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감사 결과 자료엔 이 씨가 사살되기 전까지 정부가 사태를 방관한 전말이 고스란히 담겼다. 감사원은 감사 착수 1년 5개월 만인 이날 감사 핵심 내용을 보도자료로 공개했다. 기밀이 담겼다는 이유로 전문은 비공개 결정됐다.
감사원 등에 따르면 서욱 당시 국방부 장관은 22일 오후 4시 51분 국군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우리 국민이 북한 등산곶 해상에서 발견됐다”는 보고를 받았다. 서주석 당시 안보실 1차장(오후 5시 18분)과 서훈 실장(오후 5시 30분)도 차례로 보고를 받았다. 전날 서해 연평도 인근서 사라진 이 씨가 표류한 지 38시간 지난 시점이었다.
하지만 서 전 실장은 대응 방향 검토 회의를 열지 않았다. 그는 표류 사실을 아는 국방부와 국가정보원, 수색을 진행하던 해경에 보안 유지를 강조했다. 서 전 실장 등 안보실 간부들은 구조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는데도 오후 7시 전후 퇴근했다고 감사원은 밝혔다.
정부는 이 씨 사망 이후인 23일 새벽 첫 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이 씨를 살릴 ‘골든 타임’을 흘려보낸 정부가 사망 후에야 진실 은폐를 위해 나섰다”는 것이 감사원 시각이다.
감사원은 안보실이 이날 문 대통령에게 “북측이 실종자를 발견했다”고 서면보고한 사실도 파악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이 어떤 지시를 내렸는지는 서 전 실장 등의 조사 불응으로 감사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文정부, 서해 피격 사망 확인하고도 생존 묻는 대북통지문 보내”
감사원 “부실대응-조작-은폐” 결론
“軍, 오후 10시 44분 공무원 피살 확인… 새벽 3시반 첩보보고서 60건 삭제
靑 ‘자진 월북 정황 알리라’ 지침 내려”
감사원, 13명 징계-주의조치 등 요구
감사원은 1년 5개월에 걸친 공무원 이대준 씨 서해 피살 사건 감사를 통해 2020년 9월 당시 문재인 정부가 이 씨의 사망 사실을 확인하고도 생존해 있는 것처럼 언론에 알리고, 생존 여부 확인을 요청하는 면피성 ‘뒷북’ 통지문을 북한에 보낸 것으로 파악했다. 실종된 이 씨가 북측 해역에서 발견됐고, 북한군에 의해 피격·소각되는 과정을 당시 정부가 실시간으로 파악했음에도 그가 사망하기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이런 총체적 부실 대응 책임을 피하기 위해 관련 사실을 조직적으로 은폐하고 왜곡했다는 게 감사원의 판단이다.
당시 청와대는 이 씨의 자진 월북 정황을 언론에 알리라는 지침도 내렸다. 감사원은 이 씨 피살 사건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부실 대응과 조작 과정 전반이 국가 위기 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청와대 국가안보실 주도로 이뤄졌다고 결론 내렸다.
● “생사 위험 확인하고도 대응 책임자들 칼퇴”
국가안보실은 2020년 9월 22일 오후 5시 18분 이 씨가 북한 해역에서 발견됐다는 합동참모본부의 보고를 처음 받았다. 서해 연평도 해역에서 전날 오전 실종돼 약 38시간 동안 표류 중이던 이 씨는 생명이 위독한 상태였으나 안보실은 이를 파악하고도 최초 상황 평가회의를 열지 않았다. 국방부는 국제상선공통망 등을 통해 북한에 이 씨 구조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하지 않았다는 게 감사원의 설명이다. 특히 연간 50∼100여 차례 보내왔던 대북 통지문을 이날은 발송하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군에 발견돼 이 씨의 생사가 불투명한 상황에서 안보 사령탑인 서훈 당시 실장을 비롯해 서주석 1차장, 강건작 국가위기관리센터장 등 안보실 주요 당국자들은 오후 7시 반 이전에 퇴근한 것으로 조사됐다.
통일부 납북자 관련 대북정책 총괄부서장인 A 국장도 당시 국가정보원으로부터 이 씨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고 파악했음에도 이를 장차관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그는 이 씨가 무사한지도 파악하지 않은 채 오후 10시 15분 퇴근했다.
북한군은 그날 오후 9시 40분부터 10시 50분에 걸쳐 이 씨를 사살하고 시신을 소각했다. 그날 오후 10시 44분 군은 이런 사실을 첩보로 확인했다.
● 사망 뒤 보안 유지 지침→한밤에 첩보 삭제
서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탈북 어민 강제 북송 사건‘ 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2023.11.01. 뉴시스
안보실을 비롯한 관계 기관들이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하게 사건 은폐에 나선 시점도 이때부터였다. 서훈 실장 주재로 열린 23일 오전 1시 관계 장관회의에선 이 씨 피살 사실에 대한 보안 유지 지침이 내려졌다. 국방부는 이후 오전 2시 반 합참에 비밀자료 삭제를 지시했다. 합참은 오전 3시 반 군사정보통합처리체계(밈스·MIMS)에 기록된 이 씨 관련 첩보 보고서 60건을 삭제했다.
통일부도 내부적으로 이 씨 상태를 처음 파악한 시점을 A 국장이 국정원으로부터 관련 정보를 전달 받은 22일 오후 6시가 아닌, 이인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관계장관회의에 참여한 시점인 23일 오후 1시로 조작했다. 이 씨가 사망한 뒤에야 통일부가 이 사실을 처음 인지했다는 점을 향후 국회나 언론 대응 과정에서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 사망 16시간 뒤 언론에 ‘실종’ 사실 처음 알려
이후 국방부는 이 씨가 사망한 지 약 16시간이 지난 2020년 9월 23일 오후 1시 반 문자 공지를 통해 이 씨의 ‘실종’ 사실을 언론에 처음 알렸다. 해당 공지엔 생사 여부에 대한 설명 없이 “실종자가 북한 해역에서 발견된 정황이 포착돼 정밀분석 중에 있다”는 내용만 담겼다. 이어 오후 4시 35분엔 이 씨가 생존했던 전날 보내지 않았던, 생존 여부 확인을 요청하는 전통문을 북한에 보냈다.
이 씨가 사망한 다음 날(23일)에도 서해 북방한계선(NLL) 일대를 중심으로 한 해경의 수색 활동은 계속됐다. 감사원은 “23일 오전 2시 반과 3시경 안보실로부터 두 차례 이 씨 피살 정보를 전달 받았지만 수색을 종료할 경우 그 사유를 언론에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고 밝혔다. 또 “해경은 (이 씨가) 북한 해역에서 발견되지 않은 것처럼 최초 실종 지점을 중심으로 수색구조 활동을 지속했다”고도 지적했다.
감사원은 군 장성과 통일부 국장, 해경 간부 등 8명에 대해 징계 및 주의 조치를 하라고 기관에 통보했다. 퇴직한 서 전 실장과 김홍희 전 해양경찰청장을 포함한 5명에 대해서도 “인사 자료를 남기라”고 통보했다.
고도예 기자, 신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