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쯤 한 방송사에서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여주인공이
들고 있던 빨간 돼지 저금통으로 인해 한동안 빨간 돼지 저금통이 유행했던 적이 있다.
수 년이 지난 지금. 빨간 돼지 저금통은 커녕 돼지 저금통 조차도 제대로 팔리지 않아
팬시점 오사장은 나름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나마 형형색색의 다른 돼지 저금통은
어느정도 팔리기는 했지만 몇 개 안남은 빨간 돼지 저금통은 촌스럽다며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사실 팔리지 않는 걸 몇 년씩 가게 구석을 차지하는 애물 단지로 모셔두느니 버리는 게 이익이다.
그런 걸 오사장도 생각을 안한 건 아니다. 그 걸 귀찮다는 핑계로, 아깝다는 핑계로 차일 피일 미뤄왔을 뿐이다.
오늘은 일 끝내고 가는 길에 몇 개 안남은 저 것들을 가져다 버리던가 해야겠다 생각하며
오사장은 그렇게 오후 나절이라 한산한 가게 안에 흘러나오는 곡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딸랑'
"안녕하세요."
이제 겨우 7살 남짓 되보이는 꼬마가 성큼 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손에 천원짜리 꼬깃꼬깃 접힌 걸 꾹 쥐고는 두리번 거린다.
"꼬마야 뭐 찾는 거 있어?"
"저금통이요. 엄마가 군것질 하지 말고 동전 모으라고 사오랬어요"
오물 오물 작은 입으로 그새 쪼르르 카운터 앞에 와서 조잘거린다.
오사장은 카운터에서 나와 아이의 손을 잡고 저금통이 있는 곳 까지 데리고 갔다.
저금통은 아이의 손이 못미치는 조금 높은 위치에 있었고,
오사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가장 오른쪽에 있는 빨간 돼지 저금통을 집어주었다.
"빨간색 돼지. 괜찮지?"
"네! 돼지 저금통은 빨강!"
다시 카운터로 가 계산을 하고, 아이는 신이 나서 가게를 빠져나갔다.
제 몸에 비해 조금 큰 듯한 저금통을 두 팔로 꼭 안고는 집까지 뛰어가다가 그대로 엎어져 버렸다.
조그만 다리에는 금세 생채기가 나버렸지만 개의치 않고 일어났다.
하지만 무릎이 쓰라린지 뛸 엄두는 못내고 천천히 걸어서 집으로 간다.
아이가 살고 있는 집은 팬시점에서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하는 가까운 곳에 위치한 작은 주택이었다.
저금통 심부름을 시킨지 30분이 되도록 오지 않는 아이가 걱정 돼 대문 앞에서 기다리던 엄마는
절뚝이며 걸어오는 아이를 보고 기겁을 해서 달려갔다.
"찬아! 왜이래, 넘어졌어?"
"응.. 일찍 오려고 뛰어 오다가 넘어졌어."
쪼그리고 앉아서 다리를 보니 피가 진득하게 엉겨 있었다. 상처는 그리 크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 와중에도 찬은 빨간 돼지저금통을 샀다며 자랑을 한다.
집으로 들어가 더러워진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고 이제 상처를 소독할 차례인데
쓰라린 게 뻔한 소독이 무서워 슬금 슬금 방으로 도망친다.
"유찬! 빨리 안오면 과자 엄마가 다 먹어버릴거야!"
"아니. 엄마 돼지 돼지! 책상 위에 올려놓고 올게!"
방에 저금통을 가져다 둔다고 방에 들어간 찬은 10분이 지나도 나올 생각을 않는다.
결국 엄마가 유찬! 하고 소리를 지르고 나서야 울상을 한 채 나와서 거실 바닥에 앉았다.
"이 것봐, 유찬. 상처 나는 건 괜찮지만 그 걸 깨끗하게 치료를 해야 흉터가 안남는거야.
그리고 찬이는 이제 7살이니까 소독하고 이런 거 무서워 하면 안돼. 알았지?"
얼굴을 찡그리기는 해도 착하게 잘 참아준 아들이 대견스러워 엄마는 과자 몇 개와 음료수를 따라
내어온다. 오물거리며 맛있게 잘도 먹는다.
"자. 오늘 저금통 심부름 잘 했으니까 엄마가 300원 줄게. 이 거 다 먹고 가서 돼지 밥 줘, 찬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과자를 먹던 찬은 음료수까지 싹 비워내고 쪼르르 방으로 들어갔다.
저금통에 동전을 밀어 넣으며 맛있게 먹어. 하고 말하는 폼이 앙증맞다.
저녁무렵, 형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아빠가 퇴근하시기가 무섭게 찬은 오후에 산 돼지 저금통 자랑에
여념이 없다. 그래, 그래. 건성으로 내뱉는 형의 말에도 기분이 좋고, 그럼 찬이네 돼지 밥줘야 겠네? 하며
오백원짜리 동전을 쥐어주시는 아빠의 말씀에도 기분이 좋다.
오늘은 맛없는 시금치 반찬이 나왔지만 맛있게 먹었다고 칭찬도 받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까 받은 오백원을 주머니에서 꺼내 저금통에 밀어 넣으며 베시시 웃는다.
"돼지야. 만나서 반가워. 잘 지내보자!"
* * *
이후로도 엄마는 종종 찬에게 심부름을 시키고는 했다. 성급한 성미에 뛰어 오다가 엎어지기 일쑤지만
돼지에게 밥을 줄 때면 괜스레 밀려오는 뿌듯함에 엄마의 심부름을 마다하지 않는다.
벌써 돼지 저금통을 사온지 3달이 지났다.
그 간 가족들의 심부름을 하면서 백원 이백원 받은 돈으로 돼지 밥을 준 것도 솔찬히 모였다.
"돼지야. 오늘 유치원에서 친구랑 싸웠어."
오늘도 심부름을 갔다 와서 돼지에 밥을 주며 처음 저금통을 샀을 때처럼 찬은 혼잣말을 시작한다.
찬은 오늘 기분이 좋았다. 유치원에서 친구랑 요플레를 가지고 싸우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요플레가 딸기맛 포도맛이 있었는데 난 포도맛이 싫단 말이야.
그래서 내가 먼저 딸기 맛을 집었는데 윤빈이가 그 걸 뺏어간거야!
그래놓고 나보고 포도맛 먹으면 되잖아. 하는 거 있지? 걘 정말 못됐어."
찬은 동전을 다 밀어 넣고 침대에 누웠다. 부엌에서 찬을 부르던 엄마는 대답이 없자 무슨 일인가 싶어
방으로 들어왔다. 머리 끝까지 이불을 뒤짚어 쓴 찬은 어느새 찔끔찔끔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찬아? 왜그래. 무슨 일이야 응?"
유치원을 다녀와서부터 표정이 좋지 않아 최근 부쩍 좋아하는 심부름을 시켰는데
지금 와서 보니 울고 있으니 엄마는 당황스럽다.
엄마가 와서 다독이니 찬은 더 끅극대며 울기 시작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겨우 띄엄 띄엄
말한 것은 친구와 싸웠다는 것이었다. 어린 마음에 친구랑 싸우고 화해를 못한 게 걸린 것이다.
결국 엄마가 찬이 손을 붙들고 윤빈이네 집에 찾아갔다.
"어머. 찬이 엄마가 어쩐 일이세요. 어머 찬이 왜 울어? 응?"
"아니. 애가 오늘 유치원에서 윤빈이랑 싸웠다고 울드라구요. 마음에 걸렸나봐.
그래서 화해하라고 데리고 왔죠. 윤빈이는 안에 있어요?"
"있지 그럼! 윤빈이 요놈도 그래서 그런가 애가 유치원에서 와서는 표정이 안좋드라고.
무슨 일 있냐 그래도 말도 안하고. 그냥 내가 포도맛 먹을걸. 이러는거야 글쎄.
찬아! 윤빈이 불러줄테니까 여기서 잠깐 앉아 있어. 윤빈아 !"
아줌마가 윤빈이를 데리러 방으로 들어가시고 엄마와 거실 쇼파에 앉아 기다리는 찬은 여전히 침울하다.
그 사이 윤빈이 방에서 쭈뼛쭈뼛 나와서 찬의 앞에 다가선다.
"찬아.. 아까 요플레 뺏어 먹어서 미안해... 네가 먼저 잡았던 건데.."
"아니야.. 나도 미안해.. "
윤빈과 화해를 하고 돌아오는 찬의 얼굴은 싱글벙글이다.
엄마는 친구랑 화해도 잘하는 멋진 아이라며 돼지 밥으로 백원을 주셔서 더 기분이 좋다.
"돼지야 돼지야. 윤빈이가 나한테 미안하다고 그랬어. 근데 나도 좀 미안한 거 같아서
미안하다고 그랬어. 화해 해서 기분이 진짜 진짜 좋아."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찬은 기겁을 했다.
"으악!"
찬의 비명에 놀라 방으로 뛰어 들어온 부모님은 어디 다쳤나 싶어 찬의 몸을 구석 구석 살핀다.
하지만 다친 곳도 없어 왜 그러냐고 묻는데 이제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찬이 손가락으로 책상 언저리를 가리킨다.
"저기... 돼지가.."
늘 책상위에 올려져 있던 빨간 돼지 저금통은 두 동강이 나 바닥에 뒹굴고 있었고,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동전들도 모두 쏟아져 있었다. 어느새 찬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플라스틱 저금통이라 왠만해서는 잘 깨지지 않는 것이 왜 깨져있나 당황스러운 건 엄마도 마찬가지였다.
엉엉 우는 찬을 달래고 있는데 교복을 입고 학교 갈 준비를 마친 형이 방에 들어왔다.
"어, 찬이 왜 울어?"
"저금통이 깨졌거든. 그거 때문에."
두동강이 난 저금통을 보던 형은 아 그 거 내가 아까 나오다가 잘못 건드렸어. 하며 태연하게 말한다.
"너는 애가! 찬아 아빠가 저금통 새로 사다줄테니까 이제 그만 울고. 응? "
새 저금통을 사다 준다고 해도 싫다고 도리질을 하며 눈물만 흘리고 있다.
그동안 매일 말도 못하는 돼지에게 동전을 넣어주며 말을 걸던 찬이를 생각하면
지금 이렇게 우는 것도 당연하다.
"찬아, 엄마가 형아 혼내줄게. 응? 이제 씻고 밥먹고 유치원 가야지."
아무리 어르고 달래봐도 요지부동이다.
결국 억지로 안아들고 화장실로 데려가 씻기고 옷을 입혀 식탁앞에 앉혔다.
더이상 울면 혼날 것 같아 찬은 꾸역꾸역 밥을 먹는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찬에게 돼지 저금통은 친구였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을 대신한 친구였고, 엄마에게 하지 않은 비밀얘기도 들려주는
친한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한 순간에 없어져 버려서 찬은 지금 너무 슬프다.
밥을 다 먹고 양치를 하던 찬의 눈에 다시금 눈물이 차올랐다.
칫솔을 입에 문 채 아까보다 더욱 많은 눈물이 찬의 볼을 타고 흘렀다.
찬은 오늘 소중한 친구를 잃었다.
첫댓글 아. 찬이 너무 귀여워요 >_< 형이 너무 무심하네요. 동생이 아끼는 저금통을 깨트려놓고도 미안한 기색하나 내보이지 않고 .....재밌게 잘봤어요 ^-^ 건필하세요!
형이 사춘기라 그런가봐요 ㅎㅎ 중학생이니까 ㅎㅎ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ㅋㅋㅋ 왜 웃음이 나올까요..ㅋㅋㅋ 처음에는 좀 무섭거나 새드..비스무리한 건줄 알았는데..ㅋㅋ 찬이 형 너무해요.ㅠ<<재밌게 읽었습니다!!
ㅎㅎㅎ 찬이형 못됐죠 ㅜ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금을보고 님 소설 다 찾아봤는데 ㅋㅋㅋ 이거너무 재밌고 귀여운 소설같아요ㅋㅋㅋ 다음에도 좋은 소설 써주세요~!!
우와 감금 ㅎㅎ..... 네~ 지켜봐주세요 ㅎㅎ
찬이 넘넘 긔여워여 마음이 순수하네여
아직 7살이라 한참 순수할 때이죠~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