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나..라는 단어만 나오면 경기를 앓는 사람들이 많다.
거의 "일본서기"의 독점물처럼 되어 있어 사학계에서는 논의조차 꺼린다.
진경대사탑비에 각인된 김유신의 고국 "임나왕국"은 광개토대왕비에도 언급되어 있는 만큼,
이를 무시할래야 무시할수도 없다.
삼국사기의 지리지에 보면 "대증현은 경덕왕이 동편현으로 개칭"한 혀재의 부산진구 동평동이면,
동국여지승람의 제 23권 동래현 고적조에 "동평현성은...동남쪽 석축이고 서북쪽은 토축으로 둘레가 3,508척"으로서, 금정산성에 연결된 동평,당감동 일대의 고성이었다.
헌데 대증산성 축조 2개월 후에 난데없이 "왜인이 성을 공격" 하였으며,
다음해 4월에도 "월성에 왜병이 내침한다는 풍문으로 백성들이 산곡으로 다투어 도망"가는 비상사태가 벌어진다.
그리하여 신라측은 다음해 3월 "왜인과 강화를 체결"한후 400년간 동래지역(부산지역)에서 홀연히 자리를 감춘다.
이는 즉.. 신라가 동래지역에서 후퇴하였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대증산성을 공격한 "왜"는 도데체 누구였을까.
지금까지 "왜인"이라고 하면 무조건하고 현해탄을 건너온 것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위에 인용한 "왜인"은 바다 건너온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대증산성을 공격한 왜인은
바다건어온 왜가 아니라 실은 대증산성 남쪽 수킬로 지점의 거칠산국을 점령하였던 탈해의 부하 거도.. 즉 오족왜인이며, 이 왜인이 바로 임나왜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임나가야를 신라본기에선 왜라고 표현하였는가..
이는 문무왕의 즉위 경위를 보면 알수있다.
문무왕의 어머니는 김유신의 동생이다.
김유신은 바로 망한 임나가야의 후예이다.
역사에서..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기록을 변조하는것은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임나가야에 대한 기록은 지워버리고.. 왜라는 존재만 남겨놓게 된다.
즉 신라본기 자체에 임나가야 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 편찬 방침을 세운것이다.
이로서 삼국사기에 가야편이 상실된 경위는 해소가 되었을것이다.. 이미 신라는 가야의 역사를
아니 신라에 병합된 가야의 지배층은 자신들의 역사를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신라와 왜의 쟁패
.. 동래 대중산성으로 진출했던 신라는 임나측의 반격으로 후퇴하였으며, 이때의 임나를 신라본기는 "왜"로 바꾸어 썼다.
그후 30년 이 지난 158년 부터 500년까지 342년간 무려 38회에 걸쳐 신라본기에 "왜"가 기재되었다.
이중 평화관계 5건을 제외한 나머지 33건은 모두 왜의 침공으로 일관된 왜침의 기록이다.
서기 158년이면 일본땅에 돌도끼들만 난무하지 않았을까? 철기 유물이나 청동기라도 나왔다면 몰라도
아모튼..
그 기록이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것은 총 33건의 왜침 기록 중 일본서기와 합치되는 기록은 4건이고
나머지 신라본기에서만 기록된 침략 기록은 29건이다.
즉 자칭 왜침이라 기록한것이 29건이다.
지금까지 그 기록에 나온 "왜"를 바다를 건너온 왜로 보아왔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 출몰지점은 의당 부산 근처여야 하지만.. 부산 근처의 출현 기록은 단 한건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지상공격임이 분명한 국경침공이 11회,
공성작전이 10회로서 이중에는
신라의 심장부인 월성침공이 1회, 금성침공이 3회, 경주 토함산과 명활성 침공이 각각 1회씩이다.
다만 해상침공은 그위치를 알수없는 풍도가 2회, 선단침공이 1회이지만,
임나,신라 간 국경이 월성군 모화리여서 해상침공이라고 해서 반드시 바다를 건너온 왜침은 아니다.
결국 총 38회의 왜침기사중 일본이 주장하는 침략을 제외한 나머지는 현해탄을 건너온 왜침이 아닌 임나측 공격이었다.
(당신들도 알지만.. 현재의 학계에서 규정하는 임나는 일본사람들이 자랑스러워 하는 점령지역 아닌가.. 하지만 그 자랑스러운 공격의 기록이 일본서기에는 거의 없다 단 4건만 기록되 있을뿐)
서기 158년 죽령을 열고 왜인이 내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는 아달라왕 시기이며.. 왜인이 국경인 죽령을 넘어온것이라 할것이다.
이때 신라측은 국빈급인 왜의 재상을 데리고 "미륵대원"을 갔는데, 이곳은 당시 집권층이던 박씨왕실의
성역인 현재의 경주 국립공원 서악지구 북쪽의 미륵동이다.
따라서 "미륵대원 동쪽의 입현"은 서악지구 선도산 동쪽의 언덕.. 즉 경주전문대와 경주초등학교 사이에 끼여 있는 선도산의 동북쪽 자락으로 예상된다.
신라측이 왜의 재상을 데리고 자신의 성지로 갔다는것은 곧 모종의 중요한 외교적 교섭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일종의 평화협정이다. (실은 신라 지배층의 지각변동을 예고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때의 왜족은 바로.. 부산지역에 거점을 확보한 가라족.. 즉 모씨혈족이다.
그후 제 9대 벌휴왕이 등극하는데 그는 바로 모씨혈족 계통의 석씨정권을 연 첫 왕이다.
벌휴왕의 즉위로 성립된 석씨정권은 임나측과 통합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그런데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당시 기록을 보자..
벌휴왕 10년 (193년) 6월에 "왜인이 큰 기근을 당하여 먹을 것을 구하러 온자가 1천여 명"에 달하였다.
이들을 바다를 건너온 왜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이들은 바로.. 모화성 고개를 넘어온 임나의 구걸행령이었다.
6월은 바로 가장 넘기 힘들다던 "보릿고개"의 시기이다.
흉년을 당한 임나인들은 동족이던 신라왕실의 동포애를 믿고 대거 월경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이 행렬은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209년에도 범경하였고.. 이때는 큰 충돌이 없었다.
232년에는 대거 월경하여 월성을 겹겹히 애워쌌다.
이때에 이르러 신라는 왜인을 추격 1천여명을 주살시킨다.
이때 희한한 사태가 벌어지는데 249년 4월 왜인이 신라 재상 석불감 석우노를 살해한다.
이야기인즉.. 석우노는 신라 조분왕의 아들로서 임나인과 동족이었다.
그는 왜인들에 대하여"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구이로 삼고 왕비를 부엌데기로 삼겠다"고한 말이 빌미가 되어 왜가 내침하자, 우노는 자기의 세 치 혓바닥이 저지른 잘못임을 뉘우치고 스스로 왜로 잡혀가 처형을 당하였다고 한다.(삼국사기 권 45 석우노전)
그러자 석우노의 처는 신라로 온 왜의 사신을 집으로 초청하여 정중하게 술을 잔뜩 마시게 한 후 불태워 죽여 버렸다.
이일 이후.. 양국의 관계는 험악해져...287년 왜가 일례군을 불지르고1천여 인을 잡아간 보복작전을 계기로 하여 왜침은 292년과 294년 두차례에 반복되었다.
그후 300년 정월에 "왜국과 교빙"하여 312년에는 통혼까지 이루어 지지만.
344년에는 재차 요청한 통혼을 거부함에 따라 외교 관계가 다시 단절되어 346년에 왜병이 금성을 포위하였다.
이러한 임나측 침공은 결과적으로 자기 무덤을 판 꼴이다.
서기 356년 동족인 석씨왕권이 몰락하고 17대 내물왕의 즉위로 김씨왕권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이후의 양측 대결은 양상이 바뀌어 왜측은 364년 4월 토함산을 침공한데다 이어서.. 393년 9월에 임나와 동족이던 비류백제의 망명으로 임나인도 상당수가 뒤따름에 따라.. 임나정세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왜침 기사로 확인된 396년 이전은 임나전사이고.. 이후는 임나후사이다.
영락 6년(396년) 응신의 일본 망명을 기점으로 임나를 장악하려던 신라의 요청에 따라 영락 10년 출동한 고구려의 5만은 임나가라(동래)와 염성(울산)을 점령한 뒤 신라의 수비병을 배치하였다.
이로서 신라는 200여년간의 두통거리가 되어온 원수의 임나를 정령한 것이었다.
이때.. 임나주둔 신라병이 궁월군이 이끌고 망명하던 백제 120현민을 억류하자, 급보를 접한 응신이 동왕
16년 목토숙녜를 파견하니 "신라왕이 경악하여 그 죄를 빌매 궁월군의 인부를 데리고 귀환하였다"
이에 대한 신라측의 실성왕 4년 4월조의 기록을 보면..
"왜병이 경주 명활성으로 내공했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매 왕은 기병으로 독산 남쪽을 공격하여 3백여급을 살획하였다"고 하여 신라측의 승리로 기록되어 있는데
잘 살펴보면..
실성왕 원년(402년? 405년?).. 에 신라는 "왜국과 우의를 통하고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볼모로 보냈"는데
전쟁에서 이겼고.. 화의를 했다면.. 왜 볼모를 보내는가..(왜에서 신라쪽으로 보낸 볼모는 없다.. 말이 돼냐)
기록을 기록대로 믿어선 안돼는 대목이기도 하다..
사실은 패배했음을 기록은 암시하고 있는것이다.
당시 비류백제의 망명행렬은 끝이 없어서.. 봉의공녀,아직기,왕인,아지사주의 백제 17현민들이 속속 망명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아직까지의 임나는 백제유민들의 망명창구였던 것이다.
두번째 임나의 정세변동은 온조백제의 정권교체로 또한차례 흔들리게 된다.
즉 475년 장수왕의 침공으로 한성백제가 붕괴되자.. 웅진백제가 성립되고.. 한성백제는 일본으로 망명한다.
웅진백제는 모씨정권이다.
모씨정권은 집권하자 마자.. 비류백제의 영토와 임나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임나를 점령한 모씨 백제는 임나왕족을 살해하진 아니하였다.
동성왕이 죽고 무령왕이 등극함으로서 .. 대대적인 임나정책 변화를 가져오는데
무령왕은 여씨왕통.. 즉.. 본래의 온조백제 계통이다.
서기 509년 대대적 호적조사가 실행되는 바.. "백제인으로서 임나로 도망와서 본관을 끊은지 3.4대째가 되는 자들을 색출하여 백제로 옮기어 본관을 부여"하여 임나의 낭인집단을 해체한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임나왕을 폐하고.. 백제군 주둔성을 설치하여 임나를 완전히 백제령으로 흡수하였다.
이 조치로서 500년 3월에 "왜인이 장봉진을 침략한것을 " 마지막으로 .. 신라역사 자체에 왜의 침략 기록은 사라진다..
어쩜 이렇게 아다리가 딱 맞나..
이때에 이르러 일본에서는 백제측에 사신을 파견하여.."임나의 복건"을 요구하며 백제와 승강이를 벌였다.
그 사이 신라측은 그 여세를 몰아 진흥왕 23년 마침내 낙동강 건너 김해가라까지 공격해 점령하였다.
간략히 요약하면 이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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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지만.. 임나는 우리의 고대왕국중 하나였다.
현재의 일본과는 하등 관계도 없는 고대 한반도 국가였다.
신라가 임나관가를 타멸한(562년) 이후 임나왕은 물론 백제군령성주도 자취를 감춘다.
그대신 망명정권과 신라가 직접 대결하는 양상이 벌어진다..(그것이 바로 일본서기에 표시된 4회의침략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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