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76편: 양녕의 진솔한 마음
부왕은 양녕이 쓴 '첫줄'에 경악했다.
한양에 입성한 양녕이 창덕궁에 도착했다. 숙위하는 갑사 군사들의 경계가 삼엄했다. 개성에 있는 임금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고삐를 붙잡고 있던 인의가 숙위군 앞으로 다가섰다.“어서 문을 열도록 하라.”
“어명이 있을 때까지 문을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저분은 세자 저하이시다.”
“특히 세자는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있으셨습니다.”
양녕은 어이가 없었다. 창덕궁이 아버지 집이라 하면 세자전은 내 집이지 않은가? 내가 내 집에 들어가는 것도 못 들어가게 하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자전에 이르려면 창덕궁 돈화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엄연한 현실을 긍정하려 들지 않았다. 양녕은 분노했다. 한양으로 돌아가라 해놓고 세자전에 들지 못하게 한다면 노숙하라는 말인가? 부왕이 아버지가 맞긴 맞다는 말인가? “저하, 소인이 알고 있는 김첨지 댁이 인달방에 있습니다. 우선 그리로 드시지요.”
양녕은 돈화문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운종가를 피해 송현을 택했다. 종루길보다 지름길이었으나 적송이 빽빽이 들어찬 오솔길이었다. 와룡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안국방을 지나 고개 마루에 올라서니 경복궁이 한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과 함께 정궁으로 지었으나 주인을 잃고 을씨년스러운 모습이었다.
경복궁의 주인공은 개성에 있다. 차세대 법통을 이어갈 주인공은 둥지에 들지 못하고 헤매고 있다.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된 것 같았다. 고개를 돌려 계곡 아래를 바라보았다. 불에 탄 폐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정도전이 척살당한 취월당이었다. 불길에 그을린 소나무는 새 순이 돋아나고 주변은 울창한 숲으로 변했지만 집터는 그대로였다. 선죽교를 건널 때 느꼈던 정몽주의 숨결과 정도전의 얼굴이 겹쳐져 왔다.
태종 이방원이 양녕을 세자전에 들이지 말라는 엄명에는 다른 뜻이 있었다. 한양에 도착한 양녕이 창덕궁에서 입궁을 제지당하면 돈화문 앞에 자리를 깔고 부왕의 용서를 구하는 석고대죄가 있기를 기대했다. 참회의 눈물을 흘리며 밤을 새우고 있다는 보고를 받기를 갈망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임금의 위엄을 세우고 참회하는 세자의 모습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깊은 뜻과 달리 아들의 행동은 엇나갔다. 석고대죄(席藁待罪)는커녕 분노를 터트리며 사가(私家)로 든 것이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태종은 변계량을 불렀다. “세자가 백성의 집에 거처한다고 하니 그의 불공(不恭)하기가 이와 같다.”
“세자가 백성의 집에 거처하는 것은 어찌 다른 마음이 있겠습니까? 세자가 이미 사리를 알기 때문에 그가 하늘을 속이고 종묘(宗廟)를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임금을 속일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책망하고 스스로를 꾸짖다가 이러한 행동을 하였을 것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입에서 족히 책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경으로 하여금 한경에 가서 그 허물을 말하게 하고자 한다. 경이 경숙(經宿)하는데 수고스러워도 다녀오도록 하라.”
태종의 밀명을 받은 변계량이 부랴부랴 한양을 찾았다. 양녕에게 부왕의 뜻을 전하고 세자전 출입제한을 해제했다. 세자전에 들어간 양녕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부왕에게 올리는 장문의 서(書)를 손수 작성했다. 이름 하여 수서(手書)다. 임금과 세자는 의전적인 글 이외는 직접 글을 쓰지 않는 것이 법도였다.
밤을 새우며 작성한 양녕의 진솔한 마음.
“전하의 시녀(侍女)는 다 궁중에 들이면서 신(臣)의 첩(妾)은 내치려 하십니까? 어찌 모두 중하게 생각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십니까? 전하는 신이 끝내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어찌 알지 못하십니까? 신의 첩 하나를 금하다가 잃는 것이 많을 것이요, 얻는 것이 적을 것입니다. 전하께서 천만세(千萬世) 자손의 첩을 금지할 수 없으니 이것이 잃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어리를 내보내고자 하시나 그가 살아가기 어려울 것 같아 내보내지 아니 하였습니다. 바깥에 내보내어 사람들과 서로 통하게 하면 성예(聲譽)가 손상될 것이므로 내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선(善)함을 책(責)한다면 이별해야 하고 이별한다면 상스럽지 못함이 너무나 클 것인데 악기의 줄을 끊어 버리는 행동을 차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신은 장래 성색(聲色)에 대한 계책을 세워놓고 정(情)에 맡겨서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한(漢)나라 고조가 산동에 거(居)할 때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였고, 진왕(晉王) 광(廣)이 비록 어질음이 천하의 칭송을 얻었으나 그가 즉위함에 미치자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왕자는 사(私)가 없어야 마땅하지만 김한로는 오로지 신의 마음을 기쁘게 하기를 일삼았을 뿐인데 포의지교(布衣之交)를 잊고 이를 버려서 폭로하시니 공신이 이로부터 두려워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 스스로 세자는 새 사람이 되어 일호(一毫)라도 임금의 마음을 어둡게 하지 아니할 것입니다.”-<태종실록>
하얗게 밤을 세웠다. 일고(一鼓)에 붙잡은 붓을 새벽 닭소리와 함께 놓았다. 붓을 놓은 순간 양녕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토록 진지하게 자신과 싸워본 일이 양녕 생애에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양녕은 서(書)를 북쪽을 향하여 가지런히 놓았다. 그리고 삼배(三拜)를 올렸다. 부왕에 대한 경배였다.
이토록 진솔하게 털어놓기는 처음이었다
구구절절한 속내다. 얼마 전에도 어리의 일로 조상에게 바치는 맹세문을 쓴 일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강요된 대필이었다. 애초부터 지킬 의사가 없는 요식행위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리를 첩으로 맞아들일 확고한 대책과 즉위 과정의 세계관을 펼치고 있다. 부왕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이토록 진솔하게 털어놓기는 처음이었다.
글을 작성한 양녕은 내관(內官) 박지생을 개성에 보내어 태종에게 직접 전달하도록 했다. 아버지에 대한 도발적인 양심선언문이었다.
양녕은 밤을 세워 작성한 자신의 글 마지막 줄이 빛을 발하면 세상이 밝아질 것이고, 첫줄에 의미를 부여 한다면 전쟁이 발발 할 것이라 생각했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77편~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