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飛行機)가 탄생(誕生)하자마자 인간(人間)들은 이 신기(神器)한 문명(文明)의 이기(利器)를 무기(武器)로 사용(使用)할 궁리(窮理)를 했습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전투기(戰鬪機)가 공중전(空中戰)을 펼치면서 인류(人類)가 탄생한 이래 그저 바라만 보던 하늘이 격렬(激烈)한 전투 공간(戰鬪空間)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빠른 속도(速度)로 비행하며 3차원으로 기동(起動)하는 적기(敵機)를 잡기는 상당히 어려웠습니다.
뒤로 돌아가 기관총(機關銃)을 난사(亂射)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당연히 상대(相對)도 틈을 주려하지 않았습니다.
↑공중전에서는 적기의 후방 위치에 서는 것이 유리합니다
따라서 공중전(空中戰)의 승패(勝敗)는 전투기(戰鬪機)의 성능(性能)에 더해 이를 다루는 조종사(操縱士)의 능력(能力)에 의해 결정(決定)되었습니다.
통상(通常) 5기의 적기(敵機)를 격추(擊墜)한 조종사에게 최고(最高)라는 의미(意味)를 지닌 에이스(Ace)라는 호칭(呼稱)이 부여됩니다.
5가 적은 것 같아도 달성(達成)하기 대단히 어려운 숫자입니다.
전쟁의 판(版)이 커지면서 뛰어난 에이스들이 속속 등장(登場)하게 되는데,
특히 제2차 대전 당시의 독일 공군(空軍)은 에이스의 보고(寶庫)라고 해도 결코 과언(寡言)이 아니었습니다.
↑제1차 당시 독일의 전설적인 에이스인 리히트호펜(Manfred Albrecht Freiherr von Richthofen, 1892년 5월 2일~1918년 4월 21일)
↑2차대전 당시 핀란드 공군의 포커 D.XXI. 이 기체로 유틸라이넨은 2회 격추 및 1회 격추보조를 기록했다.
무려 100기 이상을 격추(擊墜)한 슈퍼 에이스만도 108명이나 배출(排出)했으며 현재까지 격추 왕 중에서 124위인 핀란드(Finland)의 유틸라이넨(Eino Ilmari "Illu" Juutilainen, 1914년 2월 21일~1999년 2월 21일) 이상은 모두 당시 독일 공군 소속(空軍所屬)이었습니다.
당시 연합군 전체(聯合軍全體)를 통틀어 최고의 에이스였던 소련의 코체더부(Ivan Mykytovych Kozhedub, 1920년 6월 8일~1991년 8월 8일)의 전과(戰果)가 62기라는 점과 비교(比較)하면 독일 조종사들이 남긴 기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충분(充分)히 유추((類比, analogy)할 수 있습니다.
↑연합국 최고의 에이스였던 소련의 코체더부
이처럼 비교(比較)가 불가능(不可能)할 만큼 엄청난 전과(戰果)를 달성(達成)한 대단한 슈퍼 에이스 중에서도 최고(最高)의 기록(記錄)을 기록한 인물(人物)은 에리히 하르트만(Erich Alfred Hartmann, 1922년 4월 19일~1993년 9월 20일)입니다.
전쟁 중 그가 격추(擊墜)한 적기(敵機)는 무려 352기에 이릅니다.
수십 기가 어우러져 싸우는 대규모 공중전(大規模空中戰)이 사라진 현대(現代)에 와서 5기 격추가 거의 없다는 점을 상기(想起)한다면 그가 세운 기록을 능가(凌駕)하기는 불가능(不可能)한 것으로 평가(平價)됩니다.
그만큼 대단한 불멸(不滅)의 기록입니다.
↑재현이 불가능한 352기 격추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운 하르트만
하르트만은 독일의 쇠퇴(衰頹)가 시작된 1942년부터 참전(參戰)했기에 활동 기간(活動期間)이 긴 편이 아니었음에도 엄청난 기록(記錄)을 세웠습니다.
가장 많이 피해(被害)를 당한 소련이 너무 약이 올라 미군에 항복(降伏)한 그를 전범(戰犯)으로 몰아 인계(引繼)받은 후 10년이 넘게 강제 노역(强制勞役)을 시켰을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1955년 석방(釋放)된 후 독일 연방군(聯邦軍)에 재입대(再入隊)해 공군 재건(空軍再建)에 앞장섰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대단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 처음부터 잘 싸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