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15. 주일 큐티
에스라 4:6 ~ 16
첩첩산중을 돌파하는 방법
관찰 :
1) 대적들의 이어진 고소들
- 6절.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 고레스 때에는 고레스의 칙령이 있었기 때문에 유다인들을 고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고레스 사후 아하수에로 왕 때에는 고소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이 고소는 소용이 없게 되었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로 인해서 부림절이 있게 되고, 유대인들이 이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하수에로는 B.C. 485 ~ B.C. 464년까지 재위했습니다.
- 7절. “아닥사스다 때에 비슬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그의 동료들이 바사 왕 아닥사스다에게 글을 올렸으니 그 글은 아람 문자와 아람 방언으로 써서 진술하였더라” => 아닥사스다 왕의 술맡은 관원이 느혜미야였습니다. 이어지는 그들의 고소의 내용은 매우 상세하고 놀라운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첩첩이 쌓여지는 어려움을 극복해 내도록 도우셨습니다. 아닥사스다는 아하수에로의 아들로 B.C. 464 ~ 424년 까지 재위했습니다. 이 때의 고소는 예루살렘 성벽을 보수하지 못하도록 하는 방해였습니다. 히브리 성경은 에스라 4:7 ~ 18절 그리고 7:12 ~ 26절까지 아람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국제 통용 언어가 아람어였기 때문입니다.
2) 고소자들과 고소의 내용
- 8절.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가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려 예루살렘 백성을 고발한 그 글에” => 여기 등장하는 이들은 사마리아인으로 페르시아의 관리였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 9절 ~ 10절.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디나 사람과 아바삿 사람과 다블래 사람과 아바새 사람과 아렉 사람과 바벨론 사람과 수산 사람과 데해 사람과 엘람 사람과 그 밖에 백성 곧 존귀한 오스납발이 사마리아 성과 유브라데 강 건너편 다른 땅에 옮겨 둔 자들과 함께 고발한다 하였더라” => 대적들은 급기야 더 많은 무리들을 규합하여 아닥사스다에게, 사실은 여호와 하나님께 대적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탄이 하는 기본적인 패턴입니다. 진리는 숫자에 연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 힘이 더 있고, 그들의 주장이 옳은 듯이 보여집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주장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3)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린 글의 초본
- 11절.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린 그 글의 초본은 이러하니 강 건너편에 있는 신하들은” => 격식을 갖추어 고소하고 있는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 12절. “왕에게 아뢰나이다 당신에게서 우리에게로 올라온 유다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이 패역하고 악한 성읍을 건축하는데 이미 그 기초를 수축하고 성곽을 건축하오니” => 이들의 주장은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영역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곽을 건축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성을 “패역하고 악한 성읍”이라고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의도성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공격하고자 한 것입니다.
- 13절. “이제 왕은 아시옵소서 만일 이 성읍을 건축하고 그 성곽을 완공하면 저 무리가 다시는 조공과 관세와 통행세를 바치지 아니하리니 결국 왕들에게 손해가 되리이다” => 이들은 일어나지도 않은 사건을 마치 그렇게 된 것처럼 기정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자신들의 전제 속에서 이미 굽어져 있습니다.
- 14절. “우리가 이제 왕궁의 소금을 먹으므로 왕이 수치 당함을 차마 보지 못하여 사람을 보내어 왕에게 아뢰오니” => 당대에 소금 생산권의 장악은 권력의 장악과 다를 것이 없던 때였습니다. 이들은 페르시아의 권력에 복종하겠다는 의미로 “왕궁의 소금을 먹으므로”라고 언급한 것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왕의 충성된 신하로, 자신들이 아닌 왕의 경제적 손실을 안타까워하기 때문에 아닥사스다 왕에서 글을 올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듣는 이의 귀에 감미롭게 들리게 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펼친 것입니다.
- 15절. “왕은 조상들의 사기를 살펴보시면 그 사기에서 이 성읍은 패역한 성읍이라 예로부터 그 중에서 항상 반역하는 일을 행하여 왕들과 각 도에 손해가 된 것을 보시고 아실지라 이 성읍이 무너짐도 이 때문이니이다” => 이들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남유다의 끝 무렵에 바벨론에 대항하고자 애굽과 손을 잡으려는 시도를 계속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벨론이고, 페르시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었지만, 이들은 그것을 이렇게 갖다가 붙였던 것입니다.
- 16절. “이제 감히 왕에게 아뢰오니 이 성읍이 중건되어 성곽이 준공되면 이로 말미암아 왕의 강 건너편 영지가 없어지리이다 하였더라” => 대적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패역한 족속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논지는 사실 희미할 뿐입니다. 다른 이들의 명예를 훼손시킴으로 자기 자신들의 입지를 견고하게 하려는 악한 의도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의 하는 짓이 바로 언제나 이렇습니다. 있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기정사실화해서 몰아붙이는 악한 짓을 대적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침 :
1)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은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방해하고 괴롭히고 있습니다. 이들은 아하수에로 왕 때 고소했다가 모르드개와 에스더로 인한 부림절 사건으로 이들의 술수가 좌절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아닥사스다 왕 때 다시금 고소했습니다. 사탄 마귀의 궤계는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무너지고 포기할 때까지, 좌절할 때까지 계속해서 반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절망하지 않는 한, 대적의 궤계가 계속 이어지겠지만, 절망하지 않기에 승리는 절망하지 않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이들을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대적은 그것을 알기에 절망하지 않는 이에게 절망을 심어주기 위해 죽어라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소망을 품으며 사랑으로 나아갈 때 좌절과 절망을 이기고 대적의 고소를 무너뜨리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아닥사스다 왕 때에는 느헤미야가 있어서 원수들의 문제와 궤계를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졸개들의 악날한 수작에 대해서 사람을 준비하시는 것으로 도우셨고, 승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아하수에로 왕 때는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통해, 아닥사스다 왕 때는 느혜미야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원수들의 고소의 내용은 치밀하고 악한 의도를 가지고 사실과 거짓을 교묘하게 섞어놓았습니다. 사실 그 내용대로라면 이스라엘에게 소망이 없도록 수를 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문제들을 사람을 준비하셔서 이겨내도록 하셨습니다. 사탄 마귀의 궤계를 이길 힘은 전략과 전술 이전에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사람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 자신이 하나님이 준비시키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러한 첩첩산중의 상황을 벗어 날 수 있습니다.
3) 에스라는 이 모든 상황을 통과한 사람으로서 이 글을 기록함에 있어 모르드개와 에스더, 그리고 느헤미야를 염두에 두고 이 본문을 기록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문의 현재 상황으로는 성전 건축이 중단되고 막막한 상황으로 이어지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사람들로 돌파가 일어납니다.
적용 :
1) 사탄의 고소 내용은 참으로 악날하고 악독합니다. 그러나 소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과 역경속에서도 그것을 극복하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은, 하나님이 준비하시는 방법은, 돈도 권세도 그 무엇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나 자신에 집중하겠습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이 준비하시고, 찾으시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람을 찾는 능력을 배양하겠습니다.
2) 문제와 역경 속에서 꼼수를 부릴 생각을 하지 말고 그럴수록 사람을 키우겠습니다. 내 주위의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세 자녀, 그리고 북경한인교회를 통해서 만나게 되었던 귀한 동지들, 그리고 북경 출신의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 이런 이들을 주님의 안목으로 보고 이끌어 줄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새로운 일꾼들을 만나게 하실 주님의 역사를 기대합니다. 주여, 제게 그런 안목을 주시옵소서. 주여, 제가 그런 역경을 돌파할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3) 둥지 모임에서 귀하고 소중한 나눔을 갖게 하심에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주님께서 은혜 중에 이들과의 만남이 앞으로도 선하고 건설적으로 이어지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