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타나시오의 교훈: 정통 신앙과 정통 실천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
사도 15,7-21; 요한 15,9-11 /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024.5.2
오늘 복음은 포도나무의 비유에 이어서 나오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은 농부이시고, 당신은 포도나무이시며, 제자들은 그 나무에 붙어 있어야 하는 가지라고 비유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즉 제자들이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으면 많은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을 것이지만,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즉 가지가 나무로부터 떨어져 나가면 말라 버려서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거나 불에 태워져 사라질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교회와 신앙인들에게 매우 엄중한 뜻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의 뜻에 따라서 한 번 더 강조하셨으니, 그것이 오늘 복음 본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셨던 방식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었다는 것인데,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라는 당부였습니다. 그리하면 예수님께서 누리시던 기쁨을 그들도 충만하게 누리게 되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요한 15,11)
초대교회의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남겨 주신 당부와 약속에 충실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테파노의 치명 이후 일어난 박해를 피해 북쪽으로 가서 안티오키아 공동체를 일군 교우들을 위해 사도들은 바르나바를 파견하였고, 바르나바는 고향인 타르수스에 은신해 있던 바오로를 발탁하였으며, 안티오키아 공동체는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소아시아로 이 두 사도를 선교사로 파견하는 등 활발하게 예수님의 복음 선포 활동을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선교 활동을 벌이던 중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유다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던 중에 바리사이파 소속으로 추정되는 지도자급 유다인들이 박해를 일으키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두 사도는 이방인들, 즉 그리스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는데 구약성경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율법을 다 지키겠다고 서약하는 할례를 강요할 수 없어 면제를 해 주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주로 예루살렘에서 활동하던 사도단의 수하들이 이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는데, 그들이 보기에는 함부로 할례를 면제해 준 바오로의 이완주의적 태도가 심히 못마땅하였으며 자칫하면 신앙의 정통성을 훼손시킬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시도라고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사도단에게 중재 요청을 하기에 이르렀고, 사도들은 격론을 벌인 끝에 하느님께로 돌아오는 이방인 입교자들에게는 할례를 면제하고, 그 대신에 우상 숭배를 하는 대신에 도덕적인 생활을 할 것이며(사도 15,20), 가난한 이들을 기억하라(갈라 2,10)고만 당부하였습니다. 갈라티아서 2,9에 의하면, 이 예루살렘 사도회의 후에, 이방인들에 대한 선교 활동이 공식화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서기 70년 경에 유다인들 110만 명이 죽임을 당하는 대학살과 예루살렘의 성전과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는 이스라엘 독립전쟁이 끝나고, 로마제국 영토에서 거주하던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 대한 선교 활동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던 3세기 무렵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문제란 예수님의 신원 이해와 신앙의 정통성 확립과 관련된 문제로서, 이를 위협하던 당시의 이단 사상은 ‘입양설(入養說)’과 ‘영지주의(靈知主義. Gnosticism)’였습니다.
입양설이란, 비록 소수이기는 했지만 당시 고대 교회의 주류로 자처하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남아 있던 사상입니다. 즉, 나자렛 예수는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선포한 복음과 사랑의 공로로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신 분이라고 이해하려던 이단 (異端), 즉 다른 가지였습니다. 이는 그분의 부활을 온전히 믿지 못하는 태도에 기인한 것이었으며 결국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의 일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심각한 오류였습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하고 더 널리 퍼져 나갔던 영지주의는 특히 영향력이 컸던 사제 아리우스에 의해 주도되면서 그리스 출신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입양설이 부활의 신비를 부정하는 오류를 초래했다면, 아리우스 이단은 강생의 신비를 훼손하는 오류를 초래하였습니다. 아리우스 사제는 예수님의 신성을 존중하는 나머지, 그분은 사람의 육신을 잠시 취하셨을 뿐 영험한 지혜 즉 영지(靈知. Gnosis)를 지니신 분이라고 설명함으로써 이방인 출신 신자들이 이해시키기는 쉬웠을른지는 몰라도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를 약화시키거나 훼손하는 오류를 범했습니다.
사실 입양설이나 영지주의를 비롯해서 고대 교회가 오늘날과 같은 신앙교리를 확립하기까지 여러 이단 사상들이 출몰했습니다.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시금석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하느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강생의 신비는 물론 부활의 신비를 아우르는 문제였기 때문이고, 그제까지 출현했던 인류의 그 어떤 사상으로도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교회가 기리는 성 아타나시우스 주교 학자는 3세기 말에 활약하면서 특히 아리우스 이단과 사상적으로 투쟁하는 가운데 오해도 받고 유배도 당하는 고초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도 고대 교회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진리로 고백하는 정통 신앙을 확립하게 하는 데 빼어난 활약을 펼쳤습니다.
이 사상 투쟁 과정에서 이단 사상들 가운데에서 정통 신앙을 식별하도록 이끄신 분은 성령이십니다. 하여, 지금 우리가 고백하는 대로 참 하느님이시며 참 인간이신 분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고백하자면 비천한 인간성을 취하신 강생의 신비에 따라서 인간의 여러 조건에 따라 자칫 유린당하고 훼손당할 수도 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서도 신성한 존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전쟁, 노예제도, 인신매매, 신분제도 등 인간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고 말살할 수도 있는 사회악을 제거하려고 노력하고 실제로도 개선하려는 노력은 대부분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교회는 추후에 이를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계 인권 선언이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계 인권 선언의 정신과 권위를 인정했다는 면에서 매우 의미있는 교도권 언명(言明)이었는데, 이 공의회 이후 라틴 아메리카의 신앙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 대해서 취하신 입장과 최후 심판의 말씀을 기준으로 하자면, 정통 신앙을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정통 실천을 행해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하는 것으로는 모자라고, 하느님께서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해야 하며, 단지 전례에서 신앙고백을 하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생활에서 가난한 사람을 하느님 사랑으로 존중하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나자렛 회당에서 당신의 사명을 천명하실 때에도 이끄신 분은 성령이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루카 4,18)
이토록 예수님의 으뜸가는 사명으로 천명되었던 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고대 교회에서 사상 투쟁의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는 초대 교회 이래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사랑을 나누는 전통이 너무도 생생했기 때문에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갈수록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불평등이 고착되어 가는 현 상황을 감안하면, 마땅히 예수님의 복음에 더 가까운 형식으로 신앙이 고백되어야 하고, 또 고백된 신앙이 실천으로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날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이끄시는 성령의 빛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생산과 소비와 분배에 대한 복음적 안목이 현대인의 구원에 필수적입니다. 우선, 옛날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풍요로워진 물질 생활에 대해 감사하고 절제하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과거의 왕이나 귀족들에게나 가능했던 물질 생활이 일반적인 현대인들에게 가능해졌는데도 감사하거나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물질적 문제가 아니라 영적인 문제가 원인입니다. 그 다음, 물질에 인간 노동을 가하여 인류의 물질 생활과 복지에 기여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노력에 품위를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셋째로,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만이 아니라 분배에 있어서도 정의가 실현되어서 모든 사람들이 재화가 결핍되어서 고통받지 않을 수 있도록 사회를 끊임없이 개혁해 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사람이 부유하게 살자고 하면 지금처럼 빈부격차가 커질 수 밖에 없지만 모든 사람이 검소하게 살자고 하면 모든 사람이 재화의 결핍 때문에 고통받지 않을 수 있으며, 거기에 물질에 대한 감사의 영성으로 살아가면 지금보다 행복감이 더해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보다 하느님께 순종해야 마땅하듯이(사도 5,29), 물질을 섬기거나 물질을 많이 가진 자들에게 굽신거려야 하는 체제가 아니라 모든 이들이 물질을 고르게 소비하거나 사용할 수 있도록 절제하려는 마음과 약간의 물질 부족과 재화 결핍에 대해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영성을 존중해야 합니다. 체제가 아니라 영성입니다!
아타나시오 성인이 분투노력했던 바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인류가 받은 계시를 올바로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과, 그 계시에 대한 신앙고백은 실제 현실을 반영해야 살아있는 신앙고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당시와는 달라진 오늘날의 시대상황에서도 살아있는 신앙고백을 하자면 좌표조정 작업이 필요한데, 그것은 이렇습니다. 인간과 물질에 대한 이해가 반영되어야 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인간 존엄성을 존중해야 하며, 하느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물질을 모든 사람이 고르게 사용할 수 있도록 세상을 개혁해야 하고, 특별히 가난한 이들에게 가진 것을 나눔으로써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행복과 구원을 함께 누려야 한다는 뜻이 우리의 신앙고백에 담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되고, 그분이 허락하신 기쁨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