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단의 문을 허물어온 겁 없는 인생
중령과 대령시졀, 저는 홍릉에 있는 국방연구원에서 국방자원의 효율화 분야를 담당하는 간부였습니다. 제가 연구소에 들어간 시점은 1981. 7월경, 그 다음해 초부터 조용하던 군에 일대 회오리 바람이 잠잘 날 없었고, 그 회오리 바람은 모두 제가 일으켰던 바람이었습니다.
예산을 다루던 군의 간부들, 무기체계 구매를 담당하는 간부들, 군수분야 간부들, 방공포, 레이더, 작전분야 간부들, 조달본부, 원가계산 담당자들, 수리부속구매관들, 계약을 주관하는 간부들 모두가 저를 미워하고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금단의 문 뒤에 감추어진 병리현상들과 비밀들을 겁 없이 파헤쳤습니다. 좌충우돌, 그야말로 겁 없는 사나이, 풍운의 사나이였습니다. 제 연구결과에 따라 당시 윤성민 국방장관은 전국적으로 예산개혁, 군수개혁, 율곡사업 개혁을 주도 했고, 저는 전군을 돌아다니면서 새로운 개념에 대해 강의를 하고 다녔습니다.
저를 국보라고 극찬하는 군의 어른들도 있었지만, 저를 문제아라며 미워하는 어른들도 있었습니다. 드디어 공군이 휴즈사로 부터 구매한 방공자동화 사업이라는 금단의 문을 부숴버렸습니다. 1975년부터 당시 2억 5천만 달러에 구매한 장비를 25달러 가치도 없는 폐물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했고, 이 보고서는 보안사를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이는 군에 그야말로 핵폭탄 급 충격을 주었습니다.
1987년 윤성민 장관에서 육사11기 이기백 장관으로 바뀌었습니다. 당시 공군총장은 장관에게 가서 지만원을 택하던지 공군을 택하던지 택일을 하라는 최후통첩 식 주문을 했고, 그로부터 저는 연구소를 떠나 국방대학원 교수로 가라는 압력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때가 군을 그만둘 시기라 생각하고 과감하게 전역지원서를 냈고, 1987년 2월말 예편을 한 후 곧장 미국으로 건너가 모교에서 교편을 잡는 것으로 인생의 길을 바꾸었습니다. 1989년 말에 귀국하면서부터 “영원한 자유인”을 표방하며 저술, 강연, 방송, 기고 등으로 한 10년간 아주 순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사회에 수많은 표현들을 해왔습니다.
“70만경영체 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 처녀작이었는데 이 책은 우리사회에 엄청난 충격차를 던졌습니다. 모든 언론들이 ‘신선한 충격’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부터 저는 일약 유명해지기 시작 했습니다. 율곡사업 이라는 금단의 문을 처음으로 부수어 버린 것 이었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저는 수많은 금단의 문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박정희를 밟아야 인정받던 시대에 박정희를 존경한다, 숭배한다, 띄웠습니다. “문서 공개할수록 박정희는 빛난다.” 이 글은 아마 두고두고 고전으로 인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김구를 내리고 이승만을 추켜올렸습니다.
민주화 세력을 공산세력으로 적시하였습니다. 김대중을 김정일에 충성하는 좌익이라 했습니다. “이제는 나서야 한다.” “김대중 정부, 적과의 내통을 의심한다.” (2001. 2. 한국논단)누구도 할 수 없는 일, 하기 싫어하는 일을 제가 했습니다.
5.18 역사를 뒤집었습니다. 일제시대의 일본의 긍정적인 역할에 대해서도 처음으로 언급하였습니다. 위안부의 왜곡된 아성도 허물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모하고 아슬아슬한 일들을 저지른 것입니다. 제 인생, 이제 돌아보면 어제는 저 사람의 주먹에 터지고, 오늘은 이 사람의 주먹에 터지는 그야말로 피로 범벅된 그런 삶을 살아왔습니다.
광주에 묻은 한의 세월
2002년 10월 22일, 광주검사 최성필이 보낸 경찰들이 안양 아파트로 들이 닥쳤습니다. 저는 그들이 테러범인줄로만 알았습니다. 그 만큼 거칠고 경찰 같지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막무가내로 저를 끌어냈습니다. 목욕탕에서 나와 팬티만 입고 있는 제게 옷을 입을 권리도 주지 않고 그대로 연행하겠다며 끌어냈습니다.
저를 승용차 뒷좌석 가운데 태우고 수갑을 뒤로 채운 후 자식 같은 나이의 경찰들이 머리를 쥐어박고 뺨을 때리고 온갖 전라도식 특유의 욕설을 하며 물리적 언어적 폭력과 린치를 가했습니다. 이것이 민주화의 성지에서 왔다는 경찰들의 태도였습니다.
영장실질 심의를 하는 판사가 탁자를 치고, 저를 노려보면서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아버지벌 되는 광주출신 변호인에게 “변호인은 광주 시민들로부터 무슨 욕을 먹으려고 이런 자의 변호를 맡았소?” 하고 윽박질렀습니다.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라 후레와(후례) 폭력의 공화국이었습니다. 나무마루 바닥으로 된 구치소에 101일간 감금돼 있었습니다.
한방에 14명이 낮에는 담요 한 자락만 깔고 벽에 나란히 붙어 앉아 차렷 자세로 보냈습니다. 사람이 많다보니 어깨와 어깨가 맞닿았습니다. 밤에는 칼잠을 자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요란하게 내뿜는 코골이 속에서 신경질을 잠재우고 잠을 청하려고 고군분투 하였습니다.
재판부에는 수도 없이 답변서를 제출하여 광주의 명예에 대한 당사자 사건을 광주 법관들이 재판하는 것에 무슨 승복력이 있느냐며 그 곳 법관들을 조롱하듯 몰아쳤습니다. 감옥에서 환갑을 맞았습니다. 가족이 새벽 4시에 눈바람을 뚫고 내려와 면회를 하였습니다. 단5분이었습니다. 가족이 돌아간 후 복도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한참동안 어깨를 들먹이며 펑펑 울었습니다.
제 변호인들은 서울이 행위지인데 광주에서 재판받을 이유가 없다며 관할을 서울로 옮겨 달라 소송을 냈지만 대법원도 외면했습니다. 대한민국 위에 광주공화국이 있었습니다. 이때가 바로 제가 김대중과 임동원으로부터 미움을 받아 국정원으로부터 1년 반 동안 도청되고, 해코지를 당했던 시기였습니다.
수많은 재판에서 모두 패소했습니다. 1심에서 승소했던 사건들이 2심에서 줄줄이 뒤집혔습니다. 아마도 협심증은 이때부터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서울 구치소에 2년 있었습니다. 좋은 방에 있었지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지 말아야 할 곳이 감옥이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이 인생 최악의 한계 상황
제가 그토록 자신 있게 내놓았던 이명박 수첩, 그 책으로 인해 감옥에 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5.18에 대해 특별법과 다른 우익사관을 표현 했다하여 감옥에 잡혀갈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로 두 번씩이나 감옥에 와서 고초를 당한다면, 아니 여러분들이 그런 고초를 당하셨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사방이 지뢰밭이라 어느 방향으로든 발을 내딛기가 겁이 날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지뢰처럼 깔려있는 법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바뀌지 않으면 저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 계속하여 감옥을 들락이며 인생을 허무하게 마감할 것입니다. 헌법은 우리에게 행복추구권을 보장한다 합니다. 제게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많이 바뀔 것입니다.
감옥이란 들어오기는 쉬워도 나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제 나이 67세입니다. 내일 모레면 70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10년 전이 엊그제만 같습니다. 앞으로 제가 10년 이상을 더 살 수 있겠습니까? 건강한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살 수 있겠지요. 10년은커녕 저는 지금 이 감옥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양쪽아래 어금니는 각 편에 두 개씩 흔들려 염증을 자주 일으키고, 피를 묽게 해주는 협심증 약을 거르지 말고 복용해야 하기 때문에 지혈이 어렵다며 이곳 간이 치과에서는 발치해 주기를 전면 거부합니다. 끼니때가 오면 죽을 먹는데도 고통스럽습니다. 죽이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하루 종일 기력을 잃고 방바닥에 깔려 있다가 감방 사람들이 SOS를 쳐서 링거주사를 맞으면 며칠 움직입니다.
이것이 생사의 한계 상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심리적 공항이 엄습합니다. 육체가 기력을 잃으면 정신도 병이 듭니다. 이런 상태로는 일을 하기는커녕 살아가는 데에도 벅찹니다. 일을 할 때에는 1박2일 국내여행도 한번 해보지 못했습니다. 토요일도 일했고, 일요일의 대부분도 사무실에 바쳤습니다. 저는 참으로 바보같이 살았고, 가족에게도 못할 짓을 하였습니다.
좌우 돌아볼 사이 없이 일을 너무 했기 때문에 감옥에 온 것입니다. 이런 제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 이런 사람을 놓고 다른 사람들도 아닌 주변 사람들이 괴롭혀왔습니다. 구명운동에 동참하기는커녕 구명을 위한 노력에 대해 시비를 하고 당을 떠나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제가 없는 동안 감정싸움을 하고 파워게임을 하다가 당을 나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장수를 감옥에 보내고 망연자실한 마음을 다잡고 동분서주 뛰어 다니는 중앙당 간부들을 향해 무엇이 모자라느니 하면서 분란을 일으키고 분위기를 나쁘게 몰아가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제게 실망했다고 편지를 쓴 사람도 있습니다. 참으로 매정한 사람입니다. 이런 분들 중에 제게 편지 한번 써서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준 분이 없습니다. 이 모든 행동은 제게 돌을 던지는 행동들입니다.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는다고 당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절대로 당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아니면 저를 동정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제가 없는 동안 당을 나가거나 당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당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닐 것입니다.
저와 당을 비난하기 전에 스스로는 당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생각들 해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모든 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제가 없는 동안 불평불만의 글을 게시판에 올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어떤 명분으로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조용히 뒤에서 도와주시는 분들 많이 계십니다.
불평, 불만을 말씀하시는 분들은 실질적으로 당에 성실하지 않은 분들일 것입니다. 하고 싶은 불만이 있어도 그 것이 당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면 삼가 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어려우면 그냥 조용히 떠나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조용히 당을 사랑하고 저를 신뢰해 주시는 아주 적은 수의 정예 당원들만을 필요로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감옥에서 나갔을 때 배가 12척이었다 하지요? 제게도 그렇게 남은 듬직한 동지들만을 필요로 할 것입니다. 또한 당을 일단 나가신 분들도 게시판에 글을 쓰지 마십시오. 환영하지 않습니다. 반면 이제까지 참아 주시고 배려해 주신 모든 당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 말씀드립니다. 당을 지켜 주시기 바랍니다.
저에 대해 아직도 애정을 가지고 계신 분 들은 저를 도와주시는 길이 있습니다. 10시1반으로 힘을 합치면 큰 힘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사무실로 전화를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의 건강과 행복을 빌어 드립니다.
2007. 11. 5. 지만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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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넘에 주뎅아리 참 박정희대통령 묘소 참배도 매년오는데 일찍왔다간 박사모 회장님 기록함 보시거 언론에 공개합시다 정말 저인간이 왔다갔는지 매년왔다 갔다고 했는데 정말인지 확인해서 인터넷에 올려 막퍼옴겨야지요
미친 인간 절라도 아니랄까봐 어디 박사님이 매번 박대통령 묘소에 참배한다고 되어있나요? 트집 잡을 것이 없으니 지어내어서 트집이라... 시스템 창당 이래 쭉 무슨 날에는 박대통령을 참배했거늘 대한민국의 1등 애국지사님을 감히...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광주 공화국이란 말씀 오른 말씀입니다.
역사는 당신을 의인 으로 기억할 것입니다, 건강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국은 당신이 정의와 진실 을 위해서 더많은 수고를 바라고 있읍니다,
저렇게 머리좋고 시스템적으로 분석력이 뛰어난 애국지사님이 한사람 만들어지기가 어렵기에 우리는 그분에게 보배로이 생각하고 언제나 감사와 존경심을 가져야 한다.
왜 광주는 있는 사실 그대로를 얘기하면 몰매를 맞아야 하나요? 다른 곳은 그러지 않는데 유독 거기는 참 이상합니다.
김용갑 의원님도 매스컴 외엔 당연한 사실을 아무도 말못하는 진실을 얘기했는데 벌을 받고... 벌때처럼 달려들고 어디 그래서 바른소린들 누가 할 수 있는가?
없는 것을 만들어서 얘기하면 안되지만 있는 사실을 얘기못하면 여기가 공산주의 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