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호지(水湖誌) - 17
제3장 표범머리를 가진 남자
제9편 귀양지에서 9-1
사랑하는 아내 장씨와 애끓는 작별을 마치고, 임충은 창주 땅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를 압송하는 두 명의 관리는 동초와 설패였다.개봉부 공문에는 임충을 창주 노성으로
넘기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들은 가는 도중에 임충을 없애버릴 계획이었다.
임충이 떠나기 전에 육겸이 두 사람에게 은자 열 냥을 주고, 고태위의 분부니 가는 길에
죄인을 없애라는 당부를 했기 때문이다.때는 6월의 폭염 길이었다.
불볕더위에 숨이 턱턱 막히는데다 임충은 종기가 나서 걷기가 더욱 힘들었다.
“여기서 창주까지 2천 리가 훨씬 넘는데 언제 가려느냐? 어서 빨리 걸어라!”
동초와 설패는 몽둥이를 휘두르며 그를 소처럼 끌고 갔다.
낮인데도 해가 가린 울창한 숲속에 도착하자, 세 사람은 더 이상 걷지 못하고 모두 쓰러졌다.
그곳은 야저림(野猪林)이라는 곳으로 동경성에서 창주로 가는 가장 험준한 곳이다.
동초와 설패는 큰 소나무에 임충을 묶어놓고 말했다.“육겸이라는 자가 고태위의 분부라고
하면서 너를 죽이라고 했다. 어차피 죽을 텐데 더 고생하다 죽는 것보다는 미리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우리 여기서 이만 끝장내고 말자.”
그 말을 듣자 임충은 눈에서 눈물을 흘러내리며 애원했다.
“두 분은 나와 원수진 일이 없는데 왜 나를 죽인단 말이오. 내 목숨을 살려주시면,
그 은혜는 맹세코 잊지 않을 것이오.”그러나 동초는 코웃음을 쳤다.
“여보게, 이 녀석과 한가하게 수작이나 할 텐가? 어서 요절내고 가세.”
설패가 몽둥이를 들어 임충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찰나였다.송림 속에서 벼락같은
호통소리가 들리며 한 자루의 철선장이 날아와 두 사람의 몽둥이를 떨어뜨렸다.
“네, 이놈들아,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호통소리에 놀란 임충이 고개를 들었다.
호통을 친 사람은 뜻밖에도 노지심이었다.
두 사람이 놀라서 어쩔 줄을 몰라 벌벌 떨고 있을 때 노지심이 다시 소리쳤다.
“이놈들아! 너희 두 놈의 머리통과 이 소나무 중 어느 것이 더 단단한지 시험해 보겠다.”
노지심이 철선장을 번쩍 들어 소나무를 내리치니 소나무는 단 번에 우지끈 하고
두 동강이 나버렸다.그러자 동초와 설패는 혼쭐이 나서 달아나 버렸다.
며칠 후 노지심과도 헤어진 임충은 시진(柴進)의 집을 찾았다.
시진은 주나라 세종 황제의 자손으로 무덕 황제가 내린 책과 철로 만든 활을 가지고 있어서
아무도 그를 얕보지 못하는데다 큰 재산가여서 그의 이름은 멀리 동경까지 알려진 터였다.
임충은 시진의 집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을 알고 한번 만나보고 싶어 찾아갔다.
시진 역시 80만 금군 교두인 임충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시진은 임충의 방문을 몹시 반가워하며 곧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주객이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 때 기골이 장대한 사내가 거만한 태도로 그들 앞에
나타났다.임충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러나 홍교두라 불리는 그는 거만하고 괘씸하게 굴었다.
“대관인께서는 왜 유배당한 군장 따위를 정중하게 접대 하시는지요?”
홍교두는 임충을 대놓고 하대하는 말을 하자, 시진이 그의 말을 받았다.
“이 분은 80만 금군교두 사부십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하하하, 대관인께서 워낙 창봉을 좋아하셔서 가끔씩 유배당하는 어중이떠중이 군인들이
창봉 훈련관이라고 찾아와서 배불리 얻어먹고 돈까지 뜯어가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임교두는 천하의 고명하신 호걸이십니다. 부디 말씀을 삼가십시오.”
그러자 홍교두는 앉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임충을 향해 말했다.
“어디, 네 봉술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한번 겨뤄 볼까?”때마침 달빛이 낮처럼 훤히 뜰을
밝히고 있었다.홍교두가 뜰로 나가 창봉을 잡자 임충은 시진의 스승을 욕되게 하는 것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하여 선뜻 응하지 않았다.
그러자 홍교두는 자기의 위세에 겁을 먹은 줄 알고 기고만장이었다.
곁에서 보고 있던 시진은 심히 괘씸하여 임충에게 말했다.“홍교두가 저러니 부디
겸손해하지 마시고, 한번 봉술을 시험해 보시지요. 그간 홍교두가 늘 적수가 없다,
적수가 없다하셨습니다.”임충이 말을 들어보니 홍교두는 시진의 스승도 아닌 것 같았다.
임충은 이내 몽둥이를 들고 그의 가슴을 겨누고 섰다.
홍교두는 몽둥이를 번쩍 치켜들고 그의 머리를 노렸다.
물론 홍교두는 임충의 적수가 아니었다.두어 합이 못되어 허리로 번개같이 들어오는
몽둥이를 막아내지 못하고, 홍교두는 땅바닥에 나둥그러지고 말았다.
곁에서 보던 시진은 물론 장객들이 크게 웃었다.홍교두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시진은 더욱 임충을 공경하여 후당에 머물러 있게 하고 날마다 대접했다.
- 18회에 계속 -
★ 수호지(水湖誌) - 18
제3장 표범머리를 가진 남자
제9편 귀양지에서 9-2
임충은 그곳에 한동안 머문 후에 스스로 귀양지인 창주로 가서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시진이 써준 편지와 스물다섯 냥의 은자로 임충은 죄인이면 의례 받아야 하는 1백대의
형벌을 모면했던 것이다.그리고 매일 사당에 나가 아침과 저녁 두 차례 향을 피우고 마당을
쓰는 일을 계속했다.세월이 흘러 첫 겨울이 된 어느 날 임충이 오래간만에 거리로 나가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문득 등 뒤에서 누가“임교두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하는 말이 들려왔다.이곳에서 자기를 알아볼 사람이 없는데, 웬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보니 뜻밖에도 이소이(李小二)라는 사내였다.
이소이는 동경의 주막집에서 일하던 남자였다.
그는 한때 주인의 돈을 훔친 것이 발각이 되어 관청에 붙들려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임충이 돈을 물어주고 그의 죄를 면하게 한 다음 여비를 주어 동경에서 떠나게 한 은덕을
베푼 적이 있었다.그는 그 후 창주로 와서 주점 주인 왕이라는 사람의 데릴사위가 되었으나
몇 해 후에 장인장모가 죽자 지금은 주점의 주인이 되었다.그는 한시도 임충의 은혜를
잊은 적이 없었다.이소이는 임충이 귀양살이 온 신세라는 것을 알고 마음이 아팠지만
한편으로는 은혜를 갚을 기회가 와서 기뻤다.
이소이는 틈만 나면 임충을 집에 청해 음식을 대접하고 새 옷을 사주고 빨래도 해주었다.
천리타향에서 귀양살이 하는 임충으로서는 이소이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어느 날 이소이의 주점에 동경에서 온 손님 둘이 찾아와 술과 안주를 시켰다.
두 사람의 행동이 수상한 것을 안 이소이가 의심이 나서 아낙을 시켜 몰래 옆방에서
말을 엿듣게 했다.워낙 은밀히 하는 얘기라 자세히 듣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 입에서 간간히 ‘고태위’니, ‘임충’이니 하는 사람의 이름이 섞여 나오더니
마침내 육겸이라는 이름이 입에 올랐다.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육겸이었다.
임충은 이소이가 말한 나이는 서른 살쯤에 키가 5척밖에 안 되고, 수염이 없고 얼굴이
검붉은 사람의 인상착의가 바로 육겸이라는 것을 알았다.
‘놈이 나를 죽이려고 여기까지 찾아왔구나. 그놈을 그냥 둘 수가 없구나.’
임충은 철물상에서 해완첨도라는 칼 한 자루를 구해 성내를 헤맸지만 닷새가 지나도록
육겸을 찾을 수가 없었다.엿새가 되는 날 관청에서 임충을 불러 군마들의 먹이를 관리하는
초료장에서 일하라는 분부를 내렸다.그곳은 사당을 관리하는 일보다 더 편한 일이었다.
임충은 곧 이소이와 작별하고 짐을 꾸렸다.
그는 해완첨도를 허리에 차고 창을 손에 들고, 호위병과 함께 초료장으로 향했다.
때는 추운 겨울인데 검은 구름은 하늘을 덮고, 바람은 크게 불며 눈이 펄펄 내렸다.
가는 도중 주막에서 술 몇 잔 걸친 다음 임충이 초료장에 도착하니 황토 담장 안에 있는
몇 개의 초가삼간이 그나마도 모두 마초가 쌓인 곳간이었다.
그 중 한 집에는 늙은 죄수 한 명이 외롭게 불을 쬐고 앉아 있었다.
임충과 함께 간 간수가 노인에게 말했다.“관영에서 이 사람과 임무를 교대시켰으니
너는 천왕당으로 가거라.”늙은 죄수는 임충에게 열쇠꾸러미를 내주면서 말했다.
“냄비와 식기는 두고 갈 테니 쓰시오.”“나도 천왕당에 식기들을 두고 왔소.”
“술 생각나거든 벽에 걸린 저 호리병을 들고 동대로에 가시면 술집이 있습니다.
그럼 평안히 지내시오.”늙은 죄수와 간수가 돌아간 후 임충은 혼자 남았다.
말이 집이지 벽에서는 찬바람이 들이닥쳐 무척 추웠다.
임충은 여기서 겨울을 지낼 생각을 하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내일은 미장이를 불러다가 집수리를 해야겠군.”임충은 추워서 견디지 못하고 늙은 죄수가
말한 대로 벽에 걸린 호리병을 창끝에 매달고, 삿갓을 쓰고, 동대로 술집을 찾아갔다.
술과 고기로 배를 채운 임충은 한 식경(一食頃, 약 30분 정도로 밥 한 끼 먹을 시간)이나
지나서야 초료장으로 돌아왔다.그러나 놀랍게도 초가집마저 바람에 쓰러져 있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길가에 있는 옛 무덤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
묘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주막에서 가져온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문득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초료장의 집들이 불타고 있었다.
그기 놀라서 뛰쳐나가려고 했을 때 무덤 옆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임충이란 놈이 이번에는 갈 데 없이 죽었겠죠?”“아무렴요.”
“내가 동경에 올라가면 고태위께 말씀드려 두 분을 좋은 자리로 승진시켜 드리겠습니다.”
“고아내 병도 이제는 다 나았겠죠.”“임충이 죽은 줄 알면 장교두도 싫단 말을 못하죠.”
“아무튼 잘 해치웠습니다. 임충이 불길 속에서 요행히 살아났다 하더라도 초료장을 태운 죄가
워낙 크니까 죽음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임충은 그 말을 듣고 ‘하늘이 나를 보살펴
초가집이 쓰러졌구나.’ 생각하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임충은 하늘에 고개를 숙여 절을 했다.그리고 곧 창을 고쳐 잡고 묘문을 밀치고 뛰쳐나갔다.
“이 개 같은 놈들아!”그 소리에 세 명이 기겁을 하고 놀랐다.불 속에서 타 죽은 줄 알았던
임충이 뜻밖에 나타나자, 그들은 달아날 엄두도 못 내고 서 있었다.
임충은 먼저 관리를 죽였다.그리고 도망치는 부안의 등을 찌르고, 마지막으로 육겸의
가슴을 찔렀다.육겸은 눈 위에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 19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