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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칭별칭 |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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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 | 지명 |
시대 | 현대 |
성격 | 국가 |
위치 | 아시아 동남부 |
인구 | 8,616만명(2008년 현재) |
면적 | 33만 1,210㎢ |
수도 | 하노이 |
국화 | 연꽃(Hoa sen) |
화폐단위 | 동(Dong) |
언어 | 베트남어 |
종교 | 불교, 가톨릭교 |
수교일 | 1992년 12월 22일 |
정치·의회형태 | 1당 독재체제, 사회주의 공화제, 단원제 |
아시아 동남부에 있는 공화국.
정식 명칭은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으로, 인도차이나반도의 동부에 위치하며, 해안선의 길이가 3,444㎞에 달한다. 면적은 33만 1,210㎢, 인구는 8,616만명(2008년 현재), 수도는 하노이(Hanoi)이다.
주민은 베트남인이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밖에 중국인과 53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용어는 베트남어이며, 종교는 불교가 80%, 가톨릭교가 9% 등이다.
2007년 현재 국민총생산은 715억 달러, 1인당 국민생산은 1,024 달러이다.
베트남은 1당 독재체제의 사회주의 공화제로서, 의회는 임기 5년의 단원제(498석)이며, 정당은 공산당 하나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제2차세계대전에서 일본군이 패주한 뒤에 인도차이나에 복귀한 프랑스는 호찌민〔胡志明〕이 세운 베트남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Vietnam: 월맹)에 대항하여 1946년 6월 안남국 황제 바오타이를 옹립하여 월남국(越南國)이라는 보호령을 세웠다.
이로 인해 제1차베트남전쟁이 시작되었으며 8년에 걸친 월맹의 프랑스에 대한 항쟁은 1954년 5월 8일 디엔비엔푸 결전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함으로써 베트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양분되었다. 남부에는 사이공을 수도로 하는 베트남공화국(Republic of Vietnam: 월남), 즉 고딘디엠 정권이, 북쪽에는 호찌민 정권이 수립되었다.
월남은 프랑스를 대체한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으로 유지되었으나, 1973년 1월 파리휴전협정조인으로 미국이 철수함에 따라 붕괴의 길을 걷게 된다. 1973년 1월 8일 키신저 미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과 레둑토 월맹 정치국원은 파리의 제4차 비밀협상에서 휴전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월 27일 파리에서 로저스 미 국무장관, 트란반남 월남 외상, 구엔투이트린 월맹외상, 구엔티빈 월남임시혁명정부 외상이 월남전쟁의 종결과 평화 회복에 관한 협정 및 4개 부속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20년에 걸친 월남전쟁은 끝나게 되었다.
이어 미국·월남·월맹·베트콩의 4자합동군사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3월 27일 포로교환 완료와 더불어 주월미군은 철수했다. 휴전은 성립되었으나 휴전 위반 사례가 빈번하여, 1973년 2월 업무를 시작한 중립 4개국(캐나다·헝가리·인도네시아·폴란드)의 휴전감시관리위원회(ICCS)는 감시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월남 정부군과 베트콩은 관할지역 확장을 위해 무력충돌을 계속하여 전투가 다시 일어났다. 결국 1975년 초 월맹과 베트콩은 대공세를 전개하여 각 성(省)을 차례로 점령하였고, 마침내 4월 30일 사이공(현 호찌민시)을 함락시켰다.
그 날 새벽 주월 미국대사관의 대규모 헬리콥터 철수작전이 종료되고 몇 시간 후 월남의 두옹 반 민 대통령은 무조건 항복했다. 1975년 이후 베트남·라오스·캄푸치아로부터 작은 배를 타고 탈출한 선상 난민들, 즉 보트 피플(boat people)이 급격하게 늘어나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1979년에는 매달 7만 명이라는 엄청난 수에 이르렀으나, 인접국의 상륙거부, 강제송환, 조난과 표류, 기아와 해적의 피해 등으로 극심한 참상을 겪었다.
1979년 6월 유엔난민문제고등판무관(UNHER)은 베트남 정부와 해상탈출 난민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월남인들의 질서 있는 출국을 허용한다는 특별협정을 각서형식으로 체결했다.
이어 7월 20·21일 제네바에서는 유엔 주관하에 65개 관계국이 참가한 베트남난민 국제회의가 열려, 베트남은 난민추방책을 지양할 것을 약속했고, 미국 등 서방 각국은 난민 분할 정책 및 난민 구제비 갹출을 약속함으로써 선상 난민은 완화되기 시작하였다.
동남아 각국에 도착한 난민수는 35만 명을 헤아리며, 지역별로는 말레이시아 16만 5,000명, 태국 6만 5,000명, 필리핀 2만 6,600명, 싱가포르 6만 5,000명 등이다. 중국은 월남화교 2만 6,000명을 수용했다. 1980년까지 서방 각국이 받아들인 난민 수는 미국의 31만 명을 비롯하여 캐나다 7만 명, 프랑스 7만 명, 오스트레일리아 4만 3,000명 등이다.
1986년 12월 공산당 제6차 당대회에서 경제 개혁을 위한 도이모이(刷新) 정책이 채택된 후 1989년 환율 및 악성인플레이션이 진정되고, 농업 생산의 증대 등으로 베트남 경제는 안정되기 시작하였으나 1990년 동구권과 구소련의 몰락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던 기존의 동구권 무역 시장이 붕괴됨에 따라 소련과 동구권으로부터의 원조 중지 및 무역 관계붕괴, 인플레 및 실업의 급증 등 경제 성장률 하락과 재정 적자 증대로 베트남은 사회·경제적 난국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7년 9월 20일 유엔에 가입하였으며, 같은 해 라오스와 우호 협력조약을, 1978년 11월 소련과 우호 협력조약을, 1979년 2월 캄푸치아와 우호 협력조약을 각각 체결하였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 등 서방 국가와의 우호강화를 시도하였고, 한편 상대적으로 소원해진 중국·러시아 등 국가들과도 기존 우호 관계 재확립을 시도하고 있다.
2006년 6월 취임한 응웬 밍 찌엣 국가주석이 국가를 대표하나 실권은 2006년 4월 연임에 성공한 농 둑 만 공산당 서기장에게 있다.
대외적으로는 공산국가임을 내세우고 있으며, 1977년 유엔에, 1975년 비동맹회의에 가입하였다.
우리나라와 베트남과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난민(難民)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고려 때인 1253년(고종 40)에 안남왕자 이용상(李龍祥)과 그 친족 군필(君苾)이 송나라로 망명하던 도중에 표류하다가 당시의 옹진현(甕津縣) 창린도(猖麟島)에 도착하였다.
이용상은 오늘날 옹진군 마산면(馬山面) 화산리(花山里)에 살았으며 그 뒤 고려를 침공한 몽골군을 항복시켰으며 그 공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져, 화산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
또 지방 30리와 인구 20호(戶)를 식읍으로 받았다. 옹진 본영(本營) 동문(東門) 근처에는 그의 공적을 기린 기적비(紀績碑)가 있으며, 두문동(杜門洞) 이을봉(离乙峰) 아래에는 그와 아들·손자에 이르는 3대의 무덤이 있다.
지금의 화산이씨(花山李氏)들은 그의 후손이다. 또 『광해군일기』 권15에는 1612년 베트남 상인들이 제주도에 표류해왔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그 경위와 내용은 자세하지 않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의 월남 기착사실도 있다.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간 진주사람이 월남에 다녀온 일도 있고 1777년(숙종 43)에는 제주도 사람의 베트남표류 기사도 있다.
베트남이 우리나라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5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우리나라는 1955년 10월 월남공화국을 승인하고, 그 다음해 5월 사이공에 외교공관을 설치한 이래 친선우호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1964년 9월 22일 시작된 한국군 파월 이후 두 나라 관계는 긴밀하게 전개되었다.
파리휴전협정에 따라 1973년 3월 24일 한국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경제적 협력관계가 모색되었다. 그러나 사이공이 함락되기 직전인 1975년 4월 29일 주월 한국대사관이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일부 공관원들과 교민들은 철수하지 못한 채 베트남 치하에 남아 있다가 1976년부터 1980년에 걸쳐서 송환되었다.
그 간의 관계에서 우리나라와 월남 간의 국가원수 상호방문은 모두 다섯 차례 있었다. 1957년 9월 28일 고딘 디엠 대통령의 방한이 있었고, 1958년 11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이 방월했다. 1966년 10월 21일에는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이 방한했다.
당시 우리나라와 월남 간에는 한월관세 협정(1959. 1. 1.), 한월무역 협정(1962. 12. 19.), 주월한국군원조단의 지위에 관한 협정(1964. 10. 31.), 한월항공운수 협정(1967. 1. 16. 발효, 1969. 9. 16. 개정), 한월경제 및 기술협력에 관한 협정(1971. 6. 12.) 등이 체결되었다.
한국기술자들의 월남 진출은 1965년 9월 미국 회사의 고용으로 42명이 사이공에 파견된 것을 시작으로 하는데, 절정기였던 1968년에는 1만 5,571명에 이르렀고, 1971년 7월 1일 현재 교민 수는 6,321명이었다.
비행한국인이나 유랑한국인 문제도 뒤따라 일어났으며 1966년부터 1972년 2월까지 대사관으로부터 강제송환·자진귀국·경고처분을 받은 사람도 1,152명이나 된다. 또 국제결혼 등에 의한 한월혼혈아의 수도 1,500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파리휴전협정조인으로 교민 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1973년 6월 30일 현재 1,882명으로 집계되었다.
1975년 4월 말 사이공 함락을 앞두고 주월 한국대사관이 철수를 위한 일제등록을 실시해서 파악한 교민 수는 504세대 902명이었다. 그 중 우리나라 정부가 파견한 수송함에 탑승하여 4월 26일 사이공을 떠난 교민은 537명이다.
한편 우리나라 기업의 월남진출은 전쟁경기를 타고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66년에는 진출기업이 9개에 지나지 않았으나 3년 뒤에는 55개 기업으로 늘었으며, 이듬해인 1970에는 56개 기업으로 절정에 달했다. 1971년 6월 말에는 43개 기업으로 줄고, 1972년에는 22개 기업으로 떨어졌다.
한국업체들의 건설계약고는 1968년 1,039만 달러, 1969년 1,154만 달러로 절정에 달했다가 1970년 1,064만 달러, 1972년과 1973년 각각 900만 달러로 떨어졌다. 우리나라의 대월남 외환수입은 1966년부터 1972년까지 7년 동안 수출에서 7,630만 달러, 물품군납에서 1억 3,930만 달러로 합계 2억 1560만 달러이다.
무역외수입인 용역 및 건설군납·군인송금·기술자송금·특별보상지원에 의한 수입은 같은 기간 동안 총 6억 4,190만 달러를 기록한다. 군인송금은 1966∼1972년간 1억 7,830만 달러, 기술자송금은 같은 기간에 1억 6,620만 달러였다.
경상수입 및 무역외수입에 의한 대월남 외환실적은 1966년 5,800만 달러, 1967년 1억 3,350만 달러, 1968년 1억 5,620만 달러, 1969년 1억 5,840만 달러, 1970년 1억 5,180만 달러로 총계 85억 7,600만 달러에 이른다.
한편 우리나라는 한월경제기술협력 협정(1971년 6월 1일 발효)에 따라 의료원을 준공했다. 이후 의료원 건립과 운영에 관한 약정(1974년 1월 30일 체결)에 따라 우리나라는 매년 28만 5,000달러의 경비를 부담하여 의료원에 근무할 의사 및 요원들을 3년간 파견하기로 하고, 1974년 2월 최초로 의사 10명을 포함한 의료사절단을 파견했다.
또 우리나라는 1967년 농업기술단을 파견했는데, 1967년 이래 농업사절단으로 승격시키고 1973년에는 16명의 농업사절단을 파견하는 농업기술협정을 체결했다. 1967년부터 1974년까지 우리나라가 파견한 농업사절단의 총인원은 215명이다.
월남정권의 패망 후 우리나라는 1977년부터 1985년까지 807명의 선상난민을 수용했다. 사회주의 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교류는 중단되었으나 구엔 반린 서기장이 도이모이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양국의 교역 규모는 확대되고 있다. 1992년 4월 4일 연락대표부 설치에 합의하였으며, 12월 22일에는 양국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
이후 양국 간에는 1993년 2월 경제기술협력 협정을 체결한 이래, 1993년 5월에 무역 협정, 항공 협정, 투자보장 협정, 1994년 5월에 이중과세방지 협정, 1994년 11월에 문화 협정, 1995년 3월에 세관협력 협정, 1995년 4월에 해운 협정, 1996년 11월에 체육교류 협정, 1998년 12월에 사증면제 협정, 1996년 11월에 원자력 협정, 1998년 12월에 외교관 및 관용여권 사증면제 협정, 2000년 3월에 교육협력 협정, 2002년 8월에 관광 협정, 2003년 9월에 범죄인 인도조약. 형사사범공조조약, 2004년 10월에 에너지 및 자원협력MOU, 2005년 4월에 베트남 원전인력훈련MOU 등을 체결하였다.
2008년 현재 우리나라의 대 베트남 수출액은 804억 달러로 주종목은 기계장비·석유제품·비료 등이며, 수입액은 629억 달러로 주종목은 원유·수산물·쌀·커피 등이다.
2007년 현재 베트남에는 삼성, 코오롱, 쌍용, SK 등 150여 업체가 진출해 있으며, 3만 7,000여명의 한국민 교민과 5만여 명의 체류자가 있다.
한편, 북한은 1950년 1월 31일 수교를 하고, 같은 해 10월 25일 각각 공관을 개설하였다. 양측 간에는 1957년 11월과 1973년 3월에 문화협조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59년 5월에는 방송 협정, 1977년 1월에는 민영항공업무에 관한 협정, 1977년 3월에는 체신사업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고, 1997년 5월에는 외무협조합의서, 2002년 5월에는 이중과세방지 협정, 투자보장 협정, 민형사사법공조조약, 해양수송에 관한 협정, 2003년 11월에는 표준화도량형품질감독 협정, 2004년 4월에는 품질관리분야협조계획 등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베트남의 대북한 수출액은 1978년의 경우 85만 달러, 수입액도 85만 달러였으나 최근의 무역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또 1991∼1995년 경제 및 무역 분야 협력 약정서에 서명은 하였으나 연 교역량은 100만 달러 이하로 극히 저조하다.
베트남동남아시아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부에 위치하고 있는 사회주의국가. 정식 국호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수도는 하노이(Hanoi)이다. 면적 32만9707㎢, 인구 7,671만 명(1997년 현재)으로 베트남인이 대부분이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베트남 [Vietnam, Socialist Republic of Vietnam]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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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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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서는 구석기 시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베트남의 선사시대에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석기문화가 영향을 주고 받았다. 오늘날 이리안자야지역에서 출토되는 석기 유물과 동일한 양식의 유물들이 베트남에서도 발견된다.[1]
베트남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베트남인들은 산신의 딸인 어우꺼와 바다 신의 아들인 락롱꿘의 결혼을 통해서 태어났다. 어우꺼는 100개의 알을 낳았고 그 알에서 태어난 100명의 자식 가운데 50명은 아버지를 따라 바다로, 50명은 어머니를 따라 산으로 갔다고 한다.[2] 기원전 2919년 베트남 최초의 국가인 홍방 왕조가 세워졌으며기원전 257년 툭판 왕조로의 교체가 일어났으나, 이어 중국 세력이 밀려 들어와 기원전 111년에는 한나라에게 복속되었다. 이로부터 10세기까지 간헐적인 독립 운동을 제외하고는 중국 세력의 통치가 지속되었다.[3]
938년 박당 전투에서 응오 왕조의 시조인 응오꾸옌(베트남어: Ngô Quyền/
프랑스는 제2차 세계 대전 때까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한 국가로 베트남을 식민지로서 통치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종전 후에 다시 군대를 파견하였고 이는 호찌민이 지도하는 민족 세력인 비엣민과 남북으로 대립하게 된다. 베트남은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으로 분단되었고 1964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은 미국과 베트남 전쟁을 치려야만 했다. 이후 마오쩌둥주의 노선을 표방하는 캄보디아의 크메르 루즈와 전쟁을 치렀고 중화인민공화국과도 국경분쟁으로 중국-베트남 전쟁을 치렀다. 1980년대 이후 도이 머이 정책으로 서방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베트남에는 구석기 시대이래 인류가 살아왔으며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인도네시아 제도에 이르는 지역에 산재하고 있는 석기 문화 유적이 많이 발굴되고 있다.[1] 베트남의 건국신화인 락롱꿘, 어우꺼 신화는 약 4,000년 전 락롱꾸언(베트남어: Lạc Long Quân/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에 따르면, 호모 에렉투스인 랑선 인이 북부 베트남 지역에서 발견되어 약 50만년 전인 구석기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여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5]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으로는 대략 25만년에서 14만년 전에 살았던 사람의 치아 화석이 탐엄(Tham Om)에서 발견되었고, 항훔에서는 약 14만년 전에서 8만년 전 사이의 치아 화석이 발견되었다.[6]
기원전 28,000년부터 기원전 8,000년 사이 북부 베트남에는 선비 문화(베트남어: Văn hóa Sơn Vi)로 불리는 중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에 걸쳐 이루어진 문화가 존재했고[7], 이 외에도 기원전 10,000년부터 기원전 2000년 사이에 오늘날 호아빈 성 유역에 있었던 호아빈 문화(베트남어: Văn hóa Hòa Bình)[8]와 랑선 성의 박선 문화(베트남어: Văn hóa Bắc Sơn)[9]가 있다.
동손 문화는 기원전 300년 경 청동기 문명으로 동남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였으며 베트남 북부를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여러 곳을 지배하였다. [10] 마 강(Sông Mã)과 홍 강 유역에서 기원전 1200년 경의 습식 벼농사와 정교하게 만든 북과 같은 청동 주물들이 발견되었다. 동손 문화의 청동 무기, 도구, 북과 같은 유물들을 만든 청동 주물 기술은 동남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이다.[11][12] 동손 문화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유적과 많은 유사성을 지니는 데, 배 모양의 관(棺), 매장용 항아리, 각주(角柱) 위에 세워진 집, 구장 열매를 씹고 치아가 검게 물드는 관습 등이다.
베트남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2879년부터 기원전 258까지 있었던 홍방 왕조가 세운 반랑(베트남어: Văn Lang/
기원전 257년 홍방 왕조의 마지막 왕 훙뚜엔브엉(Hùng Tuyên Vương)은 툭판 왕조에게 패배한다. 툭판은 그의 부족 어우비엣(베트남어: Âu Việt/
남비엣은 수도를 번우[15]에 두고, 중국 남부[16]와 홍 강 삼각주 지역을 통치하였다. 이와 같이 홍 강 삼각주를 정복한 중국인들은 화전 농업, 사냥, 낚시를 주업으로 하면서 봉건적인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들을 발견했다. 이 초기 베트남인들은 이 지역의 다른 민족들과도 교역하고 있었다. [10] 남비엣의 기원을 말해주는 역사적 유물들이 논쟁 거리로서 남아 있는데, 이는 일부 역사학자들은 이것이 중국의 통치였다고 보는 반면, 일부는 이것이 독립적인 시기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기원전 111년 중국의 한나라의 무제는 남비엣을 정복하였다. 후한(23년~220년) 초기, 베트남에서 독립을 위한 투쟁을 했는데, 이것이 쯩 자매의 운동이다. 한나라를 재건한 광무제는 41년 복파장군 마원(馬援)을 보내었다. 마원은 42년에 쯩 자매를 처형하고 베트남 내의 중국의 통치권을 확립하려 하였고 잔당 토벌 중 쯩 자매의 무리를 토벌하려던 41년의 전쟁 때 걸린 열병으로 49년 진영 내에서 사망했다.
1세기~6세기에 지금의 베트남 남부 지역은 매우 세련된 예술 및 건축 양식을 특징으로 하는 인도계 푸난 왕국에 속해 있었다. 푸난인들은 정교한 운하 체계를 갖추어 운송 및 관개용수 공급에 사용했다. [10]:11
기원전 111년부터 10세기 초까지 대부분의 시기 동안 중국 왕조를 계승한 통치자들이 지배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17] 쯩(베트남어: Trưng/
938년 전쟁 끝에 중국에서 독립한 이래, 재복속을 노리는 몽골 제국, 명나라와 계속 전쟁을 벌여왔다. 939년 베트남의 응오꾸옌이 바익당 강(베트남어: Bạch Đằng River) 에서 남한(南漢)을 물리치고 10세기 이후에는 중국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또한 한 세기 후에는 완전한 자치권도 얻어냈다. 나라 이름은 다이비엣이라 하였고, 리 왕조와 쩐 왕조 시기에 황금기를 맞이하였다. 쩐 왕조 통치 동안 쩐흥다오는 원나라에 의한 몽골인의 침입을 무려 세 번(1285년과 1288년)씩이나 물리쳤다.[18]
쩐 왕조 시기에는 불교가 번성하여 국가 종교가 되었다. 이후 호 왕조를 거치면서 중국의 명나라의 영락제의 침략에 의해 한동안 정복당해 탄압받았으나, 레 왕조를 세운 레러이(Lê Lợi)가 이를 회복하였다. 베트남은 15세기 레 왕조 시기에는 절정에 달하였는데, 특히 레탄똥 황제의 통치(1460년–1497년) 때 그러하였다. 레 왕조가 끝날 무렵, 민중 봉기가 베트남을 뒤덮었다. 먼저, 중국의 힘을 업고 막 왕조(Mạc, 莫)가 레 왕조의 힘에 도전하였다. 막 왕조를 패퇴시킨 뒤 레 왕조는 다시 일어났으나 실질적인 힘이 없었다. 이때 권력은 북부의 찐 왕조(베트남어: Trịnh/
11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 베트남인은 남띠엔(베트남어: nam tiến ❲"남으로의 확장"❳) 이라 부르는 과정을 통해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는데, 바로 응우옌 왕조가 이 시기에 메콩 강 삼각주까지 진출하여 중부 고원 지대의 참파 왕국과 메콩 강 유역의 크메르 제국의 일부를 정복하였다. [19][20] 민중 전쟁은 떠이선 운동에 의하여 찐 왕조와 응우옌 왕조가 멸망하고 1802년 새 왕조가 일어나면서 마무리되었고 이로써 현재의 베트남의 영역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떠이선 왕조는 오래 가지 못했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응우옌 아인이 이끄는 응우옌 왕조의 잔존 세력에 의하여 패퇴한다. 응우옌 아인은 베트남을 통일하여 응우옌(Nguyễn) 왕조를 열고, 자롱 황제가 되었다.
1789년에 하노이까지 진격해 온 청나라 군대를 섬멸한 것은 베트남 역사상 가장 유명한 조국수호의 일화이다.
산업혁명을 경험한 유럽에서는 통상무역의 확대를 요구하며 아시아 시장으로 진출하였다. 베트남도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의 손길을 피해갈 수 없었다. 17세기 초기에 베트남에 통상을 요구하는 사자가 방문했다. 왕조 성립 직후인 1804년, 영국사절 로버츠가 통상관계의 개선을 요구하면서 다낭을 내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1832년에는 미국으로부터의 사절도 유사한 목적으로 내항을 했지만, 거절되었다.베트남의 독립은 아시아 식민지 사업의 첫 발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내딛었던 프랑스에 의하여 서서히 잠식되었다. 베트남이 프랑스의 통상 교섭 요구를 거절하고, 가톨릭 교도를 박해하자,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전쟁을 일으켜 1862년 베트남의 항복을 받아내고 남부 베트남 3개주(코친차이나)를 할양받은데 이어, 타이와 미얀마를 제외한 인도차이나 반도(즉, 현재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화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1885년)를 세웠다. 이로써 베트남 전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포함되었다. 프랑스는 베트남 사회에 뚜렷한 정치적 및 문화적 변화를 가져온다. 근대 교육의 서구적인 체계가 도입되고 베트남 사회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다.(→프랑스에 대한 응우옌 왕조의 항쟁)
담배, 인디고, 차, 커피의 수출을 촉진할 목적의 플랜테이션 경제를 발전시키면서 프랑스는 자치와 시민권의 요구를 대개는 무시하였다. 이에 대해 프랑스로부터 독립하려는 베트남인의 독립투쟁은 끊이질 않았다.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한 베트남 청년 호찌민은 종전회담이 열리던 베르사유 조약에 베트남 대표로 참석하려 했으나 참석을 거절당했고, 그는 식민지를 고수하는 자본주의 열강보다는 제국주의를 반대하며 새롭게 탄생한 소련과 코민테른에 기대를 걸게 되었다.
독립 국가를 수립하려는 정치적 운동은 곧 판보이짜우(베트남어: Phan Boi Chau/
중일전쟁(1937년~1945년)이 격화되면서, 일본 육군은 베트남으로부터 국민당 정부로의 물자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북부에 진주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한편,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선에서는 1940년에 프랑스가 독일에게 무릎을 꿇었고, 나치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비시 정권이 임명한 장 드꾸(Jean Decoux) 장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과 협력하여 일본군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하여 [10]:19 1940년에 일본군은 베트남 북부에 진출하고, 1941년에는 베트남 남부에도 진주하였다. 일본으로서는 버어마, 말레이 반도, 인도에 있던 영국령 인도차이나에 대한 군사 행동을 위하여 베트남의 천연 자원이 꼭 필요하였다. 이러한 이 지역의 전략적 입지와 천연 자원을 이용하고자 했던 일본은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프랑스 정부에게 일상적인 국정 운영을 맡겼다. 일본 점령에 항거하는 활동을 펼친 유일한 단체는 베트남 독립동맹(회)(비엣민 또는 베트민, 월맹(越盟))이었다. 1941년에 비엣민이 호찌민의 지도 아래 통합되었다. 호찌민은 프랑스와 일본의 지배로부터 독립을 추구하였다.
일본군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와 공존은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3월까지만 지속되었다. 비엣민의 공격이 계속되고 드쿠 정부가 - 과거 4년반 동안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인 - 일본에 맞설 계획을 세우던 1945년 3월, 프랑스의 비시 정권이 몰락하자, 일본은 프랑스와의 공동통치 체제를 전복시키기 위해 반프랑스 쿠데타를 일으켜 프랑스의 군대 및 관리 모두를 감금했던 것이다. 즉, 일본군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실행하여 프랑스군을 제압하여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내세우고, 아예 드쿠 정부로부터 베트남을 독립시켜 자신의 꼭두각시 정부로 만들려고 했고, 바오다이 황제는 프랑스와 적대하는 일본군에 협력했다. 이에 따라 1945년 3월 일본의 지원을 받는 일본의 영향력하에 있고 명목상에 불과한 꼭두각시 정부인 베트남 제국이 수립되고, 바오다이가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당시의 일본 군인 중에는 일본에 망명 중인 기외후(畿外侯)를 베트남 제국 황제를 세우려고 했지만, 남방군(南方軍)이나 제38군은 베트남의 새로운 정권에게 불간섭의 방침으로 군정의 실시나, 친일 정권 건설을 배제하는 걸로 결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오다이는 독립한 베트남의 최초의 원수의 지위를 손에 넣게 된 것이었다. 그는 안남과 통킹을 프랑스 보호구역으로 내준 1883년 조약을 폐지했다. 이 때 일본에 의한 미곡수탈과 산업용 작물 생산을 강요한 정책, 홍수, 제방 파손으로 인해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고, 그 결과 북부 베트남 1천만 인구 중 2백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10]:20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했고, 베트남 제국도 1945년 8월 무너졌다.
비엣민은 베트남 8월 혁명으로 빠르게 권력을 탈취하고 임시 베트남 민주공화국 정부를 설립하였다. 일본은 베트남의 행정권을 비엣민에게 넘겼다. 비엣민은 하노이를 점령하고 임시정부를 선언하였다. 8월 30일에 후에의 궁전에서 베트남 제국의 꼭두각시 황제 바오다이는 퇴위하였다.[21] 9월 2일, 일본이 도쿄 만의 정박중이던 미주리 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조인하여 전쟁이 종결됨과 함께, 비엣민은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22] 그러나, 포츠담 회담의 결과와 연합군 일반명령 제1호에 따라 베트남은 중국과 영국에 의해 다시 분할점령의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같은 시기 베트남에 있는 프랑스인과 일본군의 포로가 된 프랑스 군인들이 주축이 되어 사이공에서 식민군을 재결성하여 비엣민 세력과 충돌이 일어났다. 1945년 프랑스임시정부(the Provisional French Republic)는 원래 일본의 점령에 대항하기 위하여 조직된 프랑스 극동 원정군(the French Far East Expeditionary Corps)을 베트남에 보냈다. 이는 베트남의 독립 운동을 진압하고 프랑스의 지배를 재건하기 위함이었다. (→비엣민·베트남 제국·베트남-프랑스 관계)
이 부분의 본문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입니다.
이후 영국과 중국은 이전의 지배자였던 프랑스의 설득에 따라 군대를 철수시켰지만, 프랑스는 식민지에서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프랑스는 바오 다이를 내세워 사이공에 괴뢰정권인 베트남국을 수립하였다. 이에 맞서 비엣민은 북부의 하노이에 동남아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나라인 베트남민주공화국(월맹, 북베트남)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1945년에 이 성립하고 북부는 비엣민이 장악하고 남부는 프랑스가 장악했다. 곧 비엣민과 프랑스군은 치열한 전투를 개시하였다.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사건으로 촉발된 베트남의 프랑스에 대한 독립 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비엣민과 프랑스 군 사이에 발발하여 1954년 7월 20일까지 지속되었다.
그 와중인 1950년 소비에트 연방과 중화인민공화국은 북베트남을 국가 승인하였다. 미국을 배후로 하는 프랑스 극동 원정군과 베트남 국군(베트남어: Quân đội Quốc gia Việt Nam)은 전쟁으로 인한 피해가 덜하였으나 - 프랑스 극동 원정군 측 사상자는 중국과 소련을 배후로 한 비엣민 측 사상자의 1/3에 불과하였다 -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결정적 패배를 하게 되고, 이로 인하여 1954년 제네바 협정에서 호찌민은 유리한 조건에서 휴전 협상을 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체로 끝맺었고,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17도선에서 남북이 분단하고, 이로써 북위 17 도선 (군사분계선, DMZ) 이북은 호찌민의 북베트남이, 이남은 바오 다이 황제의 베트남국(베트남어: Quốc gia Việt Nam)이 통치했다.
이러한 남북 분단은 임시 조치였고, 1956년에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열리지 않았다. 1954년 10월, 베트남에 있던 프랑스군이 철수했다. 1955년 베트남국의 총리 고 딘 지엠(Ngo Dinh Diem)은 그의 형인 고 딘 누(Ngo Dinh Nhu)가 주도한 부정한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 바오 다이를 축출하고 스스로 베트남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언하였다. 이로써 공산주의의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미국이 지원하는 베트남공화국(월남, 남베트남)이 대치하는 양상을 띠게 된다.
이 부분의 본문은 베트남 전쟁입니다.
베트남 전쟁은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미국이 북 베트남에 폭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으로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미국이 베트남에 개입하기 시작한 1959년을 기점으로 잡기도 한다. 1975년까지 계속된 이 전쟁은 민족적인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과 싸운 내전의 성격이 있는 반면, 미국과 한국을 비롯한 미국의 동맹국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개입하고, 이에 맞서 중국과 북한도 비공식적으로 각각 전투원을 파견하여 북베트남을 지원함으로써 국제전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전쟁은 한국전쟁과 더불어 냉전 기간의 대표적인 전쟁이다.
결국 반전 여론과 불투명한 전세에 미국은 휴전 협정을 맺고 베트남 전역에서 퇴각하지만,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베트남 해방전선은 전쟁을 재개하여 사이공을 북베트남군이 점령하고 남베트남 정부 대신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가 세워지면서 끝이났다. 대한민국에서는 한자를 한국어식으로 음차한 월남 전쟁이라고도 부른다.
이 전쟁으로 인해 민간인을 포함한 베트남인 150만 명이 사망했고, 미군은 사망자 6만여 명, 대한민국에서 참전한 군인도 5천여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전쟁 이후에도 미군이 사용한 무기와 화학약품으로 인해 피해자 본인과 그 자녀들이 장애를 갖게 되는 사례가 속속 집계되고 있고,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학살사건이 보도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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