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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살맛 나는 세상이야기들... 원문보기 글쓴이: 크레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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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4년 10월 麗蒙연합군의 함대가 집결했던
對馬島의 아소우灣 .>
이 날 굳이 對馬島로 가려면 방법은 있었다. 오후 1시에 부산에서 후쿠오카(福岡)로 직행하는 배편이
있다고 했다. 후쿠오카에 가기만 하면 對馬島로 가는 여객선뿐만 아니라 여객기까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12월1일 오전 8시30분, 記者는 쓰시마空港에 내렸다. 후쿠오카空港에서 日本航空 여객기 141편(요금
1만1950엔)을 타고 출발한 지 꼭 30분 만이었다. 공항에서 바로 택시를 잡아 타고 코모다(小茂田)로 달렸다. 나가사키(長崎)縣에 속하는
對馬島는 우리나라 울릉도처럼 길이 좁고 험난하다. 평지는 드물고 온통 산이어서 대중교통수단은 별로 없다. 면적은 709km2, 우리나라의
濟州道보다는 작지만, 巨濟島보다는 크다. 인구 약 4만3000명으로 2004년 3월1일자로 市로 승격된다.
助國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진두에서 용전했지만, 그것은 螳螂拒轍(당랑거철: 사마귀가 수레 앞을 막아
섬)이었다. 敗할줄 뻔히 알고도 회피하지 않고 출진한 것이라면 그건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는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武士의 역할」을
완수했다.
對馬島까지 와서 百濟人(백제인)들이 만든 일본 最古의 성터인 카네타노키(金田城)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지에서 「朝鮮式山城」으로도 불리고 있는 이 城은 663년 백제부흥군-倭軍의 연합군이 白村江(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羅唐연합군에게 패전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百濟 유민들과 왜인들이 羅唐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667년에 축조한 것이다. 성벽은 높이 2∼5m,
길이 5.4km. 이후 金田城은 大陸의 동향을 살피는 日本의 최전선 기지로 활용되었다.
「元史」 日本傳에 『至元 2년(1265), 고려사람인 趙彛(조이) 등이 일본국과
通해야 한다고 아룀으로써 使臣을 뽑았다』는 구절이 있다. 바로 이것이 世祖 쿠빌라이가 일본침공을 결의하는 동기였다고 한다.
몽골의 병사들은 日本兵과 달리 가능한 한 輕裝(경장)으로서 머리에 얇은 철제의 투구를 쓰고, 가죽製의
갑옷과 장화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무기는 손에 短弓(단궁) 혹은 長槍(장창)을 들고 허리에는 曲刀(곡도) 혹은 도끼를 찼다.
기자는 12월1일 오후 이즈하라 읍내의 대마역사민속자료관·향토자료관·崔益鉉기념비 등지를
답사했다. 음식점 「시마모토」에 들러 따끈한 청주를 반주로 삼아 저녁을 먹었다. 뜻밖에 기모노 차림의 안주인이 다가와 첫잔을 채우는 친절을
베풀었다.
對馬島를 초토화하고 출항한 麗蒙연합군의 함대가 이키시마 북부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74년 10월14일 오후 4시경이었다. 大船 2척으로부터 약 400명의 몽골군이 상륙하자 가쓰모토의 村人들은 이를 세도우라(지금의
아시베港)의 후나카쿠죠(船匿城)에 급보했다. 城主는 이키의 守護代인 다이라노 케이류우(平景隆)였다. 가쓰모토에 상륙한 麗蒙연합군은
하카타(博多)港 공격에 편리한 세도우라를 점령하려고 동쪽으로 진격해 갔다.
그러나 이키島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숨은 것만 아니라는 사실은 몽골 측의 기록 「心中大義」에
『倭人(왜인), 이리(狼)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 것에 의해 실증되고 있다. 일본인의 용맹성에 대한 驚異(경이)로움이
아니었겠는가.
이키島를 초토화시킨 麗蒙연합군은 이어 肥前(히젠: 지금의 나가사키縣) 마쓰우라(松浦)郡의
다카시마(鷹島)를 습격했다. 일본 측 기록인 「日蓮註畵讚」(일련주화찬)에는 『肥前國 松浦黨 수백인이 戰死했다. 이 섬의 백성과 남녀가 당했던
참사는 對馬와 같다』고 했다.
1274년 10월17일, 麗蒙연합군은 다카시마(鷹島)로 침입, 이 섬의 阿翁과 船黨津의 해안으로부터
상륙했다. 한편 松浦黨의 무사들도 다카시마의 殿浦에 상륙, 남방의 곶(岬)에 日本山城을 구축하여 내습하는 麗蒙연합군에 항전했지만,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烽火(봉화)체제 및 驛馬(역마)제도가 미숙했던 탓이었겠지만, 교토(京都)와 가마쿠라(鎌倉)에서는 初戰
패전의 상황을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야 파악할 수 있었다. 大宰府로부터 교토의 六波羅로 파발마가 달려가 麗蒙연합軍의 對馬 내습을 보고했던
날짜가 10월17일이었다. 10월19일과 20일에 하카타灣에서 合戰이 있었다는 것은 물론 이키島가 점령당했다는 것조차도 10월28일이 되어서야
보고가 들어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20일의 하카타의 하코자키 지구 전투에서는 상륙한 麗蒙연합군을 島津久經의
부대가 용감하게 맞싸웠고, 하카타의 이키노하마의 전투에서도 少貳景資(經資의 동생으로 前線사령관)의 부대는 노도와 같이 몰려오는 몽골군에게
밀리면서도 힘껏 항전했다. 그는 스스로 長弓을 쏘아 몽골군의 副元帥(부원수)를 馬上으로부터 추락시켰다. 다음은 「八幡愚童記」 관련 기록이다.
필자는 11월29일 오후 하코자키 神社를 찾아갔다. 후쿠오카市營 지하철의
하코자키쿠우마에에키(箱崎宮前驛)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면 걸어서 3분 거리다. 도리이(鳥居: 신사의 입구에 세운 기둥문) 세 개를 지나면
웅장한 本殿과 마주한다. 1086년에 건립되었고, 몽골병에 의해 불탄 지 1년 만인 1275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