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호지(水湖誌) - 19
제3장 표범머리를 가진 남자
제10편 창주 탈출 10
임충은 세 사람의 머리를 베어 묘안에 던지고 달아났다.밤길에 눈발이 퍼붓고 있었다.
더 이상 추위에 견딜 재간이 없어질 때 초가집이 하나 나타났다.
이젠 살았구나 싶어 그 집에 들어가니 4.5명의 사내들이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저는 노성영에서 온 사람이오. 잠시 쉬어가도 되겠소?”임충이 그들의 허락을
받고 옷을 말리는데, 문득 곁에 놓인 항아리에서 술 냄새가 풍겼다.
그가 돈을 주고 술 한 잔을 사려고 하자 사내들이 말했다.
“우리는 노적 곳간을 지키는 사람들이오. 이 추위에 우리 먹기도 술이 모자라는데,
어림도 없는 말은 하지 마시오.”“딱 한 잔도 안 됩니까?”“안 되오.”
“그러지 말고 딱 한 잔만 주시오.”“허어, 이 양반이 불을 쬐게 해 준 것만도 인심 쓴 건데
술까지 달라고? 냉큼 안 나가면 다리 뼈다귀를 부러뜨릴 것이오.”임충은 그 말에 크게
노하여 창끝으로 모닥불을 들쑤시자 불똥이 튀어 그 중 늙은 정객의 수염을 태웠다.
정객들도 크게 노하여 일제히 임충에게 달려들었으나 그의 창이 한두 차례 움직이자
모두 놀라 앞을 다투어 도망가버렸다.임충은 혼자 항아리에 든 술을 반이나 마시고
밤길을 걷다가 취해서 눈밭에 쓰러져 잠들어 버렸다.
그러자 임충에게 혼쭐이 났던 사내들이 나타나 그를 묶어 끌고 갔다.
날이 밝아 임충이 눈을 떠보니 뜻밖에도 그는 장원에 묶인 채 누워 있었다.
이윽고 수십여 명의 무리들이 달려들어 임충을 마구 패기 시작했다.
그때 장원 주인이 나와서 그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랐다.“아니, 임교두께서 이게
웬일이십니까?”장원의 주인은 다름 아닌 소선풍(小旋風) 시진(柴進)이었다.
그는 이곳 농장의 주인이었던 것이다.임충은 겨우 살아나 그간의 경위를 낱낱이
얘기했다.“형님의 운명도 참 기구하십니다. 그래도 이렇게 제 집에 오셨으니
참으로 불행 중 다행입니다.”
시진은 하인에게 새 옷 한 벌을 가져오게 하고 음식을 크게 차려 대접했다.
임충은 시진의 집에 일주일을 묵었다.그러나 관가에서 살인범을 그냥 둘 리 없었다.
창주 노성 관영에서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해 체포조를 내보내고 현상금 3천 관을 걸었다.
임충은 바늘방석에 앉은 것 같았다.“관영에서 날 잡으러 드니 대관인에게 누를 끼치고
싶지 않소. 오늘로 이곳을 떠나겠소. 염치없는 말씀이나 약간 노자를 주시면
이 몸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한 은혜의 만 분의 일이라도 갚겠소.”시진이 말한다.
“이곳을 꼭 떠나시겠다면 제가 편지 한 장을 써드릴 테니 양산박(梁山泊)으로
가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양산박이 어딥니까?”
“양산박은 산동 제주(山東濟州)에 있는 곳으로 그 넓이가 8백 여 리가 됩니다.
지금 세 명의 호걸이 그 산채에 있소.첫째 두령은 왕륜(王倫)이요, 둘째 두령은 두천
(杜遷)이요, 셋째 두령은 송만(宋萬)입니다.그 휘하에 7,8백 명의 졸개를 두고
노략질을 마음대로 하지만, 그곳은 천하에 드문 험난한 요새인지라 관가에서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곳입니다.그 세 두령과는 일찍부터 제가 잘 아는 사이로
이제 제가 편지를 써드릴 터이니, 그리로 가셔서 화를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래야 할까 봅니다.”
그러나 임충으로서는 우선 창주를 빠져나가기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창주에서 빠져나가는 길 입구에는 군관들이 길목을 지키고 있으면서 검문이 엄격했다.
시진은 궁리 끝에 임충에게 호위 하나를 붙여주었다.그리고 수십여 명의 일행들에게
모두 활과 창을 들게 하고, 여러 마리 사냥개를 앞세우고 떠났다.
검문소에서 경비병들이 그들을 보고 말했다.
“대관인께서 사냥을 나가시는군요. 돌아오시는 길에 꿩이나 두어 마리 주십시오.”
“오냐, 알겠다.”시진 일행은 무사히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임충은 곧 말에서 내려 옷을 갈아입고 허리에 칼을 차고, 시진과 작별한 뒤 멀리
양산박을 향해 길을 떠났다.십여 일이 지나 눈 내리는 어느 날 저녁에 임충은
호숫가 주점에서 술을 주문하고 양산박 가는 길을 물었다.
“여기서 양산박까지는 배를 타고 건너야 합니다.”“그럼 배를 좀 타게 해 주시오.”
“날이 저물고 눈이 오는데 어디서 배를 구하겠소.”임충은 하는 수 없이 술만 마실 뿐이었다.
이 세상 넓은 천지에 몸 하나 의탁할 곳이 없어서 이렇게 도적의 소굴을 찾는 신세가 된 것을
생각하니 불현듯 지난날 동경 거리에서 위세를 부리던 생각이 떠올라 애끓는 한숨만
새어 나왔다.‘80만 금군교두로 매일 동경 번화가를 활보하던 몸이 뜻밖에 고구의
흉계에 빠져 이렇게 집이 있어도 못 가고, 기구하게 떠도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 회한을 어디서 풀어 볼 것이랴!’
- 20회에 계속 -
★ 수호지(水湖誌) - 20
제4장 탁탑천왕(托塔天王)
제11편 살인자들 11
첫날은 허탕이었고, 둘째 날도 부질없이 저물었다.
관군들도 감히 손을 못 대는 무서운 산적 떼가 살고 있는 양산박 근처에 사람들이
다닐 리가 없었다.이틀을 허비하고 임충은 그대로 산채로 돌아왔다.
왕륜은 비웃음을 띠고 말했다.“만약 내일도 그 일을 못하면 다시 산으로 돌아올 것 없소.”
임충은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고 다음 날 다시 산에서 내려왔다
산 아래 동편 숲 속에다 몸을 숨기고 한나절을 기다렸으나 행인은 구경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운수가 불길하구나. 더 기다려 뭘 하겠나. 날이 저물기 전에 딴 곳으로 가버리는게
상책이다.”그때 졸개가 한편을 가리키며 소리를 지른다.
“저기, 한 사람 옵니다.”
임충이 바라보니, 과연 멀리 산언덕 아래 한 사내가 등에 짐을 지고 오고 있었다.
임충은 기뻤다.‘이젠 됐다!’그는 칼을 휘두르며 숲에서 달려 나갔다.
그러자 그 사내는 임충이 뛰어나오는 것을 보고 놀라서 짐을 내던지고 달아났다.
임충은 끝내 그를 놓치고 말았다.그는 졸개를 돌아보며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쉬었다.
“사흘 걸려 모처럼 사람 구경했는데, 놈을 놓쳐버렸으니 내 신세도 기구하구나.”
졸개가 위로했다.“그래도 짐은 챙겼으니 이거라도 가져가서 왕두령께 말씀드려 보시지요.”
“아무튼 너는 짐만 가지고 먼저 산채로 돌아가거라. 나는 여기서 좀 더 기다려 보겠다.”
그가 기다린 보람은 있었다.잠시 후 한 남자가 산모퉁이에 나타났다.
임충이 칼을 잡고 나서자 그 남자도 칼을 뽑아 들고 맞섰다.
“이 강도 놈아! 냉큼 칼을 버리지 못하겠느냐?”
임충이 다시 그 남자의 행색을 살펴보니 행색과 차림이 범상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오른 쪽 눈 주위에 검푸른 점박이 큼지막하게 나 있는 것이다.
더구나 남자는 체구가 크고 칼을 든 기세도 만만해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나 임충은 겁내지 않았다.그는 전직 동경 80만군 금군교두 임충이었다.
천하에 그를 모를 리가 없었다.두 호걸의 칼이 마주 부딪쳤다.
그러나 30합이 넘어도 좀처럼 승패가 갈리지 않았다.그때 문득 멀리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두 분 호걸은 잠시 손을 멈추시오.”임충이 바라보니 나루 건너 산언덕 위에
왕륜이 두천, 종만과 함께 수많은 졸개들을 거느리고 내려왔다.
임충과 함께 푸른 점박이 사내도 칼 잡은 손을 멈추고 기다렸다.
그들 일행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와서 왕륜이 다시 입을 연다.
“두 분 검술이 과연 명불허전이오. 이분은 표자두 임충이시지만 얼굴 푸른 친구는
뉘라 하시오? 성명이나 통합시다.”남자가 대답한다.“나는 양지(楊志)라는 사람이오.
일찍이 무관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천자의 대궐 관리를 맡아 황제의 칙명으로 9명의
호위병과 함께 큰 호수에서 화강석을 가져오는 중에 뜻밖의 풍랑을 만나 황하에서
배가 뒤집혔소.천자의 명을 수행하지 못해 대궐로 돌아가지 못하고 화를 피해 지내왔는데,
풍문에 조정에서 내 죄를 용서한다는 말을 듣고 지금 동경으로 가서 다시 내 예전의 지위로
복귀하려는 터요. 사정이 그러니 내게서 뺏은 물건을 순순히 돌려주는 것이 어떻겠소? “
그의 내력을 듣고 나자 왕륜은 말했다.“그럼 그대가 바로 그 양지란 말이오?”
“나를 어떻게 아시오?”“내가 수년 전에 동경에 과거 보러 갔다가 형 씨 이름을 들은 적이 있소.
오늘 이처럼 만났으니 함께 산채로 가서 술이나 한잔 나눕시다.”그들은 함께 산으로 올라갔다.
왕륜은 그들을 위해 크게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그러나 왕륜은 은근히 양지에게 술을 권하며 머리를 굴렸다.
‘양지의 무예가 임충에 못지않으니 두 사람을 함께 산채에 머물러 있게 한다면
두 호걸이 서로 견제하면 내 자리가 온전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곧 양지에게 산채에 머물러 있도록 권했으나 양지는 사양했다.
그는 임충과 사정이 달라서 구태여 도적의 소굴에 몸을 숨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대궐에 가면 떳떳하게 다시 벼슬자리에 오를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하룻밤을 양산박에서 묵고 하산했다.왕륜은 마음에 안 들었으나 별 수 없이
임충에게 산채의 네 번째 자리를 내주며 머물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 21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