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 휴게소
• 2020.2., 전민호
어머니께서 창원에 있는 모 병원에서 어깨 인공관절 수술을 하여, 나는 음력 정월 초하루 설날에 병원에서 지냈다. 어머니께서 연세가 많아 걱정했지만, 수술 예후가 좋아 형제들은 병실에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분의 양해도 있었지만, 찻집에 가서도 찻집의 온 시간을 다 써버린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 버스를 타고 청주로 돌아왔다.
피곤이 몰려와 버스에서 자다가 일어나 보니 캄캄한 밤에 달리는 버스 소리만 살아있다. 자가용으로 다닐 때는 앞길만 보고 다녔는데, 버스를 타니 고속도로 주변 경치가 색다르다. 드문드문 시골길을 밝히는 가로 등은 별빛 같고, 줄을 지어 다리를 밝히는 가로 등은 달덩어리 같다. 멀리 도시를 환하게 비추는 불빛은 은하수 같다. 밤하늘에 떠 있는 도시를 지나면 또 다른 작은 불빛 마을을 지난다. 고속도로 휴게소다.
남해 바닷가가 고향인 나에게 고속도로는 고향을 이어주는 끈이다. 장시간 운전을 자주 하게 되어 추억을 숨겨놓은 휴게소가 있다. 요즘은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를 많이 이용하지만, 그 길이 개통되기 전에는 경부고속도로와 대구․마산 간 고속도로를 이용했다. 추풍령휴게소에서 뻥튀기 과자로 가족들의 무료함을 달랬고, 현풍휴게소에서는 돌담을 거닐었다. 현풍휴게소 돌담을 배경으로 촬영한 사진으로 농협에서 주체한 가족사진 경연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한번은 고향에 다녀오다가 추풍령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었다. 아내가 우동을 너무 맛있게 먹어서 게걸스럽게 먹는다고 흉을 봤는데, 집에 와서 보니 막내를 임신했었다. 그 후 추풍령휴게소에서는 아내의 구박을 기꺼이 감내한다.
대전․통영 간 고속도로가 개통된 후에는 덕유산휴게소와 산청휴게소를 주로 이용한다. 아내와 운전 교대에 적절한 거리다. 겨울철에 덕유산휴게소에서 바라보는 덕유산 자락에 쌓인 눈은 여행의 멋을 더해준다. 상시 이월상품 할인매장도 있다. 나의 아웃도어 대부분은 이곳에서 샀다. 산청휴게소는 지리산의 먼발치에 앉은 느낌이다. 몇 년 전 진해 작은할아버지 상(喪)에 다녀오다가 산청휴게소에서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하늘에서 물통으로 물을 쏟아붓는 것 같이 비가 왔다. 차바퀴 중간까지 물이 차올랐다. 잠결에 갑자기 바뀐 세상을 알아차리는 데 한참 걸렸다.
어느 설날 새벽에 어린아이들과 함께 고향에 갔다. 주행 중 차 계기판에 원인 모를 비상등이 들어오고 차 소리가 이상해서 함양휴게소로 들어갔다. 휴게소 주차선에 들어가자마자 시동이 꺼졌다. 견인차 출동 요원은 설날 새벽인데도 자기 집에 차를 끌어놓고는 거실과 안방을 내어주고 난방 온도를 높여 주었다. 데리러 온 형님이 도착할 때까지 아이들과 함께 추위에 떨지 않고 기다릴 수 있었다. 이제는 그분의 성함과 집의 위치도 잊었지만, 함양휴게소를 지나칠 때 그분의 안녕을 기원한다.
전국 국공립대학도서관협의회 총무 일을 볼 때는 협의회 회장님과 사무국장님을 모시고 전국의 대학도서관을 많이도 다녔다. 졸리고 피곤할 때는 휴게소 가장자리에 있는 자판기 커피가 약이었다. 내린 커피는 입맛에 맞지 않았다. 사무국장님의 입맛과 같아서 더 즐겼던 것 같다. 저렴하고 누구에게나 무난한 맛을 내는 자판기 커피는 공무원 입맛이라고 생각했다.
캄캄한 밤을 뚫고 두어 시간 달린 버스는 선산휴게소에서 20분을 쉬었다. 화장실로 가서 쌓인 노폐물을 빼고, 늦었지만 식당에서 급하게 저녁을 때웠다. 그리고는 호두과자를 샀다. 우리 가족에게는 고속도로와 호두과자는 필수조건이다. 내가 고속도로를 타면 아이들은 호두과자를 기다린다. 다른 과자로 바꾸어 보았지만, 그만한 것이 없었다. 호두과자를 들고 버스 좌석에 앉으니 사랑을 전할 준비를 끝낸 느낌이었다.
휴식을 취한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가까이 있는 가로 등 불이 휙 지나갔다. 급커브 길에서는 싱긋 웃으며 휘리릭 날아가기도 한다. 휴게소는 긴 여정의 쉼터다. 졸리면 자기도 하고 덜 졸리면 잠을 깨워서 가는 곳이다. 문의 요금소로 나왔다. 몸을 뉘고 마음을 쉴 집에 다 왔다. 생각해 보니 고속도로 휴게소는 내 삶의 휴게소이기도 했다. 버스 가까이 있는 물체가 먼 곳의 물체보다 더 빨리 지나간다. 가까운 가족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데 인색했다. 부모 형제와도 소원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그들이 휙 지나기 전에 내가 삶의 휴게소가 되어주어야겠다.
첫댓글 고속도로 휴게소는 내 삶의 휴게소이기도 했다. 버스 가까이 있는 물체가 먼 곳의 물체보다 더 빨리 지나간다. 가까운 가족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데 인색했다. 부모 형제와도 소원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그들이 휙 지나기 전에 내가 삶의 휴게소가 되어주어야겠다
"가까운 가족에게 바쁘다는 핑계로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데 인색했다. 부모 형제와도 소원했다. 세월의 흐름 속에 그들이 휙 지나기 전에 내가 삶의 휴게소가 되어주어야겠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