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초의 서양화가 1940년작 ‘무희’를 그린 나혜석(1896~1948)은 김무영과 결혼할 때 네 가지 조건을 걸었습니다.
1.일생동안 나를 사랑해 줄 것
2.그림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3.시어머니와 따로 살 게 해줄 것
4.첫 사랑 최승구의 묘에 묘비를 세워 줄 것 등 나혜석은
왜 100여년 전에 이런 조건을 내 세운걸까요?
시부모 봉양과 여성의 정조가 중요 시 되던 시절이었지만 신랑 김우영은 다 들어주었습니다.
나혜석은 출산과 육아를 겪으면서 화가 활동이 소홀히하게 되자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뜯어 먹는 악마다’ 라고 잡지에 기고도 했습니다.
그러한 사회적 강요를 뒤로하고 미국, 유럽 등 2년 가까이 세계일주를 하면서 프랑스 파리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만난 인물이 천도교의 거두 최 린인데 사상, 취미, 예술관이 찰떡 궁합이 맞아 급기야 함께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남편 김우영은 그걸 알고 이혼 요구를 했지만 그도 종로에 기생을 첩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어쨌든 여성운동가이자 화가인 나혜석은 명성은 잃었고 불륜 상대인 최 린은 장관으로 승진하며 승승장구하였습니다.
나혜석은 개인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친일파로 돌아선 최 린을 정조유린죄로 고소하였습니다.
위자료로 12,000원(현재 약15억 원)을 청구하였고 그 돈은 만해 한용운의 동지 만공과 간월암에 일부 시주를 하였습니다.
나혜석이 발표한 이혼고백서에 ‘정조라는 것은 남이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자유 의지에 속하는 취미의 문제다 ‘ 라고 하였습니다.
조선 사회에 파란을 일으킨 나혜석, 열정적인 불꽃같은 삶, 수원 인계동에는 나혜석 거리도 있습니다.
고모할머니 되는 나혜석의 조카 손녀 나문희 탤런트도 진격의 할매입니다.
첫댓글
탈렌트나문희씨가
뼈대있는집이네요
유명한 집안 입니다.만
후세의 평가가 서로 엇갈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