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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반체제적 초현실주의(dissident surrealism) - 1920년대 말과 1930년 초의 조르쥬 바따이유(Georges Bataille)와 미셀 레리스(Michel Leiris) 등 ② negritude 운동 - 1940년대 말과 1950년대 초의 셍고르(Leopold Senghor)와 세제르(Aime Cesaire) 등 |
상이한 방식의 두 운동은, 무의식의 초월적 잠재력을 문화적 타자의 급진적 타자성과 연결시켰다. → 바따이유(Bataille)는 무의식에서의 자기 파괴적 충동을 다른 문화에서의 헌신적인 소비량과 관련
→ 셍고르(Senghor)는 유럽전통에 근본적인 합리성을 아프리카 문화에 근본적인 정서성에 대조시킴
12) 오늘날 의사인류학적 미술(quasi-anthropological art)에서 무의식과 타자 사이의 원시주의적 관련의 작품을 보면, 르네 그린(Renee Green)이나 아드리안 파이퍼(Adrian Piper) 등의 작품에서 취급된 환상은 비판적으로 취급되기도 하지만 때때로 원시주의적 환상은 실재론적 가정에 흡수되어, 이제 타자는 지당하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이렇게 정치적 진리를 투사된 타자나 외부에 두는 이러한 실재론적 가정의 원시주의적 변형은 위에서 지적된 타자성과 비교하여 정체성의 자동적인 약호화를 넘는 문제가 되는 결과를 갖는다. (This primitivist version of the realist assumption, this siting of political truth in a projected other or outside, has problemmatic effects beyond the automatic coding of identity vis-a-vis alterity noted above.)
13) 첫째는, 이 외부-타자의 투사의 문제이다. (First is the problem of the projection of this outside-other.)
조안느 파비안(Johannes Fabian)은
① 시간은 세계(논의에 따라서, 혹은 자연, 혹은 우주)에 내재적이며, 따라서 세계와 공존한다. [Time is immanent to, hence coextensive with, the world.(or nature, or the universe, depending on the argument] ② 세계(자연적이며 사회문화적 실재의 더 폭넓은 의미에서)의 부분들 사이의 관계는 시간적 관계로서 이해 될 수 있다. [Relationships between parts of the world(in the widest sense of both natural and sociocultural entities) can be understood as temporal relations.] |
라는 두 가지 가정에 기초해서 공간 위에 시간을 신화적으로 대응시키는데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리하여 서로에게 대응된 공간과 시간과 함께, “저 너머”는 “그때로 되돌아가는”이 되었고, 가장 먼 것은 가장 원시적인 것이 되었다. 원시적인 것의 이러한 자리매김은 명백히 인종차별적이었다. 원시적인 것은 우선 서구의 백인 주체에 의해 ‘문화’사에서 최초의 단계로서 투사되고 다음에는 ‘개인’사에서의 최초의 단계로서 재 흡수된다.
원시주의적 환상이 해체되지 않는 한, 타자가 무의식과 여전히 융합되는 한, 오늘날까지 타자성의 탐구는 차이가 허용되고, 심지어 진가가 알려지는 새로운 방식으로 타자를 “자기화”하는 것 이상으로, 타자가 여전히 자아의 돋보임으로(두드러짐으로) 남아 있는 낡은 방식으로 자아를 “타자화”할 것이다. (To the extent that the primitivist fantasy is not disarticulated, to the extent that the other remains conflated with the unconscious, explorations of alterity to this day will "other" the self in old ways in which the other remains the foil of the self more than "selve" the other in new ways in which difference is allowed, even appreciated.) 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원시주의적 환상은 의사-인류학적 미술에서 살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14) 그 다음에는 이 외부-타자의 정치학의 문제이다. (Then there is the problem of the politics of this outside-other.) 오늘날 우리의 글로벌 경제에서, 순수한 외부를 가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이것은 우리의 세계체계를 조급하게 총체화 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과 혁신 모두를 초월적 사건이라기보다 오히려 내재적 관계로서 명시하는 것이다. 오래전에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은 negritude 운동의 대립 논리에서 유럽문화의 부주의한 확증을 보았으나, 포스트 식민주의 미술가와 비평가는 단지 최근에야 실천과 이론을 타자성의 이원 구조에서 차이의 관계 모델로, 분리된 공간-시간들에서 혼합된 경계지대로 발전시켰다.
15) 많은 모더니즘에 기본적인 이러한 타자의 전유는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지속되는데 이탈리아 철학자 프랑코 렐라(Franco Rella)는 타자의 신화The Myth of the Other(1978)에서 라캉(Lacan), 푸코(Foucault), 그리고 들뢰즈(Deleuze) 그리고 기타리(Guattari)처럼 다양한 이론가들이 타자를 동일자의 부정(negation of the same)으로서 이상화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작업이 종종 부정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을 재평가하게 한다 해도, 그것들에 대한 지배적인 정의를 취한다. 그래서 또한 그것은 종종 지배적인 정의에 대한 수사학적 전복(rhetorical reversals)이 그러한 정치학을 지지하게끔 허용한다. 더 일반적으로 이러한 타자성의 이상화는 한 집단이, 역사의 새로운 주체로 특권을 부여받지만, 단지 다른 집단에 의해 대체되게 될 뿐인, 시간적 궤도를 따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연대기는 상이한 (사회적, 인종적, 성적 등등) 차이뿐만 아니라 또한 각각의 차이 내에 상이한 입장들을 소멸시킬 수도 있다. 결국 그 역사적 주체들이 역사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기 전에 그것들을 소모시킬 수 있는 정치학이 되는 것이다.
16) 이러한 타자의 헤겔주의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작용할 뿐 아니라, 그것은 모던한 주체에 구조적일 수 있다.(it may be structural to the modern subject.) 사물의 질서 The Order of Things(1996)의 유명한 구절에서, 미셀 푸코(Michel Foucault)는 이러한 주체를 주장했는데, 19세기에 부상된 이 모던인(modern man)은 데카르트와 칸트 철학의 고전적 주체와 다른데, 그 이유에 대해 그는 그의 진리를 비사고-무의식의 타자-에서 추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무의식의 베일 벗기기는 모든 인간 과학의 진리이다. 이 때문에 정신분석과 인류학과 같은 베일 벗기기가 모던 담론의 가장 특권적인 것이다.”라는 Foucault의 이러한 시각에서 과거와 현재의, 자아의 타자화는 단지 모던 주체에 대한 부분적인 도전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타자화는 또한 낭만적인 대립을 통해 자아를 지탱하고, 변증법적 전유를 통해 자아를 보전하고, 초현실주의적 탐구를 통해 자아를 확장하고, 후기 구조주의적 교란 등을 통해 자아를 연장하기 때문이다.
인류학적 연구 시대의 미술과 이론(Art and Theory in the Age of Anthropological Studies)
17) 인류학의 몇몇 비평가들은 일종의 미술가 선망(artist envy)을 발전시켰다.(제임스 클리포드의 이문화간의 ‘민족지적 초현실주의’의 콜라주에 대한 열광은 유명한 사례이다.) 이러한 선망에서 미술가들은 형식적인 성찰성의 전형, ‘텍스트로서 이해된 문화’에 대한 자각적 독해자(selfaware reader)가 되었다. 여기서 문화적 타자는 또한 인류학자, 비평가 혹은 역사가의 이상적인 이미지를 반영하기 위해 재형성된다. 물론 신인류학은 문화를 상이하게, 텍스트로서 이해하는데, 그 말은 다른 문화에 대한 그 투사가 심미적인 만큼 텍스트주의적 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텍스트 모델은 대화와 다성(polyphone)의 담론적 패러다임을 통해 민족지적 권위에 도전을 한다고 상정된다. 그러나 실천이론의 윤곽 Outline of a Theory of Practice(1972)에서 오래 전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는 이러한 텍스트 모델의 구조주의적 변형을 의문시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관계를 의사소통 관계로 더 정확하게는 해독(decoding) 작용으로 환원시켰기 때문이며 따라서 민족지학의 독해자를 권위가 덜한 것이 아니라 더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말로, 이러한 “텍스트의 이데올로기”, 즉 담론으로서 실천의 재약호화(recoding of preactice as discourse)는 또한 이러한 방법들을 추동하는 맥락주의적 야심(contextualist ambitions)에도 불구하고, 문화 연구와 신 역사주의에서 그렇듯이 의사-인류학적 미술에서 뿐만 아니라 신인류학에서도 지속된다.
18) 최근에 인류학자들 사이에 구미술가 선망은 다른 방식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민족지학자 선망은 많은 미술가와 비평가를 집어 삼킨다(consume). 인류학자들이 문화적 해석에서 텍스트 모델을 이용하고자 했다면, 이들 예술가들과 비평가들은 이론과 실천이 화해되는 것 같이 보이는 필드워크(fieldwork 현지조사)를 열망한다. 종종 그들은 참여자-관찰자의 기본 원리에 간접적으로 의존하는데, 이들 중에 클리포드는 특정 제도와 민족지적 현재(the ethnographic present)를 애호하여 narrative의 시제에 비판적 초점을 둔다. 그러나 이러한 차용은 단지 현대 미술과 비평에서의 민족지적 전환의 징후일 뿐이다.
19) 20세기 미술에는 타자의 많은 참여가 있었다. 그러한 참여들 중 대부분은 원시주의적이고, 타자성의 정치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렇다면 그 민족지적인 방법에 대한 상대적인 자의식을 제쳐놓으면, 무엇이 현재의 전환을 구별 짓는가?
첫째, 우리가 보아 왔듯이, 인류학은 타자성의 과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점에 대해서 정신분석학과 함께, 그것은 예술적 실천과 비판적 담론 모두의 국제어(lingua franca)이다.
둘째, 문화를 그 대상으로 다루는 것이 그 분야이며 이러한 확장된 관련 분야가 포스트모더니즘 실천과 이론 영역이다.
셋째, 민족지학은 맥락적이라고 여겨지는데, 현대 미술가와 비평가들은 오늘날 다른 실천가들과 함께 종종 자동적으로 맥락적이기를 요구하며 그들 중 대부분은 일상에서 현지조사(fieldwork)를 열망한다.
넷째, 인류학은 현대미술과 비평에서 또 다른 천편일률적인 가치인 학제적인 것을 중재한다고 여겨진다.
다섯 번째로 인류학의 최근의 자기-비판은 그것을 매력적으로 만드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설사 주변부의 타자들에 대한 낭만적인 기분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중심의 민족지학자의 성찰성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유 때문에 인류학의 결함 있는 탐구들은 정신분석학의 기묘한 비판들처럼 선봉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이러한 경향을 따라 가장 예리한 비판이 느껴진다.
20) 그래도 민족지적인 전환은 또 다른 요소에 의해 결말을 얻게 되는데, 이 요소는 인류학의 이중유산을 포함한다. 문화와 실천이성 Culture and Practica Reason에서 마샬 사린스(Marshall Sahlins)는 두 가지 인식론이 그 분과(discipline)를 오래 분리시켜 왔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상징 논리를 강조 하는데, 여기서 사회적인 것은 주로 교환체계에 입각해서 이해된다. 다른 것은 실천이성을 특권화 하는데, 그것은 사회적인 것이 물질문화의 견지에서 주로 이해된다. 이렇게 볼 때, 인류학은 이미 동시대 미술과 비평을 지배하는 두 가지 모순된 모델에 참여한다. 즉 한편으로, 사회적인 것을 상징적 질서 또는 문화적 체계로서 재형성해서, “인간의 소멸”, “저자의 죽음” 등을 촉진했던 1960년대의 언어학적 전환인 텍스트의 구 이데올로기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구 텍스트 패러다임과 주체 비판에 대립되는 컨텍스트와 정체성으로의 전환인 지시대상에 대한 최근의 갈망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렇듯 인류학이 분리된 담론으로 전환하면서, 미술가들과 비평가들은 이러한 모순적인 모델들을 마술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그들은 동시에 다 문화 기호학자의 외관을 취하면서 컨텍스트적인 fieldwork의 외관을 취할 수 있고, 비판이론을 계속하면서 비판이론을 비난할 수 있고, 주체를 상대화하면서 다시 중심에 둘 수 있다.
현대 미술의 장소선정(The Siting of Contemporary Art)
21) 현대 미술에서의 민족지적 전환은 또한 지난 35년에 걸친 미니멀리즘 미술 계보학 내에서의 발전에 의해 추동된다. 이러한 발전들은 연이은 탐구들로 구성되어 있다. 즉 첫째는 미술 매체의 물질적 구성요소들에 대한 탐구, 그 다음에 그것의 공간적 지각 조건에 대한 탐구, 다음에는 이러한 지각의 육체적 토대(corporeal bases)에 대한 탐구였는데, 이제 미술 제도는 더 이상 단지 공간적 견지(스튜디오, 화랑, 박물관 등등)에서만 묘사될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또한 상이한 실천들과 제도들, 다른 주체성들과 다른 공동체들의 담론적 네트워크(discursive network)였다.
22) 이러한 발전은 또한 - 매체의 표면으로부터 박물관의 공간으로, 제도적 틀에서 광범위한 네트워크로, 많은 미술가들과 비평가들이 욕망이나 질병, 에이즈나 홈리스(homelessness)같은 조건들을 미술을 위한 장소로 다루게 되기까지- 미술의 장소선정에서 일련의 변화를 이루게 된다. 이러한 장소선정의 비유와 함께, 지도그리기의 유비8)가 나타난다.(Along with this figure of siting has come the analogy of mapping.) 중요한 순간에 Robert Smithson과 다른 이들이 이 지도제작 공정을, 미술의 장소선정을 극적으로 변형시킨 지질상의 극단으로까지 밀어 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장소선정은 또한 화랑과 박물관에 의해 보상될 수 있고, 속죄의 미술가의 신화(아주 전통적인 장소)를 지지하는 등등의 한계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근래 미술에서의 지도그리기는, 어떤 제도나 어떤 공동체의 민족지적인 지도그리기가 오늘날 장소-특정적인 미술의 주요 형태로 될 정도로, 사회학적이며 인류학적인 것을 향하는 경향이 있다.
23) 사회학적 가정과 인류학적인 복잡한 사태에 대한 자각은 또한 메리 캘리(Mary Kelly)와 실비아 콜보우스키(Silvia Kolbowski)같은 미술가들의 페미니즘 지도 그리기를 인도한다. 따라서 사이Interim(1984-89)에서, Kelly는 이미지와 음성의 대위법적 혼합을 통해 페미니즘 운동 내에서의 개인적이며 정치적인 입장들을 기록한다. 사실상, 그녀는 그 운동을 그녀가 미술, 이론, 가르침, 행동주의, 우정, 가족, 스승, 나이 먹음에 관한 토착 민족지학자로서 참여한 친족관계 체제로서 재현한다. 미술에 대한 제도적 정의의 다양한 재구성에서, 콜보우스키(Kolbowski)는 또한 민족지적 지도그리기를 반성적으로 채택한다. 카탈로스에서 확대된 Enlarge from the Catalogue(1987-88)과 같은 프로젝트에서 그녀는 미술 전시, 카탈로그, 리뷰와 같은 것에 작용중인 문화적 권위에 대한 페미니즘 민족지학을 제안한다.
24) Baltimore의 현대미술관이 후원한 박물관 채굴하기Mining the Museum에서, Wilson은 Maryland 역사학회의 고고학자의 역할을 맡았다. ① 우선 그는 그 컬렉션을 뒤져 보았다. ② 그 다음에 그는 종종 역사적인 것으로서 드러나지 않은, 주로 아프리카-미국인의 역사들을 환기시키는, 재현들을 재생이용 했다. ③ 마지막으로 그는 또한 역사에 권리가 있다고 오래 주장해 온 다른 재현들을 다시 구성했다. (예를 들어, Metalwork 1793-1880)이란 명칭이 붙은 한 전시회에서, 그는 한 벌의 노예 쇠고랑을 두었다.) 그렇게 함에 있어, 윌슨은 또한 상실되거나 억압되거나 혹은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제도 속에 옮겨진 아프리카-미국인 공동체의 민족지학자로서 봉사했다. Andrea Fraser는 상이한 박물관 고문서 고고학과 박물관 문화의 민족지학을 수행했다. 그들이 사랑스럽지 않나?Aren't They Lovely?에서 그녀는 특정 계급 구성원의 이질적인 가정의 물건들이(안경에서 르느와르Renoirs 작품에 이르는)일반 미술 박물관의 동질적인 공공 문화 속에 어떻게 승화되는지 조사하기 위해 버클리의 캘리포니아 대학의 미술관에 개인 유물기증을 재개한다. 여기서 Fraser는 제도의 승화를 겨냥한 반면에 윌슨은 제도의 억압에 초점을 맞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미술가들은 박물관학을 가지고 놀며 처음에 미술과 인공물(artifacts)의 제도적 약호화(institutional codings)를 모두 드러낸 후 그 다음에 재구성 한다.
25) 미술제도들은 또한 장소 특정적인 작품을 경제 개발, 사회적 확장 그리고 미술 관광여행을 위해 이용할 수 있으며, 사유화의 시대에 이것은 필연적이며 심지어 당연하다고 추정(assume)된다. Sculpture Chicago의 1993 공공미술 프로그램인 「활동중인 문화(Culture in Action)」에서, 8개의 프로젝트가 시 도처에 설치되었다. 다니얼 마르티네쯔(Daniel Martinez), 마크 디온(Mark Dion)과 케이트 에릭슨(Kate Ericson)과 멜 찌글러(Mel Zeigler)와 같은 미술가들이 주도한, 이들 합작은 혁신적인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창작에서 다양한 청중을 포함하는 도시의 실험실로서 이바지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자기들을 지원한 기업과 에이전시를 위한 홍보활동 시도로서 이바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애매한 공익사업의 또 다른 사례는 “유럽의 문화수도”의 연례 선정이다. 1993의 수도인, 안트워프(Antwerp)에서 여러 장소-특정적인 작품들이 다시 주문되었다. 여기서 미술가들은 그 쇼(show)의 모토(motto)인 「표준적인 상황을 취해서 그것에 과거와 현재의 조건을 겹쳐 다중 읽기로 개역하기에 대하여」와 일치하여, 현재의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 이상으로 상실된 역사들을 탐구했다. 장소 특정적 작품의 선구자인 고든 마타-클락(Gordon Matta-Clark)에서 빌린, 이 모토는 장소-지도그리기의 은유와 상황주의적 전용(detournement)을 혼합한다. 그러나 여기서 또 인상적인 장소 특정적인 프로젝트가 또한 관광여행의 장소로 바뀌었고, 상황주의적 분열(disruption)과 문화-정치적 진흥(promotion)은 조화(reconciled)를 이루게 되었다.
26) 이들 경우에 제도는 그것이 그렇지 않으면 돋보이게 할 작품에 그들을 던질 수도 있다.(In these cases the institution may shadow the work that it otherwise highlights.) 그것은 스펙터클이 되고, 그것은 문화자본을 모으고, 또한 감독-큐레이터는 스타가 된다. 이것은 음모도 아니고, 순수하고 단순한 흡수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 장소를 재형성하는 것 이상으로 미술가를 우회시킬 수 있다. Bejamin에 따르면, 프롤레트쿨트 작가가 프롤레타리아의 현실에 서고자 했지만, 단지 부분적으로 후원자의 위치에 자리잡았던 것과 같이, 민족지적 미술가는 장소가 선정된 공동체와 협력할 수는 있지만 오직 이 작품을 다른 목적으로 방향이 돌려지게 할 뿐이다. 종종 미술가와 공동체는 양자의 정체성의 단순화를 통해 연결되는데, 전자의 외관상의 진정성이 후자의 진정성을 보장하기 위해 불리워지며, 결국 새로운 장소 특정적인 작품은 간단히 정체성의 정치학 속으로 붕괴될 우려가 있다. 미술가가 장소 선정된 공동체의 정체성 속에 서 있을 때, 그가 이러한 정체성을 대표하기를(stand for) 그것을 제도적으로 재현하기를 요구받을 수 있다.
분과의 기억 그리고 비판적 거리(Disciplinary Memory and Critical Distance)
27) 결론적으로 필자는 두 가지를 주장을 하는데
① 현대 미술의 장소선정(the siting of contemporary art)
② 그 내부에서의 성찰성의 기능을 다루는 것이다. (the function of reflexivity within it)
필자는 많은 미술가들이 욕망이나 질병 같은 조건들을 작품을 위한 장소로서 다룬다고 시사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은 수직적인 것 이상으로 즉 주어진 장르나 미디어의 분과 형태에 대한 통시적인 참여이상으로, 수평적으로 즉 사회적 이슈에서 이슈로, 정치적인 논쟁에서 논쟁으로 공시적인 움직임 속에서 작업한다. 형식주의적인 질(quality)로부터 네오 아방가르드적인 흥미(interest)로의 일반적 변화와 상관없이, 매체 특정의 것에서 담론-특정의 실천(discourse-specific practice)으로의 이러한 이동의 여러 가지 지표들이 있다.
28) 1장에서 역사적 아방가르드로의 귀환과 연관된 포스트모더니즘적 파열(postmodernist rupture)에서 수평적이고 공간적인 축은 여전히 수직적인 것과 시간적인 축과 상호교차 했다. 미적 공간을 확장하기 위해서, 미술가들은 역사적 시간 속으로 깊이 파고들어 작품에 어울리는 새로운 장소들을 열게끔 과거의 모델을 현재로 귀환 시켰다. 두 가지 축은 긴장 상태에 있었지만, 그것은 생산적인 긴장이었다. 그 둘은 이상적으로 조정되어 함께 앞으로 나아갔고, 과거와 현재는 변위되었다. 오늘날, 미술가들이 수평적인 작업경향을 따름에 따라 수직적인 경향은 때때로 사라지는 것 같다.
29) 이러한 수평적인 작업방식은 미술가들과 비평가들이 각 문화의 구조를 지도그릴 만큼 아주 충분히 그것에 친숙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역사를 서술할 만큼 아주 충분히 그것에 친숙하기를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가 에이즈에 관해 작업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에이즈 재현의 담론적 넓이뿐만 아니라 역사적 깊이도 이해해야 한다. 그러한 여러 가지 담론들의 양 축을 조정하는 것은 엄청난 부담이다. 여기에 수평적인 작업방식에 대한 전통주의자의 경고 -새로운 담론적 연결은 오래된 분과의 기억을 흐리게 할 수도 있겠지만- 는 논박되기만 하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And here the traditionalist caution about the horizontal way of working-that new discursive connections may blur old disciplinary memories-must be considered, if only to be countered.) 그 비난에서 분명한 것은 이러한 움직임이 현대미술을 위험스럽게도 정치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실로, 이러한 미술의 이미지는 정치적인 미술을 전적으로 추방하려는 요구가 있으면서도, 일반 문화에서 지배적이다. 이러한 요구는 명백히 자기모순적이지만, 그럼에도 그것들도 또한 논박되기 위해 고려되어야 한다.
30) 필자의 두 번째 주장은 현대 미술의 성찰성(reflexivity)에 관계한다. 필자는 이러한 타자성을 손상 시킬 수도 있는 타자와의 과잉-동일시(현실 참여, 자기-타자와, 등등을 통해)에 맞서 성찰성을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다. 역설적으로, Benjamin이 오래 전에 함축했듯이, 이러한 과잉-동일시는 그것이 재현에서 이미 작용중인 타자화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타자를 소외시킬 수 있다. 이러한 너무 짧은 거리나 너무 많은 거리라는 위험에 직면에서 필자는 틀 짜는 사람이 타자를 틀 지울때 틀 짜는 사람을 틀 지우고자 하는 변위의 작업을 주장해왔다. 이것이 주어지고 구성된, 실제적이며 공상적인 것으로서의 타자성의 모순적인 사태를 다루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러한 틀짜기(framing)는 로즐러(Rosler)가 한 Bowery Project에서처럼 사진에 붙이는 캡션만큼 단순할 수도 있고, 혹은 Heap of Birds 혹은 바움가르텐의 기호들에서처럼 이름의 전도만큼 단순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러한 재구성만으로는 충분히 않다. 또, 성찰성은 신비적, 심지어 자기도취주의에 이를 수 있는데 거기서 타자는 모호해지고, 자아가 단언된다.(Again, reflexivity can lead to a hermeticism, even a narcissism, in which the other is obscured, the self pronounced.) 그것은 또한 전적으로 참여를 거부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 비판적 거리는 무엇으로 보장하는가? 이 개념이 다소 신화적이고, 무비판적이고, 일종의 마술적 보호, 그것만의 순수 의례가 되었는가? 그러한 거리가 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전히 바람직한가?
31)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타자와의 환원적인 과잉-동일시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타자와의 지독한 탈동일시는 더욱 나쁜 것이다. 오늘날 좌우의 문화정치학은 이러한 궁지에 빠져있는 듯 하다. 좌파는 상당한 정도로 희생자로서 타자와 과잉-동일시하는데, 이것은 타자를 고통의 위계 속에 가두며, 그에 따라 비참한 자들은 죄를 저지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더 상당한 정도로 우파는 자신의 희생자로서 비난하는 타자와 탈 동일시하는데, 이러한 탈 동일시를 이용해서 공상적인 공포와 강한 혐오를 통해 정치적 연대를 구축한다. 이러한 궁지에 직면에서, 비판적 거리(critical distance)는 결국 그렇게 나쁜 생각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