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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방문 축일]
참 기쁨의 삶을 위해 꼭 필요한 세 요소.
오늘은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찾아보심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하시고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기쁘고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은 엘리사벳을 방문함으로써 참 기쁨의 삶이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을 잉태하신 어마어마한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온 인류에게 이 행복을 전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늙은 사촌 누이와 그 태중의 아기를 기쁘게 했다는 것만으로 기뻐하십니다.
이를 볼 때 참 기쁨을 위해 필요한 것이 세 가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는 줄 것이 있어야 합니다.
EBS 다큐프라임, ‘가족쇼크’에서 김용준(21세) 씨는 말기 암으로 죽어가는 엄마의 전화를 계속 받지 않습니다.
엄마는 아들과 단둘이 살았는데, 아들이 호스피스 병동에 찾아오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으니 혼자 고통을 견뎌야 할 뿐입니다.
어버이날 카네이션도 자신이 직접 만들어서 방에 놓습니다.
그러며 전화를 안 받는 아들을 원망합니다.
아들은 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어머니의 전화까지 외면하는 것일까요?
김용준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연락을 안 하면 싫어할 수 있겠다.’ 생각은 하지만, 전화해서 목소리 들을 때마다 진짜 현실이 눈앞에 딱, 있다는 느낌? 엄마가 저보고 살았고 저도 엄마만 보고 살았으니까.
엄청 소중하죠. 아직은 함께 할 게 많았는데! 제일 하고 싶은 건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 먹는 거.”
김용준 씨는 아직 엄마의 사랑이 더 필요한 상태입니다.
더 받아야 하는 상태인데 이제 엄마를 위로해야 하는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결국, 엄마 임종 직전에야 엄마를 볼 용기를 내어 찾아갑니다.
그러나 울기만 합니다.
엄마는 정신이 혼미한 중에도 아들을 위해 머리맡에 숨겨 두었던 5만 원 지폐를 쥐여줍니다.
엄마는 주고 싶은데 줄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깝고, 아들은 받아야 하는 나이인데 주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무언가 주어야 하는데 아직 가진 것이 없어서 사랑하면서도 죽어가는 엄마를 볼 힘이 없는 것입니다.
주고 싶은데 줄 것이 없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요?
두 번째는 내가 주는 것을 기쁘게 받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참 기쁨의 삶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에 있습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잉태하신 후 당신의 능력으로 누구를 가장 기쁘게 할 수 있는지 아셨습니다.
늙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에게 가시면 가장 좋겠다고 생각하셨습니다.
내가 아무리 은총이 있더라도 그 은총을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면 그것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의 원인이 됩니다.
레오파드 증후군이라는 병 때문에 태어나면서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로 자란 이예지 양.
검은 상자 속에 갇혀 사는 예지 씨는 부모의 존재도,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먹으면 좋고 배고프면 화를 내는 동물과 같은 상태입니다.
부모는 그녀와 소통을 할 수 없어서 예지가 짜증을 내며 손으로 자기 머리를 때리고 자해를 해도 무엇을 원하는지 도저히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주고 싶어도 받을 능력이 없는 자녀를 둔 부모의 마음은 미어질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겠지만 딸이 자신보다 먼저 죽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누구도 그녀에게 자신들처럼 대해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모 마리아에게는 당신을 받아들이고 이해해 줄 능력을 지닌 엘리사벳이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달려가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행복일까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그러나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 번째가 가장 중요합니다.
사실 사랑하면 누구나 줄 것이 있고 그 줄 것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행복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데 ‘겸손’이 없다면 그렇습니다.
제가 예전에 사순절 동안 특강을 같은 내용으로 17번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강의를 많이 하는 것이 사순절 때 주님께 바치는 희생으로 여기고 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17번째 강의를 마치고 많은 감사와 박수를 받으며 집으로 향하는 자동차 안에서 커다란 공허함을 느꼈습니다.
‘이게 다인가?’
저는 저도 모르게 저 자신의 영광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남을 기쁘게 하는 것만으로 행복하려면 겸손해져야 합니다.
나는 누군가를 기쁘게 할 능력이 없는데 내가 기뻐지라고 주님께서 나에게 그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를 기쁘게 했다면 그것만으로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김용준 씨는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리고 싶었어도 아직 힘이 없었습니다.
그 한 명을 기쁘게 할 힘도 받아야 생기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무언가 줄 수 있다면 그것 자체로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전에 ‘가장 작은 학교’라고 하는 제목으로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중국의 한 시골 학교인데 선생님이 한 명이고 학생도 한 명입니다.
선생님은 그 한 명에게 매우 고마워하고 아이도 선생님에게 참으로 고마워합니다.
그 한 명이 없으면 자신은 선생님일 수 없고 아이는 학생일 수 없습니다.
교실에 선생님 한 분, 학생 한 명이 수업하는 사진을 보며 ‘하느님께서 세상에 말씀을 주실 때도 이와 같았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려는 것은 ‘말씀’, 곧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뿐입니다.
하느님은 얼마나 다행이셨을까요? 들어줄 성모 마리아가 없으셨다면 말씀은 아버지 입에서 나오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당신의 말씀을 받아줄 성모 마리아 한 분을 보며 기뻐하셨고, 오늘은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 한 분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더 바란다는 것은 교만입니다.
저도 유튜브를 하면서 가장 기쁜 것은 내가 가진 것이 있고 그 가진 것을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조회수에 신경이 쓰입니다.
교만의 병이 도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내가 할 말이 있고 한 사람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 있어도 기쁠 수 있는 성모님의 겸손을 본받으려 합니다.
이것만 있으면 기쁘고 행복합니다.
내가 누군가를 기쁘게 해 줄 수 있는 것, 그다음은 내가 줄 것을 받을 그 누군가가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니 줄 것이 있고 받아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기쁘게 감사해야 할 겸손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31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복음: 루카 1,39-56
성령의 궁전이신 동정 마리아님, 저희를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소서!
복음서 안에 등장하시는 성모님은 참으로 말을 아끼십니다.
신비로운 베일에 싸인 아들 예수님의 때로 이해하지 못할 언행 앞에서, 그저 성모님은 마음에 간직하십니다.
성모님은 침묵과 기도가 일상이셨던 분임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성모님께서는 억울한 일들을 꽤 많이 당했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를 통한 수태고지 사건 때, 나자렛의 소녀 마리아는 요셉과 단란한 결혼생활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으로 인해 평범한 삶을 물건너 갔습니다.
인간적 시선으로 억울한 일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 사람 저 사람 찾아다니면서, 이러쿵 저러쿵 억울하다며
하소연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딱 한 사람, 연세가 들고 지혜로운 엘리사벳을 찾아가 그분의 영적 동반을 받습니다.
나자렛에서 아인카림으로 며칠이나 걸리는 여행길이었는데, 서둘러 걸어온 나자렛의 마리아를 엘리사벳을 극진히 환영하고 환대합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삿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2-45 )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마리아를 맞이하는 엘리사벳은 환희에 찬 목소리로 마리아를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환대를 받고 있는 마리아 역시 기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 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궁전이신 동정 마리아님, 당신은 항상 부드러움과 신중함으로 아들 예수님의 곁을 지키셨으니, 시련을 당할 때 저희를 버리지 마시고, 믿음이 흔들리는 어둠의 순간에 저희 손을 잡아 이끌어 주소서.
저희를 은총의 샘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소서.”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강론>
(2024. 5. 31. 금)(루카 1,39-56)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1) 천사가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한 일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한 일이기도 합니다(루카 1,30-33).
성모님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것은, 바로 그 ‘기쁜 소식’을 전해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엘리사벳은 즈카르야와 친척들과 이웃들에게 다시 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은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이 성모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처음 전해진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메시아 강생 소식’이 모든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는 이유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메시아께서 세상에 오셨다는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기쁜 소식’이라는 말은, 일차적으로 ‘나에게’ 기쁨을 주는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다.
너도 기뻐하게 될 것이다.
우리 함께 기뻐하자.” 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일이 바로 선교활동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메시아 강생 소식’을 들은 자신의 기쁨을,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루카 1,46).” 라고 표현하셨는데, 자신의 큰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가셨습니다.
따라서 성모님을 ‘첫 선교사’ 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2) 성모님을 통해서 ‘기쁜 소식’을 듣게 된 엘리사벳은 자신의 기쁨을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은, 엘리사벳 자신의 기쁨을 표현한 말이지만, 세례자 요한의 기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소식을 전하는 사람도 기뻐하고, 그 소식을 듣는 사람도 기뻐하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기쁜 소식’입니다.
시메온 예언자는 그 기쁨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1,29-30).”
이 말은,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는 뜻입니다.
‘기쁜 소식’이 주는 기쁨은 누구에게나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큰 기쁨’입니다(루카 2,10).
3) 그런데 실제 현실을 보면, ‘모든 사람’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인데도, ‘모든 사람’이 기뻐하는 것은 아니고,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만 기뻐하고,
안 믿거나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헤로데의 경우에는 자신의 왕권을 지키는 일만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메시아 강생 소식’은 ‘기쁜 소식’이 되기는커녕 ‘듣기 싫은 소식’이 되었습니다(마태 2장).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계획할 때, 또 그 계획을 실행할 때, 예루살렘 주민들과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그런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분명히 메시아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왜 그렇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들은 메시아께서 주시는 구원보다도,
헤로데처럼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는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돈을 모으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돈을 잘 모으는 방법에 관한 소식’만이 ‘기쁜 소식’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다음 말씀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0,14-15).”
‘기쁜 소식’을 들어도 전혀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구원의 기쁜 소식’은 ‘심판을 경고하는 무서운 소식’으로 바뀌게 됩니다.
4)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신앙인들 자신들은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지, 정말로 기쁨 속에서 살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참된 기쁨을 전해 주려면, 신앙인들이 먼저 그렇게 기뻐해야 하고,
그 기쁨 속에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만일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신앙인들의 삶에
기쁨이 없다면, 신앙인들이 전하는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선교활동이 신앙인들의 본분이고 의무라 하더라도 의무감으로 할 일이 아니라, 기쁨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기쁨 없이 의무감만으로 전하는 소식은 기쁜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