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좋아하는 예술작품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다. 실물보다 크게 청동으로 만든 이 발가벗은 남자상은 깊이 사색하는 자세로 내면을 향한 아득한 표정으로 팔목에다 머리를 얌전하게 기대고 앉아 있다. 그가 발가벗고 있는 까닭은 실재의 의미를 파고드느라 사회적 관습과 참여를 상징하는 의복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칼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는 두 살 때 한 부부에게 입양되었는데, 그들은 칼을 자기네 혼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입양했다. 그들은 이혼하지는 않았지만 칼이 쉰 살 때 두 해 간격으로 차례차례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 서로에게 인내하며 살았다. 칼은 그들이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불투명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은 자기를 길러주고 보살펴 주었다는 점에서 그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사실 칼에게 냉혹하거나 학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의 삶을 쓸데없이 간섭하던 그 강압적 행태를 생각하면 그들이 미워졌다. 칼은 부부가 함께 공유하는 유일한 물건이었고, 그래서 그들은 앞다투어 그의 생활을 시시콜콜 간섭하고 사생활을 누릴 기회마저 빼앗았다.
어릴 적에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을 안 칼은 양부모가 이용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그래서 그는 탈출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닫아버렸다. 그는 평소에도 자기 방에서 지낼수 없었고, 어머니의 끊임없는 감시 밑에서 공부하고 놀아야 했다. 그러다 보니 조금이나마 사생활을 갖고 싶은 절망적 노력의 일환으로 자신만의 벽을 쌓게 되었다.
칼의 생활에는 오즈의 마법사의 사자 같은 용맹함이 없었다. 그래서 허수아비의 지적 몽상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지적 고찰의 대상으로 보았다. 몇 안 되는 소꿉 친구들이 서로 어울리게 된 것은 대체로 우표수집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그는 오즈의 마법사에서 허수아비(지성중추)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특히 사자(몸중추)에 손상을 가져오는 학교에서는 훌륭하게 처신했다. 칼은 존재의 심장부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의 내면의 공허함은 끔찍스러웠다. 그리고 자신은 감정상의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는 감정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거부 단계에서 보내면서도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칼의 일생에서 거부 단계는 대단히 강력하면서도 대단히 교묘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상처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정말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알지만 적어도 의식 수준에서는 그것을 느끼기를 거부하는 셈이다. 그의 상처는 그의 지성중추 속에 깔끔하게 분류되어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당한 피해와 그것이 불어넣고 있는 분노를 느낄 필요가 있다. 그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삶의 열정이 필요하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의 고통은 감정적으로 맞부딪칠 때라야 그에게 도움이 될수 있다.
대학에서는 흠모하는 교수의 영향을 받아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고등학교에서 가르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학사과정만으로는 준비가 충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그 시점에 자신은 교사가 될 체질이 아님을 깨닫고 컴퓨터 시장분석가로 취직하여 훌륭하게 자리를 지켜냈다. 그는 혼자서 일하고 대부분 지휘감독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직업이 마음에 들었다.
칼에게 있어 정보는 수전노가 긁어모으는 황금처럼 정보 자체를 수집하기 위해 수집하는 것이지, 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늘 지켜보기만 할 뿐 결코 참여하지는 않는 일종의 회색인간이었다. 상처 입은 그의 공허는 조가비아와 결혼한 것도 그녀가 ‘개인적 자유를 바라는 그의 욕구를 존중하고’ 외부의 간섭을 차단하는 완충기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서재가 곧 그의 성과이며, 비록 좋은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가 서재에서 누리는 개인적 자유는 절대로 침범해서는 안 되는 것임으 일찍 터득했다. 그는 우표수집을 계속했고 컴퓨터 게임 남북전쟁을 열과적으로 좋아했다.
칼에게는 분노 단계를 체험할 필요가 있다. 그는 분노가 너무나 끔찍한 것이기에 억누르고 있으며, 분노를 분석하는 것으로 처리하는 체했다. 그는 분노를 밖으로 분출해, 자신을 분석보다는 행동으로 몰아가는 힘 구실을 하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칼은 천성적으로 묵상에 대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마음묵상은 그가 요란스런 지적 분석에서 벗어나 자신의 참된 내적 실체, 곧 하느님이신 사랑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그가 관상적 자세를 생활화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고 사랑받는 사람임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자비묵상은 칼에게 중요하다. 그는 부모를 용서하할 필요가 있으며, 어쩌면 용서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따라서 그는 부모에 대한 스스로의 감정을 체험해야 한다. 그들이 비록 죽었을지라도 그들에 대한 감정을 처리하는 일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니다.
사변적 묵상과 성서를 바탕으로 한 성찰, 그리고 예수님이나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의 사적 대화는 칼이 자신과 만나도록 돕고 깊숙이 박혀 있는 감정을 두려움이나 불안감 없이 알고 또 어느 정도 해소하게 해줄 것이다. 가장 심원한 형태의 지혜는 아는 것, 뜻하는 것, 느끼는 것을 통합된 전체로 융합하는 지혜다. 그리고 칼에게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모든 지혜의 근원, 육화되신 지혜와 착실히 관계를 맺는 기도이다.
그가 인색함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안겨준 상처와 대면하려면 이 길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그는 이 상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런 다음에 얻은 지식이 단순히 개인적 용도만이 아닌 나눔을 위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는 또한 겸손을 알고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며 자신의 부분적 지식을 두려움 없이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자신의 감정을 삭이는 대용물로 보지 않고 진정을 자신이 가진 것을 그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방법을 통해서 한바퀴를 돌게 된다. 그의 나눔은 응답을 받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응답을 통해 자신의 지식이 커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배우는 방법은 선생이 되는 것이다’라는 격언을 이해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어린 시절 상처와 그가 일생 동안 아파하면서도 무시해 온 온갖 고통을 용서하고 온전해지면서 맺는 결실이 될 것이다.
사색가가 지니는 이점은 이때쯤 제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뒤로 물러서서 삶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그의 능력이 이제는 두려움이 아닌 배우고자 하는 건전한 갈망게서 비롯될 것이다. 그는 유익한 목적에 지식을 사용하기 위해 사물의 구조를 살피고 인과관계를 배울 것이다. 그는 사회관습에 굴복하지 않고 바로잡아야 할 것은 바로 세움으로써 성실성에 대한 감각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는 여전히 개인적 자유에 끌리고 그것을 필요로 하겠지만, 부름을 받으면 사회적 상황에 응답할 준도 알게 되었다. 행동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은 그가 자신의 몸(사자:억눌린 중추)과 만나는 통로에 해당한다. 그는 이제 자신의 분노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쓰라리고 폐쇄적인 힘이 아닌 활력을 불어넣고 자극하는 힘으로 활용할 것이다. 그는 인생을 좀더 폭넓게 체험하고 자신의 지식을 더 많이 나누기 위해 키워 나갈 것이다.
뒤에 나올 초점맞추기 과정은 그가 입은 상처를 인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에는 그 점을 깨닫기 어렵겠지만 일단 요령을 터득하면 큰 보람을 얻게 된다.
절제된 감정표현이 권장되는 기도모임에서 체험하게 되는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는 칼이 발견하기 힘들어도 그에게 유익하다. 칼이 감정적 차원에서 용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지적 욕심을 타파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선물을 함께 나누려는 아량과 흔연한 자세는 디모테오 상권 6장 17-19절과 마태복음 25장 31-46절을 묵상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참조 문헌:용서의 과정 윌리엄A. 메닝거 지음 -바오로딸-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