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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글 스크랩 지구 이야기①②③ 지구의 나이. 달의 탄생.
아리아(姜相淳) 추천 0 조회 56 15.03.18 02:1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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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이야기①

 

지구과학분야에는 왜 노벨상이 없을까?

 

글 | 김경렬 _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노벨상이 시작된 1901년경으로 시계를 되돌려보면 지구에 대한 사람들의 이해는 상상하기 힘든 초보적인 수준이었다. 지금은 상식처럼 되어있는 46억 년의 지구나이를 놓고 거장 켈빈경을 앞세운 젊은 물리학자들이 열역학에 근거하여 당당히 주장하는 3천만 년의 ‘젊은 지구설’ 앞에서 진화론을 믿는 생물학자들과 지질학자들은 아무리 그래도 1억 년은 넘을 것 같다는 ‘늙은 지구설’ 을 가지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런 난처한 상황에서 ‘방사능’ 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가지고 혜성처럼 나타나 ‘늙은 지구설’ 에 손을 들어준 과학자가 있었다. 바로 물리학자 러더퍼드였다.

원자핵이 원자내 극히 작은 공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최초로 밝힌 그는 이 발견 이전인 1908년에 이미 노벨상을 수상하였다. 더구나 수상 분야는 ‘방사능의 연구’ 가 인정된 화학분야였다.

러더퍼드는 당대의 대화학자 램지가 우라늄 광물 속에서 추출한 헬륨이 우라늄의 방사능 붕괴에 의해 정량적으로 만들어진 산물임을 알아차리고 이들 자료에 우라늄-헬륨 방사능모래시계를 응용하여 ‘늙은 지구’ 편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러더퍼드는 지구의 나이에 관한 정량적 탐구의 길을 최초로 열어준 위대한 ‘지구화학자’였다.

 

지구는 대가들의 자연스런 연구대상

 

근대적 의미의 지구과학도 타 학문과 마찬가지로 제법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층은 아래쪽에 있는 것일수록 역사가 더욱 오래된 것이라는 지구 연구의 금과옥조인 ‘누중의 원리’ 를 스테노가 제시한 것이 이미 17세기 중엽의 일이고, 허튼이 ‘현재는 과거의 열쇠’ 라는 중요한 개념을 담은 ‘동일과정의 법칙’ 을 발표한 것이
18세기 후반이다. 지질학자 라이엘의 저서 ‘지질학 원리’ 는 1831년 다윈이 비글호를 타고 항해를 시작할 때 중요하게 간직하였던 참고 문헌이었다.

 

그러나 보일의 법칙으로 유명한 영국의 보일(1627~91)은 바닷물이 짠 원인으로 동화 속에 흔히 등장하는 바닷속에 가라앉은 요술 맷돌의 정체가 풍화작용을 통해 암석이 녹아 들어간 강물임을 이미 1670년경 처음으로 밝혀낸 ‘화학해양학의 아버지’ 다.

 

뢴트겐의 x-선 발견이 일반에게 받아들여진 정황을 보여주는 당시의 삽화

 

 

Geology's founding father: James Hutton / 근대 지질학을 세운 허튼. 1787년경의 만화 

 

 

근대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라부아지에(1743~94)는 공포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안타깝게도 단두대에서 처형됐지만, 처형되기 5년 전이었던 1789년에 이미 퇴적층에 포함되어 있는 화석들이 퇴적층들의 상대적 연령을 결정하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파리 주위의 퇴적암들의 층서에 대한 연구논문들을 발표하였던 지질학자였다. 층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영국의 스미스의 연구보다도 18년이나 앞선 연구였다.

학위논문 주제였던 전리설로 지도교수들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만들었던 화학자 아레니우스가 이 연구로 노벨화학상을 탄 것이 1903년의 일인데, 아레니우스는 이미 1896년 당시 과학계에 받아들여진 빙하기의 원인을 살피면서 지구온난화 문제를 최초로 염려한 기후학자였다. 중수소의 존재를 실험적으로 확인하여 1931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화학자 유레이도 고기후 온도계를 발견한 동위원소지구화학의 선구자였다.

 

지구의 이해가 실로 초보적이었던 시절, 지구와 관련된 많은 문제들은 당대의 위대한 물리학자와 화학자들의 자연스러운 연구대상이었다. 이런 당시의 정황에서 지구과학분야를 따로 떼어 노벨상을 준다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양자론에 기초한 현대 물리학이나 화학이 새로이 발
전한 것과 마찬가지로 지구과학도 많은 발전을 이룩하며 자연과학 내의 하나의 학문으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였다.

 

20세기 맞으며 꽃 피운 현대 과학

 

많은 사람들은 뢴트겐이 음극선 연구중 우연히 놀라운 투과력을 발휘하는 X선을 발견한 1895년을 근대과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분수령으로 꼽는다. 이어진 1896년의 베크렐의 방사능 발견, 1897년 톰슨의 전자의 발견 등은 20세기를 준비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상황을 세그레의 저서 ‘X선에서 쿼크까지’ 를 통해 조금 엿볼 수 있을 것 같다. 세그레는 반양성자를 발견한 연구로 1959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이탈리아 출신의 과학자였다.

 

앞서 가는 실험실의 가장 중요한 연구 장비는 음극선 장치였으며, 이를 성공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축전지, 룸코르프 유도코일, 진공장치 등을 갖추어야 했다. 원통형 철심에 절연시킨 두 개의 코일을 감은 고전압 발생장치 룸코르프 유도코일의 크기는 당시 실험실의 규모를 가늠해볼 수 있는 중요한 척도였다.

유도전류를 만드는 2차코일 길이가 무려 450㎞나 되며 1m 이상의 긴 불꽃을 튀길 수 있었던 장치가 런던의 왕립학회에 보관되어 있으며, 뢴트겐이 사용한 코일도 직경 20㎝, 길이 50㎝의 대형으로 1차 코일의 전류도 약 20암페어 정도의 것이었다.

 

또한 최상의 진공을 얻기 위하여 그릇 속의 수은이 관 속으로 한 방울씩 떨어지면서 공기를 한 방울 한 방울씩 유리기구 밖으로 밀어내어 진공을 만들어내는 수은 진공펌프가 사용되었다. 수은 그릇을 손으로 여러 번 오르내리게 하기 위해서 조교들이 수행하여야 했던 지루하고 고된 수고가 상상된다. 지금의 실험실과 비교하면 정말 형편없는 초라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기반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과학자들이 20세기를 맞이하면서 혁명적인 현대 과학의 꽃을 피워낸 것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Portretul lui Antoine-Laurent Lavoisier

 

라부아지에와 1789년 그가 발표한 파리 주변 퇴적층에 대한 층서연구기록

 

 

IPYE의 로고 및 IPTE를 알리는 UN의 보고서

 

The Planet Earth Institute - International Year of Planet Earth

 

 

1896년 베크렐의 방사능 발견은 지구과학을 정량과학으로 도약시키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이를 시작으로 사람이 달에 착륙하는 1969년까지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지구 나이’ 탐구는 20세기에 지구과학이 이루어 낸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더욱이 1960년대 확립된 판구조론과 함께 지구과학자들이 나이 46억 년의 늙은 지구를 새로이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면서 지구과학은 혁명적인 변화와 발전을 이룩하였다.

1978년 NASA가 오존층 파괴, 지구 온난화와 같은 당면 지구환경문제에 효과적으로 접근하기 위하여 지구를 종합적, 총체적으로 연구하는 ‘지구시스템과학’ 의 필요성을 제창한 이후 지구과학은 종합과학으로서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1995년 오존층 화학 연구로 세 명의 대기화학자 크루첸, 롤랜드, 몰리나를 노벨화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노벨상 위원회에서 앞으로 지구과학분야를 하나의 독립적인 수상부문으로 제정하는 문제를 심도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기도 한다.

 

2007년은 ‘유엔이 정한 지구의 해(IYPE, 2007~2009)’ 가 시작되는 뜻 깊은 해다. 앞으로 연재할 글을 통하여 20세기를 거치면서 지구의 과학이 하나의 정량과학으로 발전해 온 중요한 발걸음을 다시 살피며, 우리들의 유일한 삶의 터전이자 우리 후손들에게 남겨주어야 할 소중한 지구의 모습을 더듬어 가면서 이에 대처하는 우리의 지혜를 찾아보려고 한다.


 

 

지구 이야기 ②

 

지구는 언제 태어났을까?

 

1904년 러더퍼드가 톰슨에 이어 영국 케임브리지의 캐빈디쉬 연구소장을 맡기에 앞서 왕립학술회원 800여 명 앞에서 한 강연은 지구나이 탐구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를 회고하면서 쓴 그의 글은 당시의 흥미로운 상황을 잘 전해준다.

 

 

"〔중략〕

약간 어두웠던 강연장으로 들어섰을 때 관중 속에 켈빈 경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지구의 나이를 다루는 내 강연의 종반 부분에서 문제가 있을 것임을 직감하였습니다. 왜냐 하면 내 결론은 그의 것과 대치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강연이 진행되는 동안 다행스럽게도 켈빈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강연의 중
요한 부분에 도달하자 이 늙은 분이 몸을 곧추 세우고 눈을 바로 뜨면서 나에게 악의에 찬 눈짓을 보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때 나에게 한 영감이 떠올라 다음과 같이 말을 이어갔습니다.

 ‘켈빈 경은 어떤 다른 종류의 새로운 열원이 발견되지 않을 경우에 지구의 나이가 가질 수 있는 한계를 설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바로 오늘밤 우리들이 생각해보려는 라듐을 예언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자 늙은 켈빈은 웃음이 담긴 시선을 내게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략]"

 

 

이 강연은 켈빈을 앞세운 물리학자들의 ‘젊은 지구론’ 의 결정적 오류가 공식적으로 지적된 지혜로운 강연이었다.

 

열역학이 제시한 새로운 접근방법

 

지구의 나이에 대한 궁금증은 과학보다는 종교의 영역이었다.
1650년 아일랜드 대주교 어셔의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저녁) ’은 꽤 타당성이 있는 지구 생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케플러(1571~1630)도 지구의 기원전 3993년 탄생을 주장한 것을 보면, 성경이 지구를 이해하는 정보의 원천이라는 생각이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1650년 성경의 연대기로부터 지구는 기원전 ‘4004년 10월 22일 저녁’ 에 태어났다는 계산을 한 아일랜드 대주교 어셔. 어셔의 계산이 흔히 인용되는 데 기여를 한 1701년 당시 윈체스터 사원의 주교 로이드가 발간한 성경(창세기).

 

 

지구나이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처음으로 가능하게 한 것은 열역학이었다. 식어가야만 하는 태양을 계속 불타게 할 수 있는 에너지원은 무엇일까? ‘ 핵에너지’ 가밝혀지기 이전까지 참으로 답하기 어려웠던 난제였다.

이의 연장선상에서 지구나이 추정을 완성시킨 과학자는 톰슨(=켈빈경)이었다. 톰슨은 열역학 확립의 주역이었던 대과학자로서 자연스럽게 지구의 나이에 관심을 갖게된 것 같다.

 

지구가 뜨거운 암석덩이였다가 서서히 식어 오늘에 이른 것이라면 현재와 같이 식기 위해서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까? 화산에서 분출되는 용암의 온도(섭씨 약 1100℃)를 지구 형성시의 온도로 잡고, 암석들의 열전도도를 추정한 후 지하 깊숙한 석탄 광산 갱도에서 관찰된 온도 기울기로까지 지구가 식는데 필요한 시간을 구한
것이다.

 

명쾌한 이론이었지만 이를 실제 지구에 적용하는 것은 참 힘든 일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1862년 켈빈은 지구 나이를 약 1억년 정도로 추정하였으며 당대의 지질학자들도 대개 이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1880년경 젊은 물리학자들이 암석의 열전도율을 정밀히 측정하고 지구의 나이를 약 2500만 년으로 새로이 추정하는데, 켈빈이 이를 지지한 것이다. 켈빈을 앞세운 물리학자들의 ‘젊은 지구설 ’에 지질학자들이나 생물학자들이 감히 반대 의견을 내는 것은 힘든 일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이 때 러더퍼드가 방사능이라는 새 무기를 가지고 오류를 지적한 것이다.

 

태양의 원소(헬륨, He)가 준 돌파구

 

1868년 인도에서 일식을 관측하던 프랑스의 장쌩(1824~1907)이 태양 스펙트럼에서 밝은 노란빛을 내는 새 원소를 발견하고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이름을 따 ‘헬륨’ 으로 명명하였다. 그런데 램지는 이 태양의 원소가 지상(우라늄 광물)에도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으며, 러더퍼드는 헬륨 핵의 흐름이 바로 α선임을 알아냈다.

 

용융상태에서는 헬륨을 포함한 모든 기체가 공기 중으로 다 사라진다. 그러나 일단 광물이 되면 우라늄이 붕괴되면서 방출되는 모든 α입자(헬륨)는 광물내에 갇히면서 광물 형성 이후의 경과 시간을 알려줄 수 있다.

러더퍼드는 램지가 연구하던 우라늄 광물이 놀랍게도 10억~15억 년 전 형성되었음을 알아냈다. 지구나이의 최소값에 해당하는 이 수치는 켈빈의 잘못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러더퍼드는 방사능 붕괴과정에서 열이 발생함을 밝혀 켈빈의 또 다른 핵심적 가정을 무너뜨렸음은 물론이다.

 

러더퍼드의 연구가 지질학자들에게 흔쾌히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자신만만하고 오만하였던 켈빈에게서 받은 상처가 쉽게 잊히지 않은 상태에서 러더퍼드 역시 또 한 사람의 오만한 물리학자일지도 모른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볼트우드, 홈즈와 같은 지질학자들이 러더퍼드의 연구 방법을 받아들이기 시
작하면서 45억 년의 지구나이를 밝히는 여정이 본격화된다.

 

‘동위원소’ 와 ‘방사능 붕괴계열’ 의 이해는 넘어야 할 필수적 과제였다. 우라늄에는 반감기가 각각 45억년과 약 7억년인 U-238과 U-235가 99.3%, 0.7%로 존재하며, 일련의 붕괴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Pb-206과 Pb-207로 변환된다. 동일 시료에 대하여 U-238/Pb-206, U-235/Pb-207 및 Pb-206/Pb-207의 세 개의 ‘독립적’ 모래시계를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1936~37년 하버드 대학의 니어는 이런 방법으로 최대 20억 년에 이르는 우라늄광물 의 나이를 얻을 수 있었으나 46억 년에 이르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크기가 큰 쇳덩이일수록 식을 때 시간이 더 걸리는 사실을 지구 나이 산정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던 뉴턴의 생각을 실제 구체적 실험을 통하여 연구하였던 프랑스의 뷔퐁. 자신이 제작한 크기가 다른 10개의 가열된 쇳덩이들이 식는 과정을 관찰하여 지구 크기의 쇳덩이가 식는데 9만6천670년, 암석으로 된 지구는 약 7만5천년 정도가 걸릴 것으로 추정하였다. 자신도 너무 짧은 것 같다고 여겼던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한 추정이었지만 구체적 실험 방법의 도입, 6천 년의 지구에서의 탈피등은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1950년대초 칼텍의 패터이 우라늄이나 납 광물이 아닌 ‘일반 암석’ 속의 적은 양의 납 시료내에서 동위원소비를 정확히 측정할 수있는 획기적인 방법을 개발하였다.

마그마가 식어 화강암이 형성될 때 우라늄이 많이 함유된 지르콘 같은 광물이 만들어지며, 우라늄이 붕괴하면서 생성되는 납은 광물내에 축적된다. 우라늄과 납의 동위원소비를 통하여 화강암 형성 후 경과된 시간을 알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This impact crater in Winslow, Arizona,

미국 애리조나주 디아블로 협곡에 있는 약 5만 년 전 발생한 운석 충돌이 만들어낸 직경 1.2km 깊이 150m의 배링거 크레이터. 미티어 크레이터로도 불리며, 이곳에서 발견된 운석은 방사능 붕괴 영향을 받지 않은 가장 작은 납 동위원소의 비, 즉 ‘원시조성비’ 를 알려준 중요한 시료였다.

 

 

외계에서 온 손님, 운석이 준 선물

 

이제 한 가지 문제만 남았다. 완벽하지 못한 모래시계를 극복하는 일이었다. 자연계에 존재하는 납의 동위원소들에는 우라늄의 방사능 붕괴로 만들어지는 것들 이외에 지구가 탄생할 때 만들어져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들, 즉‘원시조성’이 공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실제 측정값은 원시조성과 방사능 기원 성분의 합인데, 모래
시계는 방사능 기원의 값만을 필요로 하는 것이 문제였다.

 

1953년 패터슨이 우라늄을 함유하지 않아 방사능기원의 납을 무시할 수 있는 완벽한 시료를 찾아냈다. 디아블로 협곡 철운석에서 납의 ‘원시조성’ 을 찾아낸 것이다. 이 값을 이용하여 많은 운석들이 45억6천만 년의 나이를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하며, 이 때 지구를 포함하는 태양계가 태어났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방사능 발견 후 60년 만인 1956년의 일이었다.

 

 

 

 

NASA - NASA Scientists Pioneer Method

 

 

 

 

지구 이야기

 

태양계 가족의 늦둥이, ‘달’

 

"이것은 한 개인에게는 하나의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입니다”

 

1969년 7월 21일 아폴로 우주인 닐 암스트롱이 달 착륙선 이글호의 마지막 계단을 내려와 지구 이외 천체에 최초로 발을 디디면서 한 역사적 발언이었다. 이어진 여섯 차례의 아폴로 달 탐사에서 우주인들은 385kg이나 되는 귀중한 달 시료를 지구로 가지고 돌아와 지구과학자들의 손에 넘겨주었다.

조심스러운 연령측정을 통해 46억 년에 가까운 값을 보이는 많은 시료를 확인하였으며, 이로서 46억년 전 태양계 가족이 다 함께 탄생하였다는 패터슨의 결론이 더욱 확인되었다.

 

그런데 달 탐사가 알려준 흥미로운, 또 한편으로는 역설적이기도 한 사실은 태양계가 형성될 당시 달은 이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달은 어떻게 태양계의 한 식구로 등장한 것일까?

 

지구가 겪은 최대의 충돌 사건

 

달을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살핀 사람들은 그리스인이었다. 기원 전 3세기경 아리스타르쿠스는 월식 때 달에 비친 지구의 모습을 이용하여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가 지구 반지름의 약 60배 정도가 될 것으로 추정하였는데, 55~63배인 실제 거리와 비교해볼 때 매우 놀라운 추정이었다. 또한 전기 작가 플루타르크는 달에 사람들
이 산다고 믿으며 어두운 부분은 바다, 밝은 부분은 육지라고 불렀는데, 오늘날까지 이런 믿음의 흔적이 지명에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나 1610년 망원경을 하늘로 향해 어두운 부분이 실제는 넓은 평원이며, 밝은 부분은 고저가 심한 산악지대임을 밝힌 갈릴레오의 관찰을 근대적 연구의 효시로 꼽을 수 있다. 신의 창조물인 완벽한 구라 믿었던 달의 표면이 이와는 달리 매우 불규칙한 모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가 지동설을 받아들이는 데 중요한 일조를
하였음은 물론이다.

 

달의 기원에 관한 납득할 만한 이론이 정립된 것은 사람들이 달에 발을 디디면서 달의 관측을 수행하면서의 일이다. 특히 달의 밀도는 3.34g/㎤으로서 평균 밀도 5g/㎤ 이상의 지구에 비하여 가볍다. 지구처럼 무거운 철로 된 핵을 별로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탄생 후 맨틀, 핵 등으로 분화되는 과정을 마친 후 얼마되지 않은 지구가 화성 정도 크기의 물체와 천지가 개벽할 엄청난 충돌을 했으며, 이때 주로 흐트러진 지구 맨틀 성분을 추슬러가면서 달이 탄생했다는 것이 바로 ‘충돌설’ 의 요점이다.

 

1970년대 중반 당시 새로이 얻어진 달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가능성으로 반신반의 속에 등장한 충돌설은 1984년 달의 기원을 밝히기 위해 열렸던 회의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자리를 굳히기 시작한 것이다.

 

 

로쉬의 한계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1992년 있었다. 목성에 접근하던 슈 메이커-레비 9 혜성이 목성의 로쉬의 한계 이내로 들어간 후 바로 21개의 조각으 로 깨져 목성에 연속적으로 충돌한 사건이다.

 

 

달은 지구의 달이 아니다!

 

‘달은 지구의 위성(달)이 아니다’라고 하면 이 말의 의미가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과학자들은 위성이 위성이기 위한 중요한 기준으로 모행성과의 거리를 꼽으며, 안정한 위성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한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 하나가 1848년 로쉬(Edouard Roche)가 제시한 것으로 흔히 로쉬의 한계(Roche Limit)라 부른다. 로쉬의 한계란 한 물체가 접근하는 물체의 조석력에 의하여 부서지지 않고 어느 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는가를 알려주는 값이다. 행성과 위성이 같은 밀도를 가질 때 로쉬의 한계는 행성 반지름의 2.446배에 해당하는 거리이다.
1992년 목성에 접근하던 슈메이커-레비 9 혜성이 이 한계내로 들어오면서 21개의 조각으로 깨져 연속적으로 목성과 충돌하던 장면은 로쉬의 의미를 극적으로 보여준 예이다.

 

다른 하나는 아시모프가 제시한 TOW(Tug of War)이다. 위성은 중력에 의해 모행성에 끌리지만 다른 한편으로 태양에도 끌리며, TOW는 바로 이 두 힘이 균형을 이루는 거리이다. TOW는 행성과 태양의 질량을 mp, ms, 행성 및 태양까지의 거리를 dp, ds라고 할 때 TOW=(mp/ms) (ds/dp)2 식으로 표현된다. 위성이 이 안에 있
으면 모행성의 위성이 될 수 있으나, 이보다 멀어지면 태양의 영향권으로 들어가 행성에서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즉, 달이 달이기 위한 조건은 모행성과의 거리가 로쉬의 한계보다 크며 TOW보다는 작은 값을 갖는 것이다. 지구의 로쉬의 한계는 15,600km이며 TOW는 46,400km이다. 정지 위성들의 궤도가 3만6천500km 정도의 적도 상공인 것을 이로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지구와 달까지의 평균 거리는 무려 38만4천400km, 즉 TOW의 8배 이상이나 된다. 달은 달이 아닌 것이다.

 

 

Hevelius's Moon map, 1747년 헤벨리우스가 만든 달 지리서‘월면학’에 보면 칭동을 보여주는 그림이 설명되어 있다.

 

 

달은 강한 인력으로 인해 지구와 서로 단단히 묶여진 상태로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고 있는 천체이다. 이에 수반되어 나타난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우리들이 볼 수 있는 달의 표면이 반쪽뿐이라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칭동’ 이라 부르는 달의 상하좌우의 진동때문에 반보다는 조금 더 되는 59% 정도를 볼 수 있다. 인류가 가려진 달의 뒷모습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은 1959년 구소련의 루나 3호가 달 궤도를 공전하면서 달 뒷면의 70%를 처음으로 촬영하는데 성공한 후의 일이다. 지구에 가장 가까운 천체이면서도 아주 최근에 와서야 전체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샌디아 국립연구소(SNL)의 킵과 애리조나대학교의 멜로스는 당시의 충돌을 재현하는 컴퓨터 모의실험 연구를 통하여 충돌설의 타당성을 더욱 확인시켜주었다.

 

 

만약 달이 없었다면?

 

그런데 만약 이런 충돌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달이 태어나지 않았다면 오늘날의 지구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밤을 밝혀주는 빛이 없다는 것이 물론 큰 아쉬움일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어 보인다. 과학자들은 만약 달이 없었다면 아마 지구의 자전 시간이 6~8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것
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렇게 빠르게 자전하는 지구에서 과연‘사람’이 생존경쟁에 적합한 생명체로 진화할 수 있었을까? 지구 탄생 후 얼마 되지 않아 우연히(?) 지구에 일어난 거대한 충돌로 달이 탄생한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요즈음 운석의 충돌이 지구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지나 않을까 염려 하면서 과학자들이 운석 감시활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지구가 지금까지 진화하는 과정에서 달을 탄생시킨 사건 이후에도 충돌이 때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마 또 하나의 중요한 사건이 6,500만 년 전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발생한
충돌일 것이다. 직경 약 10km의 운석이 충돌한 것으로 믿어지는 이 사건으로 지구상에는 파충류가 지배하던 중생대가 막을 내리고 포유류의 시대가 열리게 된 것이다.

우리사람들이 편하게 살고 있는 지구가 만들어지는데 이런 충돌이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약 46억 년 전 우리 태양계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지구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소중한 지구의 반려자 달이 탄생하였다. 그리고 지구는 태양계 내의 유일한 생명의 행성으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태양계 내에서 지구만이 가지는 특별한 달력을 탄생시켰다. 다음 글에서 생명의 행성 지구가 만들어낸 지구달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글 | 김경렬 _ 서울대학교 지구환경과학부 교수

글쓴이는 서울대학교 화학과 졸업 후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2년 동안 육군사관학교 교수부의 교관으로 군복무를 마친 후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해양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지구환경과학부 학부장 겸 BK21사업단장으로 있으며, 해양연구소장을 겸임하고 있다.

 

 

THE SCIENCE & TECHNOLOGY

월간 과학과 기술 2007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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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pothesis: New evidence on origin of the Moon support cataclysmic collision theory 

 

Most researchers agree that the Moon formed five billion years ago from debris blasted off Earth in a giant impact. Scientists presented some new evidence supporting the theory that Moon was, indeed, born of a cataclysmic collision between worlds 4.5 billions of years ago. 

 

 

 

 

 

 

 

 

 

 

 

 

제임스 허튼의 전기 : 현대지질학의 주류인 동일과정설의 창시자

 

제임스 허튼 (James Hutton, 1726-1797).

 

스코틀랜드의 지질학자였던 제임스 허튼은 1726년 6월 3일 에든버러(Edinburgh)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 도시인 에든버러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과학적 질문들에 대해 열정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학생이었다. 그는 법률가(lawyer)로 도제(apprentice, 견습생)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고용주는 그에게 취미가 맞는 직업을 선택할 것을 충고하였다. 젊은 도제는 그가 좋아했던 화학 과목과 가장 가까운 의학(medicine)을 선택했다. 그는 에든버러에서 3년 동안 공부를 하고, 파리에서 의학 교육을 마쳤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1749년(23세)에 레이덴(Leiden)에서 의사(doctor of medicine) 자격을 취득했다.

그러나 그의 앞에 진로가 잘 보이지 않자, 그는 의사로서의 직업을 포기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베르윅셔(Berwickshire)에 있는 약간의 유산을 물려받았고, 농업(agriculture)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농사에 필요한 경작 방법을 배우기 위해 노폭(Norfolk)에 갔고, 계속하여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 북부를 여행했다. 이 기간 동안에 그는 지구 표면에 관한 공부를 하기 시작하였고, 훗날 그의 정렬을 바쳤던 문제들에 대해서 점차적으로 그의 생각 깊은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1754년(28세) 여름, 그는 베르윅셔에 자신의 농장을 세우게 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14 년 동안을 살았고, 농업의 가장 개선된 형태들을 소개했다. 농장이 체계적으로 잘 돌아가게 되면서, 농장의 관리는 더 쉬워졌고, 흥미를 점점 잃어갔으며, 농장은 스스로 돌아가도록 하게 하였다. 그는 에든버러에 돌아와 삶의 휴식을 취하게 된다. 이것은 1768년(42세) 쯤에 일어난 일이다. 그는 결혼하지 않았고, 이 기간부터 그가 죽은 1797년(71세)까지 그의 세 여동생들과 살았다. 그는 취향이 같은 문학적 과학적 친구들과 어울렸고, 연구를 가까이 하게 된다.

 

그 당시에 지질학(geology)이라는 적절한 의미를 갖는 용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광물학(mineralogy)은 상당한 진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허튼은 그 당시의 광물학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보다 더 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러 가지 광물과 암석들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지구의 역사를 어느 정도 명백히 이해해 보고 싶어 했다. 수 년동안 그는 그 주제를 연구하기를 계속했다.

마침내 1785년(59세) 봄에, 그의 견해를 당시 설립되지 얼마 안 된 에든버러 왕립협회에 ”지구의 이론, 또는 지구 육지의 구성, 소멸, 회복에 있어서 관측되는 법칙들에 대한 조사 (Theory of the Earth, or an Investigation of the Laws Observable in the Composition, Dissolution and Restoration of Land upon the Globe.)” 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주목할 만한 논문에서, 지질학은 우주창조설(cosmogony)이 아니라, 지구 물질들에 대한 연구에 한정되어야만 하다고 상술되었다. 지구 도처에 다음과 같은 증거들이 보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구 표면의 현재 암석들은 더 오래된 암석의 부스러기들로부터 많은 부분들이 형성되었다. 바다 아래에 쌓여져 내려오던 이들 물질들은 엄청난 압력 하에서 단단해지고, 연속적으로 파열되고, 지하 열(subterranean heat)의 팽창적인 힘에 의해서 융기되었다. 이 격동 동안에 광맥들과 용융된 암석 덩어리들은 지층 단층면의 갈라진 틈으로 관입되었다. 융기된 땅들의 모든 부분들은 대기에 노출되자마자 분해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분해는 육지 전체가 닳아 없어져 해양저에 퇴적될 때까지 계속 진행되었으며, 미래의 또 다른 융기가 단단해진 퇴적물들을 새로운 땅으로 다시 또 들어 올릴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허튼의 이러한 광대하고 대담한 개념의 일부는 이탈리아 지질학자들에 의해서 제시되었던 것이었지만, 허튼은 최초로 그들의 상호 관계를 신뢰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그들을 관측에 기초한 반짝이는 조리있는 이론으로 연합해 내었다.

 

허튼이 직접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단지 땅(earth)만이 아니었다. 그는 대기의 변화에 대해서 오랜 기간 연구를 하였다. 그의 책 ‘지구의 이론 (Theory of the Earth)’에 나타났던 같은 부피의 량이 또한 ‘비의 이론 (Theory of Rain)’을 포함하고 있었다. 이것은 1784년 에든버러에 있는 왕립협회에서 읽혀졌다. 그는 공기가 용액으로 보유할 수 있는 습기의 양은 온도가 증가함으로서 증가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온도를 가진 두 덩어리의 공기가 혼합되었을 때 습기를 가진 부분은 응축되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지구의 다른 지역에서의 강우(rainfall)와 기후(climate)에 관련된 이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조사했다. 그리고 강우는 모든 곳에서 한편으로는 습도에 의해서 조절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높은 대기 중에서 다른 공기 흐름들의 혼합을 증진시키는 원인이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천부적인 재능과 열정은 그가 30년 동안 에든버러에 거주하면서 발표한 다양한 연구들로부터 알 수 있다. 1792 년에, 그는 ‘자연 철학에 있어서 다른 주제들에 대한 논문(Dissertations on different Subjects in Natural Philosophy)’ 이라는 제목의 4절판으로 된 책을 출판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물질, 유동성(fluidity), 응집(cohesion), 빛, 열, 전기 등의 본질에 대해서 논의하였다. 이 주제들의 일부는 에든버러 왕립협회에서 읽혀진 논문들에서 그에 의해서 더 자세히 설명되었다. 그는 물리학(physics)의 영역 내에서만 자신을 제한하지 않았고, ‘지식의 원리 및 이성의 과정들에 대한 조사 - 감각으로부터 과학과 철학까지 (An Investigation of the Principles of Knowledge, and of the Progress of Reason - from Sense to Science and Philosophy)’ 라는 제목의 세 권의 4절판 책을 출판하면서 대담하게 형이상학(metaphysics)의 영역까지 나아갔다.

 

그 책에서, 그는 우리에 의해서 인지되고 있는 외부 세계는, 외부로부터 자극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우리 자신의 마음의 창조물이라는 개념을 전개하였다. 즉, 바깥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림과 실제성(reality) 사이에는 유사점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성과 일관성을 가지는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인상(impressions)들은 마치 그들이 정확히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물체들처럼 우리들에게 많은 실제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도덕적 행위는 마치 우리의 생각이 완벽하게 그것들을 만드는 원인들과 부합되는 것처럼 똑같이 남아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그의 말년은 그의 ‘지구의 이론’의 확장과 재출판에 힘을 쏟으며 보냈다. 그것에 대한 2 권의 책이 1795년(69세)에 출판되었다.

 

그 작업을 완료하는 데에 필요했던 세 번째 책은 그의 손으로 쓴 필사본으로 남겨졌고, 그의 전기 작가인 플레이페어(John Playfair)에게 넘겨졌다. 이 책의 한 부분은 레오나드 호너(Leonard Horner)에 의해서 런던 지질학회(Geological Society of London)로 보내졌고, 1899년에 게이키 경(Sir A. Geikie)의 편집 하에 학회에 의해서 출판되었다. 필사본의 나머지 원고들은 소실된 것으로 보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튼은 경작(husbandry)에 관한 그가 기록했던 많은 글들을 수집하는 분류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이것을 ‘농업의 요소들(Elements of Agriculture)’ 이라는 제목 하에 출판하려고 하였다. 그가 거의 이 작업을 마무리할 무렵인 1797년 3월 26일, 치유할 수 없는 질병으로 그의 활동적인 경력은 끝을 맺게 되었다.

 

그의 책 ‘지구의 이론(Theory of the Earth)’ 에 의해서, 허튼은 지질학이 발전을 지속하는 한 숭배를 받으며 기억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무겁고 애매한 허튼의 글 형태 때문에, 그의 책들은 그의 생애 동안에는 그가 노력을 기울인 만큼 관심을 끌지 못했다. 허튼에게 다행스러운 것은 그의 과학 친구들 가운데 존 플레이페어(John Playfair)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에든버러 대학의 수학(mathematics) 교수였으며, 허튼의 교리를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이 넘쳤던 사람으로 허튼의 주장들이 빛을 발하게 하였다.

허튼이 죽은 후 5년 후에, 그는 ‘허튼의 지구의 이론에 대한 해설(Illustrations of the Huttonian Theory of the Earth)’ 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플레이페어는 허튼의 이론을 훌륭하게 요약하였고, 많은 부가적인 해설과 논의들을 첨부하였다.

이 작업은 지질학 저술들에서 공헌도가 높은 고전 중에 하나로서 간주된다. 그 책은 영국 지질학의 발달에 있어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 1805년에, 플레이페어에 의해서 쓰여진 허튼의 전기는 ‘에든버러 왕립협회 보고서 (Transactions of the Royal Society of Edinburgh)’ (A. Ge.) 제 5권에 실리게 되었다.

 

 

*참조 :

The man who made the wedge: James Hutton and the overthrow of biblical authority

St Hutton’s Hagiography

Darwin, Lyell and Origin of Species

 

/ 한국창조과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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