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개인이 선택에 따른 기회와 부담을 진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한 결과까지 떠맡아야 함을 의미한다.
…………자유와 책임은 뗄 수 없는 관계다."
-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폰 하이에크, 「자유 헌정론』
영어를 수십 년 가르쳐왔지만 널리 쓰이는 평범한 단어조차 그 정확한 뜻과 쓰임새를
알 수는 없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프리덤(freedom)과 리버티 (liberty)의 차이가 그렇다.
"자유를 뜻하는 영어 단어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대부분 '프리덤' 을, 그다음에 리버티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자유 헌정론(The Constitution of Liberty)』의 저자. 하이에크는 자유를 말할 때 왜 프리덤이
아닌 리버티라는 용어를 사용했을까?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 리버티는 '모든 속박과 굴레로
부터 벗어난 상태'를 뜻하는 라틴어인 '리베르타스(libertas)'에 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는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구속도 없는 해방된(liberated) 상태의 '궁극의' 자유를 뜻한다.
한편 프리덤은 고대 게르만 또는 노르딕어인 '프라이(frei)' 에서 유래했다. 프라이는 '어떤
부족에 속해서 그 부족이 제공 하는 보호를 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처럼
어 원으로 유추해보면 리버티는 '구속과 속박이 없는 궁극의 자유'를 뜻하는 개념이고,
프리덤은 '사회가 제공하는 총체적인 이익과 보호 아래서 누리는 자유'를 의미하는 것 같다.
문명사회의 시민인 우리는 완벽하게 궁극의 자유를 누리고 살 수는 없다. 타인과 사회집단을
이루며 살아가기에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개인적 자유를 희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다면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경고한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자유를 얻기 위한 자유의 포기' 하이에크는 이런 이야기를 강조하려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구를 위해 책임을 지며 사는 것일까. 자유를 보장하는 공동체를 위한
책임일까. 여기서 다시 한 번 하이에크가 굳이 프리덤이 아닌 리버티를 사용한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하이에크는 집단주의(collectivism)에 맞서 싸우면서 개인과 시장의 '자유'를 옹호하는 데
평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그가 추구한 자유는 사회나 조직 또는 국가가 제공하는 프리덤의
차원이 아니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미국의 상징'이라고 하면 자유의 여신상(5 statue of liberty)을 떠올릴 것이다.
이 동상의 공식명칭 역시 프리덤이 아니라 리버티가 쓰이고 있다. 미국의 동전에는
두 가지 문구가 씌어 있다.
"우리는 신을 믿는다(In God We Trust)"와 "자유(Liberty)”다. 여기에도 역시 프리덤이 아니라
리버티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화폐는 국가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그래서 화폐에는 그
국가의 역사를 만든 대표적인 인물이나 표현이 새겨진다. 그런 의미에서 리버티는 미국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단어'다.
불교 용어에 '니르바나(nirvana)'란 개념이 있다. 이는 열반 (涅槃)이나 해탈(脫)의 경지를
이르는 말로 평범한 사람들은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완전체의 상태다. 니르바나는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니르바나라는 이상을 포기할 수는 없다.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 해도 일생의 목표로서 니르바나는 충분히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리버티란 바로 그런 '완전체로서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 개인이 법적 제도적
종교적 관념적 억압과 속박에서 자유를 구가하는 일이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더라도 개인이나
사회의 목표로서는 끝없이 지향해 나가야 한다. 이는 더 나은 개인, 더 나은 사회로 가는
'진보'를 위한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고상한 이상(理想)이 유례없는 참사로 끝 나는 경우가 많았다. 마르크스 역시
'해방된 개인'을 목표로 했던 이상주의자였다. 그러나 정작 그는 공산주의 실험이 재앙을 불러
일으키리라 짐작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이는 일종의 '원치 않은 결과의 법칙'이었다.
그러나 하이에크를 비롯한 자유주의 철학자들은 세상을 설계할 수 있다는 오만에 대해
'치명적인 자만'을 걷어내라며 날카롭게 경고했다.
이상이나 목표로서 자유가 가진 진보성은 역사적 정치적 효용을 상실한 것처럼 보인다.
"신도 악마도 디테일에 있다. (God is in the derails, & Devil is in the details)”는 말이 있다.
하이에크가 프리덤 대신 리버티를 쓴 이유도 바로 디테일까지 고려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아니라 남으로부터 보장받는, 즉 사회가 제공하는 총체적인 이익과 보호 아래서 누리는
자유'가 아니라 '그 누림도 제한도 나 개인의 자유의지로서 선택한 자유'라는 그 디테일에서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이야기다.
"내 자유를 남에게 맡길 수 없다. 지키는 것도 포기하는 것도 내 양심에 따른다. 그 책임도
내가 진다." 이것은 리버티가 말하는 자유다. 여기에는 '자유의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상이나 목표로서의 자유는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에 이르기 위한 자유의지는 더 중요하다.
하이에크가 말하는 자유는 군주나 절대자가 부여하거나 법과 관습에 의해 주어지는
자유로서의 프리덤이 아니었다. 그가 지지한 것은 개인의 의지가 담긴 자유였고, 그런 까닭에
그는 리버티라는 용어를 힘주어 선택한 것으로 여겨진다.
- 조전혁 전 인천대 교수, 경제학
- 살림 간, 복거일 남정욱 엮음, ‘내 마음 속, 자유주의 한 구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