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지의 창간-1]
처음에 명칭이 ‘Chance’나 ‘Destiny’로 결정될 수도 있었던 ‘Time’ 지는 출판 역사를 통틀어 가장 대중적인 주간지라고 할 수 있다. Time 지는 성격은 매우 다르지만, 지극히 우정이 돈독했던 두 동창생의 우정에서 싹튼 결실이었다.
1898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브리턴 해든은 어린 시절부터 저널리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시를 써서 가족을 기쁘게 하기도 했으며 신문을 만들어 학급 친구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그는 처음에 ‘New York World’ 기자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면접 때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편집장에게 ‘선생님은 저의 운명을 방해하시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신념을 강하게 피력했기 때문에 취직이 되었다는 일화도 전한다.
해든이 외향적이고 장난꾸러기였던 헨리 루스는 보다 실용적이고 진지한 성격이었다. 루스는 중국에 미국 대학을 두 개나 세웠던 장로교 선교사의 아들로, 출생지도 중국이었다. 루스 집안의 오랜 가풍은 이웃이나 다른 사람을 위해 하루에 최소 한 시간 이상 선행을 베푸는 것이었다.
헨리 루스와 브리튼 해든은 코네티컷의 레이크빌에 위치한 호치키스고등학교의 동창이었다. 서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두 친구는 강한 우정으로 맺어졌다. 당시 해든은 학교 신문인 ‘Hotchkiss Record’ 편집자로 활동했고 루스는 스스로도 시와 수필을 기고하면서 ‘Hotchkiss Library Monthly’를 펴내고 있었다. 예일대학에서 다시 만난 이들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졌다.
당시 해든은 ‘Yale News’ 회장을, 루스는 편집장을 맡았다.
두 친구는 1918년에는 동시에 학업을 중단하고 학생군인훈련단에 입대하기도 했다. 그들이 전국 규모의 주간지를 간행할 생각을 품게 된 것도 여기에서였다. 두 청년이 1923년에 펴낸 잡지가 현재의 ‘Time’ 지와 똑같지는 않았다.
그들의 출판 취지는 당시의 일간지, 특히 ‘New York Times’에 나타난 기사를 요약한 듯한 내용이었다.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당시 24살이던 두 청년은 예일대 친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한 친구의 어머니는 2만 달러의 거금을 투자하기도 했다. 잡지 사업의 성공 여부는 아주 불확실했는데도 말이다.
잡지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투자했던 돈은 그녀의 생전에 100만 달러로 뛰어올랐다. 산더미처럼 쌓은 신문 뭉치를 이용하여 이 두 청년과 몇 몇 안 되는 사원들은 ‘Time’지 창간호를 1923년 3월에 세상에 내놓았다.
32쪽짜리 잡지는 기존 기사를 압축해 고쳐 쓴 항목이 200개가 넘었다. 3줄짜리 기사도 있었고 100여 줄에 이르는 기사도 있었다. 잡지 표지에는 당시 은퇴했던 의회의원 조지프 캐넌의 초상화가 목탄으로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 나중에 기술했듯이 ‘Time’ 창간호는 미국 출판계나 대중들의 완전한 무관심 속에 첫선을 보였다.
해든과 루스가 당시 유력 인사에게 창간호에 대한 의견을 구하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이것으로 그냥 끝내지’라고 대답했다. 두 젊은 편집장은 좌절하지 않고 잡지와 표지를 쇄신하기 시작했다.
우선 현재 ‘Time’ 지의 도안처럼 표지 인물의 둘레에 빨간 테두리를 돌렸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변화는 잡지 자체의 독자적인 글과 보도를 수행할 필진을 고용한 사실이었다.
신랄하고 거만하며 유머 가득한 스타일의 글을 개발하여 ‘Time’지 필자들은 새로운 표현이나 용어를 만들어내고, 일상적인 어법을 기묘하게 비틀기도 하며, 거의 매 문단마다 수사적 표현이나 난해한 용어를 불쑥불쑥 던져놓았다.
이런 기괴함이 ‘Time’지 스타일을 확립시켰다. 잡지가 새롭게 만든 표현이나 낱말들이 미국의 일상어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장군’을 뜻하는 ‘Tycoon’은 ‘Time’지에 등장하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사용하게 되었다.
(옮긴글)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