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가슴 밑바닥부터 진한 아픔이 몰려오는 겁니다.
아버지 때문이었습니다. 愛憎의 당신께서 자칫하면 생을 마감하신다는 겁니다. 아내로부터의 연락을 받고 그 순간부터 허공을 집고 다니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한장의 사진이 떠올려지는 겁니다. 그 사진, 어머니에게는 비수가 되었던 그 사진, 나는 그 사진을 떠올리고 겨우 가슴 한쪽이 환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아버지를 편하게 보낼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그 한장의 사진, 40년도 넘게 지났습니다. 그 사진 속에는, 키가 훤칠하게 크고 잘 생긴 30대 남자가 생머리를 길게 기른 미인과 함께 있었습니다. 남자의 팔은 그녀의 어께에 걸쳐져 있었고, 두 사람은 삼화사 大雄殿 앞에서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10월 유신 때 山林廳에서 강제 퇴직 당하시고, 1년간 월대산 밑에서 닭을 키우다가 닭 콜레라로 망하고 나서, 교사가 되어 처음 부임한 곳이 근덕농고였습니다. 사진 속의 남녀는 아버지와 근덕농고 音樂先生이었습니다.
아버지는 下宿을 했었고, 어머니와 우리 형제들은 한달에 한번 삼척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버스를 타고 근덕에 가서 아버지를 보고 왔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 방을 청소했었고, 청소 도중 아버지가 읽으시던 책갈피에서 떨어진 사진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사진을 본 순간, 펄썩 방바닥에 주저 앉았고, 그 충격에 뒤에 엎혀있던 막내 여동생이 질겁을 하고 울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머니는 울고 있던 막내를 한 동안 내버려두었습니다.
그 사이, 나는 떨어진 그 사진 속의 여자를 유심히 관찰하였고, 바로 그 여자가 아버지 학교에 놀러가면 나를 데리고 과자를 사 주었던, 생머리카락에서 향기로운 냄새를 풍겼던 바로 그 여자, 음악선생이었던 겁니다.
늙고 힘없고 병든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보내는 일은 자식으로서 너무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장 화려했던 지점을 떠올리는 순간, 당신을 보내는 순간이 힘들지 않는 겁니다.
바로, 그 사진이 나에게 그런 거 같습니다. 어머니에게는 비수 같이 가슴을 찔렀던 그 사진에 대해서, 나는 그런 엉뚱한 생각을 하고 마는 겁니다. 아마, 그래도 어머니는 이해하실 줄 믿고 있습니다.
나는, 어느 봄날 아름다운 여자와 함께 했던 아버지의 행복한 소풍을, 당신이 떠나는 선물로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 사진은 나에게도 소풍인 겁니다.
아버지를 기억하는 ..............
애써 아버지와의 애증을 덮어버릴 수 있는............
사람은, 부모의 몸을 빌어 태어나서 온갖 일을 겪으면서 살아가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슬픔과 괴로움 즐거움 기쁨 노여움 ............그러나, 그런 것들은 한낱 스쳐가는 바람에 지나지 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삶이란, 마치 아버지의 한 장의 사진처럼 찰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소풍이라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죽음과 함께 깊은 심연의 우주 속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다행히 아버지는 겨우 회복을 하시고 위험한 고비를 넘겼습니다. 아버지의 消風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입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보러 가는 날, 경포호수 가로수 벚꽃망울에서 서서히 꽃이 피기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쪽에서는 희귀한 봄태풍이 올라 온다고 했습니다. 하늘은 묵직하게 검은 색깔이었고 가끔씩 빗방울이 떨어지곤 했습니다.
이미, 아버지는 하얗게 식어있었습니다. 가족들은 낙옆처럼 각자 널부러져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서 며칠간 괴로워하던 아버지의 얼굴은 오히려 평온했습니다. 차라리 그 모습이 좋았습니다. 아버지의 침대 귀퉁이를 잡고 이별 인사를 드렸습니다.
이제, 겨우 아버지와 和解를 한걸까요?
전, 그렇게 믿고 싶었습니다. 전날 괴로워하던 아버지의 차가운 손을 꼭 잡고 침대 옆에서 눈을 감고 가만히 서있었습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지나가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녹아버렸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미운 감정도 전부 사라져버렸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괴로운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차라리, 어서 보내고 싶을 정도 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저와 화해를 하고 가셨습니다. 병원로비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가 나를 만나고 편안해졌다는 아내의 이야기를 듣고, 나 역시 아버지를 보내는 마음에서 미안함이 덜해졌습니다.
아버지의 뼛가루를 무릎에 안고 오는 내내, 방금 화장한 온기가 따스했습니다. 영정의 사진은 젊은 시절 그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또 다시, 아버지의 젊은 시절 근덕농고 음악선생의 어깨를 감싸고 삼화사에서 찍었던 그 사진이 생각나는 겁니다. 그 사진은 黑白사진이었지만 옷차림으로 보아 봄날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 시절은 아버지의 봄날이었을 겁니다.
가족을 두고 시골 학교에 갓 부임한 키 크고 혈기왕성한 미남 선생은 아마 거칠것 없었을 겁니다. 거기에 빠지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 아버지였던 겁니다. 나는, 백봉령으로 가는 내내 그 생각만 하기로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괴로웠던 모습을 지워버리고 아버지의 봄날만 생각하면서 마음은 더욱 편해졌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봅니다.
백봉령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 옥계 시내에는 개나리와 벚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고, 산 중턱에는 진달래의 분홍빛이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白鳳嶺 정상에서 잔설이 남아있는 땅을 파고 아버지를 묻었습니다. 멀리 동해바다가 보였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와 헤어졌습니다.
내려오는 길, 아버지와 상관없이 봄날은 무심하게 가고 있었습니다. 벚꽃은 더욱 활짝 피었습니다.
봄날은 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갔습니다.
새벽이다. 늘 그렇듯이 난 항상 이 시간에 일어난다. 초저녁 일찍 잠이 들어 12시쯤 일어나면 다시 잠이 들어 꼭 이시간에 일어나는 편이다.
창문으로 새벽의 푸른빛이 들어온다. 어렴풋이 형체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방안에서 나는,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내 먹고사는 모든 것을 점검한다. 어제 소진한 광고비, 사이트, 검색엔진, 댓글, 새로운 글과 사진, 동영상....
십분정도 걸리는 일들이다. 그리고, 오늘 하루 일정을 생각한다.
오늘, 아버지................,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기고 간 그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아버지 교통사고 관련 서류를을 꼼꼼히 살피면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초동 수사부터 문제가 많았다. 대퇴골이 부러질 정도의 중상이었는데, 그리고 가해 차량에 부딯힌 아버지의 사발이가 십여미터 충격으로 굴러갔는데, 피해차량 피해 무, 피해자 경상.....그리고 그날 가해차량에게 스티커 한장이 발부되었다.
이후, 교통사고 조사계에서 벌금이 발부된 그날 피해자 진술서를 받았는데, 그것은 조사계 경찰이 손수 작성한 것이었고, 게다가 아버지의 서명이 없는 상태였다.
이런 여러가지 의혹을 가지고 조사 경찰에게 항의를 했더니, 이미 사건은 종결이 났다고 어쩔 수 없다는 거였다.
死亡診斷書의 사망원인 [가] [나] [다] 에서 [다] 항에 분명 대퇴골 골절로 인한 의학적 직접 원인이 명시되어있는데도 말이다.
경찰에게 항의를 하면서도, 내 마음은 침울했다. 그날, 사고나던 날, 아버지는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딸 들이야 서울에 있다손치더라도, 둘째 아들도 천안에 있다고 하더라도, 따지기 좋아하고 똑똑한 맏아들이 지척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경찰의 변명에 나는 큰소리 조차 칠 수 없었다.
아버지를 보내기 전, 생전에 겨우 호흡조차 하기 힘들어 괴로워하시는 아버지를 침대 곁에서 뵙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나는, 아버지의 그 괴로운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에 대한 미운 감정이 전부 사라졌다. 그러나, 아버지는.......마지막 가는 길에 겨우 찾아와 준, 큰 아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아버지와 나는, 이제 진정 헤어진 것일까? 이승에서라도 다시 만나 父子의 情을 回復할 수가 있을까?
죽음이 아버지와 나를 갈라놓고, 나는 겨우 아버지가 남기고 간, 그 書類들을 붙들고 이 새벽에 앉아있다.
이제, 아버지에게 겨우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아버지의 交通事故를 바로잡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자책감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