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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당 ‘큰손’의 헤일리 지지에 트럼프 발끈… ‘쩐의 전쟁’ 美대선
미국 정치를 움직이는 고액 기부 단체
美정계 ‘보이지 않는 손’ 기부단체… 자금-조직력 앞세워 영향력 펼쳐
공화당 反트럼프 큰손, 헤일리 지원… 대세론에 트럼프 지지 단체도 늘어
민주당 큰손들, 바이든 지원 지속… 중동전쟁 영향에 기부 중단 선언도
“중국 우선주의 정치 단체 ‘번영을 위한 미국인들(Americans for Prosperity·AFP)’이 친중(親中) 후보인 니키 ‘새 대가리(birdbrain)’ 헤일리를 공개 지지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대선 캠프 대변인 스티븐 청은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소셜미디어에 공화당 대선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니키 헤일리 전 주유엔 미국대사를 거친 표현으로 비난하는 성명을 올렸다.
트럼프 1기 행정부(2017∼2021년)에서 요직을 거치며 닦은 외교 분야 전문성에 인도계 이민 2세로 사우스캐롤라이나 최초 여성 주지사를 지낸 헤일리 전 대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약점을 보완할 부통령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됐던 인물이다. 그런 헤일리 전 대사를 향해 트럼프 대선 캠프가 사실상 정치적 결별로 해석될 수 있는 수준의 비난 십자포화를 퍼부은 것은 공화당의 대표적 큰손으로 꼽히는 정치(자금) 기부 단체 ‘코크 네트워크(Koch Network)’의 조직 AFP가 헤일리 전 대사 공개 지지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내년 1월 15일 치러지는 공화당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첫 번째 경선인 아이오와 코커스(당원 대회)를 앞두고 당내 지지율 60%를 넘기며 대세론을 굳힌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도 미국 정치판을 흔들 수 있는 대형 기부 단체의 경쟁자 지지는 중대한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코크 네트워크같이 자금력과 조직력을 갖춘 대형 정치 기부 단체들은 미국 정치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내년 11월 대선을 앞두고 내전 수준의 정치적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미국에서 정치 기부 단체들의 ‘전(錢)의 전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 공화당 ‘큰손’, 트럼프 낙선 위해 헤일리 지원
AFP는 지난달 28일 이 단체 소속 자원봉사자들과 기부자들에게 보낸 공개서한에서 “트럼프와 (조) 바이든(대통령)은 미국 정치 쇠퇴를 지속시킬 뿐”이라며 “우리는 승리할 수 있는 후보를 지지할 것이며 그 후보가 바로 헤일리”라고 주장했다.
2004년 설립된 AFP는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지지 후보를 응원하는 정치광고 제작은 물론이고 50개 주(州) 전역에서 직접 유권자를 찾아가는 방문 유세를 펼칠 수 있는 자원봉사 네트워크를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AFP의 헤일리 전 대사 지지가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은 이 단체가 코크 네트워크 일원이기 때문이다. 자산 규모 세계 22위 억만장자 찰스와 데이비드 코크 형제가 세운 코크 네트워크에는 암웨이 공동창업자 리치 디보스를 비롯한 디보스 가문과 카지노 재벌 샌즈그룹 창업자 셸던 애덜슨 등 애덜슨 가문,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헤지펀드 운용사 엘리엇매니지먼트 폴 싱어 회장 등이 참여하고 있다.
코크 네트워크가 20년 만에 처음으로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한 것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을 막기 위해서다. 자유무역과 감세 등을 주장해온 코크 형제는 2016년 대선 때부터 중국에 대한 관세 부과를 공약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웠다. 코크 네트워크는 반(反)트럼프 후보 지원을 위해 7500만 달러(약 1000억 원) 이상을 기부받았다고 밝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정치자금을 모금하는 각종 정치활동위원회(PAC)가 올 상반기(1∼6월) 모은 6700만 달러를 넘어서는 규모다.
● 디샌티스 고액 기부자는 트럼프로 이동
트럼프 전 대통령 낙선 운동에 나선 공화당 큰손은 코크 네트워크만이 아니다. 또 다른 친(親)기업, 보수 성향 정치 기부 단체 ‘성장클럽(Club for Growth·CFG)’도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정치광고를 방영하는 등 반트럼프 후보 지원에 나서고 있다.
중국의 짧은 동영상 플랫폼 틱톡 등에 투자한 사모펀드 SIG 창립자 제프 야스와 미 중서부 지역 대표 물류업체 유라인(ULine) 창업자 리처드 율라인이 이끄는 성장클럽은 감세를 지지하고 복지 확대에 반대하는 정치단체다. 재정 보수주의를 내세운 티파티 운동을 지지하고 현재 짐 조던 하원 법사위원장을 비롯한 공화당 강경파 ‘프리덤 코커스’ 소속 의원을 주로 지원해 왔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2016년 대선 때부터 반대 운동을 벌여 왔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성장클럽에 대해 “CFG는 내가 수년간 척결하려 했던 세계주의자 단체”라며 “나는 끝까지 미국 우선주의 입장이며 이것이 우리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비판했다.
2019년 트럼프 전 대통령에 반대하는 중도 보수 성향 고액 기부자들과 전 공화당 의원들이 출범시킨 ‘링컨 프로젝트’, 헤지펀드 시타델의 최고경영자(CEO)로 지난해 중간선거에서만 6850만 달러를 기부한 또 다른 큰손 케네스 그리핀도 트럼프 반대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반면 헤지펀드 르네상스 테크놀로지스 CEO를 지낸 로버트 머서를 비롯해 머서 가문이 이끄는 머서 재단은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를 검토하고 있다. 친트럼프 성향 온라인 매체 브레이트바트를 세운 머서 가문은 2016년 대선 때부터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원했고 올해도 정치자금을 8800만 달러(약 1200억 원) 이상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공화당 경선에서 다른 후보들과의 격차를 크게 벌려가자 뒤늦게 그에 대한 지원을 검토하는 큰손들도 적지 않다. 비글로 재단을 운영하는 억만장자 부동산 사업가 로버트 비글로는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의 최대 후원자였지만 최근 “나는 친트럼프”라며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둘러싼 사법 리스크 추이를 보고 지원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헤일리 전 대사를 지지하던 미국 최대 주택 자재 및 용품 판매업체 홈디포 창업자 버나드 마커스도 “누구도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를 이길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며 “대선에서 트럼프 당선을 위해 모든 것을 하겠다”고 말했다.
● 공화당 큰손들 ‘제3후보’ 통해 바이든 견제도
민주당 성향 정치 기부 단체도 재선 도전을 선언한 바이든 대통령 지원 대열에 속속 합류하고 있다. 헤지펀드 대부(代父)로 불리는 조지 소로스가 이끌고 있는 민주당 성향 정치 기부 단체 ‘오픈소사이어티’는 바이든 대통령 슈퍼팩(super PAC)에 1500만 달러를 기부했다.
바이든 대통령이 올여름 가족과 함께 휴가를 보낸 레이크타호 저택을 빌려준 톰 스타이어가 설립한 ‘스타이어 네트워크’와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부인 로린 파월 잡스가 설립한 비영리단체 ‘에머슨 컬렉티브’, 카지노 재벌 닐 블룸, 스포츠 재벌 와서먼 가문도 바이든 대통령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81세인 바이든 대통령의 나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지지율도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뒤지며 대선 본선 경쟁력에 빨간불이 들어오자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접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요구하는 민주당 큰손들도 있다. 헤지펀드 퍼싱 스퀘어 캐피털 창업자로 대표적인 민주당 지원자로 꼽히는 빌 애크먼 CEO는 “바이든이 해야 할 옳은 일은 한 발짝 물러서서 출마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메드 칸 패러다임 글로벌그룹 회장 같은 기부자들은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와 전쟁을 벌이는 이스라엘을 전폭 지원하고 있다는 이유로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지원 중단을 선언했다.
공화당 일부 큰손은 민주당을 탈당해 무소속으로 대선에 도전한 정치 명문 케네디 가문의 일원 로버트 케네디 주니어를 지원하고 나섰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2020년 대선 부정선거론’을 지지하는 온라인 소매업체 오버스톡 패트릭 번 CEO는 케네디 후보에게 10만 달러를 기부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보도했다. 제3지대 후보 출마로 인한 다자 경쟁 구도가 바이든 대통령에게 더 불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가운데 적으로 다른 적을 물리친다는 일종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을 펴고 있는 셈이다.
워싱턴=문병기 특파원
상한선 없는 정치자금 ‘슈퍼팩’이 곧 후보 영향력
미국 정치를 움직이는 고액 기부 단체
미국 ‘돈의 정치’ 가능케 하는 슈퍼팩
루스벨트 재집권 위해 1944년 결성… 2010년 美대법원 “무제한 후원 가능”
선거후보, 모금 활동에 더 힘쏟기도
미국 비영리 정치단체 책임정치센터(CRP)에 따르면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맞붙은 2020년 미 대선에 쓰인 비용은 최소 140억 달러(약 18조2000억 원)다. 지난해 한국 대선 비용(약 1216억 원)의 150배가 넘는다. 이처럼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배경으로 개인, 기업, 특정 단체의 정치자금 기부액 상한선이 없는 미국만의 독특한 제도 슈퍼팩(super PAC·특별정치활동위원회)이 꼽힌다.
PAC(Political Action Committee)은 1944년 미 산별노조위원회(CIO)가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 재집권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결성했다. 그 전해에 제정된 스미스코널리법은 특정 노조가 개별 정치인에게 직접 자금을 기부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규제를 피하기 위해 PAC이란 단체를 만들고 이를 통해 돈을 모아 특정 정치인을 지원하기로 한 것이다. 당시에는 연 5000만 달러(약 650억 원)의 상한선이 존재했다.
이 상한선은 2010년 연방대법원 판결로 사라졌다. 당시 대법원은 “특정 후보자와 협의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이뤄지는 정치광고에 필요한 기부액 상한선은 없다”고 판결했다. 직접 후원이 아니라면 PAC을 통한 무제한 후원이 가능해진 것이다. 다만 모금 내용은 세세히 공개해야 한다.
이 같은 규제 완화가 미국 주요 선거를 정책 대결이나 후보 개개인에 대한 평가를 넘어 이른바 ‘쩐의 전쟁’으로 변질시켰다는 비판 또한 상당하다. 이종곤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 선거는 ‘머니 토크스(money talks·돈이 좌우한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금권 선거 양상이 짙다”며 돈이 좌우하는 선거일수록 소수 기득권층 이해관계가 강하게 적용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거물급 정치인조차 선거자금을 얻기 위해 억만장자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슈퍼팩이 해당 후보와 별개로 운영돼야 함에도 사실상 한몸처럼 움직인다는 비판도 많다. 미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6일(현지 시간) 공화당 제4차 대선 후보 경선 토론회에 불참하고 자신의 슈퍼팩 ‘MAGA(Make America Great Again·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금 행사에 참석했다.
당내 독보적인 지지율 1위를 달리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겐 다른 후보자와의 대결보다 지지층 모금을 독려하는 일이 훨씬 중요하기에 소속 정당 주요 행사조차 경시하는 것이다. 이 교수는 “후보에게 직접 돈을 건네주지만 않을 뿐 슈퍼팩과 후보는 서로 교류한다”고 진단했다.
슈퍼팩 자금 규모는 후보의 영향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올 3분기까지 조 바이든 대통령은 7300만 달러(약 949억 원), 트럼프 전 대통령은 6100만 달러(약 793억 원)를 모금했다. 다른 후보들 모금액은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미 정치 매체 폴리티코는 “자금이 많다는 사실이 후보를 자동적으로 승자로 만들지는 않지만 풍부한 자원을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은 후보에게 엄청난 이점”이라고 설명했다.
내년 11월 미 대선이 역대 가장 많은 비용을 쓴 대선이 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CNN방송에 따르면 올 들어 노동절인 9월 첫째 주말까지 민주당과 공화당이 대선광고에 쓴 비용은 1억2100만 달러(약 1600억 원)다. 2020년 대선을 앞둔 2019년 한 해 동안 양당이 쓴 비용(6000만 달러)의 두 배가 넘는다.
한국 정당이나 정치인은 하나의 후원회를 둘 수 있다. 개인은 이 후원회에 기부할 수 있으나 국내외 법인이나 단체는 기부할 수 없다. 후원인 1명은 특정 대선 후보에게 연 1000만 원까지 쓸 수 있다. 특정 대선 후보의 후원금 모금 한도 또한 선거 비용 제한액의 5%에 불과하다. 지난해 대선 때는 25억6545만 원이었다.
이기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