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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미국 연방지법, 마이크로
소프트(MS)사에 반독점법 위반 판결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스티브
발머 사장이 레이몬드에서 기자회견을 갖
고 미국 연방지법의 마이크로소프트 독점
판결에 대한 MS사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
다.
미국 연방지법이 2000년 4월 3일 마이크
로소프트(MS)사가 개인용 컴퓨터 운영
체제(OS) 시장에서 갖는 독점권을 남용, 반(反)독점규제법인 ‘셔먼법’의 주요항목
들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이에 따라 지난 1998년 10월 미 법무부
와 19개주 검찰총장이 합동으로 MS사를
대상으로 제기한 독점 여부에 관한 소송은
근 18개월 만에 원고측이 일단 승리를 거
두었다.
이 판결로 나스닥은 사상최대의 하락폭인
349포인트(7.6%) 하락했고 MS사 주식은
15달러(14%)가 폭락했다.
이번 판결은 1999년 11월 MS사의 막대
한 시장 지배력은 경쟁사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 인정(Findings of Fact)’을
통해 어느 정도 예견됐었다.
이번 판결의 기준이 됐던 셔먼 독점금지법
은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1890년 제정
된 법으로 경제 주체들의 활발한 자유경쟁
이 시장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힘
이라는 미국식 믿음과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11년 록펠러가 소유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가 이에 근거해 34개의 기업으로
분리된 바 있다.
▶2010년 애플, 태블릿 PC '아이패드' 출시
애플의 태블릿 PC(스크린을 손가락이나 펜으로
터치하는 식으로 조작할 수 있는 휴대형 PC) 아이패드가 2010년 4월 3일(현지시각) 미국에서 공식 출시됐다.
애플의 태블릿 PC(스크린을 손가락이나 펜으로 터치하는 식으로 조작할 수 있는 휴대형 PC) 아이패드가 2010년 4월 3일(현지시각) 미국에서 공식 출시됐다.
뉴욕·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주요 도시들의 애플 스토어와 전자제품 유통점인 베스트바이엔 엄청난 인파가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날 아이패드를 기다리는 행렬은 온라인 주문·배송이 병행되면서 3년 전의 아이폰 출시 당시 보다는 길지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아이패드의 최고 마케터 역할을 해온 애플의 최고 경영자 스티브 잡스는 이날 실리콘밸리 지역의 애플 매장에 깜짝 등장했다. 그는 팔로알토 시내의 애플 매장에 검은색 후드와 청바지 차림으로 나타나 진열대를 둘러봤다.
타임스와 뉴스위크는 아이패드 시판에 맞춰 스티브 잡스를 커버스토리로 다뤘다. 워싱턴포스트는 “오바마가 아닌 사람이 두 주요 주간지의 표지를 동시에 장식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라며 스티브 잡스가 아이패드를 통해 새로 쓰는 역사의 의미를 보도했다.
이번에 판매에 들어간 제품은 16기가바이트(GB)가 499달러, 32기가는 599달러, 64기가는 699달러로 무선인터넷 사용이 가능하다. 애플 측은 아직 한국 출시시점을 확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국내에서 아이폰이 출시 4개월여 만에 50만대 이상 팔린 것을 참작하면 이르면 5월 출시될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업계의 전망이다.
한편 아이패드의 낸드플래시는 삼성전자, LCD 패널은 LG디스플레이 제품이 사용됐다.
▶2009년 민노총 회원들,
모터쇼 행사장서 선지 뿌리다 연행
▶2001년 김운용씨 IOC위원장 출마 성명 발표
▶2001년 한국문학번역원 개원
▶2001년 역사 왜곡하는 일본 역사교과서,
문부과학성 검정 통과
사실 왜곡과 과거 미화적 사관으로 우려를 낳아온 일본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의 2002년도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2001년 4월 3일 문부과학성의 검정을 최종 통과해 2002년 부터 일선 중학교에서 교재로 사용됐다. 문부과학성은 이날 “해당 교과서에 대해 식민지배를 정당화한 부분이나 가해행위를 축소한 대목 등 총 137곳의 수정 지시를 내렸고 출판사측이 이를 수용함에 따라 합격 처리키로 결정했다” 고 발표했다.
12개 시민 단체 대표들이 2001년 4월 3일 도쿄에서
합동 기자 회견을 갖고 일본 문부 과학성의 2002년도 중학교 역사 교과서 검정 통과에 강력 항의하고 있다.
문제의 교과서는 검정을 통해 한일합병이 합법적이었다는 기술이 삭제되고, 3·1운동에 대한 일제의 무력탄압 기술이 추가되는 등 많은 대목이 개선됐으나, 가해 역사의 기술을 최소화하고, 일제침략이 아시아 해방에 기여한 듯한 뉘앙스를 주는 등의 문제점은 여전해 계속 논란을 빚었다. 한국 정부는 이날 검정절차가 완료된 8종의 일본 중학생용 역사교과서 가운데 5종의 교과서가 군대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등, 우리의 관심 부분이 전반적으로 축소, 완화됐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이 같은 내용을 골자로 한 일본 역사 교과서 1차 평가내용을 공개한 후, 성명을 발표, “일본의 일부 교과서가 여전히 자국 중심주의적 사관에 입각해 과거의 잘못을 합리화하고 미화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데 대해 깊은 유감의 뜻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밝혔다. 남경 대학살 등 일제와 악연이 많은 중국도 신화통신 발표를 통해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한 데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2000년` 2000년 총선시민연대` 낙선대상자 86명 발표
▶ 2000년]미국 연방지법, 마이크로소프트(MS)사에 반독점법 위반 판결
빌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회장과 스티브 발머 사장이 레이몬드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미국 연방지법의 마이크로소프트 독점 판결에 대한 MS사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다.
미국 연방지법이 2000년 4월 3일 마이크로소프트(MS)사가 개인용 컴퓨터 운영체제(OS) 시장에서 갖는 독점권을 남용, 反독점규제법인 `셔먼법`의 주요항목들을 위반했다고 판결했다. 이에따라 지난 1998년 10월 미 법무부와 19개주 검찰총장이 합동으로 MS사를 대상으로 제기한 독점 여부에 관한 소송은 근 18개월 만에 원고측이 일단 승리를 거두었다.
이 판결로 나스닥은 사상최대의 하락폭인 349포인트(7.6%) 하락했고 MS사 주식은 15달러(14%)가 폭락했다.
이번 판결은 1999년 11월 MS사의 막대한 시장 지배력은 경쟁사에 손해를 끼칠 수 있다는 `사실 인정(Findings of Fact)`을 통해 어느정도 예견됐었다.
이번 판결의 기준이 됐던 셔먼 독점금지법은 경제력 집중을 막기 위해 1890년 제정된 법으로 경제 주체들의 활발한 자유경쟁이 시장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힘이라는 미국식 믿음과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1911년 록펠러가 소유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가 이에 근거해 34개의 기업으로 분리된 바 있다.
▶1998년 제2차 아시아유럽정상회의
(ASEM) 영국 런던에서 개최(~4일)
▶1998년 조영식 경희학원장 ‘간디평화상’ 수상
▶1997년 대한적십자사, 10억 상당 구호품 북한 발송
▶1996년 양평 남한강서 만원버스 추락 -
40여명 사상자 발생
▶1992년 방상훈 조선일보 부사장, 한국
데이타베이스산업진흥회 신임회장에 추대
▶1992년 소설가 이병주 별세
1960년 4월 혁명 뒤 나라 곳곳에서는 교원노조가 결성되고, 이듬해에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혁명 검찰부를 구성하고 교원노조 운동을 용공으로 매도하며 소속 간부들을 잡아들인다. 이때 소설가 이병주(李炳注, 1921~1992)는 교원노조 고문이라는 명목으로 잡혀 들어간다. 사실은 이병주가 주필로 있던 <국제신보>에 「조국의 부재(不在)」, 「통일에 민족 역량을 총집결하라」는 제목의 한반도 영세 중립국화를 주장한, 시대를 너무 앞질러 간 논설을 써서 싣는 바람에 걸려든 것이다. 이 일로 이병주는 군사 정권의 이른바 혁명재판소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2년 7개월을 복역하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온다. 출소 직후 이병주는 수감 생활을 하며 구상한 소설을 1주일 만에 원고지 5백여 장 분량의 중편소설로 써낸다.
이병주의 등단작이 된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뜻하지 않은 수감 생활에 대한 일종의 보상인 셈이다. 마흔네 살이 되던 해에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왕성한 필력을 과시한 이병주는 『관부 연락선(關釜連絡船)』(1972), 『예낭 풍물지』(1974), 『망명의 늪』(1976), 『지리산』(1978), 『바람과 구름과 비(碑)』(1978), 『산하(山河)』(1979), 『행복어 사전』(1980), 『소설 남로당』(1987) 등의 문제작을 잇달아 내놓으며 작가로서 입지를 굳힌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는 말을 즐겨 하던 그는 작가란 햇빛에 바래진 역사를 새로 쓰는 복원자, 준엄한 사관(史官)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모든 역사는 승자들을 위한 기록이다. 따라서 당연히 역사는 승리자 중심으로 기술되고 결과만 따지게 된다. 그러나 문학은 역사가 빠뜨리고 간 것을 챙기고 메워준다. 무명의 패배자에게도 발언권을 주고 결과만이 아니라 동기도 중요하게 조명을 한다. “역사의 그물로 파악하지 못한 민족 슬픔의 의미를 모색하는 것”을 자신의 문학적 지향으로 삼은 이병주는 철저한 자료 수집과 취재에 바탕을 두고 한국 현대사를 소설의 공간에서 충실하게 되살려낸다.
1970년대 중반, 문인들이 모인 어느 술자리. 한 젊은 소설가가 술기운을 빌려 이병주에게 대뜸 묻는다. “선생님, 빨치산 하셨지요?” 적당히 술이 올라 기분이 좋았던 이병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버린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이병주에게 쏠린다. 짧은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병주가 벌떡 일어선다. “내가 빨치산 한 걸 네가 봤어? 증거 있으면 대보라구, 이 자식아!”
이병주가 들고 있던 술잔이 어느새 젊은 작가의 얼굴을 향해 날아간다. 이어 말 한 마디 잘못 꺼낸 죄로 뜻하지 않은 봉변을 당한 젊은 작가가 묵묵히 있자 이병주는 분이 덜 풀린 듯 후배 작가의 멱살을 움켜잡는다.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아 가까스로 더 큰 불상사로 번지지는 않는다. 이병주는 자신에게 평생 따라다닌 좌익 혐의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다. 그의 사상적 편향에 대한 의심 때문에 그는 숱한 오해와 불이익을 당하며, 그의 내면에는 이에 대한 강박증적 피해 의식이 깃들이게 된다.
그가 숨진 뒤 한 유력 월간지에 마치 특종처럼 「나는 빨치산이었다」라는 기사가 실린 적이 있다. 그 기사대로라면 한국전쟁 직후 해인사 경내에 피신해 있던 이병주는 그곳을 습격한 빨치산 부대장 김간도를 만나고, 일본 메이지대학 동창인 그를 따라 지리산에서 빨치산 활동을 한다. 그러나 그 기사는 오보였다. 그의 좌익 전력은 인민군 점령 치하에서 연극동맹을 맡은 것이 전부이고, 그 어쩔 수 없는 ‘부역 행위’ 때문에 진주경찰서에 자수해 불기소 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이병주의 삶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 태평양전쟁, 강제 징병, 해방 공간에서 불거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 한국전쟁, 부역, 남북 분단, 5·16쿠데타, 필화 사건으로 말미암은 감옥살이 등 수난과 굴레의 한국 현대사를 고스란히 끌어안고 있다. 그는 삶의 갈피마다 서려 있는 수난과 질곡의 현대사를 어떤 식으로든 토해내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해방과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지리산에서는 2만여 명이 죽어갔습니다. 파르티잔과 군경 토벌대인 이들은 대부분 젊은이들이었지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지 간에, 또 파르티잔의 상당수가 잘못 선택한 길을 갔던지 간에 그들의 죽음은 민족과 시대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되어야 합니다. 2만여 생명이 죽어간 민족의 비극을 그냥 묻어둔다는 것은 기록과 문자가 있는 나라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그들의 일이 가슴에 호소하는 그 무엇으로 남겨져야 합니다.”
지리산, 높고 험준한 연봉과 크고 작은 계곡을 거느린 수려하고 웅혼한 이 산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동서의 냉전 이데올로기가 집중적으로 대치한 곳이자 이윽고 동족상잔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펼쳐진 곳. 해방 직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지리산에 가면 살 길이 있다.”는 말을 따라 칠선골, 뱀사골, 피아골, 칼바위골, 거림골, 백운골 등 골짜기로 깃들인 2만여 젊은이들의 주검을, 그 이름 없는 패자(敗者)들의 허망한 주검을 끌어안고 침묵하는 산.
이병주는 이 지리산에 묻힌 이름 없는 혼령들의 부름을 받는다. 그의 지리산은 일제의 징용을 피해 지리산으로 들어간 젊은이들이 해방 뒤 좌익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이고 열정에 찬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을 전후해 빨치산으로 최후를 맞이하는 장엄한 서사를 아우른다. 대하소설 지리산은 1972년 9월 《월간세대》에 연재되기 시작해 1977년까지 60회에 걸쳐 실리다가 일시 중단된 뒤, 1985년에서야 마무리된다. 작가가 무려 15년에 걸쳐 완성한 이 대하소설은 남한 내의 빨치산과 남로당 활동을 최초로 소설화한 작품이다. 지리산은 조정래의 태백산맥,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 이태의 남부군 같은 빨치산 문학의 물꼬를 튼다.
“한이 많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한이 풀리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러니까 계속 써야 한다.”
▶1991년 영국 소설가 그레이엄 그린 별세
▶1983년 인수봉 등반사고 7명 사망
▶1981년 공정거래위원회 직제 공포
▶1979년 중국, 소련-중국상호원조조약의 폐기
소련에 통고
▶1979년 서울지검 율산그룹 신선호 사장
거액횡령혐의로 구속(율산사건)
▶1974년 긴급조치 4호 선포 (민청학련 사건)
박정희 대통령이 1974년 4월 3일 밤 10시 "반체제운동을 조사한 결과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불순세력의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고 발표하면서 긴급조치 제4호를 발동, 학생들의 수업거부와 집단행동을 일체 금지시켰다.
중앙정보부장이 민청학련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1979년 10월 26일 박대통령의 암살과 더불어 유신체제가 종언을 고한 뒤 이 사건으로 처벌받았던 사람들은 복권되었다.
당시의 재판은 발언 제지, 경고, 휴정, 퇴정 명령, 항의 소동 가운데 사상 유례 없는 빠른 속도로 진행됐으며 재판과정에서 강신옥 변호사가 변론 도중에 법정 구속되는 세계 사법사상 초유의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4월 25일 악명 높았던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의 배후에 공산단체인 인혁당 조직과 조총련계 일본공산당, 국내 좌파 혁신계가 복합적으로 관련돼 있다며 1,024명의 체포자 가운데 54명을 군법에 회부, 구속기소했다. 구속된 54명은 비상군법회의에서 인혁당 재건위 관계자 8명이 사형선고를 받고 1975년 4월 9일 새벽에 갑작스레 처형됐고, 민청학련 관련자 29명은 1심에서 사형 7명, 무지징역 7명, 징역 15~20년을 선고받았다가 2심과 대법원을 거치면서 감형돼 단계적으로 풀려났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사건을 도화선으로 반독재-반유신체제 운동이 본격화되자 이에 앞장 선 대학생-지식인-종교인 등의 활동을 무마시킬 필요에서였다.
구체적인 내용은 민청학련과 관계된 일체의 활동을 금지하고 관련자들은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해 사형, 무기, 5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한다는 전대미문의 야만적 내용이었다. 당시 민청학련이라는 명칭은 시위 유인물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조직체였다.
▶ 1973년 마틴 쿠퍼(Cooper, Martin), 세계 최초 휴대전화 개발
ㆍ공상과학서 ‘들고 다니는 전화’ 영감
“도대체 휴대전화가 뭐요?”
모토로라 제품 디자인팀의 루디 크롤로프는 마틴 쿠퍼에게 물었다. 이로부터 90여일이 지난 1973년 4월3일, AT&T 소속 벨연구소의 조엘 엔젤 박사에게 특별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상대는 경쟁사 모토로라의 연구원 쿠퍼였다. 그는 길거리의 행인들 앞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고 말했다. 최초의 휴대전화 개발을 기념한 ‘염장 지르기’였다.
장소가 아닌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 기술은 공상과학에서 비롯됐다. TV시리즈 <스타트랙>에서 휴대용 통신기를 사용하는 커크 함장을 보고 영감을 얻은 쿠퍼는 자동차용 휴대전화(카폰) 대신 더 작고 더 가벼운 ‘들고 다니는 전화’ 개발에 매진한다. 성공적인 첫 통화 이후 6개월 만에 모토로라는 ‘라디오 전화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특허를 얻어냈다.
일반인들이 휴대전화를 소유하기까지는 그로부터 1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1983년 미 연방통신위원회가 모토로라 다이나택8000X의 시판을 허용했다. “30분간 통화하고 8시간 대기 가능. 충전에는 10시간, LED 조명과 30개 번호 저장!”이라는 광고문구가 사람들을 홀렸다. 길이가 무려 30㎝에 달하는 이 초기 모델은 1㎏이 넘는 무게를 자랑했다. 무거워서 오래 통화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배터리 용량은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았다. 3995달러라는 거금에도 수천명이 줄을 서서 속칭 ‘벽돌폰’을 구입했다. 1년 뒤에는 휴대전화 가입자가 30만명으로 늘었다.
198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의 카폰 서비스를 시작으로 국내에도 휴대전화 시대가 열렸다. 88 서울올림픽에 맞춰 다이나택 후속모델이 국내에 들어왔고, ‘국산 1호’ 삼성 SH-100 모델도 공개됐다. 서울 등 주요 도시에서 시판된 휴대전화의 가격은 기계값에 부대비용을 포함해 400만원에 달했다. 당시 포니차 한 대 값이 500만원이었으니 서민들은 입맛만 다실 뿐이었다.
‘휴대전화의 아버지’ 마틴 쿠퍼는 팔순을 훌쩍 넘겼지만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보이고 있다. 2006년에는 노년층을 위한 전화기 ‘지터벅’을 개발했고, 지난 2월에는 공학분야 최고 석학들의 모임인 미국 공학한림원 회원으로 뽑혔다.
▶ 1972년 오늘,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최고의 고려금속활자 인쇄본발견
▶1968년 브라질과 우루과이 잇는 꽁꼬르디아다리 완공
▶1967년 국가배상법 발효
▶1966년 일본 동경지방에 지진. 철도운행 1시간 중단
▶1965년 한-일 교섭 3대 현안(어업, 청구권, 교포지위) 요강에 가조인. 한-일교섭 일단락
▶1964년 미국 파나마와 국교 재개
▶1962년 아랍연합(아랍에미레이트) 등 6개국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대립하는 아프리카 공동시장 창설을 제안
▶1958년 한국정부 미국에 국토통일방안 각서 전달
▶1955년 미국-영국-프랑스 3국 유엔(UN)
군축위원회 소집 요구
▶1954년 부산진 대형 화재
▶1954년 한국산업은행 발족
▶1953년 TV가이드 창간
▶1952년 소련 쿠바와 단교
▶1950년 미국 작곡가 쿠르트 바일 사망
▶1950년 이범석 국무총리 사임
김좌진 장군과 청산리전투 맨 앞줄 가운데가 이범석 장군
▶1948년 미국 의회 마샬플랜 가결.
대외경제원조법 성립
▶1948년 제주4ㆍ3사건
1948년 4월 3일 제주도에서 일어난
4ㆍ3사건은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제주도민 열명 중 한 명이 학살된 대한민국 비극의 끝나지 않은 역사
○ 잊지 말고 기억하자,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온전한 진실이 밝혀져야 책임자 처벌도, 불행한 역사가 재연되지 않습니다.
○ 4.3사건은 제주도민들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 제주 4.3 평화공원에는 이라는 제목의 야외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바람에 흩날리는 눈'이라는 뜻의 이 작품은 군경 토벌대의 대규모 초토화 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6일, 변병옥(변변생, 당시 25세)과 그녀의 두 살배기 젖먹이 딸이 봉개동 거친오름 북동쪽 지역에서 피신 도중 학살된 후, 후일 행인에 의해 눈더미 속에서 발견된 모녀의 비극적인 죽음을 추념하는 모녀상(母女像)으로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두 생명의 넋을 기리고자 제작 설치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1947년 3월 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봉기사태와 그로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양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6년 6개월에 거쳐 사망자만 무려 1만 4천 명에 이르고, 이후에도 살아남은 생존자와 그 가족들은 ‘빨갱이’로 낙인찍혀 고통 속에 살아야만 했다.
4.3 사건은 30여 만 명의 도민이 연루된 가운데 2만5천~3만 명의 학살 피해자를 냈다. 당초 토벌대가 파악한 무장대 숫자는 최대 500명이다. 에 의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사망자만 14,000여명(진압군에 의한 희생 10,955명, 무장대에 의한 희생자 1,764명 및 기타)에 달한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여성이 21.1%, 10세 이하의 어린이가 5.6%, 61세 이상의 노인이 6.2%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제주도민들은 “우리는 빨갱이가 아니다!”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해병대에 자원입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재일 한국인들 출신 구성을 보면 제주도 출신자가 상당히 많은데, 이는 제주 4.3 사건과 깊은 연관이 있다. 당시 반공 극우단체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기 위해 이른바 ‘보트피플’로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주로 오사카 지역)을 피난처로 떠나간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4.3 사건을 경험한 유족들의 회고에 따르면, ‘좌익도 우익도 자기 마음에 안들면 마구잡이로 죽여 버리는, 완전히 미쳐버린 세상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제주 4.3 학살 피해자 가족과 시민단체에서 줄곧 진상 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였으나 역대 정부는 이를 무시하였고, 오히려 금기시하였다. 4.3 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 삼촌』의 경우 책은 금서가 되고 작가 현기영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어야 했다.
민주화 이후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CNN과의 인터뷰에서 “제주 4.3은 공산폭동이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으니 진실을 밝혀 누명을 벗겨줘야 한다.”는 발언을 했다.
1999년 국회에서 제주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이 사건과 관련된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줌으로써 인권신장과 민주발전 및 국민화합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하는 법인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되고, 2000년 제정 공포되면서 정부 차원의 진상조사가 착수되었다.
2003년 조사위원회에서 보고서를 확정하였고 조사위원회의 의견에 따라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국가권력에 의해 대규모 희생’이 이뤄졌음을 인정하고 제주도민에게 공식 사과를 하였다.
올해 70주년을 맞아 제주 4.3 희생자유족회, 제주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제주 4.3 70주년 기념사업회는 4.3은 미군정이 통치하 미국 군사고문단이 한국군에 대해 작전통제권을 행사하던 시기에 발생하였으므로 미국과 UN 등의 책임 있는 조치를 촉구했다.
▶1948년 통일독립 운동자협의회 결성
▶1938년 숙명여자전문학교 설립
▶1936년 역사가 호암 문일평 사망
▶ 1934년 오늘,
영국의 동물학자 제인 구달(Dame Jane Morris Goodall) 영국
런던에서 출생 ~1960년 아프리카의 곰베 침팬지 보호구역에서
10여 년간 침팬지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침팬지에 관한 다양한
행동들에 대한 사실을 발견해 내었다. 1965년 침팬지와 개코 원숭이의 생태 연구를 위해 곰 비 스트림 연구센터를 설립했으며, 1975년에는 침팬지 등 야생동물 연구를 위해 제인 구달 연구소를 설립했다
▶1930년 독일의 정치가 콜 출생
▶1925년 중앙도서관 개관(장서 1만2000권)
▶ 1924년 오늘,
미국의 배우 말런 브랜도 (영어: Marlon Brando, Jr) 미국
네브래스카 주 오마하 에서 출생(~ 2004년 7월 1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에서사망)는 반세기 동안 활동/ 영화사에서 가장 중요한 배우 중의 하나이며, 1950년대에 강한 정신적 기술을 강조한 조직적
스타일의 연기로 인기를 끌면서 《전선》(On the Waterfront, 1953)에서 테리 맬로이 역할과 《대부》(The Godfather, 1971)에서 비토 코를레오네 역할로 두번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1923년 일본 공산당 기관지 `적기` 창간
▶1922년 요셉 스탈린(Joseph Stalin) 소련공산당 초대 서기장 취임
서기장 임기 1922년 4월 3일 ~ 1952년 10월 16일
1878년 12월 18일 조지아 고리에서 출생~
1953년 3월 5일 러시아 쿤체보( Kuntsevo Dacha)에서 사망
▶1906년 서울~신의주
499km 잇는 경의선 개통
1906년 4월 3일, 서울과 신의주를 잇는 총 길이 499km의 경의선이 개통됐다. 이어 1908년 4월에 부산∼신의주 간 급행열차 융희호(隆熙號)가 운행되고 1911년 11월에 중국 안동∼신의주 간 압록강철교가 완성돼 부산을 떠난 열차가 만주까지 달리게 됨으로써 일제는 바야흐로 대륙진출의 확실한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평양 보통문 옆을 지나는 경의선 철길.
이 결과 도쿄를 출발한 여행객과 물자가 시베리아까지 갈 수 있게 됐고 1913년에는 런던행 여행티켓까지 발매했다. 당초 경의선은 프랑스 파브릴사와 한국인이 운영하는 대한철도회사에 부설권이 있었으나 이 회사들이 자금조달에 곤란을 겪으면서 권리가 소멸돼 어정쩡한 상태에 놓여있었다.
이 틈을 타 평소 경의선 부설이 대동아공영권의 명운을 좌우한다고 믿어온 일본은 러일전쟁 발발과 함께 철도대대를 상륙시켜 불법으로 경의선 부설에 착수했다. 일본의 강요는 결국 우리 정부로 하여금 50여년간의 임대조약을 맺어 부설권을 일본에 넘기게 했다. 철도사에 유례가 없는 2년이라는 짧은 공사기간, 6만2000원에 불과한 마일당 건설비(당시 세계철도 평균치 16만원)는 일본의 토지수탈과 강제동원으로 보충했다.
▶ 1898년 미국의 잡지 발행인 루스 출생 - 타임지, 포춘지, 라이프지
▶ 1897년 독일 작곡가 브람스 사망 - 음악으로 사색한 유쾌한 철학자
바흐.베토벤과 함께 독일 음악의 3B로 불리는 요하네스 브람스가 1833년 오늘 세상을 떠났다.
독일 함부르크에서 가난한 음악가의 아들로 태어난 브람스는 5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바이올린과 첼로를 7살 때 코셀에게 피아노를 배웠다.
이후 1850년까지는 고난의 시대가 계속됐다. 가정 사정으로 학교를 중퇴하고 가계를 돕기 위해 술집.식당.사교장 등을 돌면서 피아노 연주를 했다. 또 시간이 나면 피아노 개인지도 합창단 지휘 합창곡 편곡 등으로 동분서주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1850년 헝가리의 바이올리니스트 J. 요아힘을 알게 되어 1853년 그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나게 된다. 브람스는 이 여행에서 슈만을 만났다. 슈만은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각 방면에 소개해음악계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4개의 엄숙한 노래' '클라리넷 3중주곡' '클라리넷 5중주곡' 등의 대표작이 있다.
▶ 1860년 미국, 포니 익스프레스(Pony Express : 조랑말 속달우편)제도 가동 시작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반가운의hi스토리,솦트리종려나무
편집 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