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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돗개 유래와 설에 관한 논의
1) 늑대 설.
2) 송나라 무역선 난파 설.
3) 고유 견 설.
4) 몽고 견 설.
1) 늑대 설 .
이는 개의 조상이 동아시아 늑대라고 하는 설과는 다른 것으로써 가능성이 희박한 설이다.
그 이유는 어느 시대인지는 몰라도 늑대가 진도에만 있었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도처에서 가능한 일일 것이며 세계 각처에서도 가능할 수 있는 일이
유독 진도에서만 가능하며 진도개에게만 적용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진도 여귀산의 늑대와 개의 혼혈견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 늑대 개 강아지 3마리가 흑구, 백구, 황구 순으로 좋은 개였다고 함으로써
색소별 차이점을 말하고 있으나 작금의 진돗개에서는 그러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가 없고
또한 그 강아지 3마리의 유전인자가 수많은 개들 안에서 그 후손에게 과연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쳤겠는가 하는 것에서
의문을 갖게 한다. 이는 마치 인간사의 설화와 같은 그런 설이 아닌가 싶다.
2) 남송 무역선 난파 설
남송의 무역선이 진도 근해를 항해하다 조난을 당하여 그 배에 실려 있던 개가 진도로 헤엄쳐가서
진도개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설도 그 가능성이 매우 낮다.
예나 지금이나 차나 배에 개를 싣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
하물며 먼 바다 길을 항해하는 무역선이라면 그 가능성이 더욱 없으므로 이 설 역시 신빙성이 없다고 본다.
3) 고유 견 설(토종개설)
지금까지 진돗개의 기원이나 틀로서 인정되어 오고 있는 토종개 설이다.
그러한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이
“진도는 고립된 청정지역의 섬이어서 석기시대 부터의 고유의 토종개가 거기에 고스란히 보존되었다.” 라고 하는 것이다 .
그 고유 견 설을 보강하는 정황적 증거로는 옛날 무덤의 개뼈 이라든지,
우리개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기록 같은 것들인데 이러한 것을 현재의 진도개와 바로 연결해
진돗개를 그 때부터의 토종개로 결론짓고 그 사실적 근거로 삼기엔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먼 추상적 사고가 아닌가 생각 한다.
이런 모든 의구심을 일소하고자 하는 마지막 방편으로 진도의 어떤 특수성을 든 것이다.
그러나 그 특수성이라는 것이 단순히 섬이라는 것과 진도의 기후 풍토적인 것이라면
일반적으로 납득 될 수 있게 연구 되어져야 하며
얼핏 들으면 그럴 듯하여 그렇게 여겨져 왔던 고유견 기원설은
단 한 발자국만 더 들어가서 생각해 보면
그 객관성이나 타당성이 부족하여 오히려 더 많은 의문점들을 낳게 한다.
a. 고유견 설은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
진도는 우리민족의 수난기적 역사의 대표 지역이나 다름이 없어
사람을 비롯하여 청정 지역 에서나 가능한 무엇이든 우리의 고유성이 오롯이 유지되거나
보존되어질 가능성이 다른 지역에 비해 아주 희박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난기적 역사가 없거나 적었던 여타의 섬이나 육지에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 토종개가
대표적인 수난기적 역사를 지내온 진도에만 유일하게 보존되었다.
라고 하는 것은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이다.
모질 하나까지라도 마치 사생결단 할 것처럼 따지는 진도견계에서
아예 이론이 성립되지 않은 고유견 기원설이 신성불가침의 성역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이 분명한 의문점들에 대해서는 자칫 고유견 부정론으로 비춰질까 크게 염려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아예 들먹일 엄두조차 낼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리와 함께 살아온 진도개이건만
진도에 있는 개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고유견으로 귀정할 수있는 보편 타당한 논리가 성립되지 아니한 설이다.
어떻게 맞추어 보아도
단 한가지의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그 모든것이 꼬이기만 하는 것이라면
일제강점기하의 모리의 고유견 규정이나 그 틀 속에서만 안주되고 있는 한국 진도개는
그것이 전부일 수 없는
역사적 생물학적 환경적 검토를 통해서 만이 그 활로를 열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1910년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일으켰다.
이렇듯 중국과 소련을 점령하려고 일으켰던 전쟁에서 겨울을 나기위해 모피가 필요하여
사냥을 장려 모피를 모았으나 그 수요를 충족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는 방사해 기르던 개가 많아서
일본은 기르던 개를 등록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고
조선총독부는 한국 들개가 광견병의 원인이라는 이유로 소탕령을 내리고 백정들에게 야견수권(야 깽가리)을 주었다.
이리하여 방사견은 무조건 들개로 간주하여 토벌했고,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부터는 일본 개들처럼 등록표가 없는 개는 주인이 옆에 있어도 토벌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어른들 말씀을 들어보면 “개토벌이 나오면 집집마다 개를 안고 창고로 숨기가 바빴다." 고 하셨다.
그런데 토종개설은
바로 그 때
진도를 제외한 우리나라 전 지역에 있었던 지금의 진돗개와 같은 토종개가 모조리 씨가 마르고
비교적 진도는 들짐승이 많아 모피공출의 수효를 충족할수 있었던 탓으로 멸종을 면할수 있었고
천연기념물 지정은 1938년 이므로 그 이전에는 천연기념물로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더불어 진도를 제외한 타 지역에서는 잡종화되어
그 개들이 모두 일명 똥개가 되었다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설사 그렇다 치더라도 만일 우리의 그 같은 토종개가 타견과 혼혈되었다면
이는 주변국 어느 개와의 교잡으로 우리 토종개(똥개) 모습이 되었는지 ?
아직까지 그 조상으로 보이는 개는 주변국 어디에서도 그 형태가 없으며
육지에도 진돗개와 같은 개가 있었다는 이야기나 그 자료 또한 전혀 없다.
이는 참으로 억지 논리가 아닐 수 없다.
b. 고유견 틀에서는 보존 대책의 해법과 그 실효성이 전혀 없었다.
무엇이든 토종이라거나 순수종이라거나 하는 것의 보존대책이나 질적 향상의 핵심은
잡종화 되지 않게 하는 것이 최우선이며
또한 순수종의 번식방법 안에서는 서로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좋은 것끼리의
번식이나 사육, 또는 환경을 최상으로 조성해주는 모두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우리는 백구와 황구만을 진돗개로 규정한 잘못된 보호 육성법이나
일제하에서 그들의 내선일체의 저의에 의한 일본 개와 동일시한 진돗개의 표상 지침이나
그에 따른 일본견 유입 등의 참의로 중대한 핵심들을 염두에 두지 못한체
그들이 규정한 모든것에 안주하며
이미 순수하지 못했을지도 모를 우리가 보았던 진돗개의 모습을 진도개 그 자체로 고스란히 고정관념화 되어 ,그로 인하여 여러가지 그에 맞지 않는 현상들을
궁색하게 억지나 다름없이 우겨 맞추는 데만 급급 했을뿐
자주적 검토한번 해보지 못한 지난 수십년 간의 노력의 결과는 ,어쩌면 첮단추가 잘못 끼워진 원인으로
거꾸로 퇴보하는 참담한 결과로 이어진 것이라고 볼수도 있을 것이다.
통계적으로 진돗개의 실태를 보면
아무리 노력해도 부견보다 나은 자견이 나오기 어렵고 더 나아가서는 조 부견보다 나은 것은 더욱 어렵다.
대가 거듭 될 수록 그러한 현상이 더욱 심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진도개 존망의 심각한 문제에 봉착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결국 우리가 진돗개 원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데서 기인된 것으로 생각한다.
결국 토종개 번식 방법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정령 그것이 극에 다다른 것이라면
기존의 틀에서 탈피 해 보는 변화모색 이외에는 대안이 있을수 없다고 보는것이다.
c. 기후 환경과 부합되지 않는 토종의로서의 불합리성
지금껏 우리가 주장하듯 몇 천 년씩이나 한정된 지역에 존재해 오면서
혈통고정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진돗개는 북방견 형태로 보이는 겹개에서부터
남방견 형태로 보이는 홑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가 모두 진도개 범주에 들어가 있다.
그 현상이 진도의 어떤 특수성에서 비롯된
자연적인 체형차이의 혈통고정의 결과라거나 본다면
그것은 여타의 조건이 변하지 않는 한
그 현상이 절대로 변할 수 없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유지 되지 못하고
많았던 것이 없어지고
많지 않았던 것이 많아지는
우리가 노력하는 정 반대 방향의 형태로 변하고
나중에는 어떤 결과에 이를지 모를 현상이 있는 것이다.
진도는 우리나라 남단의 섬으로써 다른 섬과 다를 바가 별로 없는 따뜻한 기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돗개의 형태는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여전히 북방견 형태를 한 개들이 계속 존재한 것을 볼수가 있다.
그들이 토착견으로 그 지역에서 몇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면
이미 그들은 그 지역의 기후 풍토에 완벽하게 부합되어 있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진도 기후와 이질감이 있는 형태의 개가 아직도 존재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만일 그같은 현상이 진도의 역사와 무관하게
다른 어떤 특수성에서 기인되었다고 해 온 것이
옳은 말이라고 한다면
그와는 반대로 홑개 즉 귀가 크고 허리는 길며, 비교적 모질이 단모이며
밀생도가 떨어지는 진도 현지 기후와 부합되는
고유견 형태의 개 또한 공존해 왔는데
그렇다면 이 개들은 진도의 기후에 적응하여 되어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진도의 어떤 특수성과
무관하여 그렇다는 말인가?
그 문제에 대하여 진도 현지 어느 품평회 장에서 질문을 해본 일이 있다.
모두 원로 분들과 심사위원님들 그 자리에 있었다.
즉 겹개 와 홑개가 진도에 어떻게 공존하는가?
모두들 대수롭지 않는 화두로 여기면서도 그 확실한 대답은 궁색한 눈치였다.
그러자 한 원로께서 사람과 같이 자연스런 체형 차이 일뿐 더 논의할 것이 없다는 말씀을 할 뿐이었다.
또한 근래에 급격한 혼혈이 되어서
혈통고정이 안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논의되기도 하지만
역사적으로 혼혈 가능성이 없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일제 이전에는 혈통고정이 이루어져 있어야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정황이나
전해지는 말들을 종합해보면
그렇지 못했을 가능성들도 이야기 되어지고 있다.
d. 크게 보아 세종류나 되는 진도개의 현실
참고로 20년 전쯤 경기도 파주 용주골에 사셨던 최병모 선생님[작고]께 들은
진돗개 관련 이야기를 한 토막을
소개하여 보기로 하겠다.
그 때에도 나는 경기도 고양시 원당 샛골 이라는 곳에서 50여두의 진돗개를 사육하고 있을 때였다.
키가 큰 한 분과 작은 편에 속하는 두 분이 견사를 방문하셨다.
개들을 둘러보시며 “저 개는 [유]종이고 저 개는 [습]종이고 저 개는 [파]종이다.”
라고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를 하셨다.
나는 그때 진돗개를 기른 지 8년쯤 되었고 열의가 대단하여
진도를 일 년이면 4-5번 정도 다니며 숱한 개를 사오기도 하고
내 나름대로는 진돗개를 많이 알고 있다고(참으로 우습게도)
상당한 자부심이 있을 때였던 터라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하고 처음에는 의아해하였으나,
그 때도 우리는 진돗개를 겹개와 홑개로 분류하였으며
중곡동 문웅기 선생님도 [후두형] [각골형] [통골형]으로 진돗개를 분류하고
그러한 것을 정리하고 계실 때이므로 그 내력을 여쭈어 보았다.
최병모 선생님은 자기는 한국 수의사협회 넘버3으로 기록되어있는 수의사였으나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 그 일을 그만 두고 지금은 그냥 소일하고 있으나
과거 한국 최초로 진도에서 품평회를 하였을 때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고 말씀하셨다.
반신반의하며 그 내력을 여쭙자 자기가 수의사 시절
당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수의사 협회로 좋은 진돗개를 선발해 보라는 하달이 내려와
그 일을 해야 되는데 자기들은 수의사로서 동물 치료가 전문일 뿐
진돗개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어 수의사 몇 분이 급히 진도 현지를 방문하여
이곳저곳 이사람 저사람 의견을 들어 보았으나
그 때도 지금 같은 현상으로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개가 진돗개라고 하는 쪽도 있고,
오히려 털이 빽빽한 좀 당차게 보이는 것이 진짜라는 등
열 사람이면 모두 그 말들이 다르므로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서 몇 날을 허비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 대책을 세우기로 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길에 목포에서 하루를 자게 되어
오후 쯤 여관 마루에서 심심하여 바둑을 두는 중
한복을 점잖게 입은 주인인 듯 싶은 어른이 들여다보시다가
바둑 훈수를 한수 해 주시는데
자기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고수 이셨다고 하셨다.
그 어른과 잠시 이야기 중에
수의사 일행이 진도에 갔다가 그냥 돌아가게 된 이야기를 들으시고
내가 아는 친구 한 사람이 진도에 있는데 그분의 증조부께서 진도로 유배되어 오시면서부터
대대로 진돗개를 데리고 사냥을 해왔으니
진돗개에 대해 잘 알 수 있을 것 같으니 찾아가 보는 것이 어떻겠냐며 소개장을 한 장 써주시고
그 친구가 일본 최고 학부 출신으로 자존심이 강한 친구이니
조심해서 대할 것을 당부 하시 더 란다.
(후일 목포의 그 어른신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선친이신 걸 알게 되었다고 하셨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은 심정으로
다시 진도로 건너가 공포수란 어른을 찾아가 소개장을 드렸더니
반갑게 맞이하며
우리 집에 그에 관한 책자가 있었는데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으니
며칠이고 편히 묵으며 찾아보자고 하시더란다.
그때 마당에 개가 몇 마리 있었는데
특이한 것은 그 중 두 마리가 귀가 반쯤 잘려 있었고
서 있는 뒷다리 모양이 대마디처럼 짱짱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셨고
조심스럽게 귀 잘린 것을 여쭈어 보았더니
저놈들이 짐승을 추적 하다가 옆에서 다른 소리가 나면
처음 추적하던 놈을 놓아 두고 소리 나는 쪽으로 쫓아가 사냥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아서
귀를 잘라 버렸다고 말씀하시더란다.
그때 최 선생님 말씀이 자신도 일본이나 중국을 유학하며 많은 책이나 장서를 보았으나
개인이 그렇게 많은 장서를 소장하고 있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하셨다.
3일 만에 다락방에서 책을 한 권 찾았는데
1850년도에 기록한 것으로 온통 한자로 되어 있어 번역하여 읽었는데
그 제목이 [당마와 당견]이라고 쓰여 진 책으로
당마는 제주도 말에 관한 것으로 말의 무게, 치수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으며,
당견은 진돗개를 기술한 내용으로
진돗개의 원산지가 몽고로 되어있었으며
그 책자에 진돗개를
유종(柔種) 습종(틀습자 種) 파종(破種) 3가지로 분류되어 있었다며 그 기록을 말씀해 주셨다.
첫째, 유종(猷種)은 겹개가 없고
키가 크고 단모 성으로 가슴이 좁은 편에 허리는 길며
입이 쭉 빠지며 귀가 큰 편이며 꼬리는 처음 시작이 굵고 끝으로 가면서 붓끝같이 뾰족해지며.
성질은 온순한 편에 땅내를 잘하여 수색 견으로 적합한 걸로 기록 되었다고 하셨다.
둘째, 습 종 (槢 種 )은 전차 개라고 표현하셨다.
즉 체형이 앞뒤로 치우침이 없이 균등이 잘 짜여져 있다는 말씀이셨다.
모질은 중간이며 유종과 파종의 중간형으로
특히 영특하여 경비견으로 적합하며
꼬리는 처음 시작이나 끝부분이
거의 비슷한 형태라고 기록되어 있었다고 하셨고
셋째, 파종(破種)은 위의 두 종 보다 좀 작은 편에 속하며
체장이 짧고 가슴이 잘 발달했으며 귀는 작은 편에
입이 가늘지 않고 털이 빽빽이 밀생된 긴 털이며
꼬리는 처음 시작보다 끝으로 가면서 퍼진 싸리 빗자루 모양이고
성질이 가장 용맹하여 무서움을 안타서 통신용으로 적합하며
특히 발통이 넓어 수영을 잘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장 선생도 한번 시험을 해보라고 권하셨다.
그 책자를 기준하여 진돗개를 선발 하였다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나는 정신이 번쩍하며 어떤 감격을 가슴에서 느꼈다.
1850년대 이론과 1987년대 문웅기 선생님의 이론이
분류별 이름만 다를 뿐 내용적인 면에서는 일치하는 것이다.
그 뒤 최 선생님께 많은 것을 배웠다.
개 치료법이라든지 중국 야생개의 생태나 색깔, 형태 등에 대한 것은 물론이고,
진도 공 포수님을 따라다니며 사냥을 한 이야기 등등 ..
그러던 어느 날 한 사람이 또 찾아왔다.
눈 매가 매섭고 키는 큰 편은 아니었으나 운동으로 다져진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태권도 각 관을 국기원으로 통합한 일을 한 분임)
그 사람과 처음 만난 시간이 오후 3시경이었는데
그때부터 진돗개 이야기를 시작하여 저녁을 대충 먹고 밤을 새우고
다음날 아침, 점심 먹는 것도 잊고 이야기를 나누다
오후 2시경에야 개 이야기가 끝나 밥을 먹었다 .
그렇게 서로 배고픈 것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열정적으로 개 이야기를 나눴다.
지금도 집사람 이야기를 들어보면
두 사람이 그렇게 많은 밥을 한꺼번에 다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한다.
2끼를 넘게 굶고 한 번에 그걸 다 먹은 셈이니 그럴 법도 했을 것이다.
그 때 파주 용주 골 최 선생님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그 사람이 깜짝 놀라며
자기도 진도 공 포수님 증손자하고 의형제 관계이며
지난 여름에도 가족이 그 집에서 한 달 동안 피서를 하고 왔다고 하였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최 선생님 이야기를 반신반의 했었는데 이분의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놀랐다.
그때 최 선생님 말씀이 그 책자 사본을 두 권 떠서
원본은 규장각인가 하는 곳에 보관하고
한 권은 공 포수님 댁에 보관하고
한 권은 자신이 보관하고 있다고 하시어
사본이 만약 있다면 진돗개에 관한 큰 자료가 될 것이며
공 포수 댁을 서로 아는 인연이 있으므로
참으로 반가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날짜를 받아 둘이서 최 선생님 댁을 함께 방문했다.
두 분이 진도 공 포수님 댁 이야기를 하시는데
두 분 말이 모두 일치 했다.
공 포수님 증조부께서 처음 진도로 배되어 오셔서
쓰셨다는 고향강산이라는 현판이 국보급 이라든지
난 그림 한 점이 그러한 것이라든지...
하여튼 그날 책자를 빌리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 뒤 한 2년 정도 나중 분과 교류하다 소식이 끊겼고
최 선생님과는 계속 교류하던 중
나에게 어려움이 있어 한 1년 찾아뵙지 못했다.
그 이듬해 봄에 찾아갔더니 사모님 혼자 계시며
겨울에 돌아가셨다며 눈물을 글썽이며 무척 반기셨다.
병문안도 한 번 못 가본 것이 그렇게 죄스러울 수가 없었으며
그때 그 책자를 빌리지 못한 것이나
그 형별 이름에 대한 해석이라도 여쭈어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우리 선조들이 어떠한 뜻으로 그렇게 분류했는지
분명히 뜻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옥편을 뒤지고 밤을 새웠가며 다음과 같은 해석을 해보았다.
유종이라고 한 것은 부드러울 유자(한자) 로 해석 되었다 .
단 한 글자로 그 개를 다 표현한 것으로.
유한 성품과 유연한 체형을 유종이라고 분류했을 것으로 생각 되었으며
다음은 습 종이다.
그러나 습 종에 대한 것은
아직도 그 해석이 확실히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으나
한자로 가능성을 찾아보니 틀 습자라 는 글자가 있었다.
즉 진돗개의 틀로서
체형이 앞뒤로 치우침이 없이
균형을 잘 이룬 유종과 파종을 어우르는 표준으로 보았던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마지막 파종은 튈 파자(한자) 였다.
파편 할 때 쓰는 파자로 개와 꼭 맞는 표현이다.
걸음걸이가 통통 튀며, 성품도 팍팍 튀며, 순간 동작이 가히 폭발적이다.
종합해 보면 체형으로 진돗개를 분류 했던 걸 알 수 있다.
이렇듯 1850년에도 진돗개의 형태는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의 역사와
진돗개의 생태 및 정황적 근거에 비추어
일반적으로나 어떠한 이론으로도
진돗개가 신석기시대나
몇 천 년 전부터의 고유견 임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유성만을 사생결단으로 유일하게 주장되고 있는 것은
진돗개야말로 순수 우리 것으로 여기고 싶은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거나
검증 없이 믿어왔던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4) 삼별초의 난 때 몽고 견 유입설
a. 삼별초의 난
삼별초의 난은 고려 원종 11년(1270년)부터 원종 14년까지
강화도의 삼별초가 몽고 및 그 추종세력에 반대하여 일으킨 난으로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출륙을 희망하였고
삼별초는 이에 완강히 반대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장군 김 지저를 강화도에 보내어 삼별초의 해체를 통고하고 삼별초의 명부를 압수해갔다.
삼별초는 빼앗긴 명부가 몽고에 전해지는 것인 줄 알고 1270년 6월 1일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 고려의 상황은 1196년(명종 26년)에 최 충헌이 정권을 잡아 도방정치를 할 때였으며
중국에서는 몽고가 인접한 모든 나라들을 차례로 정벌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1231년(고종 18년) 몽고는 한반도까지 세력을 뻗쳐 고려의 개경을 공격해오자
당시 집권자인 최 우는 기마부대인 몽고군이 해전에 약할 것으로 생각하여
국왕을 시위하고 강화도로 천도하게 하였다.
최씨 일파의 무인정권이 무너진 후 강화도의 고려 조정에서는 개경환도 문제를 둘러싸고
문무관이 날카롭게 대립하였다.
원종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은 태자까지 파몽하여 화의를 청하는 한편
대부분 개경환도를 희망하였고
반면에 삼별초의 무신들은 그것이 몽고에 대한 굴복이라 하여 완강히 반대하였다.
삼별초 지휘관인 배 중손은 야별초 노 영희와 왕족 승화후온을 왕으로 추대하고
무인정권을 수립하였으나 강화도의 인심이 동요하고
문관과 무관이 많이 탈출하므로
배 중손은 선박 1천 여척에 재물과 강화도의 사람을 싣고 진도로 들어가서
진도를 근거지로 완도, 남해, 거제도, 제주도 등의 도서 300 여개를 지배하는 해상왕국을 이루었으며
내륙의 나주, 전주, 마산, 정읍까지 세력을 넓혔으나
감방경의 관군과 몽고의 홀돈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에 의하여
1271년 5월 15일 남조포 싸움에서 배 중손은 전사하고
승화후온과 [환]은 금갑포로 달아나다 몽고의 장군 홍다구의 칼에 맞아 전사했고
김 통정은 제주도로 도망가서 성을 쌓고 2년을 지내다가 여몽연합군의 공격으로 행방불명되었다.
삼별초난이 평정되자 삼별초군 가족은 물론
진도 사람들까지도 모조리 몽고로 데려가서 노예로 삼았다.
원종이 진도 사람들의 억울한 노예생활을 몽고에 탄원하여
노예생활을 하던 진도민들은 1년 만에 진도로 되돌아 왔다.
몽고 병은 철수하지 않고 계속 주둔하여
개경에는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하고 12개소의 둔전경략을 설치하였으며
제주도에는 1273년부터 1290년까지 탐라총관부를 두어서 일본원정 준비를 했었다.
고려는 몽고의 강압에 의하여 1275년 원종 15년 10월에
몽고군과 함께 일본을 정벌하려 출정하였으나 태풍으로 실패하였다.
이에 원 세조는 고려로 하여금 함선과 양식을 예비하게 하기위해
1279년 충렬왕 5년부터 1294년 충렬왕 20년까지와
1300년 충렬왕 26년부터 1305년 충렬왕 31년까지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하여 말을 사육하였고
둔전을 두어서 군량미 보급에 힘썼다.
b. 몽고견 설과 그 가능성
제주도에 목마장을 설치 할때에
몽고병들이 목마장 경비나 그 목양을 하기 위해
몽고 본토에서 개를 가져와 길렀다고 한다.
장보고의 해상 활동로를 보거나 고려시대의 해로를 봐도 진도를 거쳐서
전함을 정비하고 제주도로 가는 뱃길을 이용했었다.
몽고군은 장거리 항해로 인한 피로를 풀기 위하여
진도에서 쉬며 전함을 정비했다.
이때 제주도로 가져가는 몽고견이
진도에 주둔하고 있던 몽고군에 의해서 일부 사육되어진 것이
한국 진도견의 시초가 되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강화도 외포리 포구에 가면 진도에서 기증한 진돗개의 동상이 세워져
삼별초 난과 진돗개 그 연계성을 말하고 있는 듯하다.]
첫째,
조선 초기 진도에 국영 목장이 있었는데 그 목장 경비견으로 몽고에서 수입했다는 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이미 몽고는 패망하였으므로 그리되었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이다.
둘째,
삼별초난 때 몽고군이 가지고 온 군견이라는 설.
이 설도 가능성이 적다.
전쟁을 하는 군대가 개를 데리고 다닐 필요성이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셋째,
삼별초난 후 노예로 몽고에 끌려갔던 진도 주민들이
노예에서 풀려나 돌아오면서 몽고 개를 데리고 와서 길렀다는 설.
이 설도 그 가능성이 적다.
노예생활에서 풀려나 사지에서 돌아오면서
그때 별로 중하게 느끼지 못했을 것이며 중하게 느꼈다 하더라도
개를 가지고 나올 상황이 못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삼별초난 후
진도나 제주도 말의 목양 및 경비견으로
몽고군들이 가지고온 몽고견과 그때 진도에 있어던 우리 토종견이 그 시조로써 ,
섬이라는 환경적 까닭으로
여타의 견과 혼혈이 되지않고 그대로 진도에 보존되었다는 설.
위와 같이 진도개의 기원으로 몽고 견 유입설이 여럿 있으나
그 중 위의 첫째에서 셋째까지는 신빙성이 없다고 보여 지고
넷째에 해당하는 설이 그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여 진다.
(참고로 )
필자는
진돗개의 어떤 실마리를 찾고자 2004년 7월 약 한달 동안 몽고를 탐방하였다.
오지의 유목민들을 찾아다니면서
죽을 때까지도 도저히 풀리지 않을 것 같았던 진돗개 열쇠를
그곳에서 얻는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오직 진도만 원산지로 국한되어
옛날에는 진도에서 반출하거나 진도에 가야만 진돗개를 볼 수 있었던 반면
몽고에서는 진돗개와 흡사한 개를 가는 곳마다 만날 수 있었다.
몽고 견은 크게 2가지 품종인데
그 한 종은 그들이[ 방카라]라고 부르는
30키로 정도의 귀가 선 네눈박이 품종이 제일 많고
그 다음이 형태와 크기 모색 등이 거의 진돗개와 흡사한 종으로서
그중에서도 두 가지 형태로 분류되는데
기후가 따뜻한 지역의 개는 현재 우리 진돗개 같은 형태이지만
모질이 빽빽하고 중장모이거나 장모 견에 해당하는 개들이 많았다.
다른 한 종은 아주 추운 지방의 개로서 모질이 더 좋고
우리가 말하는 겹개 형태의 개들이었는데
그들 모두가 가축몰이나 사냥에 쓰여 지고 약한 놈은 스스로 도태되는 엄격한 야생의 생존원칙이 적용되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몽고인 들은 가축을 기르며 유목 생활을 한다.
그 중에 개는 가축몰이의 식구로 여긴다.
그들은 개가 죽으면 크게 슬퍼하며 초원의 좋은 곳을 골라
베개를 받쳐 머리를 서쪽으로 눕히고 꼬리를 잘라 준다.
이는 죽은 개의 영혼이 개의 생을 끝내고 사람으로 태어나라는 의미라는 것이다.
몽고 속담에는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그 집의 개가 좋아하고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그 집의 말이 좋아한다는 속담이 있다.
개가 사내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내아이는 고기를 대충 먹고 뼈를 버리므로 개가 먹을 것이 많기 때문이고,
여자아이는 알뜰하게 먹어버리므로
개 먹을 것이 적으며
사냥이나 놀이상대로 여자아이는 마땅치 않다는 것이며
말이 계집아이 태어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자아이는 사내처럼 등에 타고 귀찮게 하는 일이 적고
매 맞을 일이 적어서 그러 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들은 말과 개를 매우 귀히 여기며 생활의 동반자로 여긴다.
그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몽고인들 생활상을 보더라도
그들의 말이 왔으니
개도 필수적으로 동행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렇듯 몽고 견 유입설이
역사적으로나
진돗개의 형태와 그 실태나
정황적인 것 등이
지금까지 진돗개 기원의
어떠한 설이나 이론보다 그 가능성이 사실적 상황에 다가감을 부정할 수 없다고 본다.
그것을 기정사실로 가정하고 진돗개에 관한 그 모든 베일을 벗겨 보기로 하자.
펌:장대성의 진도개이야기. 운영자 칼럼. http://www.jindostory.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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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통고정이 안된 이유
1) 몽고견과 우리개의 혼혈
약 700여 년 전 몽고개가 우리 토종개와 혼혈되었으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는 몽고가 패망하므로 더 이상의 몽고개의 유입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도의 개가 몽고견 일색이 되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것이며
또한 본래 진도에 있었던 토종견의 형체도 이미 변화를 갖게 된 것이다.
이같이 북방견스러운 개와 남방견스러운 개의 만남은
참으로 오랜 세월동안 하나로 고정되지 못한
즉 혈통고정이 안된 이유중에 첫번째 이유가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2) 육지견의 유입
700여 년 전 진도의 인구는 얼마이고
또한 개는 얼마나 기르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미루어 짐작컨데 소수의 인구에 그리 많지 않는 개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몽고개가 제주와 진도에 유입되었고
그들이 철수한 다음 다음과 같은 상황으로 전개 되었을 가능성이다.
우리의 토종개는 농경문화의 바탕하에서 함께한
비교적 순한 개인 반면
몽고견은 유목생활에 필요한 수렵과
야생동물이나 도둑으로부터 가축을 지키기위한 번견 역할과
목양 등의 필요에 따라서 함께한
강한 개인 것이다.
이 두 구룹이
사람의 개입이 별로 없는 상태에서 혼혈 되었다면
강자 우선 번식이 적용되어
어느 시기부터는 강한 몽고견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후 그들은 환경에 적응하는 변화를 겪으면서
아직 온전한 토착화는 아닐지라도
고립된 섬의 조건에서 나름대로 자연적 혈통고정 단계에 거의 이르렀을 것이나
아직도 그렇지 못한 것은
아마도 진도의 거듭 되었던 유,무인도적인 역사로 인하여
사람의 이동을 따라 육지에 있었던 토종개가 적지않게 진도에 들어가게된 것이
혈통고정을 방해 하게된 또하나의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하여
현재 이 두 그룹
즉 북방견 형태의 흔적을 지닌 우리가 말하는 겹개와
우리 토종개 형태에서 몽고개의 영향을 받아 귀가 서고 모질이 약간 짧은 홑개가 공존하며
더 넓게보면 다양한 체형의 개가 공존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3) 자연의 선택과 사람의 선택
또 하나의 가능성은
남방인 진도의 기후와 자연환경은
진도개를 홑개인 남방견의 형태로 지속적으로 변화시켜 가지만
진도사람들은 도리어 겹개를 선호 함으로써
만일 도태 시켜야 할 경우에는 홑개를
그리고 계속 번식 할 종자견으로는 암수를 막론하고 겹개를 택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개 문화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식육문화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의 경우에도 40여년 전까지만 해도 남양분유에서는 우량아 선발대회를 하여
통통한 아이들을 뽑아 상을 주었던 적이 있으며
처녀의 경우에도 통통한 처녀를 보면 부잣집 맏 며느리감이라고 했었다.
이처럼 사람도 영양상태가 불량하리만큼 절대적 빈곤의 시절에
어찌 대다수 진도군민들이 진도개인들 통통하고 좀 더 큰개의 종자를 선호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자연환경은
계속 진도의 기후풍토에 맞는 남방견 즉 홑개를 생산해 내지만
진도군민들은 대다수 겹개를 선호함으로 말미암아
700여년 전에 비로소 시작된 개라고 할지라도
이미 하나로 통합되어
토종의 형태를 갖추어야 할 진도개가
이처럼 겹, 홑개가 공존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렇다고 볼때 겹개와 홑개 모두는 분명 진도개이다.
그러나 한가지 과제가 남는다.
이는 자연이 선택한 남방견의 홑개 형태와
사람이 선택한 겹개 형태 가운데서
오늘날의 우리는 어느쪽을 더 선호해야 하며 어느방향을 향하여 나아 가야할까 하는 것이다.
펌:장대성의 진도개이야기. 운영자 칼럼. http://www.jindostory.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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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도의 기후 환경에
온전히 부합되지 못한 이유
이 문제는 이미 설명되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진도의 어떤 특수성에서 기인된 것이 아니라
원래 혈통 자체가 서로 다른 품종의 유전자가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 북방견형에서부터 고유견 형태까지
다양한 형태가 진돗개 범주에 들어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보며
나아가 진도의 환경적 조건에 맞지 않는
북방견 형태의 견들이 있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우리속담에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을 등한시 한다거나
바로 코앞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일 것이다.
모든 사물은 주변과의 연계성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결코 뚝 떨어진 멀리에서 비롯되는 예는 극히 드물다.
사물을 직시하고 보면, 바로 거기에 진리가 존재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우리의 역사를 주축으로 하고
그 지역성을 배경으로 하여 진돗개의 실체에 접근해 보았다.
그렇게 하여본 결과 그동안 아무리 맞추어보아도 허공에 뜬 구름 같은,
어디에도 힘을 주고 기댈 곳이 없어 사상누각일수 뿐이 없었던,
베일에 가려져 있었던 진돗개 미스터리들이
굳이 유전학이라거나 고고학적이거나 신비적인 것들을
거론하지 않는 선에서도
보편타당한 이론이 도출되어진다고 본다.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다음단추를 아무리 잘 끼워도
모두 잘못 끼워지는 것처럼
첫 단추를 달리 끼워보니
그 다음 것들은 필자의 견해이긴 하지만 모두 저절로 잘 맞는다.
이러한 것이 진돗개에 대한 원리적 이해로서
진정 객관적일 수 있는 것으로
그에 대한 원리적 이해의 토대가 마련되어진다면
이러한 것이야말로
진돗개가 칠흑의 길고 긴 마법의 터널에서 풀려나는
대 전환점의 시작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펌:장대성의 진도개이야기. 운영자 칼럼. http://www.jindostory.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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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 처럼 진도개의 기원에 대해서 논리적이고 역사적 사실에 기초해서 분명히 자세히 밝힌 글은 처음 봅니다.
1. 역사적 자료와 (삼별초의 난)
2. 그 당시의 상황 (진도와 제주도에 설치된 목장)
3. 몽고인의 생활방식과 문화
4. 1850년대의 진도견의 모습을 기록 해 놓은 책.
5. 이승만 대통령 당시 진도 원산지의 진도개들의 모습에 대한 진도섬 주민들의 생생한 증언.
(이승만 박사의 1대 대통령 취임시기는 1948년, 2대 대통령으로 취임은 1952년, 3대 때는 1956년~60년)
6. 몽고견의 모습을 찍은 사진
등등을 통해서
진도개의 체형은 100여년전 훨씬 이전 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3가지 이상의 다양한 체형이 있었으며,
귀 크기도
큰 듯한 귀도 있고, 작은 듯한 귀도 있고
또
털 길이도
단모도 있고, 긴털도 있다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진도개의 다양한 체형과 모색, 귀 크기등에 대해서
위와 같은 좋은 글을 통해서
왜 그렇게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그 연유와 까닭을 분명히 알게 됐습니다.
정리하자면
1. 진도개의 체형은 다양하다.
2. 진도개의 모색은 다양하다.
3. 진도개의 모질은 다양하다.
5. 진도개의 귀크기는 다양하다.
6. 진도개는 원래 우리 토착견과 몽고 북방견과의 혼형이다.
(=몽고견 유입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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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장대성의 진도개이야기 자유게시판에 있던 몽골견의 사진입니다. http://www.jindostory.com/index.html
몽골견 백구 사진입니다.
몽골 황구 사진입니다.
몽골 네눈박이 사진입니다.
몽골 백구 사진 하나 더 올립니다.
몽골 황구 사진 하나 더 올립니다.
검은 털 박힌 몽골 황구와 몽골 네눈박이입니다.
펌:장대성의 진도개 이야기. http://www.jindostory.com/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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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진도견들을 통해서 진도견의 다양한 체형과 체고, 귀의 크기, 털의 길이, 모색, 모질등
진도견의 다양성을 볼 수 있습니다.
전주 큰 백구.
묵호.
진솔.
테리.
지수.
흑황구.
야수.
작은 백구.
우수 진도개 보존 마을.
일호.
월방이.
70년대 백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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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많은 공부가 되는 좋은 글이네요
네 좋은글과 사진 잘 보았습니다.
지금 현 시대에서는 별로 귀담아 듯거나 볼 필요가 없는 , 그런 이야기 들 이죠.
지금 현실의 이야기가 중요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현재는 과거의 연속으로 , 과거가 바탕이 되어야 현재를 보다 알수 있는 것이라고 보며,거듭하여 이야기가 되는 현재의 것들이 과거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눈앞의 현재를 보다 바로 알지 못할수 있다는 ...
댓글 달아주신 두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