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성북동은 진짜 부자들이 사는 동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전에 강남이 개발되면서 땅 값 상승으로 갑자기 부자가 된 사람들을 졸부로 부르던 시절에 그들에 비해 원래 부자들이 살았던 성북동이나 평창동을 진짜 부자들이 사는 동네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예전 드라마 속에서 부자집에서 전화를 받는 장면에 이런 대사가 있었습니다. "네~ 평창동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옛말이죠.
이젠 서울의 강북과 강남의 빈부 격차는 더 커지고 있습니다. 또 물질적인 측면뿐만아니라 지적인 측면도 강남 사람들의 수준이
높아졌습니다. 그건 아마도 돈이 몰리는 곳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야기가 한참 벗어났네요. 오늘은 제가 좋아해서 자주 갔던 곳에 얽힌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청와대 뒷길이면서 대사관저가 밀집되어 있는 성북동 길을 구불구불 가다가 삼선교 방향으로 빠지는 내리막길 좌측에 '길상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습니다. 약 7,000평의 부지에 대웅전, 석탑, 법정 스님이 머물던 장소와 템플스테이까지 갖춘 곳입니다. 주말이면 꼭 불교 신도가 아니더라도 길상사의 고즈넉함을 즐기려 많은 방문객들이 찾습니다. 저도 한 때는 거의 매월 한 두번은 갔던 곳입니다.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길상사에 관항 이야기를 몇 가지 정리해 봅니다.
첫 번째가 길상사는 사찰이 되기 이전에는 ‘대원각’ 이라는 서울의 3대 요정 중의 하나였습니다. 1950년대부터 1990년대 까지 유명 정치인들이 드나들던 밀실 정치의 온상이었다는 것입니다. 대원각이 사찰이 되기까지는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 선생님의 결단과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김영한 선생님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무소유를 실천하고자 1,000억 원대의 전 재산을 시주하여 사찰을 만들어 달라고 법정 스님에게 부탁을 합니다. 하지만 법정 스님은 요정 터에 사찰을 지을 수 없다고 10년 동안 거절을 하다가, 김영한 선생님의 진실하고 간곡한 부탁에 결국 길상사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두 번째는 대원각 주인 김영한 선생님과 백석 시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김영한 선생은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배불리 밥도 먹고, 돈도 벌기 위해 기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진향’이라 이름으로 기생 생활을 할 때 일본에 유학까지 다녀온 엘리트 영어 선생의 회식 자리에서 백석 시인을 처음 만났고, 그후 두 사람은 사랑하는 사이로 약 3년간 함께 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백석 시인의 집에서 기생 출신 며느리를 받아들일리가 없었습니다. 급하게 다른 여인과 결혼을 시키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후 백석 시인은 자신의 고향이 있는 북한에서 살았고, 김영한 선생님은 서울에서 요정을 하면서 일생 동안 백석 시인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남과북의 이데올로기에 막혀 두 사람은 평생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생을 마감하게 된 것입니다.
김영한 선생님은 약1,000억 원을 기부하고 ‘길상화’ 라는 법명과 염주 하나를 받았는데, 누군가(신문기자 또는 지인) 평생을 모은 재산 1,000억 원이 아깝지 않으셨냐고 질문을 했을 때, 이렇게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물론 1,000억 원이라는 돈은 정말 큰돈 입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고 평생을 그리워한 백석 시인의 시 한 줄의 가치만 못합니다.”라고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는 백석 시인과 김영한 선생님의 사랑 이야기가 진실이기를 누구보다 바랍니다. 요즘처럼 물질이 사람의 정신을 지배하려는 세상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아직 세상은 살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이야기라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백석 시인의 시를 좋아합니다. 학교에서는 백석 시인을 일제 강점기때 활동한 시를 잘 쓴 시인으로, 특히 토속적인 향이 묻어나고, 글을 음악처럼 쓰는 시인이라고 배웠습니다.
그런데 길상사와 김영한 선생의 저서 ‘내 사랑 백석’을 읽으면서 백석 시인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물론 사랑의 가치를 알고 계신 김영한 선생의 맑은 영혼도 제게 울림을 주었습니다.
백석 시인이 1938년 발표한 시로 가장 많이 알려진 시 한 편을 소개해 드립니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위 시는 백석 시인의 모더니즘 시풍을 보여주는 대표시로 현실 도피적인 내용과 사랑에 대한 의지를 보여주는데, 그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히지는 않았습니다.
백석 시인이 이 시를 쓰기까지 두 명의 여인이 있었 습니다. 한 사람은 백석 시인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준 김영한 선생님이고,
또 한 사람은 ‘난’이라는 여성으로 본명은 박경련 입니다.
조선일보 입사 동기였던 백석, 허준, 신현중은 가깝게 지냈는데, 신현중이 자신의 여동생을 허준에게 소개해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결혼식의 회식 자리에서 백석 시인은 박경련에게 첫 눈에 반해 ‘란’ 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통영 출신인 ‘란’을 만니기 위해 통영으로 세 번을 찾아갔지만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립니다. 백석 시인은 ‘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란’의 부모님을 찾아아 청혼을 했지만 거절을 당합니다. 이유는 명확하진 않지만 아마도 ‘란’이 백석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란’은 백석 시인의 친구인 신현중과 결혼을 하게 되고, 백석 시인은 자신의 사랑과 친구를 이렇게 떠나 보내게 됩니다.
다시 시로 돌아가서, 시의 내용을 해석해 보면 나타샤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현실의 장벽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워서 시인은 자신의 처지가 쓸쓸하고 힘들어서 소주를 마십니다. 현실을 부정하고 이상의 세상인 산골로 들어가 나타샤와 함께 순수한 사랑을 간직하고 살고 싶다는 것이죠. 즉, 나타샤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 눈과 흰 당나귀는 순수한 사랑, 산골은 현실을 벗어난 이상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
시 속의 나타샤가 누구인지는 백석 시인만이 알고 있겠죠. 첫 눈에 반했지만 친구와 결혼한 ‘란’과 자신의 젊은 시절 한 때를 뜨겁게 사랑한 ‘자야’. 그리고 시를 통해 사랑을 이루려는 백석 시인의 고독한 몸부림......
예술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많은 것 같다는 생각과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더 가치가 높아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참, 성북동 길상사 바로 건너편에 한복디자이너 이효재의 효재의 뜰이 있습니다. 따뜻한 봄날, 길상사로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만나러 나들이 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