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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마르코 11,27-33
마음을 빼앗기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경찰공무원, 심지어는 동네 KFC 직원 채용에서도 혼자만 낙방하며 실패만 거듭하다가 결국 알리바바라는 유통회사를 성공시켜 아시아 최고 갑부가 된 마윈 회장에게 한 기자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회장님이 함께 일하기 힘든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마윈 회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가장 일하기 힘든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공짜로 무언가를 주려고 하면 그들은 함정이라고 할 것입니다.
작은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하면 돈을 별로 못 번다고 하고, 큰 비즈니스에 대해 이야기하면 돈이 없다고 합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자고 하면 경험이 없다고 하고,
전통적인 방식을 시도해보자고 하면 경쟁이 많아서 어렵다고 합니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라고 하면 다단계라고 하고, 상점을 하나 같이 운영하자고 하면 24시간 내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유가 없다고 하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자고 하면 전문가가 없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구글에게 물어보기를 좋아하고, 희망이 없는 친구들에게 의견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대학교 교수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지만 장님보다 더 적은 일을 하죠.
그들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더 나은 삶을 위해 ‘지금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명확한 답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공통적인 한 가지 때문에 실패합니다.
그들의 인생은 기다리다가 끝납니다.
사업을 시작하기에 모든 게 갖추어진 완벽한 타이밍을 기다리고 공부를 시작하기에 알맞은 시간을 기다리고 아이디어가 있어도 바보 같다는 소리를 듣기가 두려워 기다립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며 그저 늙어 죽기를 기다리죠.
그렇게 기다려주어서 고맙다고 어떤 억만장자가 다가와서 돈을 주고 가기를 바라죠.
가만히 앉아서 생각만 하고 있는 대신에 무언가를 그냥 해보세요.
현재 자신에게 한 번 물어보세요. 당신은 가난한 사람인가요?”
[출처: ‘당신이 가난한 이유’, 북튜브, 유튜브]
마윈 회장이 말하는 함께 일하기 힘든 ‘가난한 사람’이란 실제로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용기가 없는 사람입니다.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을 말합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가난해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 안에 가득 찬 두려움은 바로 자아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만으로 가득차서 아무 것도 못합니다.
자아에게 마음을 빼앗긴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사람은 ‘육신-영혼-영’으로 이루어져있는데 육신을 빼앗겼으면 조금 빼앗긴 것이고 영혼을 빼앗기면 많이 빼앗긴 것이지만 영을 빼앗기면 다 빼앗긴 것입니다.
영은 마음이라고도 합니다.
마음이 자아에 빼앗기면 자신의 의지로 자아가
원하지 않는 다른 무언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일어나야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면 다 주는 것이고 마음을 빼앗기면 다 빼앗긴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빼앗겼다면 그 누군가가 나의 완전한 주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자아로부터 다시 빼앗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마음을 자아에게 빼앗겨 독사의 자식들이 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입니다.
마음은 자아에게 내어주고 겉만 하느님께 내어주려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는 행위를 보고 그들은 ‘무슨 권위’로 그렇게 하느냐고 묻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당신 마음을 아버지께 내어드렸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셨기 때문에 하느님의 권위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마귀에서 빼앗긴 이들은 알아들으려하지 않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에게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은
어디에서 오는 권위냐고 물으십니다.
분명 세상이나 자기 자신에게서 오는 것은 아닐 것이고, 그렇다면 하늘에서 온 권위로 그렇게 한 것이겠지만 그러면 ‘요한이 증언한 당신은 왜 믿지 않느냐’라고 할 것을 알기에 그들은 그냥 ‘모른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다면 당신의 권위가 어디에서 오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해봐야 그들을 머리까지만 이해시킬 뿐 그 가르침이 그들의 마음을 빼앗지는 못할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으로 예수님을 미워하기로 작정한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에게는 어떤 설득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저 트집을 잡거나 자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사용하려는 것뿐입니다.
주님을 가진 이만 부자입니다.
우리 마음은 누구의 소유입니까?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통은 가장 많이 생각하게 돼 있습니다.
나는 무엇에 마음을 빼앗겼습니까? 가장 많이 생각하고 바라는 것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면 나는 마윈 회장이 말하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마음을 다른 것에 빼앗긴 채 머리와 몸만으로 주님을 믿으려고 하면 현대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1일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마르 11,27-33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하게 됩니다!
언젠가 나름 어깨 힘주는 분들 모인 한 단체에서 저를 강의에 초대하면서 엄청 꼬치꼬치 묻더군요.
신학교 외에 어느 대학, 어떤 분야를 전공했는지?
유학은 어떤 나라를 다녀왔고, 취득한 학위는 어느 정도 수준이고, 어디서 가르쳤는지?
그래서 저는 대답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이 워낙 좋지 않아 겨우겨우 학교를 다녔습니다.
몸도 좋지 않아 성적도 언제나 바닥이었으며, 유학이라고 몇 년 다녀왔지만, 배운 바가 거의 없는, 정말이지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랬더니 즉시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언제든지 초대 계획을 취소하셔도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취득한 혜성처럼 등장하신 예수님, 그리고 그리로 몰려가는 군중, 당대 유다 세력가들을 너무나도 당연히 경계심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예수님의 뒤를 캐기 시작합니다.
예수라는 인물은 도대체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어떤 가문 출신인가?
어디 율법학교를 졸업했는가?
그에게 가르침을 준 스승은 누구인가?
교수 자격증은 취득했는가?
알아봤더니, 웬걸, 예수란 인물은 깡촌 중의 깡촌 나자렛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무학력자였습니다.
당연히 예수는 율법 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파악한 수석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얼마나 다급했던지 직접 나서서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그때 예수님은 기가 막힌 역질문을 하나 던지시는데, 그 질문 하나로 그들의 말문을 닫아버리셨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당시 세례자 요한에 대한 명망과 인기와 인지도는 전 국민적인 것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미 백성들 사이에 하늘로부터 온 하느님의 전령이자 구약시대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대예언자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면
백성들의 불신과 공분을 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의 세례가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면 세례자 요한이 준비하고 예언한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하늘에게서 온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오신 분,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 것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절하십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질문이 진실해야 대답도 진실하게 됩니다.
그들의 질문에는 진정성이 없었으며 다분히 계산적이었습니다.
질문다운 질문이 아니고 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기 위한 정치적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답(無答)은 사실 정답이었습니다.
당시 영적으로 무지하지 않고 정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자라는 사실 정도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이 요르단강에서 예수님께 세례를 베풀 때 하느님 아버지와 성령께서
예수님의 위격과 권한을 명백히 증언하셨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권한을 받으신 것이고, 백성들에게 가르칠 권한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부터 온 권한이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권한을 지니기 위해 노력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하늘로부터 온 권한은 사람들을 내리누르기 위한 권한, 코너로 몰아붙이기 위한 권한이 아니라
사람을 격려하는 권한입니다.
사람을 일으키고 살리는 권한입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권한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8주간 토요일 강론>
(2024. 6. 1. 토)(마르 11,27-33)
(성 유스티노 순교자 기념일)
<우리는 이미 믿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 성전 뜰을 거닐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그러면 내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대답해 보아라.’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터이니, ′사람에게서 왔다.‵ 할까?’ 그러나 군중이 모두 요한을 참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군중을 두려워하여,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마르 11,27-33)”
1)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권한’으로 일하시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또 세례자 요한의 세례는 하늘에서 왔다는 것도
믿고 있고,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 문제는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안 믿으려고 하는 사람이 논쟁을 통해서 믿는 사람으로 바뀌는 경우는 보기가 어렵고, 믿는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과 반감만 커지는 것을 흔하게 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논쟁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는 경우는 더러 있습니다.
어쩌면 논쟁이라는 것은, 사탄이 신앙인들의 신앙을 뒤흔들기 위해서 사용하는 방법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논쟁이나 ‘말싸움’에서 이기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신앙을 증명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2) “모르겠소.” 라는 사제들과 학자들과 원로들의 말은 정말로 몰라서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이 죄는 아니지만, 알려고 하지 않는 것과 알려 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죄가 됩니다.
“모르겠소.” 라는 말이 “관심 없다.” 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왔든지 사람에게서 왔든지 간에 자기들의 기득권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요한의 세례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활동은, 특히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신 ‘성전 정화’ 사건은, 자기들의 기득권에 큰 위협이 되었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을 것입니다.
<“모르겠소.”를 “관심 없다.”로 해석한다면,
이 말은, 그들 자신들의 구원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고, 현세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만
중요하게 생각하던 자들이었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또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라는 말은, 예수님의 권한을 알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라, “당신은 권한도 없으면서 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라는 뜻입니다.
‘이런 일’은 좁은 뜻으로는 ‘성전 정화’를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을 모두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공인된 랍비도 아니었고, 이스라엘 당국이나 로마 당국으로부터 무슨 권한을 받으신 적도 없습니다.
사제들과 학자들과 원로들의 눈에는, 즉 최고의회
의원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아무 권한도 없으면서 자기 마음대로 설치는 것으로만 보였을 것입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대답을 회피하신 말씀이 아니라, “믿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내가 하는 일에 관해서 들을 자격이 없다.” 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줄 수 없다는 뜻입니다(마태 7,6).>
3) ‘하늘에서’ 라는 말과 ‘사람에게서’ 라는 말에서,
사도행전에 있는 ‘가말리엘’의 말이 연상됩니다.
“이제 내가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들 일에 관여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십시오.
저들의 그 계획이나 활동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면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에게서 나왔으면 여러분이 저들을
없애지 못할 것입니다.
자칫하면 여러분이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사도 5,38-39).”
만일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사람이 세운 종교라면, 박해를 받았을 때 없어졌거나, 아니면 내부적으로 부패하고 타락했을 때 없어졌을 것입니다.
지난 이천 여 년 동안 안팎으로 많은 시련과 고난을 겪었으면서도 없어지지 않고 이렇게 꾸준히 성장하고 발전한 것 자체가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하느님의 종교” 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이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교라고 자칭하는 사이비 종파나 이단 종파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엄격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누가 보아도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분명한 사이비 종파들을 보면, 설립자가 죽은 뒤에는 힘을 잃고 저절로 없어지는 것을 흔하게 보는데, 다 그런 것은 아니고, 없어지지 않고 대를 이어가면서 끈질기게 살아남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라면,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서 나온 것도 아닌 것, 즉 ‘사탄’에게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사탄은 종말이 올 때까지 끊임없이 사람들을 속이고 하느님의 일을 방해할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