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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월 14일(토)
* 시작 기도
주님...
주님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림으로 섭니다.
통회하며 내 심령이 가난하여지기를 원하오니 주의 보혈로 씻으사 주의 옷자락으로 덮으소서.
그 안에서 예수로 숨을 쉬게 하소서.
비록 세상 속에서 두 발을 딛고 살지만, 그것에 속한 냄새에 취하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의 향기로 취하게 하소서.
새 술에 취하여 주님의 말씀만 내 안에 가득하게 하옵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이 하루도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기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빌 2:12-18
제목 : 심판주되신 주님 앞에서 기뻐하는 자랑이 있게 하소서.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엇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 나의 묵상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과 이미 영적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 성도들을 향하여 복종을 명한다.
이 복종은 바울의 말에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라는 말이다.
그들은 바울에게 복음을 들을 때부터 바울과 함께 있을 때 이미 하나님께 복종하는 모습을 잘 보여 주었다(12).
문제는 바울이 지금 옥에 갇혀 있으므로 그들과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종을 더욱 강조하며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함께할 그 때도 하나님께 복종하는 모습을 잘 보여 주었지만, 그 때만 아니라 지금 내가 없을 때에 복종하는 일은 더 아름답고 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한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사람은 누구나 함께 있을 때는 의도적으로라도 잘 하려고 하고, 믿으려고 한다.
그러나 정작 혼자 있을 때는 마음이 느슨해지고 또한 믿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은 받았지만 그들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으며 그들이 육신으로 살아 있을 때, 땅의 본향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본향을 더 사모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을 보면 그들의 믿음과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향한 평가를 이렇게 하신다.
아벨의 경우,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히 11:4).
그가 육신으로는 죽었을지라도 주소만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옮겨 지금도 살아 있다는 뜻으로 이처럼 참된 믿음으로 행하는 자는 죽음을 뛰어 넘는 자이다.
또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일컬을 때,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막 12:26-27)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것을 말할진대 너희가 모세의 책 중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말씀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너희가 크게 오해 하였도다 하시니라.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이루는데 두려움과 떨리는 마음으로 힘써 이루라고 한다(12b).
구원은 칭의의 구원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이루어질 종말론적 구원 곧 완전한 구원이 있다.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을 믿는 자들은 이미 구원 받았다.
그 구원에는 우리의 어떤 공로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일방적인 구원이므로 우리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하지만 그 구원을 받았음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먹고 마시며 이 땅에서 살아간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한없이 죄송스럽고 면목 없는 구원이다.
이것이 바로 아들의 생명을 받아 영생을 얻어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 즉 거듭남이다(벧전 1:23).
그러나 아직 그 구원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그 구원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우리의 썩은 몸이 거룩한 몸으로 부활할 때 완성된다.
따라서 본문 12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주신 구원은 이런 구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의 생명을 받아 영생을 얻은 자들이 이 땅에서 영생의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영생은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아들의 생명을 얻은 자답게 살면서 영생을 맛보고 누리는 것을 말한다.
이 구원을 이루는 일은 말씀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구원을 받은 자가 하나님 말씀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없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간다면 그것은 사실 구원 받은 자의 모습이라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수 없다.
(히 8:9)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였노라.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떠는 자를 하나님은 돌보신다고 하셨다.
(사 66:2)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이처럼 두렵고 떨림으로 말씀에 쉐마하는 자를 하나님은 돌보시고 지켜주시지만, 제사하고 예물을 드린다 할지라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아니라 교만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하는 사람은 돌보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소를 잡아 드릴지라도 그것이 살인하는 것과 같으며, 어린 양으로 제사를 드릴지라도 그것은 개의 목을 꺾어서 그 고기를 취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유익을 위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신다.
그들이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를 드리는 것과 같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하는 것처럼 가증한 일이라고 하신다.
(사 66:3-4)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 하시니라.
이 일을 우리가 이루는 것 곧 그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시기 때문이다.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그래서 우리가 그 일을 잘 이룰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우시고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는 불평과 다툼을 일으키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불평과 다툼이 어디서부터 나오는가?
바로 나의 조그마한 욕심으로부터 비롯된다.
욕심이 서로를 비교하게 되고, 내가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서로 싸우게 된다.
그래서 내 안에서 자라나는 욕심의 싹을 자르는 것이 중요하다.
욕심의 싹을 자르는 것은 내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주신 분복임을 믿음으로 받고 그것에 감사하며 사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다.
이런 자들이야 말로 악이 가득한 어둠의 세상에서도 밝은 빛을 발하고 향기를 발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것이다.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도록 하라고 권면한다.
생명의 말씀은 복음을 뜻한다.
‘밝혀’라고 번역한 헬라어 ‘에페코’는 밝힌다는 의미보다 붙든다는 의미가 더 적확하다.
그래서 항상 복음을 붙들고 살라는 말은 복음을 통하여서만 생명을 얻을 수 있기에 항상 복음을 떠나지 말 것을 권면하는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악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는 이 복음을 위하여 목숨 걸고 수고하며 달려왔는데 그 이유가 그리스도의 날, 즉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자기가 자랑할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자랑은 어디서 해야 하는가?
자랑은 이 땅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주로 오시는 주님 앞에서 하는 것이다.
심판주로 오신 주님 앞에서는 우리가 정말 자랑할 것이 있어야 한다.
바울은 그 자랑이 바로 자신의 자랑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이 말을 오해할 수 있다.
마치 바울이 심판주 되신 주님 앞에서 자기의 자랑만 드러나게 하려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17-18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의 믿음과 섬김, 헌신의 제물 위에 내가 죽어 흘리는 피로 전제를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할 것이며, 또한 여러분과 함께 기뻐할 것이라고 하면서 빌립보교회 성도 여러분도 이같이 기뻐하고 또한 나와 함께 기뻐하라고 권한다.
그 기쁨은 사도바울만 주님 앞에서 자랑거리가 많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쁨의 원인을 제공한 빌립보교회 성도들의 기쁨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축구 감독이 국가대표 축구선수들을 열심히 지도해서 그들이 월드컵에서 우승을 했다면 그 기쁨의 감격이 감독에게만 있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감독보다 선수들이 더 기뻐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상황에 있든지 그 상황에 묻혀버리거나, 아니면 그 상황을 해결하려고 꼼수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분복으로 알고 그 안에서 복음, 즉 생명의 말씀으로 살아갈 때 주님의 때에 주님은 우리를 새 생명을 일으켜 주실 것을 믿는다.
그 삶이야 말로 정말 주님이 기뻐하시는 참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할 것이다.
나는 내게 주신 분복에 감사하지 못하고 항상 남들과 비교하는 사람이었다.
만족이 없으니까 죄의 세력이 내 안에 욕심이라는 자리를 잡고 나를 탐욕과 환난과 곤고로 이끌고 갔다.
나는 철저하게 거기에 휘둘려서 남들과 비교해서 내가 못하다 싶으면 견디지 못하였다.
남들이 나보다 잘 하는 것을 보면 시기와 질투가 나를 장악하곤 하였다.
부교역자 때는 다른 여러 부교역자들과 항상 비교하여 내가 더 잘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정말 하나님께 칭찬 듣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칭찬 듣기 위함이었다.
화명중앙교회가 예배당을 리모델링한 후에 옥상에 정원을 조성하기 위해서 성도들이 옥상으로 흙을 퍼날랐다.
다른 부교역자들은 아무도 동참하지 않을 때 나는 성도들과 함께 흙을 날랐다.
나는 사실 힘이 별로 없기 때문에 흙을 나르는 일이 너무 버거웠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였다.
그 때 내 귀에 들리는 소리들이 있었다.
“역시 우리 김목사님은 달라.”
나는 그 소리에 더욱 힘을 내서 일을 하였다.
이처럼 나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기를 좋아했고, 다른 사람들보다 칭찬 받는 것을 좋아했다.
사람들은 나의 외적인 면모를 보고 칭찬과 박수를 보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완전 나의 의, 곧 자기주장의지에 사로잡혀서 나의 의를 드러낸 것이다.
그런 나를 하나님은 어떻게 보셨을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심지어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설교와 사역을 했던 적이 훨씬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은 비근한 예에 불과하지만 나는 이처럼 비교하는 마음으로 사역하고 생활하다 보니 마음에 평안이 없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도 내 안에는 늘 불평과 다툼, 환난과 곤고가 끊이질 않았던 것이다.
복음을 알고 보니 정말 불평과 원망, 시기와 질투, 그리고 다툼을 일으키는 나를 나 스스로 용납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창세전에 나를 택하시고 아들의 생명을 주셔서 영생을 살게 하신 주님은 그런 나를 용납하여 주시고 나를 주의 자녀로 삼아 주셨다.
이 은혜를 내가 어떻게 표현하며 무엇으로 갚을 수 있겠는가?
복음을 통하여 아들의 생명을 얻은 자로서 이제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며, 매일, 복음 즉 생명의 말씀을 붙들어 이 땅에서부터 영생의 삶을 살아가며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에 보았던 그 영광을 나도 보는 것이다.
죽기에만 합당한 나를 구원해 주시고 자녀 삼아 주신 주님께 영광과 찬송을 올려 드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자기주장의지로 가득 차서 가는 곳마다 불평과 원망, 시기와 다툼을 일으켰던 자가 여기 있나이다.
이 종은 죽기에만 합당한 자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저를 사랑하셔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며 무덤에 장사되시고 부활하여 지금도 나를 돌보고 계십니다.
이 종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는 자인데, 그런 나를 용납하여 주셨사오니 이제 그 은혜에 합당한 자로 살기를 원합니다.
복음으로 생명을 얻어 영생의 삶을 날마다 사는 자가 되어 오늘도 주님이 보셨던 그 영광을 저도 보나이다.
나를 비추는 주님의 영광이 나를 감싸기에 오늘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않고 주님 안에서 참 평강을 누리나이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아오니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받으옵소서.
이제 나의 입에서 참 복음을 전하여 복음을 듣는 그들이 악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참 빛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많아져 심판주되신 주님 앞에서 자랑거리를 가진 자로 서기를 원합니다.
나의 그 기쁨이 곧 주님의 기쁨이요 또한 복음을 통하여 영생을 누리는 이들의 기쁨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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