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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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나시아노(Donatian)
축일 8월 7일
성 도나티아누스(Donatianus, 또는 도나시아노)는
프랑스 샬롱쉬르마른의 제2대 주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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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나토(Donatus)
성 힐라리누스(Hilarinus)
축일 8월 7일
성 도나투스(또는 도나토)와
성 힐라리누스(Hilarinus)가 어떻게 서로
연관을 갖고 있는지는 그다지 확실하지 않다.
성 힐라리누스는 수도승으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의 통치 때 이탈리아의 오스티아(Ostia)에서
순교했다. 그리고 성 도나투스는 이탈리아 중부
토스카나(Toscana) 지방 아레초의 제2대 주교로
로마 순교록에는 그 역시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 때 아레초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교회 미술에서 성 도나투스는 칼과 용과 함께 있는
젊은 또는 중년의 주교로서 그려진다.
그는 아레초의 수호성인이나 그에 대한
정확한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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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메시오(Dometius)
축일 8월 7일
멜키테스 사람들과 동방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성 도메티우스(또는 도메시오)의 축일을
오늘날에도 성대히 지낸다. 성인은 페르시아의
개종자로서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Nisibis)에서
수도자가 되었다가 부제로 서품되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동굴에서 살았고,
여기서 인근 주민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여
많은 개종자를 얻었다. 사람들이 떼 지어
몰려와서 그에게 축복을 간청하였고,
혹시나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했는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병을 고쳤다고 한다.
그 당시에 도메티우스는 배교자인 황제
율리아누스의 불경을 크게 꾸짖은 바 있는데,
화가 치민 황제는 이 성인을 민중들의
재판에 회부하였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이 성인 때문에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이리하여 그는 순교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기적을 행하는 사람 또는 은수자로 알려지기
시작하여 동방 교회에서는 큰 성인으로 공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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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리치니오(Licinius)
성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
성 엑산투스(Exanthus),
성 카시우스(Cassius),
성 세베리누스(Severinus),
성 세쿤두스(Secundus)
성 리키니우스(Licinius)
축일 8월 7일
그리스도인 군인들이었던
성 카르포포루스(Carpophorus),
성 엑산투스(Exanthus), 성 카시우스(Cassius),
성 세베리누스(Severinus),
성 세쿤두스(Secundus)와
성 리키니우스(또는 리치니오)는
막시미아누스 헤르쿨리우스 황제의 통치
기간 중에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
지방의 코모(Como)에서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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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Peter)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축일 8월 7일
성 베드로(Petrus)와
성 율리아누스(Julianus)는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 중에 순교한 최소 20명의 남녀
로마 순교자들 중의 일부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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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빅트리치오(Victricius)
축일 8월 7일
로마 군인으로서 프랑스 지방에 주둔해 있던
성 빅트리키우스(또는 빅트리치오)는
자기 친구인 투르(Tours)의
성 마르티누스(Martinus)처럼 군인생활은
복음에 비길 수 없다 하여 그리스도인이
됨으로써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 후 그가 385년경에 루앙의 주교로
착좌할 때까지의 과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넓은 지역을
정열적으로 뛰어다니는 선교사 주교로
활약하였다. 그는 395년경에 브리튼의
주교들로부터 무슨 일을 꼭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정도로 유명하였고 또
영향력이 있었다. 그의 또 다른 친구는
놀라의 성 바울리누스(Paulinus)이다.
그가 기록했던 “성인들의 찬가”를 비롯하여
인노켄티우스 1세(Innocentius I) 교황이
그에게 보낸 규율적인 문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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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식스토 2세(Sixtus II)
축일 8월 7일
성 식스투스(또는 식스토)는
257년 8월 30일에 교황 성 스테파누스 1세를
계승하였다. 이때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첫 번째 포고령을 내렸다.
군사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습격했을 때
식스투스 교황은 지하 묘지인 카타콤바
속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로마(Rome)의
지하 묘지들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피아 가도(Via Appia)에 있는
성 칼리스투스(Callistus) 묘지에 안장되었다.
식스투스와 함께 체포되어 순교한 사람은
부제 성 펠리키시무스(Felicissimus)와
아가피투스(Agapitus) 그리고 차부제
야누아리우스(Januarius), 빈첸시오(Vincentius),
마그누스(Magnus), 스테파누스(Stephanus)이다.
또 한 명의 동료 순교자로 성 콰르투스(Quartus)가
있다. 그도 부제라는 기록이 있으나
잘못된 기록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들은
교황 식스투스 2세와 함께 순교하였기
때문에 로마 순교록에서 같은 날을 축일을
정해 공경해 왔다. 그러나
성 라우렌티우스(Laurentius) 부제는
며칠 뒤에 순교하였기 때문에 다른 날 축일을
정해 공경한다. 이들은
프랙텍스타투스(Praetextatus) 카타콤바에
안장되어 있다. 오늘날
교황 성 식스투스(8월 7일)와
라우렌티우스(8월 10일) 외의 다른 순교자들은
8월 6일을 축일로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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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가탄젤로(Agathangelo)
성 카시아누스(Cassianus)
축일 8월 7일
아가탄젤로는 1598년에 방돔에서 태어났고,
21살 되던 해에 르망(Le Mans)의 카푸친회에
들어갔으며,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시리아로 갈 때까지 고향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다. 또
알레포(Aleppo)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 동안에 아라비아어를 공부하여 대화나
강론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모슬렘 사회의 문맹을
퇴치하고, 터키인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하는 등 당시의 교회가 위험하다고 금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1630년에 카푸친회는 카이로에 선교지를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아가탄젤로는 1633년에 그곳의 책임자로
동분서주하였다. 이때 마르세유(Marseilles)에서
3명의 선교사들이 합류하였는데, 이들 중에
낭트(Nantes)의 카시아누스(Cassianus) 신부가
가장 출중하였다. 카시아누스는 즉시
아가탄젤로 신부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특히 노력한 것은 로마(Rome)
성좌와 곱트 교회간의 재일치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들 두 선교사가 이 힘든 일을
계속하다가 에티오피아 선교를 위하여
디바루아로 갔다가, 그곳의 왕인 바실리데스
앞으로 끌려갔다가 결국은 순교하고 말았다.
교황 비오 10세(Pius X)는 이 두 분이
17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고
선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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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알베르토(Albert)
축일 8월 7일
시칠리아(Sicilia)의 알베르투스로도 알려진
성 알베르투스(Albertus, 또는 알베르토)는
이 섬의 트라파니(Trapani) 태생이다.
그의 부모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만일
아들을 낳게 되면 몬테 카르멜의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뒤에 그를 낳았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카르멜 회원이 되어
사제로 서품된 뒤에는 메시나(Messina)로 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규칙 외에도 자발적인 고행을 많이
하였고, 매일 밤에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서 시편 전무를 바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만년에 그는 메시나와 가까운 곳에서
은수생활을 하였으며, 300년 후에 팟지(Pazzi)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Maria Magdalena)가
카르멜을 떠나려는 유혹으로 고생할 때,
천상에 계시는 성 알베르투스에게 기도하여
유혹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그의 성덕이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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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카예타노(Cajetan)
축일 8월 7일
티에나의 가스파르(Gaspar) 백작과
포르토(Porto)의 마리아(Maria)의 아들로
태어난 성 카예타누스(Cajetanus, 또는 카예타노)는
비첸차(Vicenza)에서 세례를 받고,
두 살 때 그의 부친이 전사하는 불운을 안았다.
그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나 파도바(Padova)
대학교에서 공부하여 민법과 교회법의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곧 비첸차의
시의원이 되었고, 1506년에는 로마(Rome)로 가서
교황 율리우스 2세(Julius II)로부터 최초의
공증인으로 임명받았다. 또한 그는 신심 깊은
사제들로 구성된 신애회(神愛會)를 재생시켰다.
1513년 율리우스 교황이 서거하자 자신의
직책을 사임하고, 1516년에 사제로 서품된 후
비첸차로 돌아왔다.
그는 거기서 성 히에로니무스(Hieronymus)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하여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일하다가, 베로나(Verona)에서
이와 비슷한 회를 설립하였다. 1523년 그는
로마로 가서 후일 교황 바오로 4세(Paulus IV)가
된 요한 피에트로 카라파, 바오로 콘시글리에리
그리고 보니파티우스 다콜레 등과 함께 교회를
개혁하고, 백성들에게 설교하며, 병자를 돕고,
최악의 경우에서 허덕이던 성직자의 신분을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성직 수도회를 설립하여
1524년에 교황 클레멘스 7세(Clemens VII)의
승인을 받았다. 테아티노회(Theatines)라
부르는 이 수도회는 공동체 생활을 하는
정규 성직자들로 구성하고, 서원을 발하며,
사목직에 종사하였다. 처음에는
그리 성공적이 못되었다. 1530년
카예타누스가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주교들의 개혁에 반대하는 무리들을
대적하여 훌륭한 싸움을 하였고, 이단적인
가르침을 과감하게 물리쳤다.
일반 시민들을 위한 카예타누스의 주요
업적 중의 하나는 전당포의 설립이었다.
후일 그는 복자 마리노니와 함께
몬테스 피에타티스(Montes Pietatis)를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로써
시민들의 복리를 위해 일하였다.
그는 8월 7일, 나폴리(Napoli)에서 운명하였으며,
1671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트렌토 공의회(Council of Trento) 전에 있었던
가톨릭 개혁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성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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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클라우디아(Claudia)
축일 8월 7일
어느 전설에 의하면 성녀 클라우디아는
제2대 교황이 된 성 리누스(Linus)의
어머니이며 영국 왕 카락타쿠스(Caractacus)의
딸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클라우디우스(Claudius)의 영국 동맹자인
코지둡누스 왕의 딸이라고 한다.
아울루스 플라우티우스(Aulus Plautius)가
영국을 공격하여 그녀의 일가를 사슬로
묶어 로마(Rome)로 끌고 왔는데, 후일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이들을 석방하자
그 딸 가운데 하나가 클라우디아로 이름을
바꾸어 세례를 받았으며,
사도 성 바오로(Paulus)가 디모테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 4장 21절에 등장하는
바로 그 클라우디아라고 한다.
클라우디아는 로마 원로원의 일원인
아울루스 푸덴스(Aulus Pudens)와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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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우스토(Faustus)
축일 8월 7일
전승에 의하면 성 파우스투스(또는 파우스토)는
군인 순교자로서 콤모디우스 황제 치하의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은 현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