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무책임 체계와 서생의 책임의식
태풍 카눈의 상륙이 예고된 가운데, 동학들과 함께 전남 구례에 갔다. 매천 황현(1855~1910)의 자취를 밟는 1박 2일의 답사여행이었다. 순국한 집터에 세운 ‘매천사’, 작년에 복원된 ‘구안실(苟安室)’ 등 유적지를 찾았다. 돌아오면서 새삼 떠오르는 단어는 ‘책임의식’이었다. 누구는 책임의식에 그토록 괴로워하는데, 누구는 책임을 부정하여 주위를 그토록 괴롭히고 분노하게 하는 걸까?
죽어야 할 의리는 없지만, 선비로서
경술년(1910) 망국의 소식이 알려지자, 그날 밤 매천 황현은 유서를 남기고 독약(아편)을 먹었다. 이튿날 가족들이 알게 되었다. 매천은 동생 황원에게 웃으며 말했다. “독약을 마실 때, 입을 뗀 것이 세 번이었다. 내가 이처럼 어리석은가?” 이윽고 숨을 거두었다.
유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가 선비를 양성한 지 5백 년인데, 나라가 망하는 날 죽은 자가 한 사람도 없다면 어찌 통탄스럽지 않으랴!” 망국의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조선 선비로서의 책임의식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이리라.
망국의 순간에 정작 책임 있는 조선의 왕실과 관리들은 무얼 했던가? 이미 나라는 사실상 망한 상태였다. 갑오년(1894)에 외국군을 불러들여 자국민을 학살할 때 망했고, 그것은 앞서 임오년(1882)에 중국군을 불러들일 때 시작됐다. 백성을 폭도로 몰고 적으로 삼아 외국 군대를 불러들인 왕실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오로지 왕실의 안위가 최우선이었던 고종은 결국 외세에 농락당하고 말았다. 책임의식 없이 일신의 안위와 영달을 좇던 관리는 이 나라 저 나라 줄을 대다 결국 승자 일본의 부역자가 되었다.
망국의 왕실과 관리의 책임으로 인해, 군국 일본의 가해자 책임이 부정될 수는 없다. 그런데 일본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는 일본 파시즘의 지배체제를 ‘무책임의 체계’로 규정한 바 있다. 도쿄 전범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속기록을 분석한 결과였다. 전쟁을 일으키고 학살을 저지른 군대의 지휘관이 재판정에서 자신의 행위에 대해 늘어놓은 변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이미 정해진 상황에 따랐을 뿐이며, 또 하나는 자신의 권한 밖이었다는 것이었다. 마루야마의 분석은, 강고한 체제 내의 왜소한 인간군상, 그리고 허구적 권위를 정점으로 한 교묘한 무책임 구조를 간파하게 해준다.
그러나 일본은 전쟁 책임을 부정하고 훗날을 도모할 발판을 얻기 위해 온갖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 노력은 종전 전후와 항복의 순간에도 그러했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앞서 일본은 패전이 기정사실이 되었을 때에도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 노력했다. 그런 상황에서 원자폭탄 투하는 종전을 하루라도 앞당기고 일본의 항복을 확실하게 하는 데 기여했음이 분명하다. 원폭 투하로 인한 민간인 살상은 비극이었지만, 원폭 투하가 없었으면 더 많은 병사와 주민들의 희생이 있었을 것이다.
역사의식과 책임의식을 갖춘 리더십이 절실한 때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1904~1967)는 원폭 개발이라는 맨하튼 프로젝트를 성공시킨 영웅이었다. 그는 이내 대량살상무기로 인해 죄책감에 빠졌다. 그가 원폭 개발에 전력을 다한 것이나, 나중에 더 이상의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반대한 것이나 모두 과학자로서의 책임의식이 발현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는 공산주의자라는 혐의가 씌워지고 고초를 겪었다. 정치적 반대파를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하는 매카시즘의 광풍에 영웅도 벗어날 수 없었다.
구례를 답사하면서 들은 말이 있다. 사실 이미 유사한 조어를 몇 가지 들은 바 있다. 그것은 “나라에 대통령은 없고, [______]만 있다”는 말이었다. 마침 광복절 경축사가 이를 확인해주는 듯하여 당혹스럽다. 위험한 상황이다. 2023년 여름, 일본은 미국의 대중 견제 구도에 편승하여 노골적으로 전쟁가능국가로 회귀하고 있고, 유럽에서는 전쟁이 1년 6개월이나 지속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역사의식과 책임의식을 갖춘 국제적·국가적 리더십이 절실한 때가 아닌가.
조선의 망국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일이 아니었다. 무지몽매한 행동들이 누적되어 돌이킬 수 없는 사세가 되었다. 일개 서생인 매천 황현이 망국의 짐을 지면서 남긴 절명시가 더욱 폐부를 찌른다. “역사를 돌아보니, 지식인 노릇 하기 어려웠다”는 탄식은, 오늘을 사는 지식인에게 시대적 책임을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