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의 '애손'이자 조선 역사상 가장 슬픈 임금이었던
단종의 태를 묻은 태실지(경상남도 지정 기념물 제31호)를 일제가 훼손하고,
해방 후 그 자리에 친일파가 무덤을 썼으며,
몇 년 전에는 친일파의 묘비까지 세운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경남도가 1972년 기념물로 지정한 단종 태실지는 사천시 곤명면 은사리 산 438번지에 있다.
마을 사람들은 흔히 '태봉'이라 부른다. '태'를 묻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가까운 곳에 세종대왕태실지(도 지정 기념물 30호)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왕이 임금에 오른 지 23년(1441년)에 애손인 단종이 태어나자
그의 태실 앞산에 태를 묻어라는 어명을 내려 그 해에 만들어졌다는 것.
영조 10년(1734년) 단종 태실비가 세워졌고,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조선 역대 왕들은 '태'도 신체의 일부라 하여 귀중하게 여겼고, 모두 길지(명당)에 태를 묻어 관리했다.
임진왜란과 일제시대 때 일본은 '조선의 맥을 끊는다'는 목적으로 역대 왕들의 태실을 훼손해왔다.
임진왜란 때 세종대왕 태실은 거의 파괴되었으나
거기에 비해 규모가 작은 단종 태실은 다행이 화를 면했고, 일제시대 때 수난을 겪었다.
일제는 조선 왕들의 태를 담은 항아리를 모아 서삼릉에 묻었다.
그러면서 태실지를 개인에게 불하했다.
당시까지 태실지는 '전주 이씨' 소유로 국가 소유라 할 수 있다.
이때 단종태실지도 개인 소유로 바뀐 것이다.
- 중추원 '칙임 참의' 지낸 최연국이 무덤 주인공
현재 사천 단종 태실지에는 단종의 태를 담은 항아리는 없고 개인 무덤이 만들어져 있으며,
개인 묘비까지 세워져 있다.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바로 최연국(崔演國, 1885~1951)이다. 그는 누구일까?
1996년 12월 세워진 묘비를 보면, 최연국은 민족교육에 앞장 서는 등 지역과 민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성균관대 교수 겸 성균관장 최근덕 씨가 쓴 묘비명을 보면,
최연국은 1905년 사립 명달학교(현 사천초교)를 설립하고,
1920년 일신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 설립 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또 '주일상회 경남은행 임자신탁회사', '구암토지주식회사', '사천정미소' 등을 설립, 운영했다.
비문에는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적어 놓았다.
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경기도지사 외무차관을 지낸 아들도 있고,
사위들은 일제시대 때 검사를 지냈다고 밝혀 놓았다.
그의 조카는 국회의원과 KBS 사장, 문화공보부 차관 등을 지내는 등 가문을 빛냈다고 적어놓았다.
사천 지역에서는 비석이 세워지기 이전까지는 무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잘 몰랐다.
그런데 1996년 12월 비석이 세워진 뒤 무덤의 주인공이 알려졌고,
그가 일제에 빌붙어 온갖 영화를 누린 친일파라는 사실도 함께 알려졌다.
민족문제연구소에는 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친일파 연구에 앞장섰던 임종국 선생이 남긴 친일파 인물 카드에 최연국의 이름을 찾을 수 있고,
그의 친일 행적을 소상히 밝혀 놓았다.
임종국 선생이 정리한 최연국의 친일 행적은 다음과 같다.
경남 사천시 사천면 구암리 생으로, 물산장려회 평의원(1914년 9월 10일),
경남평의원(1920년 12월 20일), 조선전람회 평의원(1929년 5월 1일),
경남도평의원(1930년 4월 1일), (중추원) 칙임 참의(1933년 6월 3일),
진주소득조사위원(1934년 9월 12일), 조선나병예방협회 기금 1천원 납부(1934년 12월 2일),
임전보국단 발기인(1941년) 등.
이 정도의 행적이면 최연국은 '빼도 박도 못하는 친일파'가 분명하다.
이완용 등이 고문으로 있었던 중추원의 '칙임 참의'까지 지냈으며,
임전보국단 발기인 참여 등은 일제에 대한 부역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방학진 사무국장은 "임종국 선생이 정리한 기록으로 볼 때
최연국은 적극적인 친일파인 것이다"라고 말했다.
- 단종 태실지 석물들, 무덤 가장자리에 나뒹굴어
단종태실지가 있는 산(태봉)은 야트막한 구릉으로, 현재 소나무가 울창하다.
둘레는 논과 밭으로 되어 있다.
1킬로미터 거리에 마을이 있는데 누가 보아도 산의 형세가 예사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복치(伏雉)'라 하여 꿩이 앉아 있는 형세였다.
그런데 일제가 '농지개혁'이란 미명 아래 산의 맥을 끊어 논과 밭을 만들어 산의 형세를 바꾸어버렸다.
단종 태실지에 친일파의 무덤이 만들어진 과정에 대해 태실지 연구가로 알려진
단성고 이은식 교사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28년 경 일제가 전국의 태실지를 의도적으로 훼손하고 그 땅을 개인에게 불하했는데,
명당이라 아무나 살 수 없었다"라고. 단종태실지를 그 당시 최연국이 소유했던 것이다.
1951년 그가 죽자 후손들이 무덤을 만들었다.
지금도 그 곳에는 단종의 태실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흔적들이 많다.
단종의 태실을 묻은 뒤 세운 각종 석물들이 무덤 가장자리에 남아 있다.
거북이 등 위에 태실의 내력을 적은 비문을 세웠는데 비석(태비신)은 부러져 두 동강이 난 상태로 되어 있다.
깨진 '태비신'에는 '대왕(大王)'이란 글씨가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리고 무덤 둘레에 놓은 돌(지배석)도 태실지가 만들어질 당시의 것이다.
최연국의 무덤 앞에 놓여 있는 상석과는 재질 등에 있어 뚜렷하게 차이가 있다.
단종태실지에 사용한 상석도 가장자리에 남아 있다.
- 지역 반응, "강제할 수 없지만 후손 양심에 맡길 수밖에"
사천시는 세종대왕 태실지와 함께 단종태실지 성역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사천시는 두 태실지 입구에 주차장을 설치하기 위해 예산까지 마련해 놓고 있다.
그런데 단종 태실지뿐만 아니라 세종태실지도 개인 소유라 성역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세종태실지에는 4기의 민묘가 있다.
사천시청 관계자는 "두 태실지의 성역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지난해 경남도문화재위원들도 땅 소유자들에게 협조해줄 것을 요구한 것으로 안다"라고 말했다.
사천문화원 오필근 원장은 "최연국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인물로,
개인 무덤이 단종태실지에 있다는 것은 부당하다"면서,
"세월을 두고 처리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천시사편찬위원회 강영태 상근위원은 "최연국은 틀림없는 친일파로,
일제가 명당을 개인에게 불하한다는 정보를 먼저 알고 사들였을 것"이라며,
"후손들은 묘를 그대로 유지하고 싶겠지만 향토사 정립 차원에서는 개인 묘를 들어내야 한다"며
"법률적으로 사유지이기 때문에 강제로 할 수는 없지만 후손들의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태실지 연구가인 이은식 교사는 "태실은 왕만의 태실이 아니라 국가와 백성의 태실도 되었다.
비록 개인 자격으로 태실을 만들어 왕의 안녕과 평안을 빌었지만,
왕의 안녕이 백성의 편안과 연관이 있다고 볼 때 성군으로 만들기 위한 기원 차원이라 볼 수 있다"라며,
"단종태실지뿐만 아니라 전국의 태실지를 복원하는 문제에 국가가 나서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교사는 "태실지 관리가 부실하고, 친일파가 무덤을 썼는데도
지금까지 언론들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면서, 그 이유로 "일제 때 친일파들이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후손 반응 "사유지다. 재론할 필요가 없다"
무덤의 주인공인 최연국의 후손들은 "사유지이기 때문에 재론할 필요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최연국의 손자들이 현재 무덤을 관리하고 있다.
한 후손은 "그 땅은 사유지다"면서,
"그렇다면 적산가옥이라든지 일제시대 때 불하받아 지금까지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집을 비우고 나가야 하는 것과 같으며,
세월이 얼마나 흘렀느냐. 재론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했다.
- 태실(胎室)이란
태실은 태를 묻은 곳이다.
우리 민족은 태를 신체의 일부라 여겼고, 그래서 태를 매우 중시하는 풍습이 있었다.
특히 왕실에서 역시 태를 왕자와 공주의 신체와 같이 여겼고, 태실을 매우 중시했다.
왕의 태실은 그 왕의 즉위년에 주로 만들어졌는데,
왕의 재위 기간의 치세 여하를 이 태실에서 시작한다는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 태실지는 길지(吉地)를 찾았고, 태실도감을 만들 정도였다.
풍수지리학으로 태실지는 명당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태실을 중시하는 풍습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최초의 태실 기록은 신라시대 김유신의 태실로 알려져 있으며, 충북 진천에 있다.
<태봉등록>이라 하여 태실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이것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기록에 따르면 '태봉'은 주로 항아리로 된 '태실'과 일반 무덤의 비석과 같은 '태비', 표석 등의 석물을 두었다.
임진왜란 중 왜구가 태실을 파헤쳐 놓았는데
이를 보수한 기록을 <의궤(儀軌)>라 하고, 이 또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다.
다행이 현재 사천시가 소유하고 있는 <세종대왕 단종대왕 태실 수개(修改) 의궤>(1730년 제작)는
현존하는 유일한 왕의 태실 보수 기록으로 알려져 있고, 문화재나 보물 등의 지정 가치가 높다.
세종과 단종의 태실 보수는 경상도 관찰사 박문수의 장계로 시작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이 두 태실에 표석을 세우기 위해 돌을 진주(대곡)에서 사천(곤명)으로 옮기는데
1170명이 동원되어 닷새 동안 일을 했다고 한다.
돌을 옮기면서 농작물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는 기록도 있다.
역대 조선시대 주요 왕들의 태실은 여러 곳에 있다.
태조(금산) 정종(김천) 태종(성주) 세종(사천) 문종(영주) 세조(성주)
예종(전주) 성종(창경궁) 인종(영천) 명종(서산) 선조(부여) 광해군(대구)
인조(충주) 현종(예산) 숙종(공주) 경종(충주) 영조(청주) 정조(영월)
헌종(예산) 순종(홍성) 등의 태실지가 남아 있다.
이런 태실을 일제가 그냥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일제는 단종 태실이 있었던 '태봉'의 산 형세도 바꾸었다.
첫댓글오 슬픈 기억이야 이땅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우리가 가진 역사에 아직도 지우지 못한 상처를... 그 때에 미국이 아닌 소련이 아닌 우리힘으로 해방에 기쁨을 누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지금에 가정은 또하나의 문제점을 동반하지만.. 한번은 생각해 볼만 합니다...북한이 말하는 그런 자주가 아니지요
첫댓글 오 슬픈 기억이야 이땅에 이런 사람이 있다니... 우리가 가진 역사에 아직도 지우지 못한 상처를... 그 때에 미국이 아닌 소련이 아닌 우리힘으로 해방에 기쁨을 누렸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물론 지금에 가정은 또하나의 문제점을 동반하지만.. 한번은 생각해 볼만 합니다...북한이 말하는 그런 자주가 아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