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맨(The Gods Must Be Crazy)
최용현(수필가)
부시맨(올바른 표기는 부시먼)은 남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에서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는 종족으로, 성인의 평균키가 150cm 정도로 작으며 광대뼈가 불거지고 엉덩이가 볼록하게 튀어나왔다. 사냥감을 발견하면 진정제를 묻힌 화살을 쏜 후 계속 뒤쫓아 가서 쓰러지면 잡는다. 이들은 개인소유의 개념이 없고 친인척으로 이뤄진 소집단이 더불어 살면서 식량과 물을 찾아 이동생활을 한다.
1980년 9월, 경비행기를 타고 칼라하리사막 위를 날아가던 조종사가 다 마신 콜라병을 창밖으로 던진다. 때마침 그 아래를 지나가던 부시맨 차이(니카우 扮)는 하늘에서 떨어진 그 병을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마을로 가지고 온다. 마을사람들은 그 병으로 뱀가죽을 펴거나 곡식을 빻는 등 여러 가지 용도로 잘 쓰다가 급기야 서로 갖겠다고 싸우기 시작한다.
차이는 마을의 평화를 위해 그 병을 도로 반납하려고 하늘로 던졌는데 병은 딸의 머리 위로 떨어진다. 이번에는 병을 땅에 파묻었더니 하이에나가 피 냄새를 맡고 파헤쳐서 다시 땅위로 올라온다. 마을사람들은 그 사악한 물건을 세상의 끝에 가서 하느님에게 돌려주기로 하는데, 차이가 그 병을 가지고 먼 길을 떠난다.
한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도시에서 여기자로 일하고 있는 젊고 아름다운 케이트(산드라 프린슬루 扮)는 칼라하리에 어린이 교사가 부족하다는 소식을 듣고 교사를 자원한다. 케이트를 이곳으로 초빙한 목사는 칼리하리에서 오랫동안 동물의 생태를 연구하던 젊은 백인학자 스테인(마리우스 웨이어스 扮)에게 케이트를 호송(護送)해 오도록 부탁한다.
스테인은 여자 앞에만 가면 말을 더듬거나 실수를 하는데, 하필 브레이크가 고장 난 고물차로 케이트를 호송하다보니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을 벌이거나 슬랩스틱 몸 개그를 연발한다. 차가 개울 한복판에서 멈추자 그녀를 안고 나오다가 물에 풍덩 빠뜨리기도 하고, 케이트의 수영복 팬티에 엉겨 붙은 가시를 떼 주는 사이에 물 밖으로 끌어내던 차가 나뭇가지에 매달리기도 하고….
차이는 문명화된 마을 옆을 지나가다가 주민이 방목한 염소를 야생염소인줄 알고 진정제 성분을 묻힌 화살을 쏘아 잡아서 바비큐를 해먹으려고 하다가 염소 주인의 신고로 잡혀가 3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에 갇힌다. 이런 사정을 들은 스테인은 차이를 생태전문요원으로 채용하여 석방시키고, 차이는 한동안 스테인의 생태연구를 도와주는 조수로 일하게 된다.
그 무렵, 인근 보츠와나에서 공산게릴라반군이 정부청사를 습격하여 각료들을 사살하고 정부군에게 쫓기다가 칼라하리로 온다. 이들은 학교로 들이닥쳐 케이트와 아이들을 인질로 삼고 강제로 행군을 시킨다. 이 모습을 목격한 스테인은 차이와 함께 진정제를 묻힌 화살로 반군들을 잠재운 후 이들을 정부군에 넘기고 케이트와 아이들을 구해낸다.
마침내 스테인의 진심을 알게 된 케이트는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하면서 스테인에게 키스를 한다. 차이는 가지고 온 콜라병을 땅 끝 절벽에서 해무(海霧) 가득한 바다에 던지고 고향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재회하면서 영화가 끝난다.
‘부시맨(The Gods Must Be Crazy)’은 목사 역으로 잠깐 나오는 제이미 유이스가 각본을 쓰고 제작까지 맡아 1980년에 연출한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보츠와나의 합작영화로, 미국의 20세기폭스사가 배급을 맡았다. 원제를 직역하면 ‘신은 미친 것이 틀림없다’ 혹은 ‘신은 확실히 미쳤어’라는 뜻이다.
이 영화는 500만 달러의 저예산으로 만들어 세계적인 흥행대박을 터뜨리며 미국에서만 5천만 달러, 해외에서 6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큰 수익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도 1983년에 개봉하여 서울에서만 30만 관객을 동원하여 흥행에 성공했고, TV 방영 및 비디오 대여로도 큰 인기를 끌며 부시맨의 존재를 전국에 알렸다.
영화 ‘부시맨’은 홀로 땅 끝을 향해 떠난 차이의 여로(旅路)와 선남선녀인 스테인과 케이트가 벌이는 해프닝, 보츠와나 게릴라반군과 정부군의 공방(攻防)이라는 3개 트랙으로 진행되다가 마지막에 합쳐지는 구도로 짜여있다. 정부군의 헬기가 바나나 밭에 숨어있는 반군에게 총을 쏠 때 바나나 열매가 죄다 터지는데도 반군들은 한 명도 총에 맞지 않는 어설픈 장면도 나오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코믹하면서도 문명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 영화가 빅히트를 하자, 같은 감독에 의해서 ‘부시맨 2’(1989년)가 만들어졌으나 크게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그 후 니카우는 홍콩으로 스카우트되어 ‘강시와 부시맨’(1991년), ‘홍콩에 간 부시맨’(1993년), ‘팬더곰과 부시맨’(1994년) 등을 연이어 찍었으나 모두 ‘부시맨’의 인기에 편승한 아류작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니카우는 자신의 생년월일을 모르고 있어서 홍콩으로 갈 때 ‘부시맨’ 촬영 당시를 36세(1944년생)로 추정하여 여권을 만들었다고 한다. 1991년에는 우리나라의 ‘봉숭아 학당’ TV프로에 출연하여 부시맨 차림으로 칠판에 화살을 쏘기도 했는데, 당시 그의 산족 말을 통역하는 것이 상당히 복잡했다. 그의 말을 먼저 스와힐리어로 통역하고, 그것을 영어로 통역한 후 다시 한국어로 통역하는 3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니카우는 나미비아의 코이산족 출신으로 ‘부시맨’ 출연 때는 단돈 300달러(한화 37만 5천원)를 받았다. ‘부시맨 2’에서는 대폭 상승한 80만 랜드(한화 약 7000만원)의 출연료를 받아서 그 돈으로 자신이 사는 마을에 전기시설을 설치했다고 한다. 니카우는 1980년부터 1994년까지 15년간 배우생활을 했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타락했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으나, 은퇴 후에는 수도설비와 전기시설이 갖춰진 벽돌집을 지어 직접 농사를 짓고 가축들을 기르며 검소하게 살았다고 한다. 슬하에는 6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의 나이 59세 때인 2003년 뿔닭 사냥을 나갔다가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태고(太古)의 순수함을 간직한 부시맨 차이, 그는 빈 콜라병 하나로 물질만능주의에 빠진 전 세계의 문명인들에게 무소유가 무엇인지를 유쾌하면서도 해학적인 풍자를 담아 온몸으로 가르쳐주고 떠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