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얗게
텅
하얗게
텅
눈이시리게
심장이 시리게
하얗게
텅
네 밥그릇처럼 내 머릿속
텅
아, 잔인한, 돌이킬 수 없는 하양!
외로운 하양, 고통스러운 하양,
불가항력의 하양을 들여다보며
미안하고, 미안하고
그립고 또 그립고
- 황인숙 시집〈못다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 2016 -
사진 〈Bing Image〉
갱 년 기
황 인 숙
이번 역은 6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삼각지역입니다
삼각지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오른쪽으로
우르르 달려온다
열리는 출입문을 향해
사람들이 통로를 필사적으로 달려온다
다시는 오지 않을 열차라도 되는 양
놓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양
이런, 이런,
그들을 살짝 피해
나는 건들건들 걷는다
건들건들 걷는데
6호선 승차장 가까이서
열차 들어오는 소리
어느새 내가 달리고 있다
누구 못잖게 서둘러 달리고 있다
이런, 이런,
이런, 이런,
건들거리던 내 마음
이렇듯 초조하다니
놓쳐버리자, 저 열차!
사진 〈Bing Image〉
비 온 날 숲 밖에서
황 인 숙
나는 너무 오랫동안
숲에 가지 않았다
선뜻
발을 들여놓지 못하겠다
그렇다고
발길을 돌리지도 못하고
우산을 뱅글뱅글 돌리면서
들여다 본다
숲은
어둡고
고요하고
축축하다
초록 물감 두툼히 발린
아직 마르지 않은 유화처럼
산들,
바람이 부니
아랫도리를 벗은 숲의 방향(芳香)
훅 끼친다
치맛단을 추켜올리고
맨발로 걸어 들어가고 싶다
그러면 수풀은 나를 애워싸고
젖은 손가락들로 온통 나를
만지겠지
아, 징그러운!
아니, 싱그러운
사진 〈Bing Image〉
꽃에 대한 예의
황 인 숙
유독
꽃을 버릴 때가 되면
곤혹스럽다
재활용은 안 될 테고
일반쓰레기 봉투랑 음식물쓰레기 봉투
어느 쪽에 버리는 게 마땅한지
망설이다 종종
동네 화단 덤불에 슬쩍 얹어 놓곤 했다
때가 되어간다
이미 지났을지도
바닥까지 말랐을 것이다
물을 부어주는 게
왠지 계면쩍었던 때가
그때였을까?
꽃병 속에서
시든 꽃이 말라간다
낱낱 꽃잎들과 꽃가루가
식탁 위와 방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있다
전날도 아니고 전전날도 아니고
오래전 화장 얼룩덜룩
빛바랜 꽃이여
유독
꽃을 버리는 건
버릇이 되지 않는다
버릇처럼 피어나
버릇처럼 시드는
꽃을
사진 〈Bing Image〉
문
황 인 숙
뒤틀려 쇳소리를 낼지
달콤한 콧소리를 낼지
당최 열리기나 할지
문이여, 닫힌 문이여
닫혀서 모를 사람의 문이여
달처럼 멀구나
그 언저리를 맴돌다
문
바로 앞은 말고
좀 떨어져
긴 의자에 앉아 바라본다
문만, 그야말로 대문짝만 하게
확대해서 본다
벽 없이 홀로 비석처럼 서 있는 문
열릴 일도 닫힐 일도 없는 문
문이 아닌 문
평생을 소란스레 여닫힌 문의
어리둥절한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