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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일 [연중 제9주간 월요일]
마르코 12,1-12
억지로라도 했던 선행 하나가 죽기까지 선한 영향을 준다
오늘 복음은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입니다.
나쁜 소작인들은 주인의 땅을 경작하면서도
한 번도 도지를 바치지 않았습니다.
소출의 일부를 받으러 온 이들은 때리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외아들까지 그들에게 보냅니다. 이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성체를 주신다는 뜻입니다.
성체는 생명 나무인데 선악과를 바치지 않으면 오늘 주인의 아들처럼 그들 안에서 죽습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게 하는 게 우리 안에 있는 ‘양심’입니다. 양심은 받았으면 주어야 하는 ‘정의’ 시스템입니다.
양심이 없다면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아기는 부모에게 많은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면 양심이 불편해집니다.
받았으면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보답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부모의 뜻을 따라주며 어른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만약 양심이 없다면 아기들은 영원히 유아적인 상태로 남게 될 것입니다.
계속 받아먹기만 하며 내어줄 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총은 양심의 작용을 통해 우리 욕망을 누르고 나눌 줄 아는
존재로 변화시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그 영광과 능력으로 귀중하고 위대한 약속을 우리에게 내려 주시어, 여러분이 그 약속 덕분에,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
만약 양심이 무뎌졌다면 아무리 받아도 미안하고 고마운 줄 몰라서 정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중요한 점 중의 하나는 단 한 번도 소출을 바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양심은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때는 그 작용이 약합니다.
그러나 한 번 했던 것을 하지 않게 되면 양심의 가책이 심해집니다.
만약 한 번이라도 십일조를 낸 소작인들이라면 아들까지 죽이는 일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번이라도 주인을 주님으로 인정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배신하기 쉽지 않습니다.
성체를 영하지 않으면 구원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고, 성체를 영해야만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란 믿음을 가져야 인간이란 믿음에서 나오는 온갖 죄의 욕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 본성에 참여합니다.
그러나 십일조, 혹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봉헌이 없다면 주님은 우리 안에서 또 돌아가십니다.
우리 안에 두 주인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 교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십일조 연습입니다.
저희 성당은 첫영성체와 견진성사를 받는 아이들에게 장학금으로 50만 원씩 줍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사무실에 가서 십일조를 5만 원씩 내야 합니다.
이렇게 평생 한 번이라도 십일조를 해 보았다면
나중에라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과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한 번 했던 선행은 평생 영향을 미칩니다.
‘예전에 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이 더 큽니다.
그래서 돌아오기가 쉽습니다.
아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준다고 성당 나오기 싫다고 하면 그러라고 하는 부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공부는 아이 때 시키지 않습니까?
어른들에 대한 예절도 어렸을 때 가르치지 않습니까? 한번 해 보았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서도 더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도 안 해 보았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양심의 가책이 덜합니다.
그래서 착해지기가 그만큼 힘이 듭니다.
한 번 한 선행이 평생 내 양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때문에 저는 아이들이 힘들다고 해도 매주 교리에 앞서 묵주기도 5단씩 시킵니다.
아이들은 죽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시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이렇게 주님께 시간을 봉헌한 경험이 그들의 양심에 들어가 평생 작용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씀을 들어도 첫발을 떼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한번 해 본 사람은 미래에라도 돌아올 확률이 훨씬 크다는 것을 알고 우리도 단 1년 만이라도 십일조를 해보고 기도나 선행을 체험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6월3일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복음: 마르 12,1-12
하느님께서는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반드시 다른 쪽 문을 하나 열어주십니다!
오늘은 성 가롤로 르왕가와 21명의 동료들의 순교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북아프리카에 비해 동아프리카 지역의 복음화는 꽤 늦었습니다.
1879년에 이르러서야 첫 선교 사제들이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가톨릭에 호의적이었던 무데시 추장은 선교 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그러나 무데시 추장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무왕가가 그 자리를 계승하게 되는데, 성격이 포악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오만하고 그릇된 최고 통치자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의 몫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독식하고 좌지우지하고 싶었던 무왕가 추장 눈에, 사랑과 배려, 친교와 나눔을 강조하는 가톨릭교회 교리가 곱게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폭군은 가장 충직한 부하였지만, 가톨릭 신자였던 무카사를 본보기로 참수형에 처했습니다.
무카사 자리를 계승한 다른 부하가 우간다의 김대건 신부님 격인 가롤로 르왕가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보스 몰래 4명의 예비자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즉시 사형이었음에도 은밀히 신자 수가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폭군은 닥치는 대로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사형 집행인들은 신자들이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기고, 온몸을 포승줄로 꽁꽁 묶었습니다.
그리고 밤새 빙빙 돌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갖은 협박을 하고 농락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아오자 순교자들은 참수형이나 화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순교자들이 대체로 폭군 무왕가와 가까운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에는 왕의 개인 비서도 있었고, 왕궁에서 이런 저런 사무를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를 당분간 멀리 하겠다는 말 한마디면 목숨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순교자들은 결코 태도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우간다 순교자들의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았음이 곧 드러났습니다.
순교 이후 박해의 칼날은 더욱 번득였지만, 입교자, 세례자 숫자는 점점 늘어갔습니다.
순교 직후 3천명의 예비자들이 쇄도했고, 500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같은 경우 지금 우간다를 비롯한 아프리카 대륙은 풍요로운 성소의 온상입니다.
유럽이나 북남미, 우리나라까지 포함해서 다들 사제 수도 성소의 급감으로 교회가 심각한 위기 상황에 놓여있지만, 그쪽에서는 활활 불타오르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한쪽 문을 닫으실 때, 반드시 다른 쪽 문을 하나 열어주신다는 말씀이 참된 말씀이라는 것을 실감합니다.
순교자들이 흘린 피와 그들이 보여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모범이 일궈내고 있는 이 시대 또 다른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 이상 피를 흘리는 박해가 없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순교 영성을 어떻게 실현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다가오는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 시대 순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죽어도 나와 맞지 않는 관계라 할지라도 나를 성장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수용하는 자세, 순교 영성을 사는 노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코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찾아오는 노화나 병고, 실패나 죽음조차도 주님의 크신 구원 계획안에서 바라보려는 시선을 지니는 것도 아주 좋은 순교의 한 모습이라고 확신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9주간 월요일 강론>
(2024. 6. 3. 월)(마르 12,1-12)
(성 가롤로 르왕가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
“이제 주인에게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아들만 남았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들이야 존중해 주겠지.’ 하며 그들에게 아들을 보냈다.
그러나 소작인들은 ‘저자가 상속자다.
자, 저자를 죽여 버리자.
그러면 이 상속 재산이 우리 차지가 될 것이다.’ 하고 저희끼리 말하면서, 그를 붙잡아 죽이고는
포도밭 밖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니 포도밭 주인은 어떻게 하겠느냐?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너희는 이 성경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마르 12,6-11)”
1)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는,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을 꾸짖으시는 비유이고, 누구든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이 경고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비유의 전반부는(1절-5절) 하느님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인 구약시대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예레미야서에 이 비유의 전반부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 모든 종들, 곧 예언자들을 날마다 끊임없이 그들에게 보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예레 7,25-26).”
‘포도밭 소작인의 비유’에서 죄인들의 회개를 기다리시기만 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볼 수도 있는데, ‘하느님의 기다림’을 ‘무기한(無期限)’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회개를 한없이 기다리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정하신 심판 날이 되기 전까지만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심판 날이 언제인지 모릅니다.
오늘일 수도 있고, ‘조금 뒤’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때는 ‘지금’입니다.
<또 “어차피 인간은 죄를 짓는 존재이고, 하느님은 죄인들을 용서하시는 분이다.” 라고 함부로 말해도 안 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은 무조건, 무제한으로 용서하시는 분이다.” 라는 뜻이 숨어 있는 말인데, 옳은 말이 아닙니다.
‘무조건, 무제한’이 아니라 ‘회개’ 라는 조건이 붙습니다.
하느님은 용서와 자비만 베풀어주시는 분이 아니라, 때가 되면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죄인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용서와 자비를 거부하고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2) 비유의 후반부는(6절-11절)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언하신 말씀과 죄인들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6절의 “그는 마지막으로”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은 구원받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는 것입니다.
비유에서, 주인이 아들을 보낸 것은 악한 소작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이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인간들을 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요한 3,17).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선택하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비유에서는 소작인들이 주인의 아들을 알아보고, 자기들이 포도밭을 차지하려고 그 아들을 죽인 것으로 표현되었는데, 실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 자신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려고
예수님을 죽인 것도 아닙니다.
이렇게 비유와 실제 상황에 차이가 있는데,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인 것은, 모르고 그랬더라도, 하느님께 반역한 것이고, 하느님 나라 건설을 크게 방해한 일이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자기들 마음대로 차지하려고 한 것과 다르지 않은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비유와 실제 상황에 차이가 있는 것은
겉으로 보기에만 그런 것이고, 사실은 유대인들의 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비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 9절의 “그는 돌아와 그 소작인들을 없애 버리고 포도밭을 다른 이들에게 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이 비유의 핵심 주제이고 가르침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신 것은 맞지만, 그들이 선택된 민족답게 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은총을 잃게 될 것이고, ‘다른 이들’, 즉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에게 그 은총이 넘어가게 된다는 것이 이 말씀의 뜻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교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또는 예수님의 교회답게
살지 않으면, 우리도 받은 은총을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이제 그대는, ‘가지들이 잘려 나간 것은
내가 접붙여지기 위해서였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아서 잘려 나가고 그대는 믿어서 그렇게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한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두려워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본래의 가지들을 아까워하지 않으셨으면, 아마 그대도 아까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함께 준엄하심도
생각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떨어져 나간 자들에게는 준엄하시지만 그대에게는 인자하십니다.
오직 그분의 인자하심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도 잘릴 것입니다(로마 11,19-22).”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