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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이란 무엇인가? (1)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마음이다.(一切唯心)' 라고 말합니다.
마음밖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고도 합니다.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말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에 담겨 있는만치 불교를 알려면 팔만대장경을 다 봐야 할터인데 누가 그 많은 팔만대장경을 다 보겠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불교는 모르고 마는 것인가?
팔만대장경이 그토록 많지만 사실 알고 보면 마음 '심(心)'자 한 자에 있습니다.
팔만대장경 전체를 똘똘 뭉치면 심(心)자 한 자 위에 서 있어서 이 한 자의 문제만 옳게 해결하면 일체의 불교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일체 만법을 다 통찰할 수 있고 삼세제불(三世諸佛)을 한눈에 다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이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끝납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마음의 눈을 뜨자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뜨면 자기의 본성, 즉 자성(自性)을 보는데 그것을 '견성(見性)'이라고 합니다.
요즘은 어찌된 일인지 불교에 관심이 있고 참선 좀 한다는 사람은 참선 시작한 지 한 사나흘도 안되어 모두 견성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곳에도 견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견성이 무엇인지 몰라서 그렇습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을 보면, '보살지가 다하여 멀리 미세망상을 떠나면 마음의 성품을 볼 수 있으니 이것을 구경각이라 한다.'
이것을 묘각(妙覺)이라고도 합니다.
또 열반경(涅槃經)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무상정각을 이루면 부처님 성품을 볼 수 있고, 부처님의 성품을 보면 무상정각을 이룬다.'
위 없는 바른 깨달음, 즉 성불이 바로 부처님의 성품인 불성을 보는 것이고, 불성을 보는 견성이 바로 바른 깨달음인 성불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기신론에서 말씀하신 '구경각이 견성'이라는 것과 내용이 꼭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열반경에서는 다 자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살의 지위가 십지가 되어도 불성은 아직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
결국 보살의 수행단계가 십지(十地)가 되어도 견성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성불해야만 견성이지 성불하기 전에는 견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유가사지론(喩伽師地論)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경지보살(究竟地菩薩)은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어두운 곳에서는 물건의 바른 모습을 볼 수 없듯이 십지나 등지 위의 구경지보살이 불성을 보는 것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결국 일체만법의 본모습인 자성을 보려면, 어두운 데에서 물건을 보듯 하는 수행단계를 지나서 밝은 햇빛 속으로 쑥 나서야 되는 것입니다.
즉 구경각을 성취해서 성불하는 것이 바로 견성인 것입니다.
그럼 선종(禪宗)에서는 어떻게 말했는가?
선종의 스님들 중에서도 운문종의 종조(宗祖)인 운문(雲門)스님께서 항상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십지보살이 설법은 구름일고 비오듯 하여도 견성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과 같다.
십지보살은 법운지(法雲地)보살이라 하여, 법문을 할 때는 온 천지에 구름이 덮이고 비가 쏟아지듯 그렇게 법문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견성, 즉 자성을 보는 것은 비단으로 눈을 가린 것 같다는 말이니, 비단으로 눈을 가렸는데 어떻게 물체를 바로 볼 수 있겠습니까.
이렇듯이 대승불교의 총론(總論)이라고 할 수 있는 대승기신론에서는 보살지가 다 끝난 구경각을 견성이라 했고,
부처님 최후의 법문인 열반경(涅槃經)에서는 견성이 즉 성불이고 성불이 즉 견성인데 십지보살도 견성 못했다고 하였고,
유식종(唯識宗)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유가사지론에서는 불성을 보는 것은 구경지보살도 어두운 가운데서 물건을 보는 것과 같다 하였고,
종문(宗門)의 조사인 운문스님도 십지보살도 견성 못했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선(禪)과 교(敎)를 통해서 어느 점에서 보든지간에 견성이 바로 성불이며, 그것은 보살수행의 십지와 등각을 넘어서 구경각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십지는 고사하고 삼현(三賢)도 아닌 단계, 비유하자면 층층대의 맨꼭대기가 견성인데 그 첫째 계단에도 올라가지 못하고서 견성했다고, 도통(道通)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견성해서 다시 성불한다고 하니 대체 그 견성은 어떤 것인지 이것이 요새 불교 믿는 사람의 큰 병통(病痛)입니다.
그렇다면 십지보살이니, 구경각이니 하는 그 깨달음의 경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무엇을 표준해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데 대해서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종문(宗門)에 분명한 표준이 있습니다.
화엄경 십지품(十地品)에 보면 '보살지가 7지(地)가 되면 꿈속에서도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여여하다.'
참선 공부를 하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고 있을 때에도 아무 장애를 받지 않고, 공부가 한결같으면 7지보살이라고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7지의 보살이 설사 꿈에는 공부가 일여(一如)하더라 해도 깊은 잠에 들면 캄캄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잠이 깊이 들어도 일여한 경계가 분명히 있습니다.
밖에서 볼 때는 잠을 자는 것 같지만 실지는 잠을 자지 않는다.
아무리 깊은 잠에 빠져 있어도 정신 상태는 항상 밝아 있어 조금도 변함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밝아 있는 정신 상태가 올 것 같으면 8지 보살 이상, 즉 자재위(自在位)라 합니다.
그런데 자재위에는 두 종류가 있어서 깊은 잠 즉, 숙면에서 일여하여도 아라야식의 미세한 망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 8지 이상의 자재 보살이고,
그 미세망상까지 완전히 다 끊어져 버리면 그 때에는 진여(眞如)가 드러나고 그것이 견성이고 부처님입니다.
그 때는 여래위(如來位)라 합니다.
불교에서 수행하여 공부하는 단계를 보면, 첫째 동정일여(動靜一如) 즉 일상 생활에서 가고 오고 할 때나, 가만히 있을 때나, 말을 하거나 안하거나, 변함없이 공부가 되어야 합니다.
여여불변(如如不變)하여야 합니다.
동정일여가 되어도 잠이 들어 꿈을 꾸면 공부는 없어지고 꿈속에서 딴짓하며 놀고 있는데, 꿈에서도 일여한 것을 몽중일여(夢中一如)라 합니다.
몽중일여가 되어도 앞에서 말했듯이 잠이 깊이 들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잠이 푹 들었을 때에도 여여한 것을 숙면일여라 합니다.
숙면일여가 되어도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욱 나아가야 합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된다 말입니다.
그리하여 깨쳐야만 그것이 실제 견성입니다.
그런데 참선 공부하는 사람들을 보면 숙면일여는 고사하고, 몽중일여도 고사하고 더구나 동정일여도 안되는 것을 가지고 견성했다, 깨쳤다고 인정해 달라고 나한테 온 사람만도 수 백 명은 보았습니다.
이것도 병입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무엇인가가 정신을 확 덮어버립니다.
그 때에는 자기가 깨친 것 같고 자기가 부처님보다 나은 것 같고, 조사스님보다 나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그런 병이 있습니다.
이 병에 들게 되면 누구 말도 귀에 안들어 옵니다.
그래도 여러 가지로 설명해 주면 어떤 사람은 잘못된 줄 알고 다시 공부하고, 또 어떤 사람은 이 병을 한동안 앓는 경우도 있습니다.
#퇴옹성철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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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의 일대기
https://youtu.be/rxMAZ2ig7HI

첫댓글 감사합니다"
함께하겠습니다..
나모 땃서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붇닷서! 존귀하신분, 공양받아 마땅하신분, 바르게 깨달으신 그분께 귀의합니다.
공부에 도움 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