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호지(水湖誌) - 35
제5장 채태사의 생일 예물
제18편 우연한 운명 18-1
그때 제주부는 태수가 바뀌었다.새로 부임한 종(宗)은 구관 태수로부터 양산박
도적떼들의 힘이 커져서 그동안 많은 관군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얼굴이 흙빛이
되어버렸다.이 손바닥만 한 고을에 강한 장군과 군사가 없으니 무슨 수로 그 많은
도적들을 제압할 것인가.
부윤은 군관에게 군사를 새로 뽑고 말을 사고 꼴을 모으고 군량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부윤은 한편으로는 주변 마을에 공문을 내려 방비를 엄중히 하도록 일렀다.
그 공문이 운성현에 도착하자 송강은 속으로 생각했다.
‘조개가 생일 예물을 약탈하고 양산박으로 들어가 많은 관군들을 죽였으니 이제 잡히면
큰 화를 당할 것인데 이 노릇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송강이 불안한 마음으로 귀가하는데 누군가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평소에 잘 아는 중매쟁이 왕파가 웬 노파 하나를 데리고 따라왔다.
“나리,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이 할머니가 사정이 딱하게 됐습니다.”
왕파가 웬 노파를 가리켰다.노파는 본래 동경 사람으로 산동에 친척이 있어서
영감과 외동딸 파석이를 데리고 왔는데, 친척은 오래 전에 어디론지 이사 가고 없었다.
세 식구는 운성현에서 딸 파석이가 창을 불러 근근이 끼니를 때우며 살았는데,
영감이 병들어 죽은 것이 바로 어제였다.만리타향에서 모녀는 당장 장례를 치를
돈도 없어서 평소에 왕래가 있던 왕파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다.
그러나 왕파도 도와줄 형편이 못 되었다.송강은 딱한 사정을 듣고 은자 열 냥을 주어
장례를 치르게 했다.그러나 살기는 여전히 막막했다.
노파는 송강이 아직도 독신이라는 말을 듣고 왕파를 찾아갔다.
“송압사 나리가 아직 미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객지에서 얼마나 외로우시겠소?
내 딸 파석이가 나이 열여덟이고, 인물이 훤하니 나리의 첩으로 들이시면 어떨지요?
우리 신세에 나리 은혜를 갚을 길이 없으니 왕파께서 다리를 놓아주시오.”
왕파는 그날부터 문턱이 닳도록 송강을 찾아갔다.
송강은 결국 왕파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서항에 집 한 채를 얻어 살림을 차려 주었다.
그러나 송강은 본래 무예를 사랑했지만 여색에는 초연한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밤마다 서항에 찾아왔으나 보름이 지나자 차차 발길이 멀어졌다.
젊고 아름다운 염파석은 늘 외로웠다.어느 날 송강은 젊고 미남인 데다가 창이 뛰어난
장문원을 집에 데려왔다.본래 창기 출신이었던 염파석은 주색잡기에 능한 장문원과
눈이 맞았다.그들은 만나자마자 정을 통하고 말았다.
그 소문은 마침내 사람들의 입에 퍼져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그러자 의리가 깨끗한 송강은 염파석의 집에서 발을 끊어버렸다.
그러나 염파석의 어머니는 철없는 딸이 장문원과 눈이 맞아 송강의 버림을
받게 되는 것이 두려워 속으로 애가 타기 시작했다.
어느 날 저녁 송강이 관청에서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길에 한 남자가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왔다.그 남자는 삿갓을 쓰고 송강 앞에 서서 그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송강도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그는 머리에 백범양 전립을 썼고, 비단 두루마기에
짚신을 신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등에는 봇짐을 졌는데, 어디선가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조용히 여쭐 말씀이 있으니 어디로 좀 가실까요?”두 사람은 조용한 술집을 찾았다.
방에 자리를 잡고 앉자, 그 사나이는 등에서 봇짐을 내려놓고 넙죽 엎드려 절을 했다.
송강은 화망히 답례하고 물었다.“누구신데 이러십니까?”
“절 몰라보시겠습니까? 지난 번 조보정 댁에서 위태로운 목숨을 구하고 달아난 유당입니다.”
“아니, 유당 형이? 대체 웬일이시오? 군관들의 눈에 띄면 어쩌려고 여기 나타났습니까?”
- 36회에 계속 -
★ 수호지(水湖誌) - 36
제5장 채태사의 생일 예물
제18편 우연한 운명 18-2
송강은 유당으로부터 자세한 얘기를 듣고, 조개의 편지를 읽은 후에야 그들의
형편을 이해하게 되었다.“오래 머물러 계시면 안 됩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오늘 밤은 달이 밝을 것입니다.”“네, 곧 돌아가겠습니다. 이것을 받아주십시오.”
유당은 보따리에서 황금 1백 냥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그러나 송강은 그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유당이 여러 번 청했으나 송강은 끝내 받지 않고 유당에게 답장을 써주었다.
유당은 할 수 없이 가져온 황금 1백 냥과 송강의 답서를 봇짐에 넣고, 술집을 나서서
양산박을 향해 떠났다.유당을 보낸 후 송강이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에서 염파석의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나리, 내 딸년이 워낙 배운 게 없어 잘못이 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른께서 이 늙은이를 봐서 용서해 주시오.
어서 같이 집으로 가십시다. 딸년도 나리가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어요.”
송강은 노파의 청을 뿌리칠 수가 없어서 오랜만에 염파석의 집을 찾아갔으나 파석은
송강을 본 체도 하지 않고 평상에 누워 있었다.
“파석아, 술상 봐올 동안 모시고 이야기나 좀 하렴.”노파가 바쁘게 부엌에서
상을 차려 왔지만 그때까지도 두 사람은 등을 돌리고 서로 외면한 채 한 마디도 없었다.
“파석아, 어서 나리께 약주를 권해라.”파석은 역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리, 오늘밤에는 재미 많이 보시고 아침에는 늦게 일어나슈.”
노파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송강은 그래도 혹시 계집 쪽에서 무슨 후회하는
눈치가 있을까 하여 동정을 살폈으나 여자는 여전히 목석처럼 굴었다.
밤이 이경을 넘어서자 파석은 한숨을 푸욱 내쉬고는 그대로 침대 위로 올라가
옷을 입은 채 벽을 향해 돌아눕고 말았다.송강은 계집의 행동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노파를 따라 온 것이 후회가 되었으나 밤이 너무 늦어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송강은 잠을 안 자고 벽에 기대고 있다가 먼동이 틀 무렵에 밖으로 나왔다.
노파가 알아채고,“나리, 벌써 가슈? 날이 밝거든 가시지 않고서...”
하고 만류했지만 그 말에 송강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곧 밖으로 나와 바로 집으로 향했다.
겨우 먼동이 터오는 무렵 현관문을 나서서 한참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등불이
하나 깜박거렸다.매일 새벽에 탕약을 팔러 나오는 왕공(王公)이라는 늙은이였다.
“압사 나리, 이렇게 일찍 웬일이십니까?”“간밤에 술에 만취가 되어 쓰러져 잤소.”
“약주가 과하셨군요. 성주이진탕(醒酒二陳湯)이라도 한 잔 잡수시지요.”
“그래, 한 잔 마십시다.”송강은 술 깨는데 효과가 좋은 이진탕을 받아마셨다.
그가 돈을 내려고 옷 속에 손을 넣는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돈주머니가 보이지 않았다.간밤에 파석의 방 침대 난간에 걸어 놓은 채
새벽에 급히 나오느라고 잊은 것 같았다.그 난간에 주머니가 달린 예복을 놓고 온 것이다.
그러나 예복은 둘째 치고 돈주머니가 문제였다.
돈주머니 속에 든 조개의 편지가 누출되면 더 큰 문제였다.
송강이 생각해 보니 파석이 때때로 책을 뒤적거리곤 하는 것을 봐서 계집이
글을 읽을 줄 아는 것 같았다.송강은 몹시 당황하여 몸을 일으켰다.
“이런, 내 정신 좀 보게. 내가 돈을 안 가지고 나왔소. 지금 곧 집에 가서 돈을 가져오겠소.”
송강은 급히 파석의 집을 향해 달려갔다.한편 파석은 송강이 방에서 나간 후 침상 난간 위에
걸린 자주색 의관을 치우다가 옷 속에서 편지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 37회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