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進士 追封 銀靑光祿大夫 樞密院副使 礪山宋氏 始祖 諱 惟翊 神道碑 이 곳 익산시 여산땅 천호산의 명당에 고려진사로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추봉(追封)되신 여산송씨시조 유익(惟翊)공께서 영면에 드신 묘소가 저 높은곳에 자리하고 있다. 공께서는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내려와 덕과 선을 쌓고 후손의 번창과 영달이 이어지기를 염원하며 살아오신 땅이 이곳이다. 여산은 조선조 제3대 태종대왕의 왕비이신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 외조부이신 7세 선(璿)의 시조님 묘소가 있는 고장이기에 제4대 세종대왕께서 현을 군으로 승격시키고, 제19대 숙종24년에는 군을 부로 승격시키면서 왕께서는 “우리 왕가의 후손들은 이 묘소의 외손이 아닌 자 없다” 하시며 묘소주위 7리를 하사하셨으니 숙종대왕의 정념(情念)이 이와 같았음은 공께서 지극한 염원으로 닦으신 공이 지대하였음이니 그 은총의 경사가 이보다 더 성대할 수 있겠는가 공의 뒤를이어 아들 숙문(淑文)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라 은청광록대부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호부상서(戶部尙書)에 추봉되고, 손자 희식(希植)은 삼재(三宰)에 올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판호부사(判戶部事)에 추봉 되었으며 증손 송례(松禮)는 고려24대 원종조에 100여년간 지속되던 무신집권시대를 종식시키고 왕정을 회복시켜 벼슬이 광정대부(匡靖大夫)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문하시중(門下侍中)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상장군에 올라 추성익대보리동덕좌명공신(推誠翼戴輔理同德佐命功臣)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책봉되고 시호(諡號)는 정렬(貞烈)이다. 현손으로 장자 염(琰)은 정헌대부(正憲大夫) 군부판서(軍簿判書)로 안사공신(安社功臣) 동평장사(同平章事) 낭산(朗山)부원군에 책봉되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며 차자 분(玢)은 광정대부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사사 중찬(都僉議使司 中贊) 상호군(上護軍)으로 추성보리찬화안사공신(推誠輔理贊化安社功臣) 낙랑(樂浪)부원군에 책봉되고 시호는 양의(良毅)이다. 6세에 이르러 더욱 번창하였으니 문숙공의 아드님으로 운(惲)은 광정대부 개성원윤(開城元尹)으로 원윤공파 파조(派祖)요, 방영(邦英)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밀직공파 파조요, 원미(元美)는 소윤(少尹)으로 도첨의 좌찬성(左贊成) 우문관 집현대제학(集賢大提學)을 역임하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소윤공파 파조요, 양의공의 아드님으로 린(璘)은 정헌대부(正憲大夫) 지신사(知申事) 국자감대사성(國子監大司成)으로 지신공파 파조요, 서(瑞)는 광정대부 벽상삼한삼중대광 도첨의 우정승(右政丞) 판전리사사 상호군 여량부원군으로 시호는 정가(正嘉)이며 정가공파 파조이다. 이와같이 6세 종형제 다섯분을 파조로하여 5파로 나누어져 그 후손들이 전국각지에 고루 살며 고매한 학문과 비적기공(丕績奇功)에 절의충신이 끊이지 않았으니 그 중에서도 파조이상 11현과 후대에서 시호를 받으신 14현을 시조공 묘소아래 영호재 경내의 시양사에 소목의 예로 모시고 후손들은 그 영달의 길을 잊지않을 것임을 다짐하며 매년 4월 2일 제향을 올리고 있다. 천년의 세월을 이어오면서 문중을 더욱 빛낸 조상들이 계시니 고려조에서 4세 정렬공 송례, 5세 양의공 분, 6세 정가공 서. 세분은 3대를 연이어 정승에 올라 여산송문을 국가적 대성(大姓)으로 세상에 널리 알렸으며 7세 순(珣)은 고려말 부령(部令)을 지냈으며 조선조에서 좌익공신 여산군에 책봉하고 문의(文毅)의 시호를 내렸다. 조선조에 와서는 제3대 태종조에 9세 거신(居信)은 우군도총제부사(右軍都摠制府事)를 지내고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여산(礪山)부원군에 책봉되어 시호는 충정(忠靖)이며 제6대 단종대왕의 왕비이신 정순왕후(定順王后)는 11세 증(贈) 영돈녕(領敦寧) 여량부원군 정민공(貞愍公) 현수(玹壽)의 따님으로 15세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나 단종이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영월로 유배되어 끝내 승하하신후 18세에 대왕과 생이별하시고 숭인동 동망봉아래 정업원에서 64년을 스스로의 노력으로 사시다가 82세에 승하하셨다. 단종조에는 대왕의 손위(遜位)에 저항하여 충절을 다한 절신이 끊이지 않았으니 8세 동주공(東洲公) 극명(克明), 9세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승정원 도승지(都承旨) 윤(倫), 10세 증 호조참판 찬(瓚)은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며 조정의 부름에도 나아가지 않고 절의를 지켰으며, 11세 간(侃)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형조참판에 올라 단종3년(1455) 도진무사(都鎭撫使)로 호남지방 순무중 대왕의 비보를 듣고 동학사에서 3년복상을 치른후 흥양(興陽:고흥)땅에 은거하였으며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등과 함께 7현신으로 칭송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좌참찬 겸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 도총관(都摠管)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강(忠剛)으로 임실땅에 은거한 재종제 경원(慶元)과 함께 계룡산 숙모전(肅慕殿)에 배향되었다. 제9대 성종조에서 10세 경(瓊)은 지익산군사(知益山郡事)를 지내고 호조판서에 추증되어 시호는 충무(忠武)요, 문림(文琳)은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올라 좌리공신(佐理功臣) 여성군(礪城君)에 책봉되고 시호는 공무(恭武)이며, 11세 천희(千喜)는 보국숭록대부 이조판서에 올라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제11대 중종조에 12세 문조(文祖)는 만포방어사(滿浦防禦使)에 제수되어 내침한 여진과의 싸움에서 순절,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세림(世琳)은 이조좌랑에 올라 정국원종(靖國原從)공신에 녹훈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학문과 후학양성에 전념하였으며 그 아우 세형(世珩)은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올랐다, 질(軼)은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여원(礪原)부원군에 책봉되고 시호는 숙정(肅靖)이다. 제13대 명종, 제14대 선조조는 국정의 문란과 두차례에 걸친 왜란으로 존망에 처한 나라를 위해 수많은 충신열사들이 배출되었다. 13세 량(亮)은 상주지역의 명망높은 유학자로 창의군을 조직하여 왜란에 대처하였고 유림의 천거로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올랐으나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정진과 향풍쇄신을 위해 노력 하였으며 대구망우당공원 임란호국영남충의단에 배향되었다. 14세 인(寅)은 중종대왕의 제3녀 정순옹주(貞順翁主)의 부마로 문장과 글씨로 명성이 높았으며 봉헌대부(奉憲大夫) 여성위(礪城尉)에 책봉되고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익필(翼弼)은 16세기 조선국의 대표적 유학자로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계(牛溪) 성혼(成渾)등 당대의 석학들과 교류하며 많은 글을 남겼으며 자헌대부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5세 순례(純禮)는 여진족 이탕개(尼湯介)의 재침을 물리치고 선조대왕으로부터 정충록(精忠錄)을 하사받았으며, 제주목사겸 병마수군절도사 전라수군방어사를 역임하고 자헌대부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양(忠襄)이다. 언신(言愼)은 4도어사와 5도관찰사를 역임하고 5조의 판서를 두루 거치며 국난극복을 위해 힘썼으며 한편으로는 족보간행에 전념하던 중 1606년 삼,사종형제들의 도움을 받으며 여산송씨의 첫 족보인 병오보(丙午譜)를 간행하였으며 선무공신(宣武功臣)에 녹훈되고 시호는 영양(榮襄)이다. 16세 상현(象賢)은 동래부사에 제수되어 임진란을 당하자 적과 맞서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는 명언을 남기고 의연히 순절하여 충절의 도를 다하였으며 숙종조에 좌찬성겸 대제학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부산 송공단과 충렬사에 배향되었다. 17세 대립(大立)은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지냈으며 정유재란을 당하여 호남창의별장으로 망제포전투에서 왜적에 맞서 싸우다 첨산에서 순절하였으며 선무공신에 녹훈되고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희립(希立)은 대립의 아우로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장군의 막하에서 한산, 명량, 노량대첩등 수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전라좌도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에 오르고 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제21대 영조조에서 19세 인명(寅明)은 좌의정에 올라 당파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탕평책을 시행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이렇듯 시조이후 천년의 역사와 함께 명현들이 끊임없이 배출되어 나라에 공헌하고 가문에는 영광을 더하여 여산송문을 명문거족의 대성으로 세상에 알려 크게 빛냈으며 1948년 대한민국정부 수립 후에도 26세 요찬(堯讚)은 4.19의거 당시 육군참모총장으로 국가적 혼란을 엄정하게 관리하였으며, 그 후 내각수반에 올라 다시한번 송문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여기 이 묘도는 공의 영령이 오르내리며 후손들을 살피시고 자손들은 그 보살핌 속에서 해마다 동짓날에 제향을 올리고 대를 이어 찾아와 참배하는 정성을 모으고 있으니 그 음덕은 영원할 것이다. 묘소와 영호재 아래에는 묘표와 묘비가 세워져 있으나 오랜 세월이 경과되어 글자의 마모가 심하고 해독이 어려워 여산송씨대종회송길용회장께서 한글체의 신도비를 세우고자 종의를 모으고 나에게 글을 청하므로 사양치 못하고 여러 문헌을 고증하여 이와 같이 삼가 짓는다. 신성스런 이곳 성지를 찾는 후손들은 천추만대에 빛나는 조상님들의 음덕을 가슴깊이 새기면서 영원히 번창토록 더욱 정진해야할 것이다. 서기 2020(庚子)년 월 일
한국소설가협회 최고위원 목포대학교 명예교수 문학박사 杞溪 兪 金 浩 지음
여산송씨대종회 시조묘도 신도비건립 추진위원회 세움 위원장:송길용 (묘소정화 및 신도비건립비일체 출연) 위 원:송재양, 송기성, 송기홍, 송원학, 송계주 송영국, 송필완, 송광섭, 송문석, 송운엽 송재영, 송진섭, 송종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