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전자공업 5개년 계획’을 보도한 1968년 8월 2일자 조선일보.
"요 쪼매난 것이 손가방 하나면 몇 만 달러가 된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면직물밖에 수출하지 못하고 있으니…. 김 박사, 우리나라도 전자공업을 육성하고 싶은데 도와 주시오!"
1967년 9월 대통령
박정희(朴正熙)는
미국 컬럼비아대 전자공학과 교수 김완희(金玩熙)를
청와대로 불러 트랜지스터를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김완희는 세계를 뛰어 다니며 복명(復命)에 몰두했고, 마침내 1968년 8월 1일 '전자공업 진흥을 위한 조사 보고서'를 대통령에게 내놓았다. "국내에서 진득하니 독자 기술을 개발하면 늦고, 어떻게든 선진 기술을 도입해 수출 제품을 개발해야 합니다. 거국적인 지원으로 단기간에 전자공업을 육성해야 합니다." 다음 날 아침 조선일보는 '전자공업 종합 5개년 계획 대통령 재가(裁可)'란 내용으로 이날의 보고 내용을 보도했다.
이후 한국의 전자산업은 급물살을 탔다. 1966년 처음으로 국산 TV를 만들었던 금성사(현
LG전자)가 선두주자로 나섰고,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타격을 입었던 삼성도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쟁체제에 들어갔다. 1965년 180만달러였던 전자산업 수출액은 1976년 10억달러를 넘어섰으며, TV와 라디오, 집적회로, 콘덴서, 녹음기, 브라운관 등이 주요 품목으로 떠올랐다. 1974년에는 한국반도체주식회사가 설립돼 미래의 '국가적 텃밭'이 마련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