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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어떻게 고난을 극복할 것인가?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당신의 고난이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지 않도록,하나님이 그 고난을 더 깊은 어둠과 고통과 공포로 역사하지 않도록 당신의 모든 고난이 옳은 방향으로 진행되게끔 전력을 다하라”(존 오웬).
”나는 신음한다.그러나 불평하지 않는다“(리챠드 백스터).
구약신학자 월터 카이저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고통의 골짜기에서 체험한 더 깊은 진리와 확신을 원만하고 평탄한 삶과 바꾸지 않겠다“.
고통가운데 하나님을 만난 인생은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고난속에서 하나님을 찾게 되고 결국은 하나님을 찬양하게 된다.고난은 때로 우리를 강인한 인격의 소유자로 만들며,더욱 깊이 있고 이해와 동정심이 깊은 사람으로 만들어 준다.고난을 많이 겪고 그것을 극복한 사람을 보면 그 속에서 참으로 아름다운 풍겨나는 것을 볼 수 있다.인생의 힘든 문제를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고통에 대한 해답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고난 받는 법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최상의 평강을 누릴 것이다.우리는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우리의 삶에서 고통과 역경으로 단련되는 제련의 능력이 이해될수록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더 많이 닮아 갈 수 있다.
인류 역사는 눈물과 고난의 역사이다.고난에는 뜻이 있다.그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다. 십자가의 길이 생명의 길이다. 고난은 우리의 죄를 씻고, 인생을 씻어 깨끗하게 한다.죄로 인하여 상하고 더러워진 영혼은 고난의 담즙으로 회복 될 수 있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들고 위대하게 만든다. 이마 위에 주름살이 깊어갈 때 마음속에 깊은 지혜가 생기고,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에 영혼의 향기가 솟아 나온다.생명의 깊은 뜻은 피로 쓴 글자와 눈물로 그린 그림으로 나타낼 수 있다.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들며 하나님께로 이끈다. 궁핍함으로 주려 보고서야 아버지를 찾는 탕자 처럼 인간은 고난을 통해서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찾는다.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는 것이 죄이다.우리는 지은 죄로 인하여 고난을 받아야 한다.굳센의지와 잃었던 용기를 다시 찾기 위하여,그리고 고결한 영혼을 다듬어내기 위하여 우리에게는 불같은 고난이 필요하다. 고난을 지는 것은 죽을 듯이 괴롭지만 그 속에는 상상도 못하는 단 맛이 있다.이것을 지는 것이 머리를 들 수 없는 불명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세상이 모르는 영광이 있다.1)
하나님은 우리에게 슬픈 날과 기쁜 날을 주시고,사나운 기후와 화창한 날씨도 주신다.청교도인 존 프레스톤은 이렇게 말했다.“궂은 날을 예상하고 그리스도를 좇아가기로 했다면,아침에는 맑으나 저녁에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하지만 폭풍우를 예상하지 않고 어떻게 바다를 항해 하겠는가?”
요셉의 고난
요셉의 고난을 생각해 보자.좌절된 꿈을 맛보지만 그는 꿈 때문에 고통당하고 꿈 때문에 영광을 누리게 된다.요셉은 억울한 고난을 받았다. 끝이 없어 보이는 고통이었다.온갖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자신의 책임을 성실히 이행했다.이런 요셉의 삶을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고난을 통해서 특별한 때를 준비하고 계셨다. 하나님은 자녀의 고난을 돌아보시고 알고 계신다. 고난으로 그치게 하지 않으시고 그 고난을 통해서 뭔가를 준비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때를 준비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초조해하고 근심하며 계획을 세웠다가 실망하며 고민하기도 한다. 때로는 당황하면서 자포자기 하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순종하지 않으며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분임을 참으로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요셉은 왕의 꿈을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해몽하고 애굽 총리가 된다. 자신을 고통을 준 그의 형들의 모습을 보고 방에 들어가 통곡한다.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그렇게 어려움들을 주신 것이라고 인정한다.그의 형들을 관대하게 용서하면서 그의 좌절된 꿈은 치유되었다.우리가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은 믿음이요(요5:4),사랑이요(롬8:37-39),말씀이요(시119:92),비젼이다.우리는 고통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노력해 왔지만,고통을 피할 방법을 잘 모른다.고통에서 나를 풀어줄 묘약도 없는 것 같다.
바울의 고난
바울은 많은 고난을 받았다2).많은 역경과 핍박을 겪었다.바울은 하늘나라,주님의 영광을 눈으로 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씀을 들었다.교만의 문제에 직면하여 육체적인 질병의 고통을 받는다.육체적인 고통을 준 육체의 가시,사단의 사자였다.그것은 아주 큰 계시를 받은 바울에게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는 장치였다.바울은 이 질병에서 떠나게 해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했다.하나님의 응답이 왔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후12:9).바울이 기도했지만 응답받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이해이다.주님은 바울의 기도에 하나님이 당신의 은혜로 직접 응답하셨다.바울은 그리스도만으로 족했고,주님이 그의 가장 깊은 필요를 채워 주셨다.바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이 약한데서 온전해졌다.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태도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준다.우리는 치유를 원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 당신을 원하도록 하신다.그래서 우리의 교만의 모든 끈을 끊어 버리신다.우리가 주님께 복종하길 원하시며 그때까지 기다리신다.바울은 하나님을 의뢰하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고난들을 온몸으로 그냥 겪어 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1:21).
그가 감옥에서 옥중서신을 써서 복음의 진보를 이루었다.불의와 음모와 모독과 투옥이 우연히 된 것 같았으나 바울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사용된 것이다.바울은 고난중에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했다.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의 평안은 그만큼 더 깊어질 수 있었다.그래서 고난을 받으면 받을수록 위로가 더욱 넘친다고 고백했다(고후1:3-6).
하나님은 자신의 택한 백성의 고난의 현장에 함께 하신다. 그들이 당하는 고통과 눈물과 아픔과 탄식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과 견딜 수 없는 인생의 고통들 앞에서 그 가운데 함께 아파하고 탄식하는 그분의 사랑을 우리도 경험하기를 바란다.
아픔이 클수록 아름다운 삶 산 사람들
천로역정을 쓴 존 번연은 17세기 중반 영국 청교도가운데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부인의 영향으로 회심하고 역사상 길이 남는 설교자가 되었다.당시에 설교를 법으로 금지했는데 그는 감옥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가 베드포드감옥에서 12년동안 복역했다.개신교를 전하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했더라면 풀려날 수도 있었다.사랑하는 아내와 앞을 못보는 열 살 된 딸이 아빠를 면회왔을 때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면회왔던 아내와 아이를 돌려 보내려 하니 내 살이 떨어져나가는 느낌이다.불쌍한 가족과 눈먼 딸아이가 당할 고통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진다”.3).
이런 고통의 과정을 없었다면 그가 하나님 말씀 속에 숨어 있는 보화를 어찌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고난당할 때 실망속에서 아픔을 경험할 때 주님 말씀의 깊은 은혜를 더 경험하게 하신다.시험을 참는자는 복이 있다. 옳다 임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한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하신다.
실낙원을 쓴 죤 밀턴4)은 “장님이 된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요,장님된 것을 참지 못하는 것이 불쌍하다.하나님은 인간의 일이나 재능을 요구하시지 않는다.자신의 멍에를 묵묵히 지고 가는 자가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그는 신앙과 투지와 인내,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에 대한 불굴의 신앙으로써 고통스런 자신의 환경을 이겨냈다.하나님이 지금도 우리를 쓰시기 원하신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두 팔이 없고 발이 하나인 채로 태어난 스웨덴 복음 가수 레나 마리아는 이렇게 말했다.“당연히 나도 하나님께 장애를 바꿔달라고 기도했지요.하지만 현재 그대로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면 기적이라 생각해요.나에게는 희망이 있어요.나에게 두 팔이 있었고 한 쪽 다리가 있었다면 좀 더 쉽고 편했을 거예요.그러나 나는 찬양할 수 있고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그녀는 자신의 모습에서 하나님의 신묘 막측한 창조의 뜻을 깨닫고 감사한다.그녀는 장애인 올림픽경기에 수영에서 4관왕을 했고 세계적인 복음 가수로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사람들이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긍정적으로 살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나는 밝은 성격에 호기심이 많고 늘 가능성을 생각했이요.그 다음은 장애를 장애로 생각하지 않는 부모의 여유로운 태도때문이에요.부모님은 나를 늘 평범하게 대해 주셨거든요.하나님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지 나를 가치있다고 하시지요.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지,지체 장애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잖아요?“5)
“고난가운데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볼 수 있을 것이다”(죠니 에릭슨).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믿음으로 고통을 딛고 일어선 신앙인들은 아주 건강한 자아상과 유머 감각을 지니고 있다.고통과 고뇌를 이기고 승리한 사람들이다.고통에 굴하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신다.극심한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게 된다.고통이 내 심령깊이 숨겨진 죄를 들춰내어 내자신이 죄인임을 더 깊이 깨닫게 한다.아브라함에게 고통스러운 것은 이삭을 통하여 그의 믿음을 하나님이 시험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 중심의 희망과 자신이 만든 인생의 기초를 무너지게 하심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게 만드신다.요나는 불순종 때문에 고난을 당했다.그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도망가는 악함을 보였다.
불순종한 요나에게 주어진 몫은 어둠과 절망과 임박한 죽음이었다.순종은 빠를수록 좋고,불순종은 언제나 많은 손실을 가져온다.음부와 같은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회개하고 믿음으로 주님께 부르짖는다.회개하자 하나님이 그를 건져주시고 사명을 회복시켜 주신다.요나는 하나님의 고난의 훈련을 참으로 실감나게 받았다.합력하여 선을 이룬 것이다.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가 감당해야 할 핍박이 바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고난의 전투에서 훈련받게 하시기 전에는 그의 백성에게 승리를 안겨주시지 않는다.성도가 십자가를 참고 견디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그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이다.그리스도안에서 약속된 복은 기쁘고 평안한 생활,보장된 안전에 있지 않고 하늘나라에 있는 것이다.예수의 제자라면 가시밭길을 걸으며,끊임없는 고통 중에 십자가를 안고 가야 한다.하나님은 우리를 회개하게 하시고,겸손을 가르치시고, 죄의 유혹을 조심하고 자신을 지키도록 주의를 기울이게 하신다.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이 은혜의 통치아래 있는 복을 누리도록 하셨다(롬6:14).우리가 겪는 많은 고통들은 하나님의 은총의 근원에서 흘러나온다.고통을 당할 때 우리의 눈을 들어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우리는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하여 고통 당한다.
고난 당한 자를 쉽게 동정하지 마라.
다친 달팽이를 보거든 금방 도우려 들지 말아라.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당신의 도움이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것이다.번데기가 나방이 되어 나올 때 쉽게 빠져나오라고 고치를 가위로 잘라주지 마라.제대로 날지 못한 장애 나비가 되고 만다.그에겐 작은 구멍을 빠져나오는 긴 시간의 몸부림과 진통이 필요하다.주위에 아파하며 방황하는 젊은이를 보거든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믿는 자들에게 역경은 신앙의 훈련이요 인내의 증거이다.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신다(시34:19).우리들에게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은 일들이, 시기나 나태함, 상실과 어두움 가운데 불순종, 절망이나 편협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님의 의지의 중심에서 이 모든 일이 주님의 사랑스런 손길로부터 오는 것이다.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자 하신다. 고난과 역경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이다. 질병 때문에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 그 질병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하나님의 은혜가 흡족함을 발견하게 된다는 영광스런 진리를 깨닫도록 해야 한다.영혼이 고통스러울 때 주님의 신실함을 생각해야 한다.생각하지 않는 인간으로 변해가는 것은 현대인의 비극이다.이 시대의 특징은 피상성이다.
“형통한 날에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 생각하라”(전7:14).
죄많은 이 세상에 살면서 신실한 성도는 정말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오늘날 개척교회 목회자들은 신음하고 지쳐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생활도 어렵지만 앞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깊이 고민하고 생각하는 자만이 위대한 존재가 될 수 있다.인간의 존엄성은 생각하는 데 있다.매사에 생각하는 사람이 되지 않으면 자기를 향상시킬 수 없다.사물을 관찰하거나 독서를 할 때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 보는 습성을 키워 가야 한다. 독서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경건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깊이 생각하는 습성을 길러야 한다.어느 시대에나 최후의 승리자는 항상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우리의 고통도 우리 삶의 일부분임을 알아야 한다. 고통을 견디는 것이 고통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향해 가는 디딤돌이다. 실패는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의 밭에 씨를 뿌리는 일이다.성경에 보면 대개 하나님은 꼭 마지막 대목에 가서야 나타나신다.
사람들은 자신이 해 볼 것을 다 해보고 막다른 골목에 가서야 하나님을 만난다. 사람들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지 않고,근본적인 문제에 맞닥뜨리지 않는 한 언제나 존재하는 그 자체로 만족하고 건강하고 행복한 현실의 것으로 만족한다. 이때는 아직 혼자 살만 하니까 필요성도 못 느끼고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마지막 한계에까지 내몰리고 나면 하나님을 찾기 시작하고 하나님은 거기에서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다.시골 외양간에 불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소는 소죽통에 밥이 있으면 여전히 고개를 쳐 박고 여물을 먹으며 아랑곳하지 않는다.그때에 주인이 소죽통을 엎어 버리면 그제서야 비로소 소가 외양간을 튀쳐 나온다.망하고 나서 박수치고 주님께 손들고 나오지 말고 미리 알아서 주님께 엎드리는 것이 상책이다.잘못된 길에서 깨닫고 돌아오면 출발점은 항상 제자리일 뿐이다.그동안의 많은 시간과 정력을 낭비한 것이 되고 만다.하나님은 우리의 슬픔을 아신다.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약한 가운데 힘을 주시며 어둠 속에 빛을 주시고 밤에는 노래를, 아침에는 기쁨을 주시는 것을 아는 성도는 계속 전진할 수 있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신다.당신은 고난을 대처해 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어디로 피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는가? 어려운 일은 송곳같이 뚫고 나가야 한다. 가장 중요한 일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일의 우선순위가 송곳을 만든다.한 가지 일에만 송곳같이 집중하여 문제를 돌파해야 한다.
성도는 고난을 당할 때 인내해야 한다.하나님이 더디 대답하시는데는 분명한 답이 있다.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은 그 고난마저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신다.동요되지 않아야 한다.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구원하신다고 말씀하셨다. 고난이 결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끊을 수 없다.고통은 잠깐이요, 은총은 평생이요,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잠깐이다.우리의 고난은 예수님이 재림 하실 때 최종적으로 끝이 난다.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으며,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이 없다. 하나님이 자기백성을 다루시는 연단방법이요, 우리를 무척 아껴주시는 사랑의 표현인 고난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도록 격려한다. 하나님께서 가난을 통해서, 질병을 통해서, 집안의 우환을 통해서, 힘들고 어려운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낮추심은 지나친 행복 속에 시련을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적 긴장감이 들도록 하여 무절제에 빠지지 않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 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일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는다.하나님은 끊임없이 목적을 가지고 우리들을 위해 역사하신다.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사용되고 통제되어 결국 선을 이루게 된다는 말이다.모든 것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최고의 선을 위해 역사하고 계신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자신을 판 형제들을 향한 요셉의 고백이다.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며 장래에 소망을 주려는 생각이다.그리스도인으로서 모든 것이 우리의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안다면 우리는 좌절할 수 없다.우리는 오히려 소망이 있다.하나님의 무한한 자비와 긍휼이 있기 때문이다.애매하게 고난을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해도 성도에게는 소망이 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과 갈등을 겪거나, 고생과 근심에 처한다 할지라도 오히려 우리에게는 소망이 있다. 긍휼이 풍성하시고 모든 위로의 하나님은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며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며, 주님을 신뢰하며 잠잠히 기다리는 자에게 구원의 반석과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이다.우리는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하지만, 인생을 사는 동안 고통을 피할 수 없다.그렇지만 우리는 고통을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육체의 고통과 여러 가지 문제들과 어려움들을 겪으며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또한 이러한 기다림과 방황은 심한 고통을 가져다준다.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치러야 할 비용을 예상해야 한다. 우리자신을 역경에 적응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십자가 지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것을 지기로 결심해야 한다. 고난이 더욱 심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하나님께서 더한 흑암과 쓰라림과 공포를 뒤엉키게 하시지 않도록 하기 위해 모든 고난가운데서 우리가 더욱 성숙해지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때리실 때에 바로 이것이 성도를 더 크게 만든다. 역경을 견디면 하나님이 아들로 대우해 주신다. 주님은 우리의 결점이 아니라 우리의 능력에 따라 고난을 주셔서 우리가 얼마나 참아낼 수 있는가를 보신다.하나님은 성도들의 인내를 시험하신다.인간의 영혼은 모든 상황이 좋아 보일 때에는 아집을 포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고통이 몰아 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영국의 죤 라일이 목사가 되기 전 아버지가 근무한 은행이 갑자기 파산했다.
“나는 일생동안 가장 큰 변화를 경험했다.그날밤 온가족은 참담했고 집과 수입을 다 잃어버렸다.나는 엄청난 마음의 고통을 경험했다.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통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하신다고 믿지 않는다.하나님은 시련의 때에 고난을 가져다 주셨다.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은 혹심한 고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예수님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웠다.아픔이 없는 고통은 사실상 고통이 아니다.고통을 깊이 체험하면서도 그 고통을 감내하는 태도야말로 성도에게 필요한 것이다.모든 일들이 나의 마음과 육체에 무거운 부담이 되었으며, 내가 그것을 어떻게 견디었는지를 생각하면 나는 자주 놀랍다.나는 신음한다.그러나 불평하지 않는다“.6)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필자가 신학생 때 밤늦게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성대암에 걸려 서울대병원에 입원한 것이다.성대를 제거하는 수술을 앞두고 두려워서 수술을 연기하면서 고민하다 나에게 전화한 것이다.나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 갔다.몇 일동안 복음을 전했고 좋은 책들도 선물했다.그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 들였고 자기 죄를 깊이 회개하였다.몇 시간동안 대수술을 한 후 그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성대 두 개를 제거하면 말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말을 해도 로보트 음성처럼 들려서 잘 알아 듣지 못한다.그는 퇴원하여 집 근처 교회에 몇 달 다니다 따뜻한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끼다 그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그 마을에 투병 소식을 들은 천주교 신부님이 몇 번 그를 찾아와 만난 뒤 그는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또 다시 암은 재발했고 몇 차례 수술을 받았다.내가 병원에 갔을 때 그는 나에게 이렇게말해 주었다.“지난 번 목사님은 병원에 딱 한번 오셔서 해 치우듯 기도해주시고 가셨다.그 뒤론 감감 무소식이다.그런데 신부님은 말못한 나를 붙들고 오랜 시간 전화해 주고 위로해 주셨다.천주교 교우들이 찾아와 사랑으로 포옹해 주며 병원비도 대신 내주었다.그 모습이 너무나 다르더라.너는 그런 식으로 목회하지 마라.교회에 소외되고 아픈 영혼들을 깊이 보듬어 주어라”.충격적인 음성이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소리가 내 귀에 쟁쟁하다.그 뒤로 몇 년간 투병 생활하다가 그는 30대에 주님 품으로 갔다.고통받는 자가 가장 위로 받을 수 있는 때는 먼저 고통을 당해 본 사람이 함께 손 잡고 옆에서 눈물흘리며 기도해 줄 때이다.
고통이 찾아 올 때 지녀야 할 태도
하나님께 솔직하게 기도한다.고통스런 마음을 고백한다.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한다,하나님이 주신대로 받아들인다,하나님께 맡기는 연습이 필요하다.고난은 결코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희망과 기회가 된다.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당하나 그 고난에 결코 함몰되는 자들이 아니다.고난은 당시에는 매우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지나고 보면 그 고난이야말로 신앙의 위대한 자양분이며 삶의 값진 보고임을 깨닫게 된다.고난을 새로운 삶의 창조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야 한다.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간의 역사는 도전에 대한 응전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우리에게 닥쳐오는 고난을 올바로 대처하면 그 고난은 우리를 발전시켜 주는 위대한 계기가 될 수 있다.하나님은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신다.우리가 편안해지면 발전이 없고 기도생활을 게을리하기 쉽다.거센 시련이 있어야 주님께 매달려 간절하게 기도하게 된다.고통을 당하면 회개하게 되고 자기를 성찰하게 된다.하나님앞에 겸손해진다.고난 당한 후에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다.순종하는 더 깊은 신앙의 삶을 살게 해 준다.고난을 통해 깨어지는 가운데 순종을 배운다.예수님은 고난 받으심으로 순종함을 배우셨다(히5:8).고난은 우리 인격에 변화를 일으키는 동력이 된다.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다듬어 가신다.고난은 강인한 신앙인이 되게 한다.기도를 통해 역경을 기긴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파멸하지 않는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맡으려는 사람에게 고난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시는 것이다.우리의 환경에 처절한 고난을 허락하심으로써 우리안에 있는 자아 중심,탐욕,아집,교만,불순종,불신앙을 철저히 깨뜨리신다.그 과정에서 많은 고통과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시련과 환란을 허락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도록 역사하시는 것이다.이러한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는 것이다.그러므로 시험과 환란을 통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을 받기 어렵다.고난은 낙심한 마음을 회복시키는 징계의 수단일 수 있다.“하나님께 징계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느니라”(욥5:17).고난의 신학이 없이 치유의 신학을 가질 수 없다.“내가 너를 고난의 풀무로 시련하였노라“(사48:10).우리의 믿음과 인격이 순수한것만 남을때까지 연단을 받는 동안에는 고통도 따르는 법이다.그러나 징계와 훈련의 결과로 우리는 그만큼 완전하신 하나님께 가까워진다.징계는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시려고 훈련시키시는 일종의 교정하는 훈련이다.주님을 위해서 고난당한 성도의 고뇌하는 모습은 참으로 가치있다.눈물의 밤이 지나면 기쁨의 아침이 밝아 오는 법이다.믿음의 빛은 캄캄한 밤에 가장 환해진다.“저녁에는 울음이 기숙 할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라”(시30:5).지금은 칠흙 같은 어두움의 밤에 잠시 더듬으면서 살지만 장차 찬란한 아침에 빛의 자녀로 변화될 것이다. 인생의 깊은 고난의 밤중에 자녀가 흐느끼며 부르는 찬양을 기뻐 받으시는 하나님은 정말 기가 막히신 분이 아닌가!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사랑과 충성, 예배와 찬양, 신뢰와 순종으로 영원토록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하나님의 불변하신 목적이다. 우리의 의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우리를 축복하는 것은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신다.”
(조나난 에드워즈)
시련은 우리를 훈계하고 가르치는 스승이며,마음을 바르게 펴주는 수단이다.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게 해주시고,우리의 근심이 도리어 기쁨에 되게 해주신다.시련은 신자들을 존귀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수단이 된다. 시련은 영광을 예비해 준다.
고난을 어떻게 이겨내야 되는가?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불시험은 무섭게 불태워버리는 고통스러운 시험을 말한다.고통스런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더 잘 견디며, 더 튼튼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다.위클리프 번역 선교회는 강한 훈련을 시킨다고 한다.1마일 이상 혼자 헤엄을 칠 줄 알아야 하며,정글 속에 사람을 떨어뜨려 놓고 살아 남도록 하는 훈련이다.그런데 탈락자가 하나도 없다고 한다.이들은 언어가 없고,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곳에 들어가서 같이 살며,그 부족의 말을 배워,문자를 만들어주고 성경을 번역하는 귀한 사역을 감당한다.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즐거움을 가져다준다.고난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더 깊은 일체감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고난을 받으셨다.인간들이 당한 고통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이었다.시련을 당할지라도 기뻐할 이유가 있다.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크게 기뻐하고,그와 함께 교제를 나누며,그와 함께 영화롭게 되고,그분과 함께 다스리는 결과를 가져온다.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한자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그분의 영광에도 동참하게 된다. 여러분은 현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가? 하나님을 위해서 나의 개인적인 욕망을 포기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고난은 형벌이 아니라 특권이다.우리는 악행이나 남의 일로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이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바울과 실라에게 고난은 하나님을 찬양할 원천이 되었다.하나님의 사람들은 광야의 가시덤불 밟으면서 가슴을 후비는 고독과 절망을 느끼는 험한 인생 여정에서도 주님이 곁에서 인도하고 계심을 믿었다.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이다.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담을 뛰어넘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적인 행동을 요구하신다.우리들이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나, 캠퍼스에서 당신이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억울한 비난과 무시를 당할 수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벧전4:19).성도로서 당하는 부당한 고난 속에 더욱 하나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뜻을 물으며 인내하면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고 주님 앞에 아름다운 것이다. 시련 당할 때 부끄러워하지 말고,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열매가 있는 줄 믿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예수님께서 시련의 극치인 십자가에서 자신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의탁하셨다.그리스도인은 평안할 때 믿음을 키우고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한 법을 배워야 한다. 초대교회가 박해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 공동체의 힘과 하나님께 의탁하면 영광의 영이 그 위에 있으며,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약속을 믿었기 때문이다.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소망을 가지고 길을 가는 것이다.길 가는 여정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길동무가 되어 주신다.그리스도의 부활을 맛보기 원하며,찬란한 기쁨을 원한다면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피하지 말라.고난에 참여하는 자만이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거룩이 가져오는 행복감은 놀라운 것이다.의인은 어떤 고난을 당할지라도 마지막에 가서는 반드시 복을 받으며 예수의 대속을 믿는 성도들은 죄 사함 받고 영원한 생명과 확실한 구원을 받고 천국의 상속자가 되는 것이다.7) 파스칼은 ‘고난은 믿음의 학교’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기도했다.“당신을 섬기라고 내게 건강을 주셨건만 나는 모두 세상을 위하여 써버렸습니다.이제 당신은 나를 깨우쳐 주시려고 병을 주셨습니다...내가 조급함으로 당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못하게 하옵소서”.인간이 진정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을 배우는 길은 고난을 통해서 만이 가능하다.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고난을 통해서 배우신 순종이었다. 우리에게는 더 말해 무엇하랴! 우리가 고난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수없이 많다.
고통이란 행복과 은총을 위한 아름다운 번제물인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간질병과 사형수의 고통이었다.
로트렉을 위대한 화가로 만든 것은 사람들이 경멸했던 난쟁이라는 고통이었다.
생텍쥐베리를 위대하게 만든 것은 그를 일생동안 대기발령자로 살아가게 한 평가 절하의 고통이었다.베토벤을 위대하게 만든 것은 끊임없는 실연과 청신경 마비라는 음악가 최대의 고통이었다.히스기야는 죽음의 질병에서 회복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했다.우리에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평안을 주시려는 것이다(사38:17).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가운데서도 혼자 당하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고 그 고난에 함께 하시는 사랑이시다.어떠한 고난이라도 그 고난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 고난은 가치있는 것이다.하나님은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성장하는 목회자는 더 높은 단계의 기쁨과 더 깊은 단계의 슬픔을 경험해야 한다‘(필립스 부룩스).
목회자가 눈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하나님의 마음이 자기 마음에 흘러 들어와 성도들앞에 설교한다면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 올 것이다.
교만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더니,하나님은 안된다고 하시며,
교만이란 내가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네가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슬픔이 없게 달라고 간구했더니,하나님은 안된다고 하시며,
고통은 우리를 세상에서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하는 은혜라고 가르쳐 주셨다.남을 사랑할 수 있도록 능력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미소지으시며,이제야 철들어 네가 나를 기쁘게 하는 기도를 배웠구나
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인생에 고난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인생의 잿더미 가운데서도 우리는 희망의 빛을 발견 할 수 있다.
헨델은 40년동안 영국과 유럽에서 오페라 음악의 작곡가로 널리 명성을 떨쳤다.1741년 그는 나이 들어 빈털터리가 되어 낙담하며 런던거리를 방황했다.뇌출혈로 한쪽 몸이 마비 되었고 시련과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다시 일어서 음악의 세계에 몰입했다.어느날 시인 챨스 기본이 낙심에 빠진 헨델을 찾아와 자신이 이사야53장말씀을 가지고 작시한 시를 건네주며 작곡을 부탁한다.깊은 감명을 받더니 그의 얼굴빛이 달라졌다.“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받고,고통을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다.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그가 멸시를 받으나 그를 위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이 말씀이 헨델의 개인적인 상처를 감싸며 어루만져 주었다.그리고 “나의 구원자는 살아계시니 기뻐하라.할렐루야!”이 구절을 읽고 곧바로 펜을 잡고 24일간 한번도 집 밖에 나가지 않으며 쉬지 않고 그 유명한 ‘메시야’를 작곡했다.그의 눈시울은 뜨거워졌고,곡을 완성한 다음 눈물이 그의 시야를 가렸다.“나는 내 앞에 펼쳐진 천국과 위대하신 하나님이 자신을 분명하게 바라본 듯한 느낌이었다“고 소리쳤다.그의 나이 56세때 였다.그는 장님이 되었고,마지막 생애동안 그의 믿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그의 음악은 광대함과 경이로움이 있다.그는 스물 여섯곡의 오라토리오를 작곡하였다.그는 깊은 고통과 처절한 실패를 통해서 위대한 음악을 맛보게 되었다.위대한 음악은 항상 비싼 댓가를 요구하는 법이다.베토벤은 “헨델은 모든 작곡가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재능이 많은 사람이다”고 말했다.8)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난다(잠24:16).
천문학자들이 새로운 천체(天體)를 발견한 것은 칠흙 같은 밤이었다.희망의 빛을 발견하는 것은 실패의 괴로움과 쓸쓸함 가운데였다.하나님은 우리의 고통과 슬픔을 아신다.그분은 우리가 라면을 먹을 때 소갈비를 뜯는 분이 아니시다.여전히 우리의 고통에 공감하시고 함께 하신다.하나님이 은혜를 주시고 약한 가운데 힘을 주시며 어둠 속에 빛을 주시고 밤에는 노래를,아침에는 기쁨을 주신다.하나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내어 주시는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고통과 투쟁은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일부임을 알아야 한다.우리 중 누구도 그것에서 면제되지 않는다.그 고통을 끌어안고 주님 의지하며 가야 한다.이것이 진토와 같이 연약한 인생의 모습이다.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고 십자가에서 쓸쓸히 못박히셨다.그러나 인간으로 보면 실패한 것 같지만,그것은 예언의 성취였으며,그의 구원을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의 선물을 주셨다.주님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 지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알았다.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사함의 복을 받게 되었고,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보이셨다.우리의 실패가 신앙 생활의 장애물이 되어서는 않된다.
디즈니랜드는 예전에는 늪지였던 곳에서 만들어졌다.포기하는 자는 결코 승리하지 못하고,승리하는 자는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고난의 때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신앙이다.아무리 고난의 풍랑이 거세어도 풍랑위에 좌정하신 주님을 의지하며,풍랑을 꾸짖고 잠잠하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나아간다면,머지 않아 어려움가운데서 반드시 헤쳐 나오게 될 것을 확신한다.믿음은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응시하는 것이다.믿음의 사람은 고난을 당하나 그 고난에 함몰되는 자들이 아니다.고난을 당할때에는 힘들고 고통스럽지만,지나고 보면 신앙의 위대한 자양분이 되고 인생의 값진 경험이었을 깨닫게 된다.고통스러울 때 지혜로운 판단력과 올바른 사고와 현명한 행동을 할 때에 고난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지혜가 부족할 때 하나님께 구하면 주신다.하나님이 주신 지혜는 세상에 어떤 지혜보다 탁월하다.성경은 하나님의 지혜를 집대성한 것이다.지혜의 말씀을 마음에 쌓아놓으면 어려운 문제와 인생의 풍랑을 거뜬하게 해결 할 수 있다.꽃은 천둥 번개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나무도 시련없이 고요히 자라지 않는 법이다.비바람이 몰아 칠 때 온 몸을 뒤틀거리는 고통과 시련을 통하여 더 튼튼하고 아름다운 거목으로 자란다.한 여름의 폭풍을 통하여 꽃과 나무들도 삶의 인내를 배우는 것이다.홀로서기를 배우라고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를 고립시켜 놓고 외롭게 만든다.가슴이 아픈데도 어디가서 위로 받는 길이 없다.그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람으로 자라 갈 수 없다. 고난을 통하여 내가 누구인지,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더 깊이 알아가게 하신다.내 자신이 얼마나 추하며 얼마나 약한지 알게 된다.고난과 시련에 직면했을 때에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고난을 통과하는 것이 쉽지 않다.십자가의 고난을 이기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고난의 대가였던 바울을 묵상해 볼 수 있다.9)하나님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죄를 들추어 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도록 하고,그리스도를 위해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고난을 주신 것이다.성도는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난과 역경이 우리를 타락시키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성숙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고난이 찾아 올 때 환영하고 고난을 꼭 껴안고 사랑하라.나를 쓰러뜨리지 못한 고난은 나를 강하게 만들어 줄테니까...
미국에 유명한 박 피얼스 목사가 홍콩에 갔는데 호텔에 방이 하나도 없었다.두개의 침대가 있는 방에 혼자 자는 남자가 있으면 잘 수 있도록 부탁해서 어떤 미국인과 함께 자게 되었다.그런데 그 사람이 자면서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깨워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사람은 아주 힘든 곳에서 사역하는 선교사였다.
부인과 함께 사역 하는데 열매는 없고 딸을 낳아 기르는데 그만 문둥병이 걸렸다.그 딸을 하와이 병원에 맡기고 돌아가는 길인데 그 선교사가 자기는 도무지 자격도 능력도 없고 안 맞는다고 생각하고 사역을 그만 둘 생각하고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주님이 이 선교사에게 찾아오셔서‘너까지 그만 두면 거기 있는 영혼을 누가 구원하겠느냐’라고 자꾸 말씀하시는 것이었다.주님이 애원하시며 말씀하시는데 그 선교사는 너무나 감격해서 그 주님을 붙들고 꿈에 그렇게 운 것이었다.우리는 사역의 열매가 없을 때 그만 두고 싶은 생각이 날 때도 있다.‘너까지 그만 두면 누가 그 영혼을 구원하겠느냐’ 그 선교사가 수고한 상급은 다 받는다.
우리는 부족하고 실수가 많아도 구원 사역은 완성이 된다.내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성부 성자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택한 백성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교회가 약해보여도 반드시 승리한다.교회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승리하심으로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교회는 승리한다고 말씀하셨다.모든 은혜의 하나님이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하나님은 인간을 깨뜨리신 다음에 아름답게 쓰신다
고난중에 욥의 인내를 배워라(약5:11)
욥은 설명할 수 없는 고난의 괴로움과 당혹감을 극심하게 경험했다.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순전하고 의로운 자였다.그런데 욥이 사탄에게 고통당하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다.갑자기 자녀들이 죽고,재산을 날려 버렸다.일시적으로 평정을 잃었으나,하나님의 방법을 단순한 인간의 합리적인 이론들을 인정하지 않았으며,종래는 평화를 회복하였다.마침내 하나님의 말씀에 압도되었고 언제가는 자신의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게 된다.자신이 이땅에 모든 상황들에 대해 합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신 분도 가져가신 분도 여호와이며 자신은 적신(맨몸)으로 왔다 가는 몸이다.그 가운데서 친구들은 ‘그것봐라, 네가 죄지어서 그렇지‘라고 말했으며,아내는 ‘차라리 하나님 욕하고 죽으시구려‘라고 말할 때 욥은 이중으로 고통을 경험한다.그는 외로움과 깊은 고통 속에 하나님과 담판을 한 뒤에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된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이제는 눈으로 본다.나의 가는 길을 하나님은 아신다.하나님이 나를 단련하사 정금과 같이 빚으셨다’.이렇게 고백한다.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욥을 어두움 가운데 두신 것이다.죄악으로 갈등하며 패역의 길로 행할 때 하나님이 얼굴을 가리우사 노하신다.욥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이것이다.우리가 범죄 하지 않아도 고난을 당할 수 있으며,순종해도 역경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불의가 없어도 고통을 당할 수 있고 아무 이유 없이 슬픔을 당할 수 있다.근거 없이 혼란을 당하고,부당한 심판을 당할 수 있다.‘영혼의 어두운 밤‘이 우리를 속박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시험하며,우리의 신뢰심을 빼앗아가고 우리의 전망을 어둡게 하며 우리의 능력을 시험할 수도 있다.욥처럼 자신의 생일을 저주 할 수도 죽음을 사모할 수도 있다. 그러나 먹구름 사이로 빗줄기가 비쳐온다.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신다”(욥19:25).“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이것은 욥이 어두운 경험 속에서 진귀하게 깨달은 진리이다.욥은 칠흙 같은 어두운 밤 가운데서 결코 아침이 올 것 같지 않는 경험을 했다.이러한 심각한 시련의 때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찾아든다.
이러한‘영혼의 깊은 밤‘은 천로역정에 나오는 순례자처럼 홀로 통과해야 하는 외로운 골짜기이다. 주변은 위험하고 대적이 우글거리고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계속 걸어가면 머지않아 아침이 밝아 올 것이다. 욥이 그러했다.욥은 고난 당할 때 침묵하며 하나님을 응시하였다.온전히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기도와 마음의 침묵안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뵙고자 할 때 하나님은 말씀하신다.고난은 회복의 기회이다.우리가 고난 당한 만큼 치유 받는다.고통이 찾아오면 우리는 여러 가지 반응을 보인다. 고통의 상황 자체를 부인하거나,무지해서 깨닫지 못하거나,현실을 도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용기있게 고난에 직면하는 것이 성도가 취해야 할 삶의 태도이다.우리는 고통을 창조적인 힘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시련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믿음의 빛은 캄캄한 밤에 가장 환해진다.어두움을 아는 사람은 배고픔이 자신의 일용할 양식임을 안다.어둠과 배고픔은 아픔이다.아픔을 통해서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자기 입장만 내세우지 않는다.밭고랑을 많이 일군 쟁기일수록 더 빛이 나는 법이다. 성경은 “곤고할 때 생각하라. 고난당할 때 기도하라”고 말씀하신다.하나님의 자녀는 말씀 때문에 핍박과 환란을 경험하고,주를 위해 고난을 겪는다.바울은 힘에 지나도록 고난을 받았다.그렇지만 고난은 잠시 동안 받는 것이다.하나님께서 그 고난을 이기게 해주신다.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고난은 다 끝이 날 것이다.고난이 끝이 있다는 사실은 성도에게 커다란 위로를 준다.새 하늘과 새 땅에서 고난은 궁극적으로 말소된다(계21:4).그 때에는 고난보다 더 찬란한 영광이 주어질 것이다.현재의 괴로움은 계속될 수 있으나 영원한 것은 아니다.인내를 배우게 하시려고 고난을 허락하신다.우리가 주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는 것은 교만하기 때문이다.조급증에 안달하지 말고 주님을 끝까지 신뢰하라.그분은 결코 이르거나 늦으신 적이 없으시다.어려운 때를 만날 때 하나님앞에 보다 더 정직해져라.자신의 죄와 허물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라.고난은 진실한 회개와 자기성찰의 기회다.자아가 깨어지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든다.고난을 통해 하나님께 순종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고난으로 응답 받은 기도(prayer answered by crosses)10)
더 큰 믿음과 사랑안에 자라며 모든 은혜 가운데 자라기를
기도 했네.그러나 주님은 내가 구한 축복 대신 내 마음에
숨은 죄악을 드러내셨네.나를 더 곤고케 하며,내 모든 계획이 어긋나게 하며,
나를 꺾으시고 바닥에 낮추셨네.
‘주여 왜 나를 이렇게 대하십니까? 나를 죽이시렵니까?’
‘바로 이것이 너의 기도에 대한 나의 응답이다.
네가 당한 시련들은 교만한 자아에서 해방시키려고
세상즐거움을 위한 너의 계획을 부숴뜨려 내 안에서 모든 것을
찾게 하려고 내가 동원한 연단의 방편이다‘.
주여! 우리가 고난속에서 주님의 선한 뜻을 발견하고 굳세게 일어나게 하소서.
중독환자 자활단체 모임에서는 항상 이 말로 모임을 끝맺는다.
“하나님,저에게 제가 바꿀 수 없는 일을 잘 받아 들 일 느긋함을 주소서.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은 변화시킬 용기를 주소서.그리고 두 가지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프리드리히 크리스토프 외팅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