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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인종차별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1>
10년 전 우리가 이민 오고 그 다음 두 해 동안 뉴질랜드에 이민이 쏟아져 들어왔다, 한국 뿐 아니라 대만과 홍콩에서도. 1997년 홍콩의 중국 이양을 앞두고 불안감을 느끼는 홍콩 사람들이 오클랜드의 한 쪽 부분을 거의 차지할 정도로 한 두 해 사이에 아시아인들이 눈에 띄게 늘어난 적이 있다. 그러면서 당연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어느 고등학교에서 키위 아이들과 한국 아이들이 패싸움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 때 마오리 아이들이 같은 유색인종인 한국 아이들 편을 들지 않고 키위 아이들 편을 들더라는 말도 들었다.
우리 아이가 운전할 나이(15살)가 되어 중고차를 하나 사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을 때, 1천불에서 2천불 사이의 차를 사야 한다고 우기면서 설명한 이유가 있다. 아이들이 동양인들은 무조건 부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아이들이 믿지 않는다고 한다. 친한 친구들을 빼놓고는. 친구들은 우리 집에 늘 들락거리니까 우리 집이 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만일 자기가 그 이상 가는 차를 타면 아이들이 자기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할 거라는 게 우리 아이의 이유였다.
우리가 처음 왔을 때 3년 된 중고차를 샀는데, 우리 동네에서 거의 새 차에 가까웠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이민 온 동양 사람들이 벤츠와 BMW를 몰고 다니고 비자카드 골드를 내밀면서도 영주권자에게도 혜택을 주는 사회복지금을 타는 일에 이곳 사람들이 기분 나빠한다는 말이 들렸다. 같은 동급생이 자기 아버지 차보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는 것을 이 나라 아이들은 곱게 봐 주지를 못했다.
이런 분위기를 한 국회의원이 부추기며 이용했고, 그 국회의원은 인기를 얻어 대표비례제를 택한 그 다음 선거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는 기회를 잡았다. 그 때 나는 이러다 호주의 백호주의처럼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를 속으로 했다. 이런 게 남의 나라 사는 대가로 치르는 불안감이구나 하면서.
그런 분위기는 1년도 못돼 사라져버렸지만 그 때에도 실제로 인종차별을 당한다고 심각하게 느낀 적이 내 개인적으로는 없다. 주변에서 인종차별 한다고 듣는 이야기도 생각하기 나름으로 이곳에서 다시 대학교를 다닌 남편이 들려준 이야기 하나.
어떤 교수를 한국 학생들은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하는데, 한국 학생들을 무시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인사를 해도 잘 받지를 않고. 그러나 남편은 그 교수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겉으로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단 잘 알게 되면 무척 친절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자기하고는 아주 잘 지낸다고 하면서.
우리가 서양 사람은 다 활달하다고 생각하는 게 착각이었음을 교회 가족 캠프에서도 느꼈다. 인간관계에 대한 세미나를 하고 자기 성격을 평가하는 테스트를 했는데, 절반 이상이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자기 스스로도 그렇게들 느끼고. 그 결과를 보고 세미나 강사가 하는 말, 그 캠프 참석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뉴질랜드인 절반 이상이 내성적인 성격이라나.
그래서 그런지 서양에서는 길에서도 누구나 보면 하이 한다고 들었던 것과는 너무 다르게 내가 먼저 하이 하는 경우가 꽤 된다. 그러니까 이 나라에도 활달한 사람, 내성적인 사람, 잘난 체 하는 사람, 수줍어하는 사람, 친절한 사람, 못되게 구는 사람 등 우리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성격을 이곳에서도 다 만날 수 있다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다는 게 나의 결론이다.
내가 공정하게 대우를 받는지, 그래서 나도 남들을 공정하게 대우하는지, 공정하게 생각하는지 내 마음을 들여다보면, 가끔 기분 나쁜 일이 있더라도 사람 사는 곳은 다 같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내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을 수 있다. <2003. 08. 28>
요리사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2>
중학교 가정시간에 요리 실습할 때는 계량컵과 스푼을 정확히 사용하여야 했다. 벌써 30년도 더 지난 일이라 누구에게서 들은 건지, 가정 선생님께 들은 건지 아니면 텔레비전의 어느 요리 강습자가 한 말인지 기억이 안 나지만, 내 머리 속에 박혀 있는 것은 서양 사람들은 우리처럼 주먹구구로 요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뭐든지 계량하여 과학적으로 음식을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이곳 음식을 만들어볼까 하고 가끔 요리 강습하는 것을 텔레비전으로 보는데, 소금을 스푼으로 재서 넣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 스푼 넣으라고 말은 하면서도 적당히 털어 넣는다. 아니면 아예 적당히 넣으라고 한다. 거의 모든 양념이 그렇다. 적당히 아니면 한 줌 등등이다. 처음에 나는 '아니 이럴 수가, 속았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 요리 강습보다 더 비과학적이잖아 라고.
이 나라에서 인기 있는 요리사가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영국사람이다.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수입하여 방영하는 이 나라 방송국 덕분에 미국 뿐 아니라 영국 프로그램을 즐기는데, 요리하면 프랑스지, 영국은 푹 삶은 시금치 아니면 생각나는 음식이 없던 나에게 영국에도 요리사가 있나 하는 거의 영국 모독적인 생각을 하게 한 장본인이다. 이미 결혼하여 아이도 있는데 내가 보기에는 아직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동안의 얼굴에 혀 짧은 소리(우리 아이의 말에 의하면 혀가 두꺼운 사람들은 그렇게 발음한다고 한다)로 쉴새없이 떠들며 부엌에서 장난치고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정신없이 요리를 하는 남자 요리사다. 이름하여 The Naked Chef.
어려서부터 음식 만드는 게 취미였다는 이 요리사는 마늘은 주먹으로 내리쳐서 껍질채 넣고 서양 요리의 감초격인 생 베이질은 손으로 죽 훑어서 넣는다. 야채도 적당히 손으로 뜯어 넣어, 어머니가 칼을 대면 맛이 없다고 배추를 손으로 찢어서 겉절이 하시던 생각이 나게 만들며, 소스가 손에 묻으면 손가락을 쭉쭉 빨아가며 음식을 만든다. 만들면서 얼마나 맛이 좋을 건지 스스로 잘 알기 때문인지 먹을 것을 앞에 둔 배고픈 사람처럼 침을 꼴깍 삼킨다. 그런 그를 보노라면 일부러 연기한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고 저 사람이 정말로 음식 만들기와 먹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한번은 친구들과 바닷가로 휴가를 가서 놀아가며 아침 점심 저녁을 그가 만들어 먹는 것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디너 메인 디쉬로 그가 만든 것은 연어 요리였는데, 연어 한 마리를 통채로 몇 겹 쌓아놓은 신문지 위에 놓고 소금 적당히 치고 레몬즙을 손으로 쥐어 짜 뿌리고, 마늘은 손으로 내리치고 베이즐은 훑어서 위에 적당히 놓고 이것저것 뭔지 모를 향신 야채를 얹은 다음 그 신문지로 둘둘 말아 끈으로 묶더니 그것을 양동이에 든 물에 몇 번 집어넣어 물을 충분히 적신 다음 숯불 위에 그대로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모래사장에서 배구를 하며 신나게 노는 사이사이 와서 몇 번 뒤집고는 얼마 지나 신문지가 새까맣게 탄 다음 집어내서 신문지를 걷어내고 시커매진 껍질을 벗기고 속살을 푹푹 떠내서 친구들 접시에 담아주는 그를 보면서 저 정도 되면 요리도 전위예술 같은 창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싶었다.
어쨌거나 너무 쉽게 요리하는 그를 감탄하는 나에게 남편이 하는 말, ■■신문지 활자를 찍는 잉크에 납이 얼마나 많은데.■■<2003. 08. 29>
공중도덕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3>
우리 집 근처 교회에서 운영하는 크리스찬 북 센터가 있다. 그 책방이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주로 일을 하고 있다. 그 중 한 분은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자원봉사 했던 초등학교 성경공부 선생님이다. 나는 그 아주머니 (할머니라고 하기에는 젊어 보이니까)의 보조교사였다.
그 분이 책방에서 한동안 안 보이더니 어느 날 다시 카운터에 나타났다. 나를 보고 반색을 하면서 자기가 한국에 가보았다고 했다. 어디를 갔었느냐는 나의 질문에 사실은 그 동안 영국에 다녀왔는데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바꿔 타느라 몇 시간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영종도 공항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를 신나게 설명해주었다, 그 공항이 문을 열기 6개월 전에 서울에 갔다 와서 그 공항을 못 보았다는 나의 말에 아쉬워하면서.
그 규모와 유리창 벽에 대한 감탄에 이어 그 분이 가장 감동받은 시설은 화장실이었다. 같이 가던 다른 아주머니가 화장실에 갔다 오더니 그 분 보고 화장실을 가보라고 하더란다. 그리고 화장실 벽에 있는 에티켓 버튼을 반드시 눌러보라는 말과 함께. 그래서 그대로 버튼을 눌렀더니 음악이 크게 흘러나오더라는 것이다, 일보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그 분은 이야기하면서 웃고 나는 들으면서 웃었다. 그 분이 마지막으로 붙이는 말은 자기 남편은 아직 영국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돌아올 때 영종도 공항에 들리면 꼭 화장실에 들어가서 그 버튼을 눌러보라고 자기가 말 했다는 것과 이 이야기를 내 남편에게도 반드시 해주라는 것이었다.
나는 뉴질랜드인을 즐겁게 만들어준 이 화장실 이야기를 남편에게 뿐 아니라 그 뒤 영어연수 온 조카에게도 했다. 그랬더니 조카가 하는 말 “남자화장실에는 그런 버튼이 없는데요.” 그러고 보니 남자는 작은 일 보기 위해 문 닫고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 분이 고속도로 휴게소의 화장실을 들어가 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그 이전보다는 많이 깨끗해졌어도 여전히 붐빌 뿐 아니라 그래서 깨끗할 틈이 없었던 화장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곳은 공중 화장실이 무척 깨끗하다, 우리가 아직 공중 도덕심이 부족하다는 교훈을 들을 때마다 예화로 듣던 대로, 어디를 가든. 깊은 산속이나 또는 물이 별로 없는 곳이나 수세식 화장실이 아닐지라도 깨끗하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깨끗하지 않은 화장실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이 몰려드는데 관리하는 손길이 미처 미치지 못한 시간에는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는 화장실이 가끔 있다. 바닷가 같은 곳에 있는. 그러니까 우리도 공중도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사람이 너무 많아 아니면 그 많은 사람에 비해 화장실이 절대 부족해서 화장실이 깨끗하지 않은 것이고, 깨끗하게 유지하기도 상당히 어려울 게다. 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 오기 전에 이곳을 다녀온 분이 말한 것이 생각난다. 뉴질랜드 사람은 얼마나 공중도덕을 잘 지키는지 바닷가에 개를 데리고 산책을 하다가 개가 실례를 하면 들고 간 비닐봉지에 그것을 싸가지고 간다고. 그래서 그런 줄 알았다. 그리고 내가 이민 오고 한 두 해는 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차츰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고, 바닷가에서는 쉽게 개들이 실례하고 간 흔적들을 볼 수가 있었다. 아침이나 저녁에 개 운동 시키러 나온 사람들의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있는 것을 볼 수가 없어졌다. 그리고 나더니 바닷가마다 시에서 만든 경고판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No dogs! 바닷가에 개를 데리고 나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개를 어디서 운동시켜야 하나. 여전히 사람들은 경고판을 무시하고 개를 바닷가로 데리고 나왔다. 처벌 없이 도덕심에 호소하는 경고는 서울이나 여기나 마찬가지다. 무시되는 것이.
그 사이 그 경고와는 직접 상관관계가 없지만 개의 오물 때문에 이웃끼리 싸움이 붙은 일이 저녁 뉴스시간에 나왔다. 어떤 개가 어느 한 집 마당에만 가서 실례를 하기 때문에 화가 난 그 마당 주인이 그 오물들을 모아다 그 개 주인 집 마당에다 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시티 카운슬에 호소했다. 자기 집 마당에 그 개가 들어올 수 없도록 해달라고. 이 일은 나도 가끔 당하는 바다. 우리 집에 울타리가 없고 나무들만 울 대신 서있기 때문에.
어쨌거나 개 접근 금지의 경고판이 몇 년 무시를 당하더니 그 경고판이 사라졌다. 대신 세워진 것은 긴 막대 위에 네모난 새장 같은 것이었다. 그 안에는 비닐봉지가 가득 들어있고. 무심히 지나쳤었는데, 어느 날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이 바닷가 입구에서 그 봉지를 꺼내는 것을 보면서 개 오물 수거 비닐봉지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비닐봉지 든 사람이 다시 눈에 띄기 시작했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었다. 그 비닐봉지는 누가 채워 넣나, 이런 것까지 시에서 사람사서 시키나. 다시 며칠 후 바닷가를 나갔다가 궁금증이 풀렸다. 어떤 아주머니가 개를 데리고 나왔는데, 비닐봉지를 한 봉지 들고 나와 그 안에다 채워 넣는 것이었다, 물론 자기가 쓸 한 봉지는 남기고.
내가 개를 키운다고 가정을 하고 바닷가에 갈 때마다 비닐봉지를 가져갔겠는지 생각해보았다. 내가 아주 고지식한 사람이라 해도 가끔 잊어버리고 갈 경우도 있을 게다. 그럴 경우 경고판은 아무 소용없다. 나의 양심에 걸림돌은 되어도. 비닐봉지를 넣어두는 통이 있으니 잊어버리고 바닷가에 나가도 그 통을 보는 순간 마음 편히 한 장 꺼내 들면 되고 또 기억나는 때는 돈 드는 일도 아니니까 많이 들고 나가 넣어두고. 좋은 제도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기분 좋게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만들고 그래서 공동체 전체에 유익이 되고. <2003. 08. 30>
어디든 그런 사람은...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4>
몇 해 전에 여자 장관이 사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음주운전에 걸렸기 때문이다. 밤늦게까지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혼자 포도주를 마셨다는 것이다. 한 잔 두 잔 먹다 보니 음주측정 한도량이 넘었는데 집에 돌아가다가 경찰에 걸린 것이다. 능력 있는 장관이었는데 이틀 후 사임했다. 우리는 동정을 했다. 음주운전한 것은 잘못이지만 그렇게 밤늦게까지 장관이 일하다니, 그리고 포도주를 마셨더라도 운전기사가 있었더라면 음주측정에 걸릴 일이 아예 없었을 텐데. 그렇지만 경찰도 대단하네, 장관이라고 봐주지 않고 음주측정하다니, 이 나라 경찰은 관용차 번호도 모르나 하면서.
이 나라 공무원이 깨끗하기로 세계 몇 위 안에 든다고 한다. 그러니 경찰도 아마 그럴 것이다. 음주측정에 걸린 한국인 이민자가 우리 식으로 경찰에게 돈을 주었다가 오히려 그 일로 인한 죄목까지 추가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있다. 그리고 그런 일이 통하지 않는 것이 우리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이야기 꺼리로 오른다. 그런데 나에게는 경찰에 대해서 별로 유쾌하지 않은 기억이 있다.
이민 온 지 일 년도 채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아침에 나간 남편이 몇 시간 안 되어 돌아왔다. 차사고가 난 것이다. 모터웨이(고속도로)로 진입하는 길을 가는데 옆길에서 차가 튀어나왔단다. 그 차는 잘못 튀어나온 것에 놀랐는지 서버렸고, 남편은 반대편에서 오는 차를 피해 인도 쪽으로 차를 꺾어 피하려고 했으나 그 차 뒤를 박았다고 한다. 그 사람은 자기 잘못을 인정했고, 경찰차가 와서 그 경관도 남편보고 잘못 없으니 안심하라고 했단다. 마침 그 곳을 지나가던 견인차 운전수는 일거리가 생겼다고 서 있었지만 둘 다 AA 멤버라 그 견인차를 이용할 일은 없었고.
한 달도 더 지난 어느 날 새벽에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서 나가니 경찰이 서 있어서 더 놀랐다. 경찰이 뭔가를 내밀며 소환장이라고 하는 데는 기절할 일이었다. 웬 소환장? 차사고 때문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펴보니 남편에게 법원에 출두하라는 통지였다. 부주의한 운전 혐의로.
기가 막히면서도 남편은 변호사를 찾아갔다. 설명을 들은 변호사는 경찰에 편지를 써서 항의를 했지만 경찰은 끄떡을 안 했다. 법원에 가야 할 날짜는 다가오고 억울해하다가 남편은 그 때 상황에 대한 증인이 있음을 기억해내었다. 건수 올릴까 하고 옆에서 기다리던 그 견인차 운전사가 증인이 필요하면 증인 서주겠고 명함을 주었단다.
증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변호사는 그 사람에게 연락해서 증인을 요청하라고 했고, 남편은 견인차 운전수는 사고 난 현장에 빨리 가야 하니까 혹시 경찰에게 잘 보여야 하기 때문에 경찰에 불리한 증인을 해 줄지 염려를 하면서도 연락을 했다. 다행스럽게도 그 운전수는 그 사건을 기억할 뿐 아니라 증인을 서주겠다고 쉽게 응락을 했다.
증인이 증언하겠다는 말을 들은 변호사는 우리에게 그 현장의 증인이 있음을 알리는 편지를 경찰에 보냈고, 그 편지를 받자마자 경찰은 고소를 취하했다. 우리에게 믿지 못할 경찰이라는 깊은 인상을 심어주고는. 남편이 사고 직후에 한 이야기로는 상대편 차를 운전한 서람은 비지니스맨 같이 보였고 점잖았으며 차도 좋은 차였다고 한다.
몇 년 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친구 집에 놀러갔다. 주차에 자신 없어 어디를 가나 늘 널찍한 공간에 차를 세워놓고 걸어 다니는 나는 처음 가는 그 집 안으로 차를 몰고 들어갈 마음이 전혀 없어서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들어갔다. 얼마 지나 누군가 그 집 문을 두드리며 혹시 그 집 앞 길가에 차를 세워놓지 않았냐고 묻자 친구가 혹시 내 차가 아닌가 하고 나에게 물었다.
허름한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문밖에 서서 미안하다고, 자기가 내 차를 박았다고. 비가 오고 있어서 김이 서려 뒷창이 잘 안 보여서 그랬노라고 하면서 명함을 주었다. 어느 전기설비회사의 직원이었다.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는 한적한 길에 더구나 비까지 내려 그 일을 보았을 사람이 있었다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냥 그 사람이 자기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나를 찾았을 뿐이라고 느껴지자 고마운 마음과 함께 그 사람의 차는 회사 차던데 이런 일로 회사에서 곤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까지 들었었다.
이 일은 몇 년 전 경찰까지 불신하게 만들었던 사건의 쓰라림을 엷어지게 만들었다. 또 역시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다는 생각을 했다. 점잖아 보여도 일을 왜곡시키는 사람, 가진 것이 많아도 조금도 손해 보지 않으려는 사람, 그런가 하면 어리숙하게 한없이 정직한 사람, 이리저리 잴 줄 모르는 사람, 이런 모든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화나는 이야기, 즐거운 이야기, 슬픈 이야기, 기쁜 이야기들을 만들어가는 것도 여기나 거기나 같다고. <2003. 09. 01>
설거지
김시원의 뉴질랜드 이민일기 <25>
예배가 끝나면 홍차나 커피 그리고 비스켙 몇 봉지를 뜯어 놓는 친교시간이 있다. 언제나 할머니 할아버지가 서빙을 하고 컵과 잔을 설거지 하는 것이 영 어색하고 불편해서 가끔 돕는다. 우리하고는 설거지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여기 오기 전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미국서 살다온 사람들이나 유학 갔다 온 사람들로부터. 그 이야기는 우리가 서양 사람보다 얼마나 깨끗한지를 말하기 위한 예였다. 그래서 나도 퐁퐁 물에서 꺼낸 그릇을 헹구지도 않고 그냥 마른 행주질 한다는 이곳의 설거지 방식을 우습게 알았다.
우리는 퐁퐁을 스펀지에 묻혀서 그릇을 닦고, 퐁퐁 묻은 그릇을 흐르는 깨끗한 물에 다시 씻는다. 나는 이곳에 오기 전에 퐁퐁을 전혀 쓰지 않았다. 기름이 떡처럼 앉은 경우가 아니고는. 엔간히 기름 묻은 것은 종이 타월이나 휴지로 닦아내고 뜨거운 물로 그냥 씻었다. 남들에게는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세제로 오염되어 하이타이 잘 풀어놓은 것처럼 거품이 하나 가득한 한강물을 본 이후로 나 하나라도 세제를 쓰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안 쓴다고 그럴듯하게 이야기했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흐르는 물로 빠닥빠닥 씻으려고 해도 퐁퐁의 미끈거리는 감촉이 영 사라지지 않는 느낌이 싫어서이기도 했다. 차라리 뜨거운 물에 기름을 녹이는 것이 더 개운하고.
여기서는 싱크대에 물을 받아놓고 퐁퐁을 풀고 그릇을 수세미나 스펀지가 아닌 손잡이가 긴 솔로 닦는다. 그릇을 물속에서 건져서 솔로 대충 한 두 번 문지르고 옆에 꺼내 놓으면 다른 사람이 마른 행주로 물기를 닦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쉬운 일을 못 할게 없지 싶어 내가 처음으로 설거지 돕겠다고 부엌에 들어간 날, 나랑 친한 에릭 할아버지가 너 정말 할 수 있냐고 마른 행주질이나 하라고 한다.
그러나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내가 나보다 적어도 30, 40년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설거지 물에 손을 담그는 것을 볼 수가 있나, 내가 아예 부엌에 안 들어왔으면 몰라도. 씩씩하게 "No problem"이라고 대답하고는 싱크대에 물을 받았다. 손이 너무 뜨겁지 않을 정도로 뜨거운 물, 찬 물 섞어서. 그런데 할아버지가 보고 웃었다. 뜨거운 물을 더 많이 받으라고. 스펀지가 아니라 손잡이가 긴 솔을 사용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거의 손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퐁퐁 물에 그릇을 담가 닦으니까 되도록이면 손에 물이 닿지 않게 하려고.
그렇게 뜨거운 물로 닦으니 그릇은 마른 행주가 닿기 전에 벌써 반쯤 바싹 말랐다. 이런 방식의 설거지는 둘 이상이 함께 해야 효과적이다. 그릇을 꺼내는 즉시 퐁퐁 물기를 닦아내야 하니까, 혼자서 하려면 그릇이 식고 물기도 완전히 닦아내기가 어렵다. 물론 미지근한 물로 해도 마찬가지로 물기를 바싹 닦기가 어렵고. 그리고 퐁퐁 물에 그릇을 넣기 전에 물로 거의 깨끗하게 헹구어서 집어넣기 때문에 물도 더러워지지 않는다. 행주가 조금만 축축해져도 새 마른 행주로 갈아 쓰기 때문에 마른 행주가 많아야 하는 귀찮음은 있지만.
내가 설거지를 해보기 전에는 교회에서 차를 마실 때 퐁퐁 물로 닦아 깨끗한 물로 헹구지도 않은 찻잔에 마시는 거라고 속으로 찜찜해했는데 이젠 별로 그렇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우리 식으로 퐁퐁을 수세미에 묻혀 찬물에 설거지하는 이웃 한국 사람의 방식이 퐁퐁을 깨끗이 씻어내지 못하는 것 같아, 우리 집에서 함께 이웃과 식사를 할 때 이웃이 설거지를 해주겠다고 해도 내가 해야 직성이 풀린다.
왜냐, 찬 물에 적신 스펀지에 퐁퐁 묻혀서 그릇을 닦으면 거품이 안 나고 미끈거리는데, 그 미끈거림이 아무리 헹궈도 서울서나 마찬가지로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뜨거운 퐁퐁 물로 씻어 다시 우리 식으로 흐르는 찬 물에 헹구어 건져놓고 마른 행주질은 안 하는 식으로 두 방법을 절충하고 있지만.
그래서 나도 이제는 퐁퐁을 많이 쓴다, 자연이 훼손되는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퐁퐁 넣고 뜨거운 물 좍좍 틀어 거품이 가득 차지 않은 물에 그릇을 씻으면 영 제대로 씻은 것 같지 않아서. <2003. 09. 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