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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송신일
날 짜 2006-05-16 11:18:02
조 회 353
지난 5월 10일(수) LA에서 열린 미주특별연회에서의 '다빈치코드'에 관한 귀한 설교가 있었습니다. 이 귀한 자리를 통해 참석한 많은 이들이 깊은 영적 통찰력과 은혜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다빈치코드'로 인하여 오늘의 한국사회와 교계가 논란하는 요즘, 이에 관한 분명한 가르침을 제시하는 듯 하여 목사님의 소개로 강연 원고를 옮겨서 소개하오니 유익한 시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제14회 미주특별연회 특별강연
다빈치 코드 신드롬 -무엇이 문제이며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강사: 김영봉 박사(와싱톤한인교회 담임)
일시: 2006년 5월 10일 수요일 오후 8시
장소: 로스안제레스 하시엔다교회
주최: 청암크리스찬 아카데미
<다 빈치 코드 제대로 보기> (1)
"진리를 위해, 진리를 따라"(For Truth and By Truth)
- 요한복음 8:31-38
1.댄 브라운(Dan Brown)의 소설 <다 빈치 코드> (Da Vinci Code)에 대해 4회 연속 설교를 시작하면서 분명히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앞으로 4주 동안, 저는 소설 <다 빈치 코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여 설교할 것입니다. <다 빈치 코드>에 대해서만 말하고 만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닙니다. 강연이 되고 말 것입니다. 저는 한 소설가가 꾸며낸 이야기에 대해 말하느라고 이 거룩하고 귀한 설교 시간을 다 허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 소설과 앞으로 개봉될 영화가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사회 현상이 되었고, 기독교의 진실에 대해 심각한 질문을 제기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제기한 문제들을 성경 말씀의 관점에서 조명하는 작업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필요성 때문에 시리즈 설교의 제목을 <다 빈치 코드 제대로 보기>라고 잡았지만, 실제로는 <기독교의 진리 제대로 보기>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네 편의 설교는 설교가 가져야 하는 본질적인 성격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다 빈치 코드> 이야기는 마치 설교 속에 사용되는 예화와 같은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분들은 "한낱 소설을 두고 왜 이렇게 난리 법석인가?"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이 소설은 '한낱' 소설이 아닙니다. 최근 역사에 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팔려나간 소설이며, 이제 5월 19일에 개봉될 영화 도 역시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울 '블락 버스터'(Block Buster)가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의 틀(plot)은 교회가 지난 2천년 동안 비밀스럽게 은폐하고 날조해 왔다고 하는 한 가지 사실을 추적해 가는 추리 이야기입니다. 그 대강은 이렇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세계적 인 종교 기호학자(religious symbologist)인 로버트 랭던(Robert Langdon)이 파리에 왔다가 우연히 한 사건에 연루됩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의 유명한 큐레이터(curator) 자크 소니에(Jacques Sauniere)가 엽기적으로 살해를 당했는데, 그가 죽어가면서 남긴 메모에 "로버트 랭던을 찾아라"고 썼기 때문입니다. 랭던은 이 사건의 내면으로 점점 끌려 들어가는데, 결국 그 사건은 기독교가 2천년 동안 감추어 온 '성배'(the holy grail)에 관한 음모와 투쟁으로 인해 발생한 것을 알게 됩니다. 처음에 그는, 성배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나눌 때 사용했던 포도주 잔을 가리키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비밀을 지켜 온 '시온수도회'(the Priory of Sion)의 내막을 탐색하면서, 성배는 포도주잔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한 피를 담았던 한 여인을 가리키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로버트 랭던은 결국 그 비밀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가 확인한 비밀은,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고, 돌아가실 때 막달라 마리아의 태에는 예수님의 씨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자 사람들은 그분의 씨앗을 잉태한 막달라 마리아에게 화가 미칠 것을 우려했고, 그래서 아무도 몰래 막달라 마리아를 프랑스 남부에 있는 한 마을로 피신시켰습니다. 마리아는 때가 차서 딸을 낳았는데, 그 딸의 이름은 사라였고, 예수님의 딸 사라는 나중에 프랑스의 메로빙거 왕조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이 비밀을 처음부터 철저히 은폐하고 억압해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다는 증거를 모두 없애 버리고, 막달라 마리아를 창녀로 둔갑시켰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시온수도회'라는 비밀 단체를 통해 그 비밀이 지켜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비밀은 비록 지금까지 완전하게 폭로되지 않았지만, 지난 수 세기 동안 각종의 미술, 문학작품, 음악 등을 통해 끊임없이 암시되고 전해졌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가 그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시온수도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고, 그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 '최후 의 만찬'이라는 그림에 여러 가지 암호를 그려 넣었습니다. 교회 전통은 예수님의 오른 편에 앉아있는 사람을 사도 요한이라고 생각했으나, 실은 막달라 마리아라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가장 사랑받은 제자였으며, 연인이었으며, 아 내였습니다. 주인공인 로버트 랭던은 수 많은 우여곡절을 거처 이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2.읽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한 번 잡으면 손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문학적인 비평을 할만 한 안목이 제겐 없기 때문에 그 면에 대해서는 침묵하겠습니다. 평범한 한 독자로서의 느낌을 말하자면, 이렇게 흡인력이 강한 책을, 영어 표현으로 page-turner라고 하는데, 저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왜 그런 표현이 생겼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소설이 전제하고 있는 소위 '기독교의 숨겨진 진실'에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예수의 결혼설 외에도 이 소설은 기독교에 대해 여러 가지의 혐의를 제기합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기독교에 대한 대목들을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성서는 이교도였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짜 맞춘 것이거든"(번역본 1권, 351쪽, 원작, p. 231 ).
"기독교에 있는 것은 다 원래 기독교의 것이 아니야. …… 심지어 기독교의 주일이라는 것도 이교도에게서 훔쳐온 것이라네"(번역본 1권, 352쪽, 원작 p. 232).
"역사상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한 사람의 예언자일 뿐이었어. 위대하고 힘 있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결국 죽음을 면할 수없는 '인간'일뿐이지. ……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위상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고 '투표'에 부쳐진 것이지……그리고 상대적으로 근소한 표 차이로 예수의 신성이 결정되었지"(번역본 1권, 353쪽, 원작 p.233).
"콘스탄티누스는 새로운 성서 제작을 의뢰하고, 재정적으로 뒷받침했어.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특성을 얘기하는 복음서들은 모두 빼버리고, 그를 신처럼 묘사한 복음서만을 골라 아름답게 윤색한 거야. 초기 복음서들은 금지되거나, 모아서 불태워졌소"(번역본 1권, 355쪽, 원작 p.234).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리스도에 대해 우리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가르친 것의 모든 것이 가짜라는 거야"(번역본 1권, 356쪽, 원작 p. 235).
"보시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이 은폐를. 예수 그리스도는 결혼했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였어"(번역 본 2권, 21쪽, 원작 p. 249).
"각색되지 않은 복음서들에 따르면, 그리스도가 기독교 교회를 세우라는 지시를 내린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였어"(번역 본 2권, 18쪽, 원작 p. 248).
자, 어떻습니까? 이 발언들을 모두 합해 놓으면, 정통 기독교는 당장 허물어져야 할 것 같아 보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성경은 모두 거짓이 되어 버리고, 기독교에서 가르쳐 온 모든 신학과 전통은 이방 종교들로부터 배워 조합한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기독교의 모든 믿음은 다 거짓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에 대해 별로 믿음이 없던 사람들은 이 책을 읽고 얼마나 당황을 했겠습니까? 실제로, 저는 이 소설을 읽고는, 마치 지진을 만난 사람처럼, "이게 다 웬 소리입니까?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발언들 중에 진실은 하나도 없습니다. 앞으로 차차 안내해 드리겠지만, 저는 성경과 기독교 기원 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해 왔기 때문에 역사의 진실을 알고 있습니다. 저자는 성경과 기독교 기원에 대해 기본적인 연구도 하지 않은 채, 떠도는 소문들을 조합해서 부정확한 정보를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기에 저는 더욱 불편했습니다. 게다가 위에서 인용한 말들은 모두, 등장인물 중 하나인 레이 티빙(Leigh Teabing)이 한 말인데, 이 소설에서 티빙은 영국 왕립 역사학회(British Royal Historian)의 회원으로 소개됩니다. 마치, 역사에 대해 그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실인 것 같은 인상을 풍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내용들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는 독자들은 그의 말들을 진실로 느끼게 되고,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3.이 소설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치 이야기된 것들이 모두 정확한 역사적 진실인 것처럼 독자를 속이는 이 소설의 힘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것이 영화로 만들어지면 그 영향력은 더욱 강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저자가 치밀하게 그렇게 꾸민 것입니다. 2년 전에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저는 그냥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시리즈 설교를 위해 연구하는 중에 저자인 댄 브라운(Dan Brown)의 정직성에 대해 점점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홈 페이지에서 그는 온갖 말을 동원하여 스스로를 정직한 구도자(honest seeker)로 소개하고 있지만, 제가 볼 때는 상업주의와 센세이셔널리즘(sensationalism)에 물든, 오염된 작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그는 소설의 서두에 '사실'(fact)라는 제목으로 한 쪽을 사용하여 '시온수도회'와 '오뿌스데이'(Opus Dei)에 대해 소개하면서,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덧붙입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예술작품과 건물, 자료, 비밀 종교의식들에 대한 모든 묘사는 정확한 것이다." (All descriptions of artwork, architecture, documents, and secret rituals in this novel are accurate.) 이 문장은 처음부터 독자를 오도하기 위해 마련된 것입니다. 이 문장과 이어지는 소설의 구성적 특징 은 독자로 하여금 마치 등장인물들까지도 생존하는 인물들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레이 티빙이라는 역사학자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는 역사적 진실 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소수의 권위자이며, 그가 기독교에 대해 하는 말이 모두 진실인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마지막 문장이 얼마나 독자를 속이고 있는지는 조금만 생각해 보면 금세 드러납니다. 저자가 여기서 하고자 하는 말은 "소설에 언급 된 예술 작품과 건물, 자료, 비밀종교의식이 모두 실재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주는 인상은 그것들에 대한 해석도 모두 정확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저자로서는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면 그만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소설에 나오는 내용들이 진실과 다르다는 지적을 받고, 저자인 댄 브라운은 이렇게 변명합니다. 다음의 대화는 댄 브라운의 공식 홈 페이지에 올라있는 대화록에서 따온 것입니다.
질문하는 사람이 묻습니다. "이 소설 중 얼마만큼이 진실입니까?" (How much of this novel is true?)
댄 브라운의 대답입니다. "<다 빈치 코드>는 소설입니다.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뜻이지요.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행동들은 모두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만, 여기서 언급 된 예술작품이나 건물, 자료, 비밀의식 (예컨대, 다 빈치의 그림, 영지주의적 복음서들, 히에로스 가모스 같은 것) 등은 모두 실제로 존재 하는 것입니다. 가상의 인물들이 실재하는 이 대상들에 대해 해석하고 논쟁을 벌입니다. 가상의 인물들이 제기한 이론들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만, 독자는 스스로 이 이론들을 검토하고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제 바람은 이 소설이 '믿음', '종교' 그리고 '역사'라는 중요한 주제에 대해 토론할 수 있는 촉매가 되는 것입니다.
이어서 질문하는 사람이 다시 묻습니다. "하지만 '사실'이라고 하는 페이지는 이 소설 안에 담긴 단어 하나하나가 모두 역사적 사실이라는 주장을 하는 것 아닙니까?"
댄 브라운의 대답입니다. "'사실' 페이지를 보면, 당신은 이 소설에서 언급된 문서, 의식, 조직, 예술작품 그리고 건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임을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페이지는 등장인물들이 제기하는 이론에 대해 그 어떤 입장도 표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이론들을 해석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죠."
이 즈음에 이르니,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지금은 은퇴할 나이에 이르신 그 목사님은 젊은 후배들로부터 높은 존경을 받는 인격자요 사상가이십니다. 그런데 그분이 젊은 시절에는 술과 담배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목사 안수를 받을 때까지 그것을 끊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목사 안수를 받으려면 인터뷰를 거쳐야 하는데, 그분이 인터뷰를 위해 선배 목사님들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인터뷰 도중에 한 분이 그 목사님께 묻습니다. "그래, 술과 담배를 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그 목사님은 이렇게 답하셨답니다. "지금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대답으로 그분은 합격이 되었답니다. 그분은 지금 생각해 봐도 자신이 너무나도 기가막힌 대답을 했다고 농담을 하십니다. "지금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인터뷰 자리에서 하지 않고 있다는 뜻으로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은 그런 뜻으로 대답했고, 심사위원들은 "과거에는 했지만 지금은 끊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어찌 보면, 매우 교활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댄 브라운이 이 소설을 통해 시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에게는 기독교를 해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단지, 그는 자신의 소설이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수 있도록 구도를 짰을 뿐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하고, 많은 독자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소설과 영화의 성공으로 그는 거대 갑부의 자리에 올라갈 것입니다. 이 성공을 지속시키기 위해 그는 앞으로 또 어떤 음모설을 사용할지 자못 기대가 됩니다. 다음에는 이슬람교에 대해서 같은 시도를 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루시디 살만(Rushdie Salman)의 경우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죽음의 시>라는 책에서 그가 이슬람교를 비판했다는 이유 때문에 온 세계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살만에 대한 암살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그는 지금껏 숨어 다니고 있습니다.
4.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통 해 우리는 상업주의와 성공주의에 빠진 한 작가가 다른 사람들이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무참히 모욕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 한 예를 보았습니다. 댄 브라운이 가상의 등장 인물을 통해 기독교 신앙과 성경과 예수님에 대해 제기한 내용들은, 그것이 진실이라면, 마땅히 확인되고 공개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실도 아니요 진실도 아닌 것들을, 어떤 이권을 지키기 위해 은폐하고 날조하고 억압해 왔다는 혐의는 참으로 심각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우리의 모든 믿음의 근거가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렇게 등장인물을 통해 기독교 신앙이 모두 가짜인 것처럼 말해 놓고는, "아니면 말고!"라는 식으로 발뺌을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는 소설가로서의 상업적 성공보다는 문학가로서의 진실의 추구에 더 관심을 두었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그는 기독교의 기원에 대해 더 철저히 공부했을 것이고, 그랬다면 그는 이처럼 거짓 정보들을 흘려 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은폐해 온 역사의 진실을 그가 발견했다면, 소설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탐구를 통해서 밝혀야 했습니다. 바 로 이것이 이 소설에 대해 제가 가지는 불만이요 아쉬움입니다.
이 소설이 독자의 마음에 던져주는 기독교의 모습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어떤 음모와 모략과 수단이라도 가리지 않는 집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이 혐의를 받아들일 수 가 없습니다. 물론, 기독교가 2천 년의 역사 속에서 그런 잘못을 종종 범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대략 300년 이후부터 로마 제국의 기득권자가 되면서 그런 잘못은 더 빈번해졌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누스를 통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던 이 시기를 기독교의 타락의 전환점으로 해석합니다. 기독교회가 재산과 권력과 폭력을 손에 쥐면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기독교회가 혹은 그리스도인이 물질이나 권력이나 폭력에 의지하는 순간,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돈과 권력과 명예를 그토록 자주 경계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실수를 많이 범해 왔습니다.
저는 지난 수난 주간에 멕시코 선교지를 돌아보면서 유카탄 반도(Yukatan Peninsula)에 있는 이짜말(Isemal)이라는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이 타운은 전체가 '성전 도시'(temple town)였습니다. 프랜시스칸 성전(Templo Franciscano)이라는 가톨릭 성당을 중심으로 모든 집들이 빽빽이 연결되어 있고, 타운 전체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이 남미에 와서 세 번째로 세운 '식민 도시'(colonial city)라고 합니다. 저는 그 성당의 규모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성당의 주교 신부라면 하늘나라가 부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타운을 돌아보면서, "그래, 이 정도의 기득권을 지키자면, 교회가 폭력을 써서 힘 없는 민중들을 착취하고 학대하는 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회는 '모두', '언제나' 그랬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모두' 그렇게 이권에 눈이 어두웠던 사람들이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이권의 추구에 있지 않고,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듯, 진리를 찾아가는 일에 있습니다. 교회가 자주 잘못을 범해 왔지만, 지난 2천년 동안, 교회 안에는 언제나 진리를 찾고 그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용감한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교회는 그러한 예언자들의 피와 눈물로 인해 오늘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여전히 '복음의 장사꾼'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시퍼런 의식으로 진리를 추구하고 그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예언자들을 끊임없이 보내 주셨습니다. 그들은 어떤 기득권도, 어 떤 명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직 진리를 추구할 뿐이었습니다.
1517년, 당시 타락하고 부패했던 가톨릭 교회의 잘못된 교리들을 낱낱이 조사하여 95개 항목의 개혁안을 제시했던 가톨릭 수도사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기억하십시다. 그 일 이후로 그는 기득권을 수호하려던 교권으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위협에 자주 떨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성직을 빼앗겨도, 목숨을 잃어도, 진리를 떠날 수 없다는 결의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는 보름스(Worms) 의회에서 최후의 재판을 받기 위해 가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전능하고 영원하신 하나님, 제가 싸우는 이 싸움이 얼마나 이상한지요! …… 세상이 찾는 것은 오직 빛나고 강하 고 크고 높아 보이는 것 뿐! 제가 그것에 눈을 돌린다면 망해 버렸을 것입니다. 오 하나님, 오 하나님, 오 나의 하나님, 오 나의 하나님,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논리에 맞서 제 편에 서 주소서. 당신이 그래 주셔야 합니다. 사실, 이 싸움은 제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의 문제입니다. 저 자신만 따진다면 세상 권세 잡은 자들과 맞설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저도 편안하고 조용한 나날을 지내고 싶습니다. 이 싸움은 당신의 싸움입니다. 의롭고 영원한 것을 위한 싸움입니다. 하오니, 제 곁에 서 주소서……. 주님, 어디 계십니까? 제게 오소서. 제게 오소서. 저는 희생양처럼 이 의로운 일을 위해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 싸움은 당신의 의로운 뜻을 위한 것입니다. 저는 영원히 당신에게서 떠나지 않겠습니다. 비록 지금보다 더 많은 마귀들이 대적하더라도, 비록 당신이 지어 주신 제 몸이 소멸하더라도, 세상의 압력에 밀려 제 양심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도록 당신의 이름으로 허락하소서. (<기도선집>, 463-4쪽)
5.실로, 기독교 신앙은 댄 브라운이 말하는 것처럼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폭력으로 인해 오늘의 모습을 이룬 것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처럼 생명을 내걸고 진리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기독교 역사를 거쳐 끊임없이 나타났습니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이름을 남기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그들 은 진리를 알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억에 이름을 남기는 것에 대해 괘념치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하나님 앞에 이름을 남기는 일뿐 이었습니다. 진리를 따라, 진리의 방법으로 살아가 는 삶이 곧 하나님께 이름을 남기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따르고 진리를 살아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진리의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득이 아니라 진실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31절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나의 말에 머물러 있으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들이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는 사람들의 첫 번째 요건은 그분의 말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머물러 있다'라는 말은 지속성(continuity)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늘 배우고 늘 생각하여 그것이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제자로서의 자격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돈을 많이 법니까? 만사 형통합니까? 시험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시험에 합격 합니까? 실력이 없는데도 경쟁에서 이깁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렇습니다. 32절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는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며, 진리를 알게 되면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는 참 자유를 얻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핵심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참된 신앙에 대해 역설적으로 교훈을 던져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더 없이 명료하게 정의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진리, 진리,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들고, 오직 진리만을 찾아가는 진지한 구도자들로서 우리 자신의 정체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위해, 진리를 따라, 진리의 방법으로 살아가기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이 진리가 아니라면 언제라도 이 신앙을 버릴 용의가 있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 입니다. 이 믿음이 진리인 한, 어떤 희생도 무릅쓰고 이 길을 가려는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분명히 압니다. ‘다 빈치 코드 신드롬’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지만, 이것도 역시 한 번 지나가면 잊혀지는 해프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진리는 영원하지만, 호기심을 자극하는 헛된 이야기들은 오래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도전 앞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더욱 무장해야 할 것은 ‘논리’가 아니라 ‘진리’입니다. 이 소설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가지고 우리 신앙에 대해 도전해 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사실 여부를 따져 가며 대화할 필요가 있기는 하겠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진리의 사람이 되어 진리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진리는 논쟁으로 증명하기 어렵습니다. 삶으로 드러날 때 진리는 그 진가를 발휘하는 것이며, 그 앞에서 모든 논쟁은 힘을 잃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더욱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물러 있어 야 할 때입니다. 더욱 참된 제자가 되도록 힘써야 할 때입니다. 이 소설과 영화의 도전 앞에서 겸손 히 물러 앉아 스스로를 돌아볼 때입니다. 교회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도전을 받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존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찮아지고 우스워졌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교회가 진리의 공동체로서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의 사람들로서 사는 데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저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소설을 통해 오늘 우리를 깨워 일으키십니다. 무엇을, 왜, 믿는지를 분명히 알고, 그 믿음대로 살아가지 않으면 더 큰 도전도 있을 것임을 깨우쳐 주십니다. 이 깨우침 앞에서 겸손히 엎드려 깨질 준비가 된 사람은 과연 누구입니까?
진리의 주님,
헛된 호기심으로부터 저희를 구하소서.
아무 목적도 없는 논쟁을 즐기는 죄 된 습성으로부터
저희를 구하소서.
오직 주님의 말씀에 붙들리게 하시어
진리를 알고 진리를 살게 하소서.
그 무엇도
진리의 길에 선 저희의 걸음을 흔들지 않게 하소서.
진리의 영이시여,
이 시대의 정신을 붙들어 주소서.
거룩한 것을 조롱하는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이득을 찾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거룩한 것을 거룩히 여김으로 얻는 기쁨을
알게 하소서.
4주 연속설교: <다 빈치 코드 제대로 보기> (2)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 기들"(Godless and Silly Stories)
--디모데전서 4:6-10
다.
1.얼마 전에 <유다복음서>가 공개되어 관심의 초점이 되었습니다. 이 문서가 사람들의 관심을 끈 이유는, 예수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에 대해 전혀 색다른 입장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가룟 유다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단테의 <신곡>에 보면, 가룟 유다는 지옥에서도 가장 고통스러운 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 만큼,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팔아넘겨 죽게 한 유다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공개된 <유다복음서>를 보면, 가룟 유다가 스승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제자로 나와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 있는 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고백한 사람은 베드로입니다. 하지만 <유다복음서>에는 베드로 가 아니라 유다가 예수님의 정체를 알아차립니다. 유다가 예수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당신이 어디에서 오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바벨로라는 영원한 나라에서 오셨습니다. 저는 당신을 보내신 분의 이름을 입에 올릴 자격조차 없는 사람입니다.
이 유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그들 모두( 다른 제자들)보다 더 높아질 것이다. 너는 나를 담고 있는 사람을 죽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너는 열세 번째가 될 것이며, 다른 세대 사람들이 너를 저주할 것이다. 그렇지만 너는 그들 모두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 날이 이르면 그들은 네가 거룩한 세대로 올라간 것에 대해 저주할 것이다.
꽤 흥미로운 내용입니다. 가룟 유다는 스승을 배반한 사람이 아니라, 스승의 영혼을 육신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도와 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로 인해 오는 세대에서 유다가 사람들로부터 저주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하지만 결국 유다는 가장 높은 자리로 올려질 것이며,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가룟 유다에 대한 동정론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만 했다면, 그 중대한 사건을 가능하게 한 가룟 유다는 죄인이 아니라 공로자가 아닌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유다복음서>는 그 질문을 제기한 사람이 이미 2세기에도 살았었음을 증언해 줍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의 공개가 여러 사람들에게 매우 흥미롭고 반가운 일인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그러면 그렇지! 내 생각이 맞았잖아?"라고 반겼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이게 웬 일인가? 그러면 성경에 있는 유다에 관한 말씀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생각하며 혼란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그런 의문을 느끼면서, "왜 이런 문서가 이제 공개되었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하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2.<유다복음서>가 지금에 이르러서 공개된 것을 두고, 교회가 뭔가를 숨기기 위해 지금까지 감추어 두었는데, 누군가의 노력에 의해 드디어 일반에게 공개된 것이라고 상상하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소설 <다 빈치 코드>가 성경에 있는 네 복음서들에 대해 던지는 심각한 혐의입니다. 영국왕립역사학회의 전 회원이며 역사 문제에 있어 세계 최고의 권위자 중 하나로 등장하는 레이 티빙이 복음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왜곡은 이런 거야. 예수가 죽은 지 사백년이나 지나서 그의 지위를 [인간에서 신으로] 승격시켰기 때문에, 유한한 인간으로서 예수의 삶을 연대기로 기록한 문서들이 이미 수 천 개나 존재했다는 사실이야.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대담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콘스탄티누스는 알았지. 이런 배경에서 기독교 역사의 가장 심오한 순간이 튀어나온 거야. 콘스탄티누스는 새로운 성서 제작을 의뢰하고, 재정적으로 뒷받침했어.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특성을 얘기하는 복음서들은 모두 빼버리고, 그를 신처럼 묘사 한 복음서만을 골라 아름답게 윤색한 거야. 초기 복음서들은 금지되거나, 모아서 불태워졌소. (1권 355쪽, 원작 p. 234)
역사가들에게 다행한 일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멸실하려고 했던 복음서들 중 일부가 가까스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야. 후딘 사막에 있는 쿰란 근처 동굴에 숨겨진 사해의 두루마리가 1950년대에 발견되었어. 1945년에는 나그함마디에서 콥트어로 쓰인 콥트 두루마리가 발견되었고. 이 두루마리들은 진짜 성배 이야기뿐 아니라, 매우 인간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의 행적을 얘기하고 있어요. 물론 거짓 정보의 전통을 지키려는 바티칸은 이 두루마리의 공개를 강력히 막고 있지. 왜 바티칸은 그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현대의 성서는 정치적 의제를 내건 인간들에 의해 편집되고 꾸며진, 역사적 허구와 편견임을 두루마리들이 극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지." (1권 355-6쪽, 원작 p. 234)
여기서 레이 티빙은 복음서와 관계된 비밀들을 만 천하에 폭로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한 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까지 수 천 개의 복음서들이 있었다.
2. 콘스탄티누스는 주후 325년에 현재 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을 새로이 제작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도록 명령했고, 그 때까지 있던 모든 복음서들을 소각시키고 금지시켰다.
3. 가톨릭 교회는 그 이후 이 사실을 은폐해 왔다.
4. 1950년에 사해사본이 발견되고, 1945년에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면서 교회가 영원히 은폐하려던 복음서들이 발견되었다. 이 복음서들은 성경에 있는 네 복음서들보다 역사적으로 더 믿을만하다.
5. 새로 발견된 복음서들 안에는 성배에 관한 비밀이 담겨있다.
6. 가톨릭 교회는 이 복음서들의 출판을 반대하고 방해해 왔다.
7. 하지만 결국 이 복음서들은 공개되었고, 이제 진실은 밝혀지게 되었다.
이번 에 공개된 <유다복음서>는 나그함마디 문서에 포함된 영지주의 복음서와 같은 성격의 문서입니다. 이 문서가 발견된 지역도 나그함마디와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그러니까 레이 티빙의 말을 연장하면, <유다복음서>가 지금껏 공개되지 않은 것은 교회가 반대하고 방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관심 있는 분들은 National Geographic 홈 페이지에 들어가거나 이번에 출판된 The Gospel of Judas라는 책을 찾아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서가 이제야 공개된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첫째 원인은 그 문서가 골동품 암시장을 오랫동안 전전하였기 때문입니다. 둘째 원인은 이 문서가 학자들의 손에 넘어왔을 때, 마치 퍼즐 조각처럼 갈기갈기 찢겨 있었기 때문에 원상태로 복구하느라고 여러 해가 걸렸습니다. 교회가 이 문서의 공개를 반대한 일은 없습니다. 가톨릭 교회든 개신교회든, 이제는 학자들의 연구를 막을 아무런 권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유다복음서>와 관련하여 교회 측의 음모는 전혀 없었습니다.
3.위에서 레이 티빙이 말한 내용을 한 번 다시 되짚어 보십시다. 이 부분에서는 설교가 강의처럼 될 텐데, 꼭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들이니,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중 혹시 "내가 뭐 그런 것까지 알아야 하나?"하고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이젠 아셔야 합니다. 그런 문서들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는 몰라도 되었지만, 이제 그런 문서들이 발견되고 번역되어 어느 서점, 어느 도서관을 가든지 구해 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므로,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에 있는 복음서들과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이 어떻게 다른지를 아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에 빠지기 쉽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질문해 오거나 도전해 오는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을 정도의 기본 지식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시리즈 설교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첫째,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이전까지 수 천 개의 복음서들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 수 천 개'가 있었다는 말은 과장입니다. 역사적인 증거로 볼 때, 꽤 여러 개의 복음서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신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 네 개의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말고도 여러 개의 복음서들이 있었습니다.
둘째, "콘스탄티누스는 주후 325년에 현재 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을 제작하여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도록 명령했고, 그 때까지 있던 모든 복음서들을 소각시키고 금지시켰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명백한 역사의 왜곡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역사적 증거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 정경 문제에 대해 한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입니다.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이라는 도시의 교회들을 위해 50권의 성경을 필사해 달라고 부탁하고는 그것을 위해 재정적인 지원을 했을 뿐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성경에 있는 네 복음서들은 후대에 날조 된 것이고 초기에 기록된 복음서들은 모두 소각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믿을만한 학자 중에 이 주장에 동의할 사람은 한 사람도, 다시 강조합니다,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성경 안에 있는 네 개의 복음서가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복음서들보다 역사적으로 더 오래되었고 더 믿을만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셋째, "가톨릭 교회는 그 이후 이 사실을 은폐해 왔다." 가톨릭 교회가 요즈음 공개되고 있는 복음서들을 반대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그 복음서들이 담고 있는 신학이 초대 교회로부터 이단으로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아주 위험한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복음서들의 사상에 반대 한 것이지, 그 문서의 공개를 방해하려 한 적은 없습니다.
넷째, "1950년에 사해사본이 발견되고, 1945년에 나그함마디 문서가 발견되면서 교회가 영원히 은폐하려던 복음서들이 발견되었다. 이 복음서들은 성경에 있는 네 복음서들보다 역사적으로 더 믿을만하다." 여기에도 역사의 왜곡이 있습니다. 1950년에 발견되어 공개된 '사해사본'에는 복음서가 한 권도 담겨있지 않습니다. 사해 근처의 키르벳 쿰란이라는 곳에서 발견된 문서들은 구약성경과 구약 외경뿐입니다. 신약성경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댄 브라운이 이 사실을 알고도 사해사본을 여기에서 언급했다면 분명한 증거 조작이요, 모르고 이렇게 했다면 역사 소설을 쓰는 사람으로 연구를 너무 부실하게 했다는 증거입니다.
1945년에 발견된 나그 함마디 문서에는 오늘 우리의 신약성경 안에 없는 복음서들과 편지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 문서들은 영지주의라는 초대 교회의 이단 종파에서 만든 것입니다. 이 문서들이 쓰인 시기를 아무리 이르게 잡아도 주후 15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약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은 대략 주후 50년부터 90년 사이에 쓰인 것들입니다. 역사적 가치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4. 다섯째, "새로 발견된 복음서들 을 보면 성배에 관한 비밀이 담겨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배에 관한 비밀'은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님이 결혼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댄 브라운이 사용한 복음서는 <빌립복음서>와 <마리아 복음서>입니다. 두 복음서 모두 150년 이후에 쓰인 것들입니다. <빌립복음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들이 나옵니다. <빌립복음서>는 누군가가 예수님의 제자 빌립의 이름을 빌어 창작한 책입니다.
"항상 주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이 셋 있었다. 그의 모친 마리아, 마리아의 누이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 그들은 막달라 마리아를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his lover)이라고 불렀다." (원본 32절)
여기서 '주님이 사랑하시는 사람'이라는 말이 영어로 his lover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영어 표현으로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의 애인이라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을 보면, 열 두 제자 중 한 사람 즉 세배대의 아들 요한을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요 13:23; 19:26; 20:2; 21:7, 20)라고 부릅니다. 댄 브라운과 같은 논리로 한다면,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동성애를 가지고 있었다고 비약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엉터리없는 논리입니까? 또 다른 구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말라버렸다고 말하는 지혜는 천사들의 어머니이며, 그리스도의 짝은 막달라 마리아다. 주님은 다른 모든 제자들보다 마리아를 더 사랑하셨고, 그녀의 [……]에 입을 맞추곤 하셨다. 다른 [ ……]은 그분을 [……]했다. 그들은 그분에게 말했다. "왜 당신은 우리 모두보다 [……] 하십니까? 주님이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원본 55절, 소설 2권 15쪽, 원 작 p. 246)
여기서 괄호 안에 둔 부분은 원본에서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입을 맞추곤 하셨는데, 어디에 맞추었는지는 본문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뺨에 했을 수도, 이마에 했을 수도, 혹은 입술에 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디에 했거나, 초대 교인들에게 있어서 서로 입을 맞추는 것은, 지금 중동 사람들에게서 보듯, 일상적인 인사입니다. 댄 브라운은 이 구절을 옮겨 적으면서 "입술에 자주 키스하곤 했다"고 덧붙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증거를 조작한 것입니다. ' 짝'이라는 말이 '연인' 혹은 '애인'을 뜻한다는 주장에도 근거가 없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을 가까이 따랐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게다가, 댄 브라운은 이 부분을 인용하면서 마지막 구절을 삭제합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더 사랑한다는 제자들의 불평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막달라 마리아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냐?" 왜 댄 브라운이 이 구절을 생략했을까요? 이 구절은,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특별하게 사랑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댄 브라운이 인용하고 있는 또 하나의 역사적 증거는 <마리아 복음 서>입니다. 누군가 막달라 마리아의 이름을 빌어 창작한 책입니다. 이 복음서에도 예수님이 다른 누구보다도 막달라 마리아를 더 사랑하신다는 구절이 두 군데 나옵니다. 한 군데를 보면, 베드로가 막달라 마리아를 만나 이렇게 말합니다.
"자매여, 우리는 주님께서 다른 여자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하신 줄 압니다. 그러니 당신이 기억하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말해 주시오. 당신은 아는데 우리는 알지 못하는 말씀 말이오. 우리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씀 말이오."
그러자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만이 알고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해줍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예수님은 영락없는 영지주의자입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막달라 마리아의 말을 거부합니다. 그것을 옆에서 본 레위가 베드로를 책망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 당신은 늘 그렇게 성마르지. 당신이 저 여자를 원수처럼 공격하는 것을 내가 보고 있네. 그러나 주님이 그녀를 영예롭게 하셨는데, 그녀를 거부하려는 당신은 누구란 말이오? 진실로 주님은 마리아를 매우 잘 알고 계시오. 그래서 그분은 우리보다 그녀를 더욱 사랑했던 것이오." (소설 2권 17-18쪽, 원작, p. 247)
이것이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했으며 사라라는 여자 아이를 낳았다'는 이 소설의 핵심 주제에 대한 역사적 증거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추측과 비약과 왜곡을 섞지 않고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결론입니다. <빌립복음서>와 <마리아의 복음서>가 이단적은 사상으로 물들었을 뿐 아니라, 아무런 역사적 진실을 담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결론은 더 더욱 믿을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 안에 있는 네 개의 복음서보다 이 두 개의 복음서가 더 믿을만하다는 주장은 역사가들에게는 너무도 어이없는 일입니다.
복음서에 대한 <다 빈치 코드>의 주장이 두 개 더 남았습니다. 여섯째 주장은 "가톨릭 교회는 이 복음서들의 출판을 반대하고 방해해 왔다"는 것인데, 그런 일이 있지도 않았고, 그런 일이 이제는 가능하지도 않습니다. 일곱째 주장은 "하지만 결국 이 복음서들은 공개되었고, 이제 진실은 밝혀지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 복음서들의 공개로 인해 밝혀진 진실은 초대 교회를 위협했던 영지주의적 기독교에 대한 진실뿐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그 어떤 진실도 이 복음서들은 담고 있지 않습니다.
5.이렇게 보면, 신약성경에 있는 네 개의 복음서들과 최근에 발견된 복음서들에 대한 <다 빈치 코드>의 입장이 얼마나 잘못 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자 댄 브라운은 역사적 가치가 전혀 없는 복음서들을 가장 믿을만한 자료로 둔갑시키고, 그 대신 가장 믿을만한 네 복음서들을 날조된 것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씌웁니다. 게다가, 몇 개의 모호한 구절을 확대하고 변조시켜서 마치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한 것이 사실인 것처럼 독자를 오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의 관심을 <다 빈치 코드>로부터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에게로 돌려 보십시다. 이 복음서들을 두고 저는 이런 질문을 해 봅니다. "왜 후대에 이런 복음서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신약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과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은 어떻게 다른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많은 말이 필요합니다만, 오늘은 설교의 결론으로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려 합니다. 신약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드러내는 일에 필요한 말씀과 행적만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반면,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쓰인 책입니다.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을 여러분은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굳이 돈을 주고 살 필요는 없으니,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서 1시간만 앉아서 그 복음서들을 읽어 보십시오. 신약성경의 복음서들과 그 내용과 질에서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느낄 것입니다.
제가 지난 10년 동안 신학교에서 신약성경을 가르쳐 오면서 자주 받은 질문이 "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자라실 때의 이야기가 없는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참 궁금한 일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보면, 태어나 실 때의 이야기에서 곧바로 공생 애 이야기로 건너뜁니다. 누가복음에 12살 때의 이야기가 하나 기록되어 있을 뿐입니다.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은 아예 태어나실 때에 관한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러니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30여 년 동안 어떻게 사셨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평생 그것을 추적하고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 은 예수님이 인도에 가서 수련하고 오셨다고 추측합니다. 뭐, 아무 증거 없으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하고 싶은 대로 추측하고 말하시면 됩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믿을지가 의문입니다.
저는, 30여 년 동안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드릴 수 없지만, 왜 그것에 대한 정보가 다 사라졌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대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사생애가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관심이 있었다 해도, 그 정보가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야기들은 사사로운 자리에서 심심풀이로 전해진 것이 아니라, 초대 교인들이 박해를 무릅쓰고 전도하고 교육하는 과정에서 전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어진 시간 안에 가장 의미 있고 핵심적인 이야기들만을 전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30년 동안 사셨던 이야기들은 그들의 신앙적인 목적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해지지도 않았고, 기록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런 일에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가면서 이 긴장감이 서서히 누그러들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부를 누리기도 하고 권력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시간도 생기고, 돈도 생기고, 마음의 여유도 생겼습니다. 동시에 신앙적인 열기도 식어지고, 믿음의 열정도 식어졌습니다. 예수님의 사생애에 대한 호기심은 이런 상황에서 고개를 들었을 것입니다. 공생에 동안에 하신 말씀과 행적을 연구하며 그분의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를 행함으로 제자답게 살아가는 일에도 시간이 부족 함에도 불구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은 그것보다는 호기심을 채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고 더 많은 시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호기심을 채움으로 이득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미 죽은 지 100년도 넘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이름을 빌어 복음서를 써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는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물론, 최근에 발견된 복음서들이 예수님의 사생애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생애에 대해 기록한 복음서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서들은 저자들이 전하고자 하는 사상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실제 말씀과 행적에 기초한 기록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상을 전하기 위해 창작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공생애를 다루는 것이든, 사생애를 다루는 것이든, 대부분의 외경 복음서들은 댄 브라운이 이 소설을 쓴 것과 비슷한 의도로 후대에 창작된 것들입니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이익을 얻으려는 의도이거나, 예수님의 권위를 빌어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려는 의도이거나, 둘 중 하나였습니다.
6.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하나 발견합니다. 지금 불고 있는 이 '다 빈치 코드 신드롬'은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헛된 호기심으로 이끌어 신앙을 타락시킬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공개된 복음서들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믿음은 이단적인 경향으로 물들었을 뿐 아니라, 진리에 대한 열정과 헌신에 있어 아주 부실합니다. 그들은 ‘진리’보다는 ‘소문’에 더 관심이 있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일보다는 그리스도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다빈 치 코드 신드롬' 은 우리를 그같이 타락한 믿음으로 오도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뒤집어 보면, 우리가 그런 헛된 호기심에 이끌리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 안일하고 편한 상황에서 살고 있다는 뜻도 됩니다. 정말, 미국은 너무 편하고 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자극적인 것이 없이는 삶이 권태로워 살기 어렵습니다. 그런 욕구가 있음을 아는 사람들은 영화로, 책으로, 연극으로 그 욕구를 만족시키려고 노력합니다.
댄 브라운은 " 당신의 소설이 이렇게 인기를 누릴 줄 예상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 전혀 뜻밖의 일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묻고 싶은 질문은 이것입니다. "왜 이 소설이 이토록 기록적인 판매고를 기록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정답은 없겠지만, 저는 두 가지의 이유를 생각합니다. 첫 번째 이유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그동안 잘 못 행동해 왔기 때문에 기독교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고 헐뜯는 일에서 재미를 느끼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다는 뜻입니다. 이 상황은 우리 스스로가 자초한 잘못입니다. 모든 교회가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깊이 뉘우쳐야 할 대목입니다. 두 번째의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편해지고 안일해져서 진리를 찾고 진리대로 살아가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헛된 호기심만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 설교 시리즈를 들으면서 혹시나 "아니, 하루하루 살아가기도 힘든 세상에 '다 빈치 코드 연속 설교'가 무슨 말이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이 계시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호기심이나 채우는 헛된 이야기에 이 귀한 시간을 보낼 여가가 없습니다. 오늘 디모데전서 4 장 7절과 8절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을 물리치십시오. 경건함에 이르도록 몸을 훈련하십시오. 몸의 훈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 훈련은 모든 면에 유익하니,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해 줍니다.
만일 제가 이 헛된 이야기를 즐기자고 이런 시리즈 설교를 마련했다면, 저도 타락했다는 증거요, 목사로서 여러분을 오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행이도, 제가 이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는 것을 그것을 즐기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기독교에 덮어씌우고 있는 것을 벗기고 진실을 확인하기 위함입니다. 이 일은 지금 이 시기에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의 말씀처럼,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들에 마음을 주지 마십시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복음서들을 탄생시킨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할 수 있는 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안에 거하여 참된 제자가 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그 진리를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 일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아무리 흥미진진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이런 헛되고 해로운 이야기에 시간을 쏟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과 장차 올 세상의 생명에 유익한 것은 바로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음을 단단히 지킵시다. 허망한 것, 부정한 것, 악한 것, 거짓된 것, 추한 것, 야한 것, 어두운 것--이런 것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다. 오직 우리의 마음을 참된 것, 깨끗한 것, 선한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 정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 밝은 것에 두십시다. 세상에 가장 참되고 깨끗하고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답고 유익하고 밝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그분의 말씀입니다. 우리 마음을 거기에 묶어 두십시다. 그리하여 우리 마음이 온통 그렇게 변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삶 전체가 그렇게 변하도록, 그리하여 우리의 표정과 말과 행동까지도 온통 그렇게 변하도록 매일 정진해 가십시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부름입니다.
오 주님,
저희 마음을 참된 주인이신 주님께 바칩니다.
사로잡아 주소서.
결박하여 주소서.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저희 마음을 다스려 주소서.
아멘.
4주 연속설교: <다 빈치 코드 제대로 보기> (3)
"우리가 추구해야 할 신비"(Mystery That We Should Seek)
--골로새서 2:1-5
1. 소설 <다 빈치 코드>가 성경에 대해 제기하는 가장 심각한 혐의는 지금 우리 성경 안에 있는 네 복음서들이 특정한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개작되고 날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와 관련된 '가장 은밀한 비밀'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에 아무런 역사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을, 저는 두 번째 설교에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오늘 저는 복음서들과 관계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 두 가지를 말씀드리려 합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비밀은 제가 상상하고 꾸며낸 것이 아니라, 충분한 역사적 증거가 있는 비밀입니다. 이미 역사가들은 알고 있었는데, 일반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비밀’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첫 번째 비밀은 대략 주후 170년에서 175년 경에 타시안(Tatian)이라는 초대 교회 지도자가 네 복음서들을 한 데 묶어 '통합복음서'를 만든 적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때, 이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들이 여러 교회에서 권위 있는 성경으로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네 복음서들을 서로 비교해 보면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자주 있다는 것입니다. 그 차이점들을 자세히 연구하면 충분히 납득이 되지만, 그냥 피상적으로 읽는 사람에게는 그 차이점들이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드리고 있는 주기도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6장 9-13절에 나오는 주기도문과 누가복음 11장 2-4절에 나오는 주기도문이 꽤 다릅니다. 이런 차이점들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때론 의아스럽고, 때론 혼란스럽고, 또 때론 당황스럽습니다.
이런 문제들을 만나다 보면, 네 복음서를 하나로 묶어서 '통합복음서'를 만들고 네 복음서들은 모두 제거시키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듭니다. 그렇게 하면 믿는 사람들에게 더 이로울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주후 160년 경에 타시안이라는 교회 지도자가 바로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디아테싸론'(Diatessaron)이라고 하는 '통합복음서'를 만들었습니다. 불행히도, 이 단권복음서의 원본이 남아있지 않습니다만, 아랍어 본문과 시리아 본문은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그 원래 모습이 어땠는지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유세비우스(Eusebius)라는 교회 역사가의 기록을 보면, 이 단권복음서는 만들어진 지 200여년이 지난 다음에도 여러 교회에서 유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는 결국 단권복음서라는 간단한 해법을 버리고 네 권의 복음서를 성경으로 택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저는 이 결정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결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결정은 초대 교회와 고대 교회의 정직성을 증명해주는 사건이라고 생각 합니다. 만일 고대 교회가 <다 빈치 코드>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뭔가를 은폐하고 조작하는 조직이었다면, 당연히 단권복음서를 택하고 나머지 네 복음서들을 폐기시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때로는 혼란을 주고 때로는 당황스럽게도 하는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네 개의 복음서를 그 대로 묶어 성경으로 편찬하는 편을 택했습니다. 당장의 편리를 위해 진실을 해쳐서는 안 되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믿습니다.
2.복음서와 관계하여 잘 알려져 있지 않는 두 번째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단권복음서 '디아테싸론'이 만 들어질 즈음에, 마르시온(Marcion)이라는 또 다른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네 복음서를 개작하는 일에 손을 댔다는 것입니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Gnosticism)라고 부르는 사상을 기독교에 접목시키는 일에 큰 역할을 했고, 이 일로 인해 이단자로 배척당한 인물입니다.
자, 여기서 잠시, '영지주의'라는 사상에 대해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부터 지중해 연안에 유행하던 종교 철학 사상입니다. 물질과 육신을 악한 것이라고 믿고, 참된 구원은 선한 영혼이 악한 육체로부터 해방되는 데 있다고 믿는 사상입니다. 영혼이 육체로부터 해방되어 구원을 얻으려면 '영적인 지식' 을 얻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상을 영지주의라고 부릅니다. 이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영적인 지식을 찾아 이 종교, 저 종교, 이 지도자, 저 지도자를 전전합니다. 그리고는 뭔가 해답을 발견했다 싶으면 그 종교를 자기들의 사상으로 변질시켰습니다. 그래서 지중해 연안에 있던 거의 모든 종교들이 영지주의 때문에 골치를 앓았습니다.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는 물질과 육신을 악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물질과 육신을 전부로 여기지 말고 영적인 차원이 있음을 믿으라고 가르치기는 하지만, 물질과 육신을 악하다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처음부터 영지주의 사상을 경계했습니다. 신약성경의 증거로 볼 때, 이미 50년에서 60년 사이에 영지주의적인 사상이 기독교 안에 침투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복음이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든 이미 영지주의 사상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영향력을 완전히 떨쳐버리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마치, 기독교 복음이 우리나라에 전해질 때, 아주 쉽게 미신적인 믿음과 섞였던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물질과 육신은 악하고, 영혼이 육신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구원이며, 영적인 지식을 얻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는 것만으로는 그리 큰 문제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은 결과, 그 사상을 추종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의 극단적인 행동으로 빠졌습니다. 영적인 지식을 깨닫지 못해서 아직 해방되지 않았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을 무참 히 학대하는 금욕주의로 흘렀습니다. 악한 육신을 학대하는 것만이 영혼을 잠시나마 자유하게 해 주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지를 얻어 이미 해방되었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육신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미 얻은 구원을 해칠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 결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특히 성적인 타락이 심했던 당시 사회에서 이 사람들은 마음껏 성적 부도덕을 즐겼습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들의 자유요 특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초대 교회가 영지주의를 반대했던 것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이같은 이단적인 경향들은 기독교 2천년 역사 중에 끊임없이 이어져 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이런 사상에 빠져 버립니다. 제가 그 동안 만났던 사람들 가운데도 "나는 이미 초보적인 수준을 뛰어 넘었으니, 도덕률에 저촉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욕구를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어떤 종파에 속아서 그렇게 믿고 행동한 것이 아니라, 혼자 책을 읽고 생각하다가 그렇게 오도된 것입니다.
반면, 그렇게 가르치는 종파도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서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 왔고 지금도 그 영향력을 계속적으로 행사하고 있는, 소위 '구원파'가 그 예입니다. 이 종파에서는, 사람이 일단 죄 사함의 원리를 깨달아 '구원'을 받으면 양심의 모든 죄책감에서 해방을 받기 때문에, 그 다음부터 하는 거짓말이나 육신적인 죄는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구원은 영혼이 받았으므로 육으로 하는 것은 영혼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번 깨달았으면 다시 범죄도 없고, 죄를 지어도 죄가 아니며, 생활에서 짓는 죄도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자유를 약속하는 '복음'처럼 들리지만, 실은 초대교회로부터 기독교가 싸워 온 이단 사상입니다.
3.마르시온은 기독교를 영지주의 사상으로 변질시켜 꽤 많은 추종자들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정통 기독교의 도전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정통 기독교가 자기의 추종자들을 빼앗아가지 않도록 뭔가 장치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르시온은 경전을 편집하여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가 만든 성경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구약성경은 모두 금지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물질과 육신을 만든 악한 신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기독교인들이 읽고 있는 네 개의 복음서 중에 '구약의 악한 신'과 관련성이 깊은 마태복음서, 마가복음서, 요한복음서를 제외시켰습니다.
셋째, '구약의 악한 신'과 가장 관련성이 적은 누가복음서만을 성경으로 택하되, 그 내용 중 '구약 의 악한 신'과 관련되는 내용들은 모두 삭제했습니다.
넷째, 바울이 쓴 편지들을 하나로 묶되, 역시 '구약의 악한 신'을 언급하고 있는 부분을 모두 삭제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마르시온은 '복음서와 사도서'(The Gospel and the Apostle)라는 '그들만의 성경'을 편집하게 됩니다. 이것이 그 동안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진짜 비밀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복음서에 손을 댄 사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아니고, 고대 교회 감독들도 아닙니다. 영지주의의 지도자였던 마르시온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들의 사상을 담은 복음서와 편지들을 창작해 냈습니다. 나그함마디(Nag Hammadi)에서 발견된 복음서들은 바로 이런 과정에서 창작된 것들입니다. <다 빈치 코드>에서 사용하고 있는 '빌립 복음서'와 '마리아 복음서' 그리고 다른 모든 문서들도 이 점에서 마찬가지입니다. 이 문서들은 예수님을 영지주의자로 만들고, 기독교를 영지주의로 만들기 위해 창작된 것들입니다.
자, 사정이 이렇다면, 어디에 더 믿음을 두시겠습니까? 단권복음서를 물리치고 살아남은 네 복음서입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사상을 위해 철저하게 재편되고 창작된 영지주의 복음서들입니까? 단순한 해법을 거부 하고, 있을지도 모를 혼란을 감수하고, 진실을 선택한 정통 교회입니까? 아니면, 자신들의 사상대로 예수님을 재해석한 영지주의입니까?
<다 빈치 코드>에서 자주 나오는 말 중, 이런 말이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가 쓰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승리한 사람이 역사를 쓰면서 자신을 진리의 사람으로 정당화시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말하는 진리의 사람이 언제나 진리의 사람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정통 기독교가 승리자가 된 것은 진리의 편에 서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권력의 힘을 빌었기 때문이고, 따라서 "정통 기독교는 진리이고, 영지주의는 이단이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통 기독교와의 싸움에서 밀려난 영지주의적 기독교가 더 진리에 가까웠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영지주의가 이단으로 밀려난 것은 정통 기독교인들과의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사상 논쟁을 하던 두 편 중 한 편이 힘을 얻어 다른 편을 이단으로 몰아세우고 단죄하고 박해하는 일들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아니,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요즘도 자주 신학교수들이 이단으로 몰려 해직당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신학 사상에 아무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교권을 가진 사람들이 경쟁 세력을 축출하는 수단으로 '이단'이라는 말을 악용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하지만 모든 이단 논쟁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지난 1 세기 동안 한국 교회는 수많은 이단 종파와 씨름을 해 왔습니다. 그들 중, 실제로 기독교의 사상을 심각하게 왜곡시키고 사람들을 오도하여 패가망신하게 하는 사이비가 많이 있었습니다. 그 사이비 종파들이 모두 힘이 없어서 이단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위험 한 생각입니다.
4.제가 소설 <다 빈치 코드>를 읽고 느끼는 염려 중 하나가 이런 것입니다. 이 소설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사실들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왜곡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만, 이 소설의 또 다른 차원에 문제가 있습니다. 이 소설은 전체적인 흐름을 통해 독자들에게 영지주의와 유사한, 아주 위험한 종교 사상을 퍼뜨릴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형편없이 날조된 기독교의 대안은 '시온 수도회'(the Priory of Sion)가 행하고 있는 신비적인 종교의식인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일(4월 30일) 저녁, CBS에서 방영한 60 Minutes라는 보도 프로그램에서 <다 빈치 코드>에 대한 보도를 했습니다. 여러 교우들께서 제게 연락을 하시어, 잊지 않고 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보도의 초점은 “시온수도회가 실재하는 것이냐?”에 있었는데, 조사 결과, 댄 브라운이 중세기부터 존재했다고 믿는 이 시온수도회는 삐에르 쁠랑따르(Pierre Plantard)라는 한 공상가에 의해 1970년대에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시온수도회의 수장(grand master)였다는 것도 이 공상가가 만들어 낸 것이었습니다. 저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시온수도회의 정체에 대해 참 궁금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런 단체는 존재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역사 소설이 기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기둥이 무너져 버린 셈입니다. 그 프로그램을 만든 사람이 댄 브라운을 인터뷰하려 했지만, 응답을 하지 않아서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자, 다시 소설의 내용으로 돌아가 보십시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인 소피(Sophie)는 우연히 시온수도회의 수장인 자기 할아버지가 다른 추종자들과 행한 비밀스러운 종교 의식(a secret religious ritual)을 목격하게 됩니다. 외부인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남성 회원들은 검은색, 여성 회원들은 흰색의 가면과 가운을 입고 노래하며 춤을 춥니다. 그러는 가운데, 소피의 할아버지와 어느 여인이 중앙에서 성적인 관계를 가집니다. 이 모습을 본 소피는 도망쳐 나오고, 그 이후로 할아버지를 더 이상 만나지 않습니다.
소피는 역사학자 레이 티빙을 통해 그 의식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그에 의하면, 헬라어로 '히에로스 가모스'(Hieros Gamos)라고 하는 이 집단적인 성교 의식은 변태적 행위가 아니라 아주 신성한 의식입니다. 성욕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정신적이고 영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온 신비로운 전통으로서, 신을 경험하는 가장 확실한 통로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생명을 창조 하는 여성의 능력은 여성을 신처럼 신성하게 만들고, 따라서 성적인 관계를 통해 남성은 그 여성을 통해 영혼의 완벽함을 되찾고 신과 접촉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신을 경험하는 통로를 독점하기 위해 이 의식을 금지시키고, 성을 더럽고 불결한 행위로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이같은 설명을 듣고 나자, 소피는 할아버지가 어느 여인과 연출했던 그 부정하고 추한 장면이 신성하게 느껴졌습니다.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동정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chapter 74, 74장).
제가 염려하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하시겠습니까? 이 소설은 분별력이 없는 젊은 독자들을 신비주의적이고 혼합주의적이며 반윤리적이고 반사회적인 종교 사상으로 오도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날조와 은폐 와 위선으로 얼룩진 제도적 종교를 버리고, 모든 사회적 규율과 도덕률을 초월하여 자유를 누리도록 돕는 신비 종교를 찾도록 오도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히에로스 가모스’라고 묘사되어 있는 그 비밀 성교의식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가장 성스러운 종교 의식이 아니 라, 고대로부터 거의 모든 종교를 타락시켰던 병적인 타락 현상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대개의 사이비 종파들은 성적인 부도덕을 거룩한 것으로 미화시키고, 마침내는 집단적인 혼음 사건으로 파국을 맞곤 했습니다. 오늘 날에도, 소위 '수준 높은 영성' 혹은 '열린 영성'을 표방하면서 사람들을 호도하여 타락에 빠지도록 유혹하는 사이비 종교 운동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특히, 제도적 종교가 점점 매력을 잃어가는 이 미국 안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이 소설이 이 같은 사이비 영성 운동에 대한 경계심을 허물어뜨림으로써 젊은이들을 오도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점을 심각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말을 하면, "아, 그건, 수준 낮은 사람들이 범한 실수이고, 우리같이 수준 높은 사람들 은 본래의 의미를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문제는 그 교만입니다. 그 영적 교만이 바로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참된 종교는 때로 도덕을 초월하지만, 도덕을 역행하지는 않습니다. 참된 종교는 때로 사회 규범(social norm)을 초월하지만, 그것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참된 종교는 절대 진리를 추구해 가면서 사회의 도덕과 규범을 깨우고 변화시키지, 그것을 무참하게 짓밟지 않습니다. 참된 종교는 역사를 초월하지만 역사로부터 도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거대하고 거시적인 비전을 마음에 품고, 역사 속으로 들어가 역사를 변혁시키기 위해 헌신합니다. 그것이 참 종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한 장소에 자신들만의 천국을 만들어놓고 비밀스러운 의식을 행하는 것은 참된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는 일반 사회와 분명히 다릅니다. 하지만 종교가 바깥 사회로부터 뭔가를 숨기는 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 종교는 이미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기독교는 분명히 신비의 종교입니다만, 그 신비는 드러내고 나눠야 할 신비지, 감추고 은폐할 신비가 아닙니다. 그런 신비를 추구한다는 것은 이미 타락했다는 증거입니다.
5.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여러분에게 참된 신비, 참된 비밀을 전하고자 합니다. 그 비밀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감추어져 있던 것도 아닙니다. 언제나 우리가 알고 있었고 들었던 것인데, 다만 우리가 그것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도 우리 중에 일하고 계시며, 모든 진리가 그분에게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읽은 골로새서의 말씀으로 눈을 돌리겠습니다. 2절을 보면,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가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선교하고 있는 이유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울 사도가 이 글을 쓸 때, 영지주의의 위협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아십니까? 영지주의자들은 '비밀스러운 지식' 즉 '영지'를 추구하여 깨달으라고, 그것이 참된 자유와 구원의 길이라고 말하면서 골로새 교인들을 현혹시키고 있었습니다. 이 유혹에 대해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비밀'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단언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지를 찾아, 신비를 찾아, 비밀을 찾아 우왕좌왕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마주하고 있던 위험이 오늘날 우리가 혹은 우리 자녀 세대가 마주하고 있는 위험과 얼마나 비슷한지요! 영지주의의 위협은 시대를 지나면서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고 더 논리적이며 매력적인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 교묘한 말로써 우리를 속여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일을 방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알지 못하면, 우리의 삶도 온전한 모습을 잃어버립니다. 겉으로는 '깨달음을 얻는 자' 혹은 '구원받은 자' 혹은 '수준 높은 자'라는 허울을 표방 하고, 속으로는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만듭니다. 그렇게 사는 것을 자유의 삶으로, 구원의 삶으로, 깨달음의 삶으로 미화시킵니다. 소위 '깨어있는 종교인들' 가운데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신에게 진실하고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명분에 자신을 내어주고는 속으로 은밀한 쾌락을 즐깁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사이비 영성의 위험입니다.
바울 사도는 5절에서 "나는 육체로는 비록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여러분과 함께 있으며, 여러분이 질서 있게 살아가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의 믿음이 굳건한 것을 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서 있게'라는 말과 '굳건한'이라는 두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단어는 군사 용어입니다. 적군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대오를 흐트르지 않고 견고하게 서서 대항하는 모습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아주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적군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상황입니다. 이 공격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가장 우선적인 대책은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아 대오를 다시 짜고, 우리가 선 자리에서 견고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참된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붙들고, 그분의 진리 안에서 참된 삶을 살아가면, 이 공격은 결국 멎을 것이고, 진리의 빛은 다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일반 운동 경기에서는 "공격이 최선의 방어다"라고 말하지만, 진리의 싸움 에서는 "방어가 최선의 공격이다"라는 말해야 합니다. 참된 진리 위에 굳게 서서 그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공격은 없습니다.
여러분, 이 혼란한 시대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 바울 사도가 권고한 것처럼, 하나님의 비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고, 참된 그리스도인로서의 온전한 삶에 더욱 정진하는 것이 가장 바른 길이요 가장 효과적 인 대책이 아닐까요? 하나님은 이렇게, 드러나지 않게, 우직하게, 진실하게 진리의 길을 가는 성도들을 이 시대에 더 간절히 찾으시는 것 아닐까요?
하늘의 비밀이신 주님,
저희를 흔들려는 교묘한 속임수에 흔들리지 않게 도와주소서.
거짓 비밀을 찾고
거짓 신비에 홀리지 않게 하소서.
참된 비밀이신 주님을 찾고
주님 안에서의 신비로운 삶에 마음을 두게 하소서.
영적 교만이 있다면 허물어 주시고
영적 불안이 있다면 고쳐 주소서.
주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입어
우직하게, 겸손하게, 진실하게, 정직하게
진리의 길을 가게 하소서.
4회 연속설교 <다 빈치 코드 제대로 보기> (4)
"우리를 깨우는 나팔소리"(A Clarion Call That Wakes Us)
--빌립보서 2:6-11
1."성서는 하늘에서 팩스로 도착 한 것이 아니야"(1권 350쪽). "The Bible did not arrive by fax from heaven"(원작, p. 231). 소설 <다 빈치 코드> 에서 역사학자 레이 티빙경이 한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성서는 신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란 말일세. 구름에서 기적처럼 떨어진 것이 아니라, 격동의 시기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역사적 기록이란 말이지. 그리고 그것은 무수한 변형과 첨가, 개정 작업을 거치며 진화해 온 것이라네. 성서는 역사상 한 번도 결정판을 가 져 본 적이 없어.
The Bible is a product of man, my dear. Not of God. The Bible did not fall magically from the clouds. Man created it as a historical record of tumultuous times, and it has evolved through countless translations, additions, and revisions. History has never had a definitive version of the book.
"성서는 하늘 에서 팩스로 도착한 것이 아니야." 여러분,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이 말을 듣고 놀라실 분이 계십니까? 이 소설에서 여자 주인공인 소피는, 마치 성경을 '하늘에서 온 팩스'로 알아왔던 사람처럼, 레이 티빙의 말에 크게 놀랍니다. 여러분도 그런 느낌이 십니까? 여러분도 성경을 그렇게 여겨오셨습니까? 하늘로부터 뚝 떨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어떤 사람이 갑자기 성령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받아 쓴 하늘의 계시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충격을 좀 받으셔야 하겠습니다. 레이 티빙이 한 이 말은 진실입니다. 성경은 하늘에서 보낸 팩스 메시지가 아닙니다. 요즘 세대의 표현으로 한다면, 성경은 '하늘로부터 다운로드 받은 문서'(down-loaded document from heaven) 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도 없고 부인해서도 안 되는 사실입니다. 제가 그 증거를 보여 드리겠습니다. 누가복음의 처음 시작 부분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어난 일들에 대하여 차례대로 이야기를 엮어내려고 손을 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 은 이것을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 파자가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하여 준 대로 엮어냈습니다. 그런데 존귀하신 데오빌로님, 나도 모든 것을 시초부터 정확하게 조사하여 보았으므로, 각하께 그것을 순서대로 써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리하여 각하께서 이미 배우신 일들이 확실한 사실임을 아시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눅 1:1-4).
이 서문에서 누가복음 저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료들을, 자신에게 주어진 이성 을 활용하여 정밀하게 조사하여,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 가장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힘쓸 것이라는 사 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신약성경 안에 포함된 여러 편의 편지를 쓴 바울 사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분은편지를 시작할 때마 다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나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가, 고린 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고전 1:1). 이 증거는 무슨 뜻입니까? 성경은 무아지경에서 하나님이 부르는 대로 받아쓴 것이 아니라, 인간 저자들이 제 정신을 가지고 쓴 글이라는 뜻입니다.
2.그런데 이 지점에서 조심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쓴 것이므로 하나님의 진리와는 상 관 없다"고 단순하게 결론지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레이 티빙이 이어서 던지는 말이 그런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성서 는 신의 작품이 아니라 인간의 작품이란 말일세"(The Bible is a product of man, my dear. Not of God.). 이 말은 진실의 반쪽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인간 저자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라는 점에서 이 말은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 저자들에 의해 기록되었기 때문에 그 안 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지 않다'는 의미를 깔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위험한 발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역사적 사건을 통해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 이르니, 지금은 돌아가신 어느 장로님과의 일화가 생각납니다. 신학대학에서 가르칠 때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인데, 그분이 가끔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시곤 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원고 설교를 반대합니다. 강단에 올라가서 성령께서 내려주시는 말씀을 전해야지, 미리 준비한 원고를 가지고 올라가 읽으면 되겠습니까? 그건 인간의 말이죠! 준비 기도를 충분히 하고 나서 강단에 올라가 성령께서 주 시는 말씀을 전해야, 그게 진짭니다." 직업 군인 출신이셨던 그 장로님은 마치 절대 진리를 말하는 것처럼 확언하셨습니다. 그분의 확신이 워낙 강해서 대꾸해 봐야 소용이 없으리라고 느꼈기에,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그냥 웃고만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또 그런 말씀을 하셔서, 이렇게 반문한 적이 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은 성령께서 강단에서만 활동하신다고 믿으십니까? 설교자가 기도하는 마 음으로 설교 준비를 하는 동안에는 성령께서 활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십니까? 저의 지식과 생각 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바를 분별하면서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 더 진짜 아닐까요?" 그랬더니 그분이 "아, 그래도, 강단에서 말씀을 받아 선포하는 거, 그게 진짭니다. 목사님도 그렇게 한 번 해 보세요"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렇지, 쓸 데 없는 말을 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이 우리 그리스도인 들 사이에 널리 그리고 깊이 퍼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분들과 만나 이야기를 해 보면,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명한 음성을 듣기를 기대합니다. 성경 말씀을 읽는 중에 깨달음을 통 해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시합니다. 형제자매들과 영적 교제를 하는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 성도 무시합니다. 마음을 잠잠히 하고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주변을 살펴보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데, 그런 것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명료하게 듣기를 원합니다. 병에 걸렸을 때도 그렇습니다. 기적적으로 한 순간에 깨끗이 치료되는 것만을 하나님이 주시는 치료라고 생각합니다. 병원 치료를 통해 회복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치료 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매사를 이런 식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을 구분해 놓고, 하나님의 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고, 인간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레이 티빙이 한 말 즉 "성서는 신의 작품이 아니 라 인간의 작품일세"라는 말이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이 쓴 것이니 신의 것일 수 없다는 말에 숨겨져 있는 함정에 빠지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한 순간에 떨어진 팩스 메시지여야만 하 고, 만일 그것이 인간에 의해 쓰여 졌다면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착각합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성 경을 그런 식으로 믿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성경이 여러 시대에 걸쳐 여러 저자에 의해 쓰여 진 것이며, 그 안에는 인간적인 요소들이 담겨 있음을 애써 부정하면서, 눈을 질끈 감고, 성경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불러 주신 말씀(dictated by God)으로 믿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엄연한 진실을 무시하고 제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것은 좋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이 강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매우 무너지기 쉬운(vulnerable) 믿음입니다. 이런 분들의 경향을 보면, 눈을 질끈 감고 무턱대고 믿거나, 눈을 뜨고 모든 것을 부정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하려 합니다. 눈을 뜨고 믿는 방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3.기독교 신앙은 눈을 뜨고 믿는 것입니다. 눈을 감고, 현실을 무시하고 믿자는 것이 아닙니다. 혹은, 눈을 뜨고, 현실을 보고, 그 현실을 전부로 알아, 믿음을 포기하자는 것도 아닙니다. 눈을 똑바로 뜨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되, 그 너머에 있는 영적 실체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아니고는, 교묘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고 견고히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진정으로 강한 믿음입니다.
성경은 한 순간에 하늘에서 떨어진 팩스 메시지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 권력자가 혹은 어느 종교 단체가 한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킨 인간적인 문서도 아닙니다. 소설 <다 빈치 코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주후 325년에 있었던 니케아 공의회에서 인간 예수를 신의 아들로 둔갑시키고, 인간이 쓴 문서들을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으로 승격시킨 것처럼 오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후 325 년 즈음에 이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네 복음서들은 모든 교회에서 성경으로 인 정받고 있었습니다. 주후 100년 경부터 네 권의 복음서들은 함께 묶여 여러 교회에서 읽히고 있었습니다. 그 책들이 하나님의 영감(inspiration of God)을 담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영 지주의자들만이 예외였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들도 그 시기에 여러 교회에서 성경으로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거나 지시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교회에서 그 책들을 읽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여러 지역에 흩어져 있던 교회들이 자연스럽게 그렇게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된 것입니다. 다만, 유다서라든가 요한계시록 같은 책들은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책들이 신약성경 안에 포함된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결정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네 복음서들과 바울의 편지들은 교회 지도자들이 손을 쓰기 훨씬 전에 벌써 모든 교회들로부터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고백도 그렇습니다. 소설 <다 빈치 코드>는 마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니케아 공의회에서 인간이었던 예수를 신으로 승격시킨 것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요. 종교들을 섞으면서 황제는 새로운 기독교 전통을 강화할 필요를 느꼈소. 그래서 소집했던 것이 '니케아 공의회'라고 알려진 교파를 초월한 그 유명한 회의란 말이야. 이 회의에서 기독교의 많은 부분이 토론 되고 투표에 부쳐졌어. 부활절 날짜와 주교의 역할, 종교 성사의 행정 체계, 그리고 물론 예수의 '신성'까지. …… 신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위상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제기되고 '투표'에 부쳐진 것이었어. 그리고 상대적으로 근소한 차이로 [예수의 신성이 결정되었지]. (번역본, 1권 353쪽)
Indeed, during this fusion of religions, Constantine needed to strengthen the new Christian tradition, and held a famous ecumenical gathering known as the Council of Nicaea. At this gathering, many aspects of Christianity were debated and voted upon the date of Easter, the role of the bishops, the administration of sacraments, and, of course, the divinity of Jesus. …Jesus' establishment as 'the Son of God' was officially proposed and voted on by the Council of Nicaea. [And the decision was made by] a relatively close vote. (p. 234)
이 말에 의하면, 주전 325년 전에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단지 위대한 예언자 혹은 위대한 교사로 믿고 따랐는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 회의에서 예수님을 신으로 승격시켰다 는 것입니다. 하지만 신약성경을 잠시만 살펴보아도 이 주장이 얼마나 근거 없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들을 보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 들로 그리고 신적인 존재로 고백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네 복음서보다 더 일찍 쓰여 진 바울 사도의 편지들을 보면 사정은 더 분명합니다. 바울의 편지들은 대략 4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초반까지 쓰였는데,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신적인 존재로 고백하고 가르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더구나, 바울의 편지 안에는 바울보다 훨씬 먼저 믿은 사람들이 만든 찬송시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것은 어떤 권력자나 공의회의 결정에 의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름을 알지 못할 수많은 초대 교인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체험 하고 고백했다는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빌립보서 2장 6-11절입니다. 다시 한 번, 눈여겨보십시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 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 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 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이 찬 송시는 바울 사도가 직접 쓴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에서 이미 만들어서 예배 때 사용하던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빌립보서가 쓰여지기 훨씬 이전에, 이름 모를 초대교인들 이 그들의 신앙 체험에 기초 하여 이 노래를 썼다는 뜻이 됩니다. 결국, 예수님을 신으로 믿는 믿음은 후대에 정치적 목적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신 후, 초대 교인들의 삶 속에서 자발적으로 터져 나온 고백이라는 결론을 피할 수 없습니다.
4. 기독교 신앙은 하늘 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인간들에 의해 경험되고, 고백되고, 확인되어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서와 신약 성경들이 그렇습니다. 이 책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쓰였습니다. 그 이후로 많은 사람들에 의 해 읽혀지면서,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는 사실을 확인 했습니다. 한 지역, 한 교회에서 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지중해연안에 있는 여러 도시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약 2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그렇게 읽혀지고 검증되고 시험되었습니다. 이렇듯, 오랜 기간 동안 믿음의 선배들의 검증 과정을 거쳐서 전해진 것이기 때문 에, 저는 성경을 더 사랑하고 믿습니다. 저는 인간을 통해 활동하시고 역사를 통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 전통을 귀하게 여깁니다. 그 신앙의 전통은 니케아 공의회에서 근소한 표 차이로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이 때에 예수님의 신성을 투표에 부쳤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아리우스(Arius)라는 탁월한 신학자가 출현하여 예 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이론을 펴서 많은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그러니까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님의 신성에 대해 투표를 한 것 은 아리우스의 신학에 대해 찬성할 것이냐 반대할 것이냐를 물은 것입니다. <다 빈치 코드>는 이렇게 실시된 투표에서 근소한 표차 이로 예수의 신성이 결정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318명의 감독들이 모인 그 회의에서 다섯 명만이 반대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정치적 목적 때문에 예수님의 신성이 결정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부활 하신 예수님을 경험한 사람들이 그들의 체험에 근거하여 고백한 믿음입니다. 그 경험은 한 두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 해 동일한 경험을 하였고, 그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도마처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고백하게 만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교회 지도자들이 신학 이론을 정립하려고 했을 때, 그들은 이름을 알지 못할 보통 사람들의 일치된 고백을 자료로 삼아 정리했을 뿐입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신학이 먼저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체험과 고백이 먼저 옵니다. 신학은 체험과 고백을 해석하고 정리하는 일 에 불과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학이 신앙의 현장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위험해지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은 참 인간이며 참 하나님이시다"라는 니케아 신앙 고백을 귀하게 여깁니다. 거기에 모인 감독들이 절대 다수의 투표를 통해 확정한 교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때까지 거의 3백 년 동안 수많은 신자들에 의해 체험되고 고 백되고 확인된 바를 정리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탁월한 신학자의 말이기 때문 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된 고백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깁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가르침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통해,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검증되고 확인된 진실이기 때문에 귀하게 여깁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 바로 오늘 제가 그리고 제가 아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바와 일치되기 때문에 귀하게 여깁니다.
5. 이제, 네 번에 걸친 설교 시리즈를 마무리합니다. 긴 여행에 동참해 주신 성도님들께, 그리고 방송을 통해 혹은 인터넷을 통해 관심을 가지 고 이 여행에 동참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어려운 기간이었을지 모릅니다만, 여러분의 인내로 인해 많은 분들이 좋은 안내를 받을 수 있게 되었으니, 그로 인해 감사하게 여겨 주시기 바랍니다.
어느 장로님께서 제게 물으셨습니다. "이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것을 권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반대하시겠습니까?" 답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 소설이나 영화를 주제로 하여 신앙의 문제에 대해 누군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다면, 소설도 읽고 영화도 보기를 추천합니다. 물론, 이 설교 시리즈를 모두 소화하는 일도 필수적입니다. 그렇게 하신 다면, 누구와 만나 대화를 하더라도 좋은 결실을 얻을 것입니다. 다만, 논쟁을 통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태도로 임하 지 마시고, 베드로전서 3장 16절 에서 권고하고 있듯이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으로" 임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뭐, 좀, 재미있는 거 없나?" 하는 심정으로 이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려는 분이라면, 그 시간에 다른 책을 읽거나 다른 영화를 보라고 권고합니다. "저속하고 헛된 꾸며낸 이야기"에 마음을 팔 여가가 없습니다. 흥미진진하면서도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 유익한 책이 얼마나 많습니까? 신앙에 대해 혹은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 주는 영화가 얼마나 많습니까? 굳이 신앙에 관계 된 영화만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영화도 그렇고, 미국 영화도 그렇고, 잘 분별해 보면, 유익한 것들이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다 빈치 코드 신드롬'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몇 가지 생각해 보고 마치려 합니다. 제가 이 시리즈 설교를 마련한 것은 일방적으로 이 소설을 공격하자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보아 야 합니다.
첫째, 이 신드롬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에 있어 무엇이 제일 중요한지를 생각 하게 해 주었습니다. 바로 '진실' 입니다. 이 소설은 종교가 얼마나 허위로 만들어질 수 있으며, 종교인들이 허위에 깊이 빠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의 교회가 이 소설이 그리는 것처럼 그렇게 거짓된 조직체가 아닌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이 그리고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이 날조되고 조작된 것이 아니라는 것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교회와 성경과 믿음이 진실 위에 세워진 것임을 확인 하면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인 하지 못할 일은, 교회가 비록 진실에 기초하여 시작되었으나, 때때로 이권 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버린 일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 개인들도, 진실을 앞세우기보다는 눈앞의 이권을 위해 거짓을 택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일들이 오늘도 자주 일어나고 있음을 부인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오도된 신앙인들(misguided believers)이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다는 사실 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니, 바로 여러분과 제가 그런 잘못을 범하게 되지나 않을까 조심스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경각심을 겸손하게 받아들이십시다. 어떤 희생과 불이익을 감수하고라도,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진실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그리고 우리 교회가 진실을 가장 우선하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기도하며 노력하십시다.
6.둘째, 이 신드롬은 우리가 믿는 신앙의 전통과 정신을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음을 깨우쳐 줍니다. 소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고는, 기독교에 대해 늘어놓는 근 거도 없는 이론들 때문에 지진을 만난 사람처럼 흔들린다는 사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취약한지를 반증해 줍니다. 사실, 이번에 시리즈 설교를 하면 서 저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설교를통해 '은혜만 받으려는' 성도들의 습성 때문이었습니다. 설교 중에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역사적 진실들을 다 루어야 하는데, 그런 이야기들을 하다 보면, "은혜가 없다"는 불평이 나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6회 정도 하려 했는데, 4회로 줄인 것이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의 강단들이 소위 '은혜로운' 이야기만 하다 보니, 믿음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는 소홀해 왔습니다. 그 결과로 인해, 이 정도의 허무맹랑한 이론에도 사정없이 흔 들리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분,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 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고전 3:2).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앙의 수준에 따라, 아직도 젖만 먹어야 하는 분들도 계시고, 죽을 먹어야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 대부분은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견실 한 건강을 다질 수 없습니다. 설교를 통해 재미와 은혜를 찾는 것도 필요하지만, 우리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고 들어가는 일도 필요합니다. 설교자인 저에게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고, 여러분에게도 그런 음식을 반기고 소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셋째, 이 신드롬은 우리의 신앙 전통과 정신을 확인할 뿐 아 니라, 그것이 지금 우리의 삶을 통해 진가를 드러내도록 힘쓰라는 도전을 던져 줍니다. 기독교 신앙이 시온수도회가 행하는 '히에로스 가모스'만도 못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가르쳐 온 영성의 삶은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사이비영성과는 비교할 수 없이 심오하고 매력적이며 건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인들에게 비추어진 것은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유럽에서 는 이미 교회가 거의 매력을 잃어버렸고, 미국에서도 제도적 교회가 점점 더 매력을 잃어갑니다. 한국에서도 비종교인들에게 가장 매력이 없는 종교가 바로 개신교라고 합니다. 인터넷에서 가장 활발한 안티 싸이트가 바로 기독교라는 사실도 우리의 경각심을 깨워 일으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딱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가장 귀한 보화를 담고 있는 기독교 가 가장 매력 없는 것으로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지금 불고 있는 '다 빈치 코드 신드롬'은 이러한 반 기독교적 분위기에 힘을 입은 바가 큽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소설과 영화에 대한 가장 좋은 선전자(promoter)가 된 것입니다.
7.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전해주신 근본정신을 외면하고, 우리의 욕구에 맞게 왜곡하여 믿고 살아왔기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을, 예수의 보혈로 인해 죄 사함 받고, 이 땅에 사는 동안 성령의 능력으로 복을 누리며, 죽고 나서 천당에 가는 것으로 축소시켜, 이기적기독교, 현세적 기독교, 기복적 기독교로 변질시킨 까닭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든지 상관하지 않고, 홀로 잘 믿어 홀로 복 받고 홀로 천당 가겠다는 태도 때문이 아닙니까? 예수님처럼, 현세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하나님 나라의 비전으로 현세를 변혁시키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삶으로써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징표로 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의 영과 혼과 육 전체가,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교회 전체가, 우리의 경제 생활, 부부생활, 여가생활 전체가 성령에 의해 사로잡혀, 예수님의 주권이 내 삶 전체를 통해 드러나지 못 한 까닭이 아닙니까? 경건의 모양만 있지 경건의 능력은 없기 때문(딤후 3:5)이 아닙니까?
만일 이토록 질적으로 다른 삶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드러난다면, 누가 감히 우리가 믿는 신앙을 비웃고 폄하하겠습니까? 아니, 그런다 한들, 누가 거기에 동조하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그렇게 살았더라면, 소설 <다 빈치 코드>는 수많은 소설 중 하나로 묻히고 말았을 것입니다. 아, 그러니 더욱 안타깝습니다. '다 빈치 코드 신드롬'은 실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깨우는 나팔소리(clarion call)인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나팔소리입니다.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라는 나팔소리입니다. 이번 기회에 대오각성하고,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분명히 하고, 우리가 사는 바에 대해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 소설가가 택한 잘못을 통해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깨우시려는 하나님의 뜻이라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희망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이 여정을 같이 하신 여러분이 희망입니다. 여러분이 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습니다. 교황이 하겠습니까? 감독이 하겠습니까? 신학자가 하겠습니까? 대교회 목사들이 하겠습니까? 누가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열심으로, 참된 교회가 되려는 열심으로 더욱 진지하게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정성을 다해, 우리가 믿는 바에 대해 성실할 때, 주님의 때에, 주님의 방법으로 모든 일을 바로잡아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를 통해 일하십니다.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주님,
저희를 깨워 일으키시니,
감사합니다.
깨어나, 깨어 있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에 사로잡혀
진정한 영성의 삶에 이르게 하소서.
주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이
참된 생명의 길임을
저희의 삶으로,
저희의 말로,
저희의 표정으로,
저희의 발걸음으로
드러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