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성으로 행궁할 때 정조임금은 대장군 복장을 하고 마차에 올랐다.
정약용에게 병조참의를 제수하고 군복을 입혀 자기의 옆에 붙어서 따르게 했다.
정약용은 활과 화살 통을 짊어지고 한 손에 장도를 들었다.
정약용은 화성으로 가는 내내 가슴이 뻐근하고 뜨거웠다.
임금의 행열이 장대한 배다리(舟橋) 위를 나아갈 때 그는 우둔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 배다리는 남인 계열의 정약용과 소론계열의 서영보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만든 것이다.
정조임금은 1777년 노론의 집요한 반대를 뚫고 왕위에 올랐다. 이후 아버지 사도세자의 추승작업에 전력하였다.
먼저 양주 배봉산에 있던 무덤을 수원으로 옮겨 현륭원이라고 하였고 수원에 화성을 조성하여 탄탄한 방어력을 지닌
새 상업도시를 만들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옮긴 이후 자주 화성까지 행차하곤 한 데에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명예롭게 복원함으로써효를 행하고 왕권을 만천하에 과시하려는 뜻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자주 사대에 올라 과녁을 향해 시위를 당기곤 하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화성으로서의 행궁에서 최대 난제가 한강 건너기였다.
정조임금은 먼저 주교사를 설치하였고 주교사에서는 오래 전 중종 임금이 아버지 성종의 선릉 참배하기 위해
만든 바 있는 배다리를 참고하여 '주교절목'을 만들어 정조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그것을 읽고난 정조 임금은 그 계획이 치밀하지 못함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비판하고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을 써서 배다리를 놓는 기본 원칙을 제시하였다.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화성행차를 원할하게 하기 위한 새로운 배다리 건설을 지시하였다.
정조 임금의 명을 받은 사람은 노론 계열의 중신인 서용보와 화성축조위 설계도를 만든 바 있는 남인 계열의
정약용이었다. 정조 임금은 의도적으로 주교사 안에, 노론 계열 한 사람과 소론 계열 한 사람을 기용한 것이다,
한데 이들 두 사람은 배다리를 설치할 장소를 놓고 부딪쳤다.
서용보는 압구정 인근의 동호 물어울 위에 설치하자고 주장하였다.
"동호에 설치하게 되면 과천까지 가는 길이 그만큼 가까우므로 길 닦는 일이 수월하고 경관도 빼여납니다."
정약용은 노량진에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노량진 양쪽 언덕이 높고 수심이 깊으며 물 흐름이 빠르지 않을 뿐만아니라 강폭이 가장 좁습니다.
동호는 노량진에 비하여 강폭이 훨씬 넓으므로 동호에 설치할 경우 노량진에 설치하는 것보다
큰 배가 열 척 이상은 더 필요하게 됩니다."
양쪽의 주장이 팽팽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들은 정조 임금에게 결정해달라고 청했고 정조 임금은 정약용의 손을 둘어주었다.
그 결정이 내려진 뒤부터 서용보는 자존심이 상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정약용과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서용보에게 정중히 머리를 숙여 화해를 청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대감의 체면을 생각지 못한 채 일만 생각하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서용보는 선선히 웃으며 "뭐 그깐 일로...."하고 말했지만 이후 그 일에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정약용은 혼자서 휘하의 관리들과 더불어 '주교지남'을 바탕으로 공사를 추진하여 배다리를 완공하였다.
배다리에 쓸 배는 새롭게 만들지 아니하고 한강에 드나드는 경강선과 강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큰 어선들을 빌려다가 활용했다.
세곡 어물 옹기 소금 따위의 운송을 담당하던 배들과 어선들에게 적당한 이권을 주고 행차 때에만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먼저 남쪽 노량진에서 북편의 한강나루를 향해 일직선으로 배를 가로로 잇대어 놓되 배의 머리와 꼬리를
장구 치듯이 엇갈린 형태로 배치하여 닻을 단단히 놓아 고정시켰다.
강심에 해당되는 가운데 부분의 배다리는 도도록한 무지개 모양으로 설계되었으므로 가운데 부분에는 유다르게 큰 배를
배치하고 남쪽과 북쪽으로는 점차 조금씩 작은 배들을 배치하였다.
배들의 배치가 끝난 뒤에는 실팍한 소나무 널판지들을 이용하여 배와 배를 이었고 널판자 위에는 잔디를 깔아 푹신푹신하게 하였다.
배다리의 폭은 24척이었으므로 아홉 사람이 일렬로 나란히 걸어갈 수 있었다.
또 맨 가장자리 걸어가는 사람이나 말이 강물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배다리의 양편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배다리 양끝과 중간부분에 세 개의 홀살문을 세웠다.홍살문은 배다리가 신성하고 위엄있는 공간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화성으로 가는 행렬을 보기 위해 배다리를 중심으로 한강의 양쪽 연안에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배다리는 임금의 뜻과 서용보 정약용 등의 주교사 관리들 경강상인들 배다리가 존치하는 동안
불편을 감수하여 준 어민들....실로 온 나라 백성의 힘이 뭉쳐진 것이었다.
===한승원의 장편소설 시대를 일깨운 역사의 웅대한 산 '다산'에서 옮겨온 글임====